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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의 앨범들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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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8 20: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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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The Avalanches

앨범명 <Wildflower>

장르 Electronic, Sound Collage

발매일 2016/07/01


기술과 예술의 콜라주.애벌렌치스는 21세기에 가장 기발했던 앨범 1장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정확히는 사라졌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어찌 됐든 간에 애벌렌치스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Akai S2000 샘플러, 애플 요세미티, 디스코 베이스, 30개의 크레디트 샘플과 수백 개의 언크레디트 샘플과 함께. 언뜻 보면 이 그룹은 샘플을 경작하기에 가장 비옥한 땅이 힙합임을 깨달은 세 번째ㅡ제이 딜라와 칸예 웨스트ㅡ인류처럼 행동한다. 논과 매카트니의 공동 작곡부터 유아용 장난감 세트의 효과음까지, 강박과 스펙트럼은 세대를 거칠수록 강해지고 확장된다. 앨범의 중추는 확실히 힙합이지만 패스트푸드 같은 칠 아웃 뮤직과 유튜브 3천만 뷰에 이르는 메가 히트 싱글 등우리의 선택권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해졌다. <Wildflower>의 특출난 점이 비단 음악뿐만 인 것은 아니다. 마치 미국의 성조기에 아이들이 색칠 놀이를 한 것처럼 느껴지는 앨범의 커버 아트는 팝 컬처의 수많은 색깔을 오려 붙인 듯한 애벌렌치스의 방식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세련되면서 너저분한 애벌렌치스의 음악은 하나의 독립된 개체(기술)로서 존재하고, 그 개체들의 군집으로서 유기체(예술)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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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Helado Negro
앨범명 <This Is How You Smile>
장르 Electronic, Alternative Pop
발매일 2019/03/08


향수와 추억의 교차로. "로버트 카를로스 랭(엘라도 네그로)은 투사다." 누군가 그가 써 내려간 노랫말을 봤다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유색인종들을 향한 편견에 저항하고, (인간의, 여성의, 성소수자의, 제3세계의, 동물의) 기본권을 수호하는 그의 음악은 한 인간의 사명감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랭의 새 앨범 <This Is How You Smile>에서는 투사의 역동성이 자취를 감추고 편안하고 별스러운 분위기가 앨범을 장악한다. 맥박처럼 울리는 북소리, 단출한 피아노 연주, 추상시를 연상시키는 가사 등 앨범의 운을 떼는 인트로 Please Won't Please부터가 앨범 콘셉트에 대한 완벽한 반영이다. 특히 라틴풍의 반복적인 어쿠스틱 기타와 랭의 친근한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Imagining What to Do, 거리의 소음, 무미건조한 편곡, 가벼운 템포의 피아노가 합을 이루는 Running 같은 곡들은 앨범의 백미라 할만하다. 대다수의 수록곡들이 기이하지만 우리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 기이함에 흠뻑 도취된다. 랭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다. "대체 어디서 피어나는지 알 수 없는 향수와 우리의 기억 속에서 한껏 미화된 추억, 그 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요."






48
아티스트 Deerhunter
앨범명 <Halcyon Digest>
장르 Dream Pop, Alternative Pop
발매일 2010/09/28

대 이어지지 않을 무수한 꿈들.디어헌터와브래드포드 콕스는 흡사 꺾은 선 그래프의 최고점과 최저점 사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한 가닥 선 같았다. 인디펜던트에는 미래의 예술가들을 고취시킬 영리한 인터뷰이와 천재ㅡ혹은 그런 척하거나ㅡ가 너무 많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랄까. 하지만 이 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어찌 됐든지 간에, 콕스와 그의 밴드는 21세기에 가장 독립적을 앨범을 내놓는 데 성공했다. <Halcyon Digest>는 발상과 접근이 너무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독립적이며, 현대 대중음악의 가장 큰 유행인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또한 독립적이다. 그동안 디어헌터는 그들만의 Funeral(아케이드 파이어), Doolittle(픽시스), Murmur(R.E.M.)이 없다는 이유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흐뭇하게 상상하건대, <Halcyon Digest>를 가진 브래드폭스 콕스라면 아마 그런 세계에 영원히 관심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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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Beach House
앨범명 <Bloom>
장르 Dream Pop
발매일 2012/05/15

끊임없이 자기복제하는 꿈속의 멜로디. 새로운 시도에 대한 투자가 감소하는 시대(이런 추세는 문화산업을 넘어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에서 역시 피차일반이다.)에 자신의 스타일을 4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에 좋은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비치 하우스는 정확히 그렇게 했다. <Bloom>이 이들의 4번째 앨범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상당수의 뮤지션들은 이때쯤 데뷔 초기의 아이디어와 열의가 고갈되고 앨범 제작과 투어라는 순환고리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세상의 관념과는 상반되게도 빅토리아와 알렉스는 <The Quietus>와의 인터뷰를 통해, <Teen Dream>과 <Bloom>의 차이점을 설명하는데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이어서 그들은 곡 하나하나가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곡들이 모여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이루고, 최종적으로 이 앨범이 <Pet Sounds>와 동등한 시장가치를 가지길 원했다.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빅토리아와 알렉스는 자신들의 핵심 사운드를 정교하게 재가공함으로써 리스크 없는 자기증식에 성공했고, 오늘날 비치 하우스는 드립 팝의 동의어와 마찬가지다. 





46
아티스트 Todd Terje
앨범명 <It's Album Time>
장르 Nu-Disco, Electronic
발매일 2014/04/08

끝내주는, 더 끝내주는. 노르웨이 출신의 DJ 테리에 올슨, 즉 토드 테리에는 전자음악 신에서 디스코를 가장 잘 활용하는 뮤지션이다. 한 문장과 문단에서 같은 어휘 사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단어를 창조했던 셰익스피어처럼, 토드의 리듬은 밥 먹듯이 변주를 거듭한다. 고전 영화의 사운드트랙, 70년대 라틴 재즈, 재즈 스캣을 샘플링한 루프, 맹렬한 신시사이저 운영 등 그의 날선 감각 또한 믿음직스럽기는 매한가지다. <It's Album Time>은 끝내주는 곡들과 더 끝내주는 곡들의 집합으로서, 응집력 강한 디스코 넘버인 Delorean Dynamite에서는 조지오 모로더의 베이스와 나일 로저스의 기타 브레이크에 대한 레퍼런스가 도드라지고, 아웃트로 Inspector Norse는 단순한 신스 루프만으로 우리 앞에 유로 디스코의 전성기를 도래시킨다. 이 앨범은 우연찮게 맞닥뜨린 명작처럼, 당신이 토드와 앨범에 대해 가진 정보가 적으면 적을수록 깊은 감흥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45
아티스트 FKA Twigs
앨범명 <MAGDALENE>
장르 Electronic, Art Pop
발매일 2019/11/08


고난은 예술가의 동반자. 탈리아 바넷(FKA 트위그스)은 왜 역사상 가장 많은 오해와 의문에 둘러싸인 여성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선택한 것일까.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성서와 구전의 묘사에서 현재의 그녀의 처지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탈리아의 소포모어 앨범 <MAGDALENE>에 대한 팬들과 평단의 반응이 사뭇 뜨겁다. 그녀는 이번 앨범을 통해 좀 더 대중적인 접근을 모색한다. 니콜라스 자, 아르카, 베니 블랑코, 캐시미어 캣, 스크릴렉스, 노아 골드스타인 등 살붙이와 다름없는 <MAGDALENE>의 협업 작가들은 전자음에 대한 그녀의 야심을 실현시켜 줄 보배로운 파트너들이다. 강한 인상의 프로덕션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건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탈리아의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는 성가대의 합창처럼 예배당을 메우고 부식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뭉개진 음향에 생명력을 주입한다. 이따금 예술가의 고난은 예술 그 자체에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유래를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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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Danny Brown
앨범명 <Old>
장르 Hip-Hop
발매일 2013/10/08


이 연대의 가장 가치 있는 B Side.하나의 앨범을 2개의 파트로 가른 뒤 한쪽에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고 다른 한쪽에는 새로운 스타일 수록한다. 디트로이트 래퍼 대니 브라운은 이 케케묵은 공식을 그대로 뒤따름으로써, 지난 10년간 가장 재생 가치가 높은 힙합 앨범 중 하나를 빚어냈다. 대니는 이 앨범이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차분하고 진중한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홍보해왔다. "좆같은 농담은 이제 그만할 거야!" 그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을 기막힌 눈썰미로 포착한 뒤, 그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엑스터시, 마리화나, 알코올, 패션을 소비함으로써 그들의 아이돌이 된다. 가사의 측면에서 <Old>는 마약에 대한 예찬이나 다름없고, 그런 점에서는 Side B (Dope Song)가 앨범의 콘셉트에 좀 더 들어맞는다. 지저분한 디트로이트의 거리, 대니가 즐겨 찾던 마약상, 파경에 이른 약혼, 마약에 중독되어 가는 가족 구성원처럼 대니를 괴롭히던 오래된 기억들이 등장하는 Side A (Old)를 듣고, 마약 예찬과 파티 음악으로 가득 찬 Side B (Dope Song)로 넘어가는 것은 분명히 친숙한 경험이 아니다. 아마 <Old>는 완벽한ㅡ그러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ㅡ앨범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쪽 면(내면세계)이 다른 한쪽 면(새로운 스타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역 또한 성립할 때, 우리는 좆같은 농담 대신 좆같은 중독에 빠져버린다.  






43
아티스트 Vince Staples
앨범명 <Big Fish Theory>
장르 Hip-Hop, Electronic
발매일 2017/06/23


흑인 폴 월 또는 '진짜' 베이스 갓. 독창적인 사운드에 대한 야망, 망가진 필터를 통과한 듯한 탁한 가사, 기괴망측하면서 스타일리시한 비디오, 가사만큼이나 날선 인터뷰 등 대중문화의 심사대에서 빈스 스테이플스의 악명을 드높여준 것은 바로 그의 '태도'였다. 2015년에 발매된 그의 데뷔 앨범 <Summertime '06>는 그해 켄드릭 라마와 나비의 날갯짓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거의 유일한 힙합 앨범이었으며, 전설적인 프로듀서 No I.D.가 지난 10년간 제작한 앨범 중에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답습의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빈스는 우리의 예상보다 영리하고, 심술궂고,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망했으며, 지난날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았다. (메이저 래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Big Fish Theory>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부분은 전자음악이 아니라 바로 '베이스'다. 실제로 앨범 발매 당일 빈스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앨범의 베이스를 찍느라 죽을 고생을 했으니 성능 좋은 스피커로 들어달라는 간청 아닌 간청을 하기도 했다. "<Big Fish Theory>를 힙합 앨범으로 분류하겠지만 앨범의 골자는 디트로이트 테크노에요. 이 앨범을 흑인 아티스트들의 유산으로 남길 테지만 흑인과는 별 상관없습니다." 빈스는 인트로에서부터 아웃트로에 이르기까지 농담에 가까운 가사를 써 내려가며 춤추라고 윽박지르지만, 우리는 좀처럼 그럴 수가 없다.  






42
아티스트 The Weeknd 
앨범명 <House of Balloons>
장르 R&B
발매일 2011/03/21


피비 알앤비의 큰 바위 얼굴. 아벨 마코넨(위켄드)은21살의 나이에 세상을 바꿔버렸다. 그것은 공짜였고, 음악산업의 가장 오래되고 보수적인 영역에서 벌어졌으며, 21세기 캐나다 음악 신에서 일어난 2번째 규모의 대사건이었다. <House of Balloons>과 함께 데뷔 초기 아벨은 '알앤비 성향이 매우 짙은 제임스 블레이크 혹은 The xx.'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평가는 마이클 잭슨을 연상시키는 그의 보컬 스타일과 합쳐져, 2010년대 초 장래의 음악가들에게 드레이크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만큼이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벨의 <House of Balloons>은 같은 동향 출신의 드레이크의 음악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지만, 진취적이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nostalgia, ULTRA>와 <Love King>보다 한발 앞섰다. 앨범 위에서 아벨은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좋은 것이고, 밤거리를 유람하고 마약에 취하는 것이 젊음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라고. 그런 취지를 가장 잘 투영한 듯한 House of Balloons/Glass Table Girls나 The Party & The After Party 같은 곡들은 노골적인 가사와 함께, 마치 마약의 환각성과 성교의 쾌감을 청각화한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일각의 견해대로 정답과는 거리가 멀거나 너무 과도한 면이 있다. 하지만 현대의 젊은이들이 이 정도 퇴폐성에 무감각해진 것은 오래된 장르 음악의 비전과 젊은 가수의 탓이 아니다.






41
아티스트 Destroyer
앨범명 <Kaputt>
장르Soft Rock, Alternative Rock
발매일 2011/01/25


Oh, Destroyer! 댄 베하르의 가사는 너무나도 확신에 찬 나머지, 가끔 그가 취급하는 것들이 사랑이나 사랑에 관한 그의 관념이 아니라, 흡사 최신 물리학 이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캐나다의 록밴드 Destroyer의 10번째 앨범 <Kaputt>에서는 대중문화 전반에 관한 댄의 논평과 여성에 대한 은밀한 사담이 여러 겹의 기타 리프에 둘러싸여 있다. 이 레코드의 많은 부분은 갤럭시 500이나 콕토 트윈스 같은 드림 팝의 선구자들에게 큰 빚을 졌다. 거기에 재즈 색소폰, 플루트, 808 드럼, 인코그니토 타입의 애시드 재즈 세션이 추가됐지만, 대부분의 수록곡들은 모체가 되는 멜로디가 없고 어미 노릇을 해줄 악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음악 속 '질감'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마치 댄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의 연어와 같다. Blue Thunder나 Heaven Or Las Vegas 같은 명곡들이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적어도 디스트로이어와 <Kaputt>에게 끼친 영향력이 건설적이었음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40
아티스트 Hiatus Kaiyote
앨범명 <Choose Your Weapon>
장르 Neo Soul
발매일 2015/05/01

눈부신 독창성! 공략이 불가능한 독립성! 2015년 개최된 제5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호주의 네오 솔 밴드 하이에이터스 카이요테와 그들의 앨범 <Choose Your Weapon>이 무관에 그쳤다는 사실은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가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이나 큰 충격을 안겨준다. 앨범의 시퀀싱, 멜로디의 짜임새, 템포의 변화, 구불거리는 하모니 등 이 앨범은 지난 10년간 발매된 모든 앨범들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다. (이것만은 확신한다) 이들의 음악은 에리카 바두나 디 안젤로 같은 전임자들과도 거의 접점이 없으며 단 한 마디도 당신의 추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들의 특별함은 침범이 불가능한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확실히 <Choose Your Weapon>은 이지 리스닝과는 거리가 멀고,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미묘한데다, 당신이 가진 음향장비의 성능에 따라 연주에 대한 판단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 습관처럼 이 밴드와 앨범을 어떤 장르나 형식으로 분류한다고 해도, 그것은 흡사 프린스의 음악을 분류하는 것처럼 의미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역시 의미 없는 권유가 될 테지만, 그저 들어라, 그리고 몸을 맡겨라.      






39
아티스트 James Blake
앨범명 <James Blake>
장르 Electronic, Dubstep
발매일 2011/02/04


'목소리를 악기처럼 활용한다'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2011년 2월, 제임스 블레이크는 자신의 데뷔 앨범 <James Blake>를 발표하며 인터넷 세상과 일렉트로닉 커뮤니티를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로 만들어버렸다. 스텝 리듬, 각종 질감들의 콜라주, 댄스홀, 하우스, 거기에 한없이 흐릿하고 음산한 블레이크의 가창이 더해져, 얼터너티브 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산할 앨범이 탄생했다. <James Blake>는 사운드 그 자체도 희귀하지만 블레이크가 자신의 목소리를 활용하는 방식이 더 큰 인상을 남긴다. 어떤 곡에서는 보컬이 아예 등장하지 않고, 또는 가볍게 반복되고, 샘플 루프처럼 되풀이되고, 오토 튠으로 변조된다. 이 같은 기법들이 낯설지 않다면ㅡ프랭크 오션의 <Blonde>ㅡ당신의 경험은 블레이크의 실험성에 큰 빚을 진 것이다. 이 앨범은 거의 모든 부분이, 그러니까 블레이크의 목소리마저도 가공을 거친 탓에, 온기를 느낄 곳이라고는 음악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속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전자음악(Electronic)에는 영혼(Soul)이 없다. 지친 심신을 위로해줄 우리의 따듯한 영혼. 제임스 블레이크가 에이펙스 트윈식의 냉소로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런 게 왜 있어야 하는데?"    






38
아티스트 Janelle Monáe
앨범명 <The ArchAndroid>
장르 R&B, Psychedelic Pop
발매일 2010/05/18


뛰어난 예술가 자넬 모네, 훌륭한 사회운동가 신디 메이웨어. 자넬 모네의 <The ArchAndroid>는 신디 메이웨더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신디는 모네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거나, 좀처럼 노출하지 않았던 성격을 투사하거나,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천성을 추가하여 만든 매력적인 아바타로서, (그녀의 DNA를 복제했으니) 모네 자신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녀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닐 수도 있다. 신디는 2719년의 미래 세계인 메트로폴리스에서 행해지는 탄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저항의 횃불잡이고, 우리는 이 흥미로운 세계관 속에서 필연적으로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마주한다. 자신의 창작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현대 정치의 단면을 그려낸다고 해서 이 앨범이 단지 정치사회적 함의만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The ArchAndroid>는 뛰어난 뮤지션과 훌륭한 사회운동가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술의 징표다. 그동안 상당수의 흑인음악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다거나 저속하다는 이유만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앨범을 통해 보여준 과거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사려 깊은 창의성이 모네의 경력 내내 계속된다면, 장담컨대 흑인음악의 미래는 밝다. 




 

 


37
아티스트 Kendrick Lamar
앨범명 <DAMN.>
장르 Hip-Hop
발매일 2017/04/14


자신의 그늘에서 달아나는 경쾌하고 효율적인 발걸음. 켄드릭은 지난 10년의 절반을 자신의 아성과 싸워왔다. 청소년기 컴튼에서의 경험을 각색해 영화적으로 풀어 낸 <goodkid, m.A.A.d city>, 시라는 형식 속에 흑인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를 함축한 <ToPimp A Butterfly>, 이 두 편의 걸작들은 켄드릭의 트로피이자 장애물이 됐다. 명료한 콘셉트의 장력 덕분에 뛰어난 일체감을 자랑하던 전작들에 비해, <DAMN.>의 감상은 대체로 정신이 없다. 프로듀서 대니얼 타넨바움이 빚어낸 몽환적인 질감과 Mike Will Made It의 힘찬 베이스가 이 정신없음의 원천이다. Sounwave나 DJ Dahi 같은 기존의 협력자들뿐만이 아니라, 스티브 레이시나 BadBadNotGood 같은 신선한 동료들 역시 본인 고유의 감성을 앨범 속에 이식하며 훌륭히 제 몫을 해낸다. 이렇듯 앨범 속에서 상충되는 창작자들 간의 미묘한 조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가슴속을 들썽거리게 만드는 <DAMN.>의 엔진이다. 프로듀싱이 동력이라면 켄드릭의 랩은 밸런스일 것이다. 켄드릭은 몽환적인 리듬 위에서 나긋하게 읊조리는 톤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과감 없이 드러내고, 맹렬하고 날선 베이스 위에서는 사자후처럼 상대방을 위협하고 동어반복의 자기과시를 일삼는다. 이러니 우리의 정신이 남아날 여력이 있겠는가.  



 



36
아티스트 Freddie Gibbs & Madlib
앨범명 <Pinata>
장르 Hip-Hop
발매일 2014/03/18


2004 Madvillainy → 2014 Pinata. <Pinata>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종이 인형이다. 샘플을 손질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괴짜 프로듀서, 소수의 팬들을 열광시키는데 도가 튼 갱스터 래퍼, 1970년대의 빈티지 솔, 블랙스플로테이션의 질감 등 <Pinata>는 <Dogg Food>와 <E. 1999 Eternal>의 시대에 발매된다 해도 전혀 손색없는 앨범일 것이다. 우리가 존재조차 몰랐던 펑크와 콰이어트 스톰 샘플 루프, 808의 타격감이 자취를 감춘 라이브 드럼, 시대의 동향에 어울리지 않는 날것의 가사 등 분명히 이 앨범은 베이스와 하이 햇에 중독된 10대들보다 골든 에라의 팬들에게 더 어필하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Pinata>가 현대에 통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앨범이 언더그라운드의 가장 뛰어난 프로듀서와 MC가 뭉쳐서 만든 작품의 10주년 되는 해에 발매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매드립은 세간의 평가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파트너의 깜냥을 극대화하거나 안정시키는데 최적화된 프로듀서다. 우직하게 자신의 라임을 연마해온 프레디는 그 수혜를 받는데 전혀 부족됨이 없었고, 이렇게 새 시대의 <Madvillainy>가 탄생했다.   






35
아티스트 Lana Del Rey 
앨범명 <Norman Fucking Rockwell!>
장르 Art Pop
발매일 2019/08/30


세상이 자신을 편견으로 둘러싸는 동안, 덤덤히 응시한 아트 팝의 미래.지난10년 동안 라나 델 레이만큼 오해와 색안경에 둘러싸인 뮤지션이 있었을까.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제2의 아델이 되길 원한다고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녀는 차라리 제2의 코트니 러브가 되고 싶었던 듯하다. 데뷔 초부터 라나는 비평의 조롱 대상이었지만지금은 그들의 총아가 됐다. 팬들은 그녀를 평생 걱정거리 없이 살아온 미련한 백인 여성으로 여겼지만, 그녀는 파트너로 잭안토노프를 선택할 만큼은 영리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라나는 자신의 경력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대를 통틀어가장 훌륭한 앨범 중 하나를 우리에게 내뱉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특히 절반의 애달픈 낭송과 절반의 기타 연주로 이루어진 Venice Bitch를 들어보라. 후반부의 환각적인 일렉 기타 연주는 너무나 제멋대로인 나머지 마치 무대 위에서 펼쳐치는 애드리브처럼 들린다. 이 밖에도 그녀는 이글스와 비치 보이스 같은 오래된 캘리포니아의 대명사들에게 존중과 안녕을 전하고, 트럼프 시대를 살아가는 기분에 대해 메모하고, 가벼운 일렉 팝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이처럼 소란스러우면서 일관된 표식들은 마스터피스의 전조 현상이나 다름없다.





 


34
아티스트 King Krule
앨범명 <The OOZ>
장르 Garage, Trip Hop
발매일 2017/10/13


당신의 마음속에 그어진 뿌연 줄 하나. 토론토의 문화비평지 스필 매거진의 에디터 니콜라스는 정성스럽게 <The OOZ>의 추천사를 작성했다. "Biscuit Town을 듣고 별 감흥이 없다면 Dum Surfer를 한 번 더 들어보고 그래도 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앨범을 끄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라." 나는 이보다 더 이 앨범에 알맞은 추천사를 본 적이 없다. 분명히 <The OOZ>는 처음 듣는 이들의 마음을 훔쳐 갈 그런 유형의 앨범은 아니다. 미술에 대입하면 이 앨범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초현실주의풍의 추상화와 마찬가지다. 고로 이 화폭을 음미하는 이들의 문화적 소양이 감상의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한다. 앨범에 대한 애정은 오히려 Biscuit Town이나 Dum Surfer가 아니라, Logos나 Lonely Blue 같은 가장 흐릿하고 을씨년스러운 순간을 통해 깊어질 가능성이 높다. 앨범의 러닝타임은 1시간에 달하지만, 이 앨범의 사운드를 정의하거나 내러티브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멈추길 바란다. <The OOZ>는 시크하고, 느긋하고, 음울하고, 쿨하고, 애처롭고, 톰 웨이츠스럽고, 슬린트스러우며, 당신이 23살의 예술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근사한 것이다.   





 
33
아티스트 A Tribe Called Quest
앨범명 <We Got It From Here... Thank You 4 Your Service>
장르 Hip-Hop
발매일 2016/11/11


우리의 추억과 의식이 머무를 안식처. 1990년대에 재즈라는 장르에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은 A Tribe Called Quest가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이 전설적인 그룹은 당시 힙합의 강령처럼 간주되던 '현실의 반영'을 위한 도구로 재즈를 채택했다. 이들은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도널드 버드, 램프, 캐넌볼 애덜리, 로니 스미스, 로이 에이어스 등 재즈 히어로들의 음악을 샘플링하고, 가능하면 그들과 함께 연주하고, 그들(재즈)과 자신들(드럼)의 비전을 세상에 소개했다.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재즈를 선택하긴 했지만, ATCQ는 방법론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 같은 선구자들의 방식과는 큰 차이를 보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 속에 장인정신과 함께 사회의식을 머금었다. ATCQ의 마지막(이라고 여겨졌던) 앨범 발매로부터 무려 18년의 세월이 흘러, 그들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마치 마법처럼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We Got It From Here...>는 왕년의 ATCQ에 대한 그리움을 충족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성과 감성이 공생하는 큐 팁의 프로듀싱, 파이프 독과 자로비 화이트의 굳센 외침, 이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뮤지션들의 조력 등이 앨범 속에서 화합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추억과 의식의 안식처를 얻는다.    


 


 


32
아티스트 Arcade Fire
앨범명 <Reflektor>
장르 Dance Rock, Art Rock
발매일 2012/10/28


21세기 록 음악의 기수들이 선보이는 댄스 리듬 매뉴. 21세기 최고의 데뷔작으로 평가받는 <Funeral>, 인디 록 부흥의 기수였던 <Neon Bible>,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The Suburbs>까지, 아케이드 파이어는 말 그대로 21세기 록 음악을 평정했다. 이들의 다음 앨범에 대한 하이프가 성층권 계면에 다다를 때쯤 매우 특별한 호외 하나가 팬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새 앨범을 LCD 사운드시스템의 프런트맨 제임스 머피가 제작한다.' 또 한 명의 팬은 위트 넘치는 묘사로 이 만남을 기념했다. '칭기즈칸과 아우구스투스의 회동.' 이런 거창한 치장들을 걷어내더라도 <Reflektor>는 당신이 관심 없는 음악에 빠져들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데이비드 보위와 롤링스톤즈 그리고 비지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밴드들이 댄스 리듬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고 앨범에 터닝 포인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선배들의 의도와는 달리 아케이드 파이어는 댄스 록이라는 하위 장르를 구체화하는데 집중한다. <Reflektor>는 더블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무질서와는 거리가 멀고 각개의 곡들이 가진 높은 밀도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중력을 형성한다. 이 앨범은 21세기에 가장 모험적인 콘셉트를 지닌 앨범 중에 하나지만, 결국 당신을 춤추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31
아티스트 David Bowie 
앨범명 <Blackstar>
장르 Art Rock
발매일 2016/01/08


위대한 예술가가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정신. 데이비드 보위는 <Blackstar>에 최대한 다양한 음악들을 담고 싶어 했다. 물론 이것이 1967년 데뷔한 이래 우리에게 쭉 보여주던 그의 본모습이다. 보위의 파트너 프로듀서인 토니 비스코티는 앨범을 제작하면서 가졌던 자신들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큰롤 답지 않은 로큰롤 음악을 만드는 것" 이 같은 자가당착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한때 하나의 장르로 인식됐던 보위의 스타일은 이제는 지난날의 유산이 됐지만, 완성도를 떠나 모험적인 근성만은 여전했다. 그는 <Blackstar>에 와서도 마일즈 데이비스의 병적인 엄격함과 톤을 전자음악의 실험성과 배합하고자 한다. 보위가 자신의 밴드를 꾸려서 <The Next Day>의 가장 전위적이고 비옥한 아이디어들을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다. 요는 섭리가 아니라 보위의 나이다. <Blackstar>가 정말로 경이로운 것은 70세의 예술가가 자신의 전성기 스타일에 의지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전성기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Heroes">나 <Let's Dance>의 스타일을 답습했다면 오히려 팬들과 평단은 열광했을 것이다.) 이 앨범은 이성보다 본능에 호소하고 어떤 가치를 담는다기보다 순간의 감정에 불을 지피기 때문에, 보위와 함께 늙어온 팬들보다 스몸비족에게 어울리는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추측건대 그 성질은 50년 동안 이어져온 한 예술가의 도전 정신이 맺은 값진 결실일 것이다.    






30
아티스트 Bon Iver
앨범명 <22, A Million>
장르 Folktronica
발매일 2016/09/30


포크송의 낡은 정서를 거슬러 오르는 위스콘신의 음유시인. 미국 위스콘신의 포크 밴드 본 이베어의 3번째 앨범 <22, A Million>은 우리로 하여금 통일된 해석을 허용치 않고,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떠한 유기성 하나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저스틴 버논의 작은 생각 하나 읽어낼 수 없지만, 앨범을 통해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버논이 자신의 안락한 스튜디오에 Teenage Engineering 사의 디지털 신시사이저를 들여놓았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레코드 중 하나를 위스콘신 여행 광고로 만들어버린 <Bon Iver, Bon Iver>에 비해, <22, A Million>은 전자음악과 힙합 비트 그리고 서브컬처에 대한 버논의 야심으로 충만하다. 앨범을 듣다 보면, 멜로디만으로 진행되는 대중음악과 포크음악의 유사성에 진력이 난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떠오른다. 버논은 디지털 필터에 지나치게 여과된 사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로파이의 힘을 빌려 앨범을 진탕 부패시켰다. 이는 자신이 만든 시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닥에 팽개친 뒤 착용했다는 아브라함 브레게의 웃지 못할 기행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본 이베어와 저스틴 버논이다. 이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빚어낸 뒤 비틀고 왜곡하고 가다듬는다. 자신들이 만족할 때까지. 






29
아티스트 St. Vincent
앨범명 <St. Vincent>
장르 Art Rock
발매일 2014/02/24


적나라한 자기 전시 대신 미스터리의 심연 속으로. 싱어송라이터 애니 클라크(세인트빈센트)는 수프얀 스티븐스의 투어 밴드 멤버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당연한 귀결이듯이, 둘은 음악뿐만이 아니라 소신과 가치관 면에서도 깊은 공감대를 이룬다. 이 외에도 데이비드 번(토킹 헤즈), 잭 안토노프, 앤드루 버드, 저스틴 버논, 토마스 바틀렛 등 인디펜던트의 심벌과도 같은 뮤지션들이 그녀와 궁합을 맞췄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셀프 타이틀 앨범은 보통 그것이 고백이든 과시든 간에 적나라한 자기 전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애니는 4번째 앨범 <St. Vincent>를 통해 적나라한 자기 전시는커녕 되려 미스터리로 스스로를 꽁꽁 에워싼다. 그간 그녀의 음악들ㅡ<Marry Me>, <Actor>, <Strange Mercy>ㅡ이 정체성 형성이라는 카르마에 몰두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행보 자체가 미스터리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인디펜던트 뮤지션들은 레코딩과 투어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레코딩에 무게추를 매단 이들이고, 이는 애니 역시 피차일반이다. 앨범에서 가장 생경하지만 찬란한 아웃트로인 Sever Crossed Fingers를 통해 그녀는 털어놓는다. "진실은 추하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로선 이것이 애니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다.     





 


28
아티스트 Flying Lotus 
앨범명 <Cosmogramma>
장르 Electronic, IDM
발매일 2010/05/03


압도적인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몽상 주의자가 검은 허공을 응시할 때. 2008년 스티븐 엘리슨(플라잉 로터스)은 리들리 스콧이 구현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로스앤젤레스의 전경에 투영하면서 자신의 미학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런 그에게 이 푸른 행성이 너무 좁게 느껴진 걸까. 점, 선, 면, 시공간 등의 3차원 지표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그곳, 대기와 매질이 존재하지 않고 극한을 넘어선 추위가 우리를 맞이하는 냉혹한 그곳, 스티븐은 다음 앨범 <Cosmogramma>를 통해 곧장 우주로 진출한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어떠한 제약에도 구속되지 않고 덥스텝, 프리 재즈, 힙합, IDM, 글리치 등을 코스모스 위에서 자유자재로 펼치고 조합한다. 그러나 이 우주적 크로스오버를 담은 레코드는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인 데다가, 훅이 없고, 리듬과 진행을 전혀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처음 듣는 이들이 느낄 쇼크와 자극 또한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Cosmogramma>는 일렉트로닉에서 하우스로, 빠른 템포에서 느린 템포로, 드럼에서 신시사이저로, 중력의 세계에서 양자역학의 세계로, 움직임이 너무 기민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 플라이로의 실험은 확실히 위험하고, 그는 마치 검증을 오롯이 타인의 몫으로 남겨둔 이론 학자와 같은 자세를 취한다. "자,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야." 





 
27
아티스트 Blood Orange
앨범명 <Cupid Deluxe>
장르 Electronic, R&B
발매일 2013/11/18


촉망받는 예술가가 자신의 필치를 정립했을 때 분출되는 광휘. 데브 하인즈(블러드 오렌지)솔란지, 스카이 페레이라, 티나셰 같은 여성 음악가들에게 예술의 나침반을 제공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데뷔 이래 그가 곡을 써준 뮤지션의 8할 이상은 여성이다) 한때 그의 경이로운 재능은 동료들의 평판을 위할 때에만 값진 것으로 여겨졌고, 블러드 오렌지로서의 첫 발걸음은 아쉬움과 근심을 동반했다. 하지만 <Cupid Deluxe>의 첫 싱글인 Chamakay가 발매된 2013년 9월부터 이 글을 작성하는 2019년 11월까지, 데브와 대중음악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듬성듬성 놓인 드럼, 우아하고 섬세한 현악 연주, 데브의 중저음과 빈틈없는 조화를 이루는 여성 보컬들의 팔세토, 극도로 매끄러운 리듬 속에 던져지는 전자음들, 그리고 그 베이스! 블러드 오렌지 음악의 아이덴티티가 <Cupid Deluxe>를 통해 완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프린스를 연상시키는 와와 기타와 능글맞은 댄스 리듬이 두드러지는 You're Not Good Enough는 팬들이 데브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뿐만 아니라 앨범 속에서 데브는 디스코와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리듬 레이어드하고, 색소폰과 동료들의 값진 목소리를 결합해 몽환적인 멜로디를 만들고, 태동기 힙합에 대한 향수를 한껏 자극하고, 우리는 거기서 분출되는 광휘를 목도한다. 

   

 




26
아티스트 Run The Jewels
앨범명 <Run The Jewels 2>
장르 Hip-Hop
발매일 2014/10/24


독창적이면서 강렬한 말장난, 희롱, 그리고 명예훼손. 비스티 보이즈의 마이크 디와 빅 대디 케인이 함께 팀을 결성했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아니, 사람들의 표현대로 아웃캐스트가 지금까지 활동했다면 이런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을까? 혹은 The Throne이? Madgibbs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Hell No다. Run The Jewels는 The Throne보다 더 세련됐고 Madgibbs 만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은 엘 피의 공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사는 빅 대디나 비스티 보이즈보다 훨씬 더 저속하고 지저분하다. (둘의 협의가 없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준이다) 2010년대는 하드코어 랩의 시대가 아니고 이 듀오는 정성스럽게 자신들의 데뷔 앨범을 재탕했지만, 어째서인지 팬들의 반응은 음악만큼이나 열렬해지고 있다. 이들이 한 일이라곤, 단지 BPM을 조금 '높이고' 다시 한 번 그들의 앨범을 '공짜로' 배포했을 뿐인데 말이다. 이 듀오가 보여주는 화학작용은 유례가 없는 것이다. 테크노 베이스라인이 장기인 힙합 프로듀서, 자신의 라임으로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던 컨셔스 래퍼. <Run The Jewels 2>에서는 세상과 어우러지지 않는 두 명의 아웃사이더가 단결해, 가벼운 말장난, 여성에 대한 희롱과 허풍, 명예훼손에 가까운 정치적 입장을, 이 시대에 가장 독창적이면서 강렬한 비트 위에 풀어놓는다.      





 


25
아티스트 Chance The Rapper
앨범명 <Coloring Book>
장르 Hip-Hop, Gospel
발매일 2016/05/13

촌스럽고 가볍지 않게, 시카고 래퍼가 전파하는 긍정 복음. 챈스의 가사에는 난해함이 없고 겉멋이 없으며 Genius의 주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행간의 단절이 없어 가독성이 좋고 여느 래퍼의 가사처럼 난폭한 구절이 없어, 흡사 아이들이 읽어도 될 정도다. 긍정적이다. 소리는 또 어떠한가. 챈스는 힙합과 가스펠 사이에서 서커스에 가까운 외줄 타기를 하고, 성스럽고, 아무리 감정이 고달파도 끝끝내 웃음 짓게 만드는 몇 가지 질감들을 가지고 있다. 이 또한 긍정적이다. 챈스는 인종 해방이라는 명분 아래 흑인 투사들을 결집시켰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숭고한 의지를 짊어질 마음도 없는 듯하다. 차라리 그는 시와 기도와 송가를 통해 시카고의 이웃과 영령들을 위로한다. 어떻게 보나 긍정적이다. 챈스는 자신의 멘토에게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의 앨범에 자신의 가장 탁월한 벌스ㅡI met Kanye West, I’m never going to failㅡ를 선사했다. 또한 시카고 래퍼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 속에 나지막한 공간들을 마련해주었다. 이는 당사자들에게도 긍정적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이었다. 챈스 더 래퍼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언급했던 유형의 낙관 주의자다. 이들의 정신과 사상에는 전염성이 있고, 미다스의 손과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끝끝내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든다. 




 


24
아티스트 Jamie xx
앨범명 <In Colour>
장르 Electronic
발매일 2015/05/29


'다채롭다'라는 낱말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영국의 DJ 이자 프로듀서인 제이미 스미스는 모든 음계를 미묘하게 만드는데 타고난 재주가 있다. 그 재주가 인디 팝에 새 얼굴을 부여하고, 다수의 동료와 라이벌들에게 아이디어를 공급하고, 음악 장르를 더 세분화하거나 혹은 세분화된 장르들을 통합시켰다. 위대한 시인 길 스콧 헤론의 마지막 앨범이 제이미의 손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The xx의 리더로서 또는 런던 지하세계의 마에스트로로서 연륜을 쌓으며, 팝 컬처의 빛과 소금이 된 전자음악과 힙합이 어떻게 차트를 집어삼키는지, 음악시장의 거대한 흐름을 응시했다. 제이미는 말한다. "드레이크 같은 래퍼가 댄스 홀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In Colour>의 본바탕이 됐다. 특히 제이미는 I Know There's Gonna Be (Good Times)에서 거룩한 가스펠 아카펠라를 클럽에서 흘러나올 듯한 흥겨운 비트 위에 올려놓고, Young Thug와 Popcaan은 에너지 필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분명히 이 곡은 앨범에서 가장 뛰어난 곡이지만, 문제는 이런 곡이 10개나 더 존재한다는 것이다.   






23
아티스트 Beyoncé
앨범명 <Beyoncé>
장르 R&B
발매일 2013/12/13


비욘세라는 이름이 어떻게 용기와 성공의 상징이 되었나. <Beyoncé>는 난데없이 나타났다. 이 앨범은 어떠한 프로모션이나 사전 정보 없이 말 그대로 난데없이 아이튠즈에 등재됐다. 지난날 비욘세가 자신의 앨범 홍보를 위해 치른 천문학적인 비용을 생각해봤을 때, 이 같은 행보는 반시장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그녀가 전복을 꾀한 것이 홍보 방식만은 아니다. <Beyoncé>는 듣는 이로 하여금 비욘세 자신의 사생활을 훔쳐볼 수 있는 몇 개의 직접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칸막이가 없는 성당에서의 고해성사를 연상시키며, 우리를 동심에 잠기게 하다가도 금세더러운 표정을 숨김없이 노출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자신에게 17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안겨준 음악 스타일과 작별을 고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피비 알앤비의 풀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팀발랜드에서부터 퍼렐 윌리엄스에 이르기까지, 앨범을 위해 자신들의 기지를 보탠 이 드림 팀 명단에서 당신이 눈여겨봐야 할 이름은 바로 Boots다. 생전 들어본 적 없던 그 이름이 21세기 최고의 팝스타에게 새로운 인격을 수여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알앤비 물결의 스포트라이트를 프랭크 오션과 위켄드가 독점하는 것이 비욘세와 부츠의 입장에서는 억울할는지 모른다. <Beyoncé>는 레트로 열풍에 일절 의지하지 않고, 디 안젤로와 맥스웰의 아이디어에 기대지 않은 채 빚어낸 것 중에서 최고의 결과물이다. (※ TMI: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이 앨범을 아이튠즈에 업로드했던 담당자는 자신이 업로드한 것이 비욘세의 새 앨범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5분 뒤 아이튠즈에 비욘세의 신보가 발매됐느냐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22
티스트 Big Boi
앨범명 <Sir Lucious Left Foot: The Son Of Chico Dusty>
장르 Hip-Hop
발매일 2010/07/05


아웃캐스트가 아닌 빅 보이의 이름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 21세기의 첫새벽에 이 판의 판도를 바꿔버린 앨범은 무엇이었을까? 영광스러운 후보군을 살펴보도록 하자. <Only Built 4 Cuban Linx... Pt. II>, <Fishscale>, <The College Dropout>, <The Marshall Mathers LP>, 그리고 어쩌면 <In Search Of...>까지, 이들 모두 이 리스트에서 최고점을 받아 마땅한 앨범들이지만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아마도 <Stankonia>와 <Speakerboxxx/The Love Below>일 것이다. 제이지의 또 다른 걸작 <The Blueprint>가 거리의 삶을 예찬하는데 열중했던 반면, 아웃캐스트는 거리의 음악을 예술의 영역으로 승격시켰다.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듀오의 잠정 해체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러, 그 반쪽이었던 빅 보이가 새로운 연대의 출범을 기리기 위해 첫 솔로 프로젝트 <Sir Lucious Left Foot: The Son Of Chico Dusty>를 발표했다. 확실히 이 앨범에는 숲을 가꾸기 위해 쓰여야 할 한정된 자원이 나무 한 그루에 과도하게 투자된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아웃캐스트라는 위대한 그림자를 지우려는 거장의 전략처럼 느껴진다. 앨범에서 뻔질나게 등장하는 휘파람 소리, 와와 기타, 더리 사우스 신스 등은 그런 전략의 조각들로서, <Sir Lucious Left Foot>을 아웃캐스트가 아닌 빅 보이의 이름으로 남게 한다.






21
아티스트 M83
앨범명 <Hurry Up, We're Dreaming>
장르 Dream
발매일 2011/10/18


Dream Pop (X), Dream (O). 언제부터였을까. 꿈이 대중음악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 히피 문화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던 사이키델리아의 시대부터였을까. 아니면 신시사이저와일렉 기타가 대중음악의 주류로 편입되던 뉴웨이브 시대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를 풀이하기 위해 평론가들이 분주해지면서부터 였을까. 드림 팝의 판권에 대한 논의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든지 간에, 프랑스의 일렉트로닉 밴드 M83는 꿈의 세계를 직경 120mm의 원판 위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음악이 얼마나 생생함으로 가득했던지 BBC는 앨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평을 남겼다. "똑같이 무의식 세계를 다루고 있는 데다, 똑같이 과학적 증거가 부재하지만, 꿈에 관한 작품이라면 <꿈의 해석>보다 <Hurry Up, We're Dreaming>이 더 우월하다." 나는 BBC의 평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들을 필요 없이 듣고 싶은 곡만 골라서 들어도 된다는 안소니 곤살레스의 인터뷰 역시 꿈을 위한 작품의 취지로 더없이 잘 들어맞는다. 일회성과 단절감이야말로 꿈의 핵심이 아니던가. 당신의 꿈속에서 Midnight City와 Wait 같은 곡들이 끊임없이 메아리친다고 상상해보라. 나로서는 그보다 더 두근거리는 공상을 떠올릴 수가 없다.     


 




20
아티스트 Vince Staples
앨범명 <Summertime '06>
장르 Hip-Hop
발매일 2015/06/30


비정한 거리가 낳은 냉소 주의자의 삐뚤어진 시선. 2010년대 제일의 불가사의. 2015년 XXL 프레시맨 클래스 중 한 명이었던 빈스 스테이플스가 대체 어떻게 그해에 <To Pimp A Butterfly>와 대등한 수준의 앨범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일평생 예술가를 꿈꾼 그대여, 상상의 날개를 펼쳐라! 당신도 할 수 있다. 만약 No I.D.가 당신의 앨범을 제작해준다면. DJ Dahi와 클램스 카지노는 무상 옵션이다. 아마 래핑은 조금만 연습하면 될 것이다. 어차피 상상이니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상은 미끄러질 것이다. No I.D.가 당신의 앨범을 제작하고 당신이 에미넴처럼 랩을 할 수 있다 하더래도, 당신이 빈스처럼 싸가지 없는 가사를 쓰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냉소 주의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빈스는 쿨하고 기이하다. 그의 데뷔 앨범 <Summertime '06> 또한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수록곡들은 멜로디가 거세된 채 리듬만으로 진행되는가 하면, 미니멀한 동시에 기괴망측한 <Yeezus>의 비전이 빈스의 마이크 위에서 만개한다. <Summertime '06>에서는 피폐해진 가정에서 태어나 비정한 현실 속에서 별다른 꿈 없이 자란 한 명의 흑인 아이가 힙합과 랩에 대한 열정을 키워 끝끝내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 명의 랩 스타로 성공하려다가, 실패한다. 루페 피아스코도, 켄드릭 라마도, 심지어 그 나스마저도 흑인 소년 퀘스트를 성공시켰는데, 빈스의 세상에서는 실패한다. 이것이 바로 <Summertime '06>다. 거리에는 매정함이 감돌고, 세상은 삐뚤어져 있으며, 게토에는 희망이 없다.  





 

19
아티스트 Drake
앨범명 <Take Care>
장르 Hip-Hop
발매일 2011/11/15


인상 좋은 피비 알앤비의 아버지. 드레이크가 자신의 앨범에서 랩보다 더 많은 노래를 한 최초의 래퍼는 아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음악 속에 여성과의 교감, 셀레브리티의 친분 관계, 가족사를 녹여낸 최초의 뮤지션도 아니고, 그늘진 유명 인사의 내면을 조명한 최초의 예술가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드레이크가 그 일을 가장 잘 해냈다는 것이다. 힙합은 단 한 번도 드레이크 같은 영혼을 소유한 적이 없다. 우리가 드레이크의 음악을 통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소득이나, 사용하는 마약, 지난밤 클럽에서의 문란한 사생활 같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기분과 컨디션일 것이다. 자니 카슨의 대저택을 떠오르게 하는 인테리어 디자인, 황금빛의 장신구와 식기들, 아주 좀 전에 섹스를 끝마친 듯한 드레이크의 표정 등, <Take Care>의 커버 아트 역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Take Care>의 가장 큰 수훈은 슬로 잼 알앤비 샘플과 다운 템포 댄스 리듬을 결합해 드레이크 특유의 나른한 사운드를 완성시킨 40, 비장미 넘치고 중독적인 클럽 튠을 만들어낸 티 마이너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켄드와 켄드릭 라마가 이 앨범을 통해 더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드레이크와 OVO Sound의 선구안(스티비 원더의 하모니카!) 또한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그리고 드레이크가 이 기름진 토양 위에 자기 과시와 자기 연민의 두 얼굴 체를 하나의 깊은 감정으로 귀결시킬 때, 피비 알앤비와 차세대 힙합은 그에게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다.      

   




 


18
아티스트 Kanye West
앨범명 <Yeezus>
장르 Hip-Hop
발매일 2013/06/18


완벽주의 예술가의 불완전한 면모에 대한 청각화.만약 내가 칸예 웨스트였다면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의 후속작을 준비하지 못해(혹은 단념해서) 그대로 은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예상 밖의 결단력으로  Dark Fantasy에 준하는 또 다른 걸작을 빚어냄으로써, 자신의 전성시대가 다시 한 번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프랑스의 전자음악 신은 비록 시장의 주류는 아니었으나 주류들이 즐겨 찾던 아이디어의 보고였고, 다프트 펑크를 필두로 한 프랑스의 프로듀서들은 <Yeezus>에 이색적인 질감과 범람하는 활력을 선사했다. 이들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마땅하고, 기존의 파트너들도 넉넉히 제 몫을 다했지만, 만약 프로듀서 릭 루빈이 없었다면 이 앨범은 인상적인 밑그림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릭의 결정적인 역할조차 이 탁월한 걸작이 거둔 성취의 일부분일 뿐이다. <Yeezus>는 아이디어들이 서로 조우하고, 결속하고, 진화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그 어떤 작품보다 직관적인 인식을 전달한다. 앨범을 처음 듣는 이들은 당혹하거나 감탄하고, 집중하거나 되풀이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받거나 때로는 전율에 휩싸이지만, 이 모든 감정 또한 칸예와 캠프가 뜻한 바일 것이다. <Yeezus>는 많은 면에서 칸예의 또 하나의 문제작이었던 <808s & Heartbreak>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힙합 커뮤니티의 극렬한 저항에 맞부딪혔던 전작과 달리 일말의 호재가 있다면, 이제 세상이 그의 급격하고 충동적인 생각ㅡ<Yeezus>ㅡ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17
아티스트 Vampire Weekend
앨범명 <Modern Vampires of the City>
장르 Alternative Pop
발매일 2013/05/14


에즈라라는 핸들. 로스탐이라는 바퀴. 뱀파이어 위켄드라는 자전거. 뱀파이어 위켄드의 데뷔는 너무나 화려하고 완성형이었던 탓에 마지막 무대를 앞둔 페스티벌처럼 느껴졌다. 후속작이었던 <Contra>는ㅡ완성도와는 별개로ㅡ이런 우려가 수면 위로 드러난 작품으로서 밴드의 명암이 너무나도 잘 반영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 뱀파이어들은 트릴로지의 마지막 작품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들은 꺼져가는 불꽃을 되살리기 보다 남은 불쏘시개마저 몽땅 태워버릴 생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극단까지 확장시킨다. <Modern Vampires of the City>는애플 뮤직과 스포티파이의 시대에 기필코 앨범 스케일로 들어야 할 보기 드문 앨범이다. 모든 수록곡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컬러가 뚜렷하지만 그중에서도 Step은 발군이라 할만하다. 마치 폴 사이먼이 전성기에 작곡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곡은 느슨한 베이스와 감미로운 하프시코드, 만담풍에 가까운 에즈라의 읊조림, 이들이 구상할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샘플(Aubrey) 등을 활용함으로써, 밴드의 지향점을 명확히 한다. 뱀파이어 위켄드는 회의주의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낙천주의자들의 집합으로서 이들의 음악은 항상 적당한 비관과 낙관을 동반한다. 앨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Ya Hey를 통해 에즈라가 노래하지 않는가. "오, 신이시여. 시온은 너를 사랑하지 않고, 바빌론 역시 너를 사랑하지 않지. 하지만 너는 모든 것을 사랑하잖아." 




 


16
아티스트 Tame Impala
앨범명 <Currents>
장르 Psychedelic Pop
발매일 2015/07/17


수많은 이들이 꿈꿨던 사이키델릭 음악의 역동적인 미래상. 2008년 테임 임팔라의 첫 EP 앨범이 발매된 이래, 케빈 파커는 호주 프리맨틀에 있는 홈 스튜디오에서 줄곧 자신만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Innerspeaker>와 <Lonerism>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 두 사이키 록 명반은 이 밴드의 장래를 한없이 밝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케빈은 비치 보이스가 <Pet Sounds>를 통해, 데이비드 보위가 <Low>를 통해, 라디오헤드가 <Kid A>를 통해, 그리고 어쩌면 존 레넌이 <Imagine>을 통해하려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된다. 즉, 할법하다고 간주되지만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이전 작품들의 궤도에서 급격히 벗어난 쇄신적인 음악을 만드는 일 말이다. 이 시대 사이키델릭 록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케빈 파커는 <Currents>를 제작하며 90년대 알앤비의 풀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인다. 앨범 속에서 케빈의 장기인 빈티지 신시사이저, 이펙트를 흠뻑 머금은 일렉 기타, 존 레넌을 빼닮은 팔세토 등의 원료들이 흡사 80년대에 맞닿아 있는 느낌을 건네는 동안, 우리는 왜 사이키델리아가 각 시대의 예술을 관통하는 테마였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납득하게 된다. 케빈은 인터뷰를 통해 <Currents>를 녹음하며 사용한 기타 이펙터가 15가지에 달한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스필 매거진의 음악 에디터 라이언은 앨범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Currents>는 록 기타의 둠스데이다." 그리고 앨범 오프닝 트랙인 Let It Happen을 통해 케빈의 일그러진 기타 솔로가 울려 퍼질 때, 수많은 이들이 꿈꿨던 사이키델릭 음악의 비전이 비로소 결착에 이른다.         



 


 


15
아티스트 Thundercat
앨범명 <Drunk>
장르 Electronic, Jazz
발매일 2017/02/24


깊고 고요한 우물 하나. 유년기에인연을 맺은 악기가 자신의 장래희망이 되고, 영감의 바탕이 되고, 생업의 기반이 된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미국의베이시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스티븐 브루너(썬더캣)가 베이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행운이었다. 브루너는 유년기의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지 듀크와 스티븐 클락은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을 저에게 소개해준 형도 마찬가지고요."그러나 내 생각에 브루너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바로 플라잉 로터스다. 두 사람에게서는 긴 시간 동안같은 경험과 취향을 공유해온 형제자매나 부부 사이에서 느껴질법한 짙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동질감과 분위기가 바로 <Drunk>를 관류하는 앨범의 핵심 메타포다. 이 환상적인 콤비는 기계적이고 날카로운 전자음을신비롭고 따스한 질감으로 변형시키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는데다, 고전 재즈의 잠재력을 타진하는데 있어서도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매 순간 즉흥적이고, 탄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고차원적인 안목과 감각에도불구하고 <Drunk>를 이끌어가는 건브루너의 베이스와 팔세토다. 극치에 달한 브루너의 베이스 테크닉은 하나의 세션이 앨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잘나타내고, 달콤하고 몽환적인 그의 팔세토는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관악기나 진배없다. 






14
아티스트 Grimes
앨범명 <Art Angels>
장르Synth Pop, Art Pop
발매일 2015/11/06


Hentai is important! 2012년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클레어 부쳐(그라임스)는 새 앨범 <Visions>의 수록곡 Oblivion을 통해 인디펜던트와 언더그라운드 댄스 신의 아이콘 아닌 아이콘이 됐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러 그녀가 더 호화로운 커버 아트를 들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앨범으로서 <Art Angels>가 정말 경이롭게 여겨지는 점은 보컬, 프로덕션, 믹싱, 엔지니어링, 마스터링 등 모든 제작 과정이 클레어의 손을 거쳤다는 것이다. <Art Angels>에서 클레어의 지분율은 <Ziggy Stardust>에서 보위의 지분율을 상회한다. 클레어는 90년대 팝 펑크와 전자음악 등 보통 우리의 포커스 밖에 존재하는 소리들을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Art Angels>는 엔터테인먼트로서도 그래프의 최상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대중적인 앨범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이 앨범이 굉장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클레어가 채택한 장르가 '신스 팝'이라는 사실이다. 신스 팝. 그래, 당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 신스 팝. 크라프트베르크로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로부터 출발해,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와 Take On Me를 탄생시키고, 레이디 가가와 더 킬러스에 의해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인디펜던트의 총아들과 아마추어 칼리지 밴드에 이르기까지, 대중음악의 모든 스튜디오와 실험실을 거쳐간 그 장르. 놀랍게도 클레어는 경박한 비음, 단순한 멜로디, 범상치 않은 콘셉트만으로 이 고루한 장르의 계보에 가장 멋들어진 포스터 하나를 덧붙인다.    





 


13
아티스트 Sufjan Stevens
앨범명 <Carrie & Lowell>
장르 Alternative Folk
발매일 2015/03/31


문화적 공황상태를 맞이한 현대인들의 해방구. 수프얀 스티븐스를 아느냐고? 아, 그 Mystery of Love를 부른.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상한 재킷을 걸치고 나온. 노래 제목 긴 걸로 TV에 출연한. 옷차림새로 밈이 돼버린. NG.수프얀 스티븐스를 아느냐고? 우리 시대의 밥 딜런. 현대 포크음악의 진수. 바로크 팝과 전자음악에까지 마수를 뻗친. NG, NG. 아, <Carrie & Lowell>을 아느냐고? <Michigan>, <Illinois>, <The Age of Adz> 등은 모두 놀라운 앨범이었지만, 음악의 언어로 말하건대 <Carrie & Lowell>은 수프얀의 경력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앨범이다. 이중 구조의 어쿠스틱 기타, 마디의 단락에서야 은은하게 들려오는 신스,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 등의 특성이 앨범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런 구조의 유사성은 앨범의 수록곡들을 마치 한 배에서 나온 자식처럼 느껴지게 한다. 획기적이고 다채로웠던 전작 <The Age of Adz>에 비해 <Carrie & Lowell>에서는 연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우리를 감싸 안는다. 하지만 그런 공허함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일상 속에서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ㅡ역시나 연유를 알 수 없는ㅡ문화적 공황상태의 한 가지 유형이다. 사실 수프얀의 개인사(앨범명인 Carrie & Lowell부터가 생모와 계부의 이름이다)에 대한 통찰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이 앨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Only Thing의 가사를 보라. '유일한 것'은 절대 긍정적인 비유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고 수프얀은 말한다. "<Carrie & Lowell>은 공허함입니다. 저는 평생을 공허함 속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누군가 이 음악을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면 저는 기꺼이 지지할 겁니다. 판단은 저의 몫이 아니라 공허함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몫이니까요." 수프얀 스티븐스를 아느냐고? 글쎄.

 




 
12
아티스트 Solange
앨범명 <A Seat at the Table>
장르 Neo Soul
발매일 2016/09/30


가장 의식적인 시선이 고전의 연륜을 만났을 때. 솔란지는 <A Seat at the Table>을 통해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 하나를 내던진다. "흑인 여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물론 그녀가 처음은 아니다. 어사 키트, 니나 시몬, 샤카 칸 등이 조심스레 지핀 횃불이 비욘세, 자넬 모네,자밀라 우즈 등의 손에서 활활 타오르는 성화가 되어 후대로 계승된다. 이 반짝이는 대열에서 가장 의식적인 노랫말과 블랙 히어로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이 뒤섞여, 솔란지와<A Seat at the Table>은 자연스레 기수가 된다. 흑인 여성으로서의 솔란지의 경험담, 놀스 집안의 역사, 오늘날 미국의 정치사회 이슈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 시대에 가장 값어치 있는 자전적 에세이가 탄생했다. 모든 걸작들이 그렇듯이, 이 앨범 또한 머금은 의의만이 유일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사실 앨범의 사운드는 대부분 솔란지보다 라파엘 사딕의 연륜 아래서 가공됐다. 모두가 그를 한철 유행했던 골동품으로 취급할 때 솔란지의 심미안이 빛을 발했고, 그렇게 사딕은 고전 솔, 일렉트로 펑크, 일렉트로 블루스 등의 원료들을 첨가해 솔란지의 아트 팝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켰다. <A Seat at the Table>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는 면에서 미래(지향)적이고, 자신의 창작력과 미적 안목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다.     





 


11
아티스트 LCD Soundsystem
앨범명 <This Is Happening>
장르Electronic, Dance
발매일 2010/05/17


그랜드 오프닝과 그랜드 피날레의 수미상관. 미국 브루클린의 일렉트로닉 밴드 LCD 사운드시스템은 세계 최고의 밴드 중ㅡ나에게는 세계 최고다ㅡ하나고, 만약 다프트 펑크를 밴드로 분류한다면 내가 2번째로 사랑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앞으로의 이야기와 품평에는 나의 사심이 듬뿍 첨가돼 있다.) 밴드의 프런트맨이자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머피는 많은 면에서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오르게 한다. 첫째, 타란티노가 "나는 세상의 모든 영화감독 중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감상한 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처럼, 머피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록 음반을 다 들어본 것 같다'라며 자신의 애호심을 드러냈다. 둘째, 이 둘은 '언제쯤 피가 솟구쳐야 하는지', '언제쯤 드럼이 달팽이관을 강타해야 하는지' 등의 서스펜스를 다루는데 있어 각 분야 최고의 권위자와 마찬가지다. 원래대로라면 <This Is Happening>은 LCD 사운드시스템의 마지막 앨범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17년 <American Dream>이라는 또 다른 후속작을 발표하며 은퇴는 번복됐다.) 머피는 자신들의 마지막 장을 준비하며, 포스트 펑크, 디스코, 하우스 그리고 댄스 등의 장르들이 왜 인기가 있었는지, 어떻게 우리를 춤추게 했는지, 어찌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는지에 대해 다시금 우리를 일깨운다.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형의 방에서 어쩌다 발견한 <펄프 픽션>이 당신의 인생에 아로새겨지듯이, 당신은 춤추고 싶을 때마다 <This Is Happening>을 틀 것이다. 반드시.






10
아티스트 Daft Punk
앨범명 <Random Access Memories>
장르Disco, Electronic
발매일 2013/05/17


But everybody calls me Giorgio. 다프트 펑크의 <Random Access Memories>는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앨범 속의 소리들은 생기 넘치는 디스코의 전성기에 맞닿아 있고, 이런 시도는 허비 행콕의 <Maiden Voyage>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Bitches Brew>같은 퓨전 걸작들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 헬멧을 쓴 2기의 로봇 외에도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참여진들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의 신명 나는 기타 연주 위로 퍼렐 윌리엄스의 매끈한 보컬을 더한 Get Lucky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었다. 이 밖에도 디스코 거장 조지오 모로더의 신시사이저와 무그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되는 Giorgio by Moroder, 칠리 곤살레스의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가 보코더로 왜곡된 다프트 펑크의 보컬과 조화를 이루는 Within 등이 앨범의 주된 감성을 이루는 곡들이다. 70년대 디스코 신에 젖줄을 대고 있기는 하나, <Random Access Memories>를 다프트 펑크가 만든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또 하나의 세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앨범 발매 후 GQ와 가졌던 인터뷰는 앨범만큼이나 훌륭하다. "누가 리드 보컬인지, 누가 참여했는지, 누가 연주를 했는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 앨범은 완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했고 연주나 연주를 녹음하는 과정도 전통적이었습니다. 녹음한 테이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보고, 믹스하고, 또 테이크를 골라냈습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이런 짓을 하느냐고요? 우리가 알잖아요. 그래서 하는 거죠." 그 실체는 아득하고 모호할지 모르나 어찌 된 일인지 다가오는 감정은 아련하고 풍성하다. (※ TMI:방갈테르와 크리스토는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작업이 까다로웠던 곡으로 Touch를 꼽았다. 앨범의 메인 엔지니어였던 피터 프랑코에 따르면 Touch는 전혀 다른 3개의 파트를 하나로 합친 곡이다.) 






09
아티스트 Janelle Monáe
앨범명 <The Electric Lady>
장르 Funk, Psychedelic Soul
발매일 2013/09/06 


자신들의 발자취에 대한 긍지로 똘똘 뭉친 전자 여성들. 사이키델릭 팝, 알앤비, 솔 등을 공상과학 콘셉트와 융합시킨 <The ArchAndroid>는 대중과 대중음악에 성공적인 미래 모델과 높은 기준을 제시했다. 세간의 눈길은 자연스레 후속작으로 향했지만, 모네가 뛰어넘기에 그 허들은 너무 높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독특하고, 정신을 고양시키고, 장르를 통합하는 또 하나의 컬렉션을 만드는 대신, (매드립과 켄드릭 라마가 그러했듯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 전체 흑인음악사의 포괄적인 흐름을 읽는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근본적인 물음 하나가 우리를 뒤따른다. '왜 흑인 예술가들만이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를 종합하려 하는가.' 당신은 록이나 일렉트로닉의 전체적인 흐름을 포괄하겠다는 백인 뮤지션을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미루어보면 <The Electric Lady>(제목부터가 지미 헨드릭스에 대한 헌사다)는 마치 모네의 질문이자 대답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이 무언가의 전형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앨범의 노래와 비트들에는 분명히 전통적인 면이 있지만, 모네는 프린스 타입의 펑크에서나, 미겔과의 슬로 잼 듀엣에서나, 에리카 바두와 솔란지와 함께한 펑크 튠에서나 앨범을 풍성하게 꾸리기 위해 위해 최선을 다한다. <The Electric Lady>에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밴드 합주, 고전 흑인음악에 대한 엄중한 헌사,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활용된 수많은 풍자와 스킷, 탤런트, 아이디어, 예술성, 직업윤리, 그리고 아름다운 용모와 사상을 지닌 최고의 예술가가 있으며, 각각의 형태는 다르나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정신에 의해서 융화를 이룬다.  





 


08
아티스트 Frank Ocean
앨범명 <Blonde>
장르 Pop
발매일 2016/08/20


이 시대의 모든 젊음이 원하는 예술의 표상. <Blonde>만큼 하나의 앨범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력을 설명하고 싶어지는 앨범이 있을까. <Blonde>만큼 하나의 앨범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은 앨범이 있을까. <Blonde>만큼, 내가 듣기를 간절히 열망했던 앨범이 있었을까. 적어도 나의 기억 속에는 없다. 어쩌면 직관적인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프랭크 오션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그리는 표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맥라렌 F1 GTR(2대 중 1대는 롱테일), 아우디 R8 LMP, 애스턴 마틴 DBR9, 그리고 오션 그 자체라고 여겨지는 BMW M3 E30 등이 배경을 수놓았던 Nikes의 비디오를 기억하는가. 그랑프리 드라이버의 삶을 동경하던 소년이 어떻게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됐을까. "<Blonde>는 섹스보다 더 황홀한 소리들로 가득 차있다." 스포티파이의 팟캐스트 Dissect를 진행하는 Cole Cuchna는 이 앨범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섹스보다 더 황홀한 소리들은 비틀스와 비치 보이스의 시대에 맞닿아 있지만, 우리의 사색은 존 레넌이 Self Control을 불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명확한 비전과 추진력을 가진 아티스트는 인종과 장르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앨범 위에서 오션의 목소리는 애절하고, 마약과 술에 취해 있고,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한다. 전기선은 바닥을 채찍질하고, 거의 모든 수록곡들이 대중음악의 전형적인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으며, 중구난방의 서사에서 유의미한 텍스트를 가려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Blonde>고, 프랭크 오션이라는 인물을 이룬 삶의 파편들이자, 사랑에 관한 이 연대의 가장 아름다운 기록물이다. (※ TMI: <Blonde>의 발매일을 예측했던 모든 언론 매체 중에서 정답에 가장 근접했던 건 뉴욕 타임스였다. 뉴욕 타임스는 앨범이 8월 5일에 발매될 거라고 발표했고, '겨우' 15일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07
아티스트 Kendrick Lamar
앨범명 <good kid, m.A.A.d city>
장르 Hip-Hop
발매일 2012/10/22


켄드릭 라마의 작은 일보, 힙합에게는 위대한 도약. 2012년 겨울의 어귀에서 나는 루페 피아스코의 <Food & Liquor> 이후로 가장 걸출한 데뷔 앨범의 발매를 지켜보았다. 발매 후 나의 예상보다 빠르게 찬사들이 쏟아졌고, <illmatic>으로부터의 대관식이 거행되고, 웨스트 코스트의 왕좌가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A Short Film by : Kendrick Lamar', 켄드릭은 자신의 데뷔 앨범이 한 편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밝혔는데,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개인사를 각색한 픽션, 컨셔스 랩, 라디오 트랙 등이 절묘하게 합을 이루는 앨범의 구성은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good kid, m.A.A.d city>의 콘셉트는 Poetic Justice라는 타이틀에서ㅡ혹은 투팍에 대한 켄드릭의 존경심에서ㅡ짐작할 수 있듯이, 우편배달부(투팍)와 헤어 디자이너의(자넷잭슨)의 애틋했던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앨범의 모든 수록곡들이 의식적이고 대중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묵살하지만,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Sing About Me, Im Dying Of Thirst로부터 시작된다. 세 명의 인물, 세 개의 사건, 세 개의 벌스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이야기를 엮어내는 켄드릭의 기예는 스토리텔링이 힙합의 주요 형식으로 채택된 까닭과 마찬가지다. 물론 <good kid, m.A.A.d city>혁신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걸맞은 앨범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켄드릭과 그의 크루들은 근사한 비트를 알아보는 선구안,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거듭되는 녹음, 훌륭히 제 몫을 해내는 게스트들과 목적의식이 뚜렷한 프로덕션 등을 통해 새로운 르네상스의 여명을 밝힌다. (※ TMI: 켄드릭 라마는 시카고에서의 리스닝 파티 도중 갑작스럽게 클럽을 뛰쳐나갔다. 그렇게 켄드릭은 칸예 웨스트의 뒤를 이어 시카고에서의 리스닝 파티 도중 뛰쳐나간 두 번째 인물이 됐다.) 





 


06
아티스트 Blood Orange
앨범명 <Freetown Sound>
장르Electronic, R&B, Funk
발매일 2016/06/28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저의 다가올 앨범은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일환이고, 페미니즘과 연대하며, 성적 소수자들을 대변할 것입니다." 데브 하인즈(블러드 오렌지)의 이 발언에는 앨범에 담긴 모든 테마들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중요한 테마 한 가지를 빠뜨리는 우를 범했는데, 그것은 바로 블러드 오렌지, 즉 데브 하인즈 그 자신이다. <Freetown Sound>. 이 10년을 통틀어, 하나의 작품으로서 아티스트 자신과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보다 잘 표현한 앨범이 있었을까. 나는 없다고 확신한다. 젊은 여성들에게 미시 엘리엇이 남긴 '유산'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인트로부터, 인종 문제와 드래그 문화를 조명한 다큐멘터리에서 채집한 샘플까지, 앨범 한복판에 자리한 레퍼런스의 폭넓은 활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음악은 더 인상적이다. 가장 다분하게 느껴지는 프린스의 영향력을 제하고서도, 커티스 메이필드, 기타리스트 에디 그랜트, 비스티 보이즈 등의 다채로운 레퍼런스가 <Freetown Sound>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특히 데브가 마이클 잭슨을 생각하며 작곡했다는 E.V.P.에서 나일 로저스의 기타 찹과 데비 해리의 웅얼거리는 보컬 위로 잭슨의 춤이 오버랩될 때, 우리의 흥분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처럼 데브의 무수한 아이디어 중 하나는 그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고 갑자기 등장해 리듬의 진행을 반전시킨다. 이건 분명 진기하고도 희귀한 음악 체험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지 위에서 블러드 오렌지라는 미명하에 고전과 혁신이 절충한다.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이 시대에 따라 새로운 얼굴을 갖는 것처럼, <Freetown Sound> 역시 세상만사의 흐름에 관계없이 더 신나고 중요해질 수 있다.  





 
05
아티스트 Bon Iver
앨범명 <Bon Iver, Bon Iver>
장르Folk Rock, Alternative Folk
발매일 2011/06/17


웰컴 투 위스콘신, 웰컴 투 본 이베어.위스콘신. 황량함. 고립감. 체크무늬 남방. 수더분한 인상. 쓸쓸한 오두막. 이것들은 초기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현대인이나 카우보이의 빅데이터 키워드가 아니다. 21세기의 첫 10년이 흘러가는 동안, 포크 밴드 본 이베어의 프런트맨 저스틴 버논은 <For Emma, Forever Ago>라는 너무나도 근사한 앨범을 선보이며 시들어가던 인디 포크 신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했다. 이 총아의 탈선은 속세의 인간들이 'Dark Fantasy'라고 부르는 칸예의 방주에 탑승하면서부터 시작됐는데, 어찌 됐든 간에 이 만남이 둘의 음악적 야심에 불을 지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버드대학교의 커클랜드 기숙사에서 페이스북을 코딩한 마크 저커버그처럼, 이들의 소포모어 앨범 <Bon Iver, Bon Iver>는 위스콘신의 동물 병원을 개조한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앨범 위에서 버논의 말재간은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지만, 그가 빚어낸 소리들은 쉽게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 Michicant이나 Calgary 같은 곡의 제목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덧없는 해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버논은 <Bon Iver, Bon Iver>가 4계절 순환 중 봄에 해당하고, 앨범의 소리들을 봄에 피어나는 정기처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만, 그의 진술은 틀렸다. 이 앨범은 그 어떤 앨범보다도 겨울 그 자체를, 그리고 그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있기에 가치를 가지는 온기를 상징한다. 저스틴 버논과 <Bon Iver, Bon Iver>에게는 위스콘신보다 더 위스콘신스럽고, 포크 음악보다 더 포크스러운 면이 있다.  

 





04
아티스트 D'Angelo & The Vanguard
앨범명 <Black Messiah>
장르Neo Soul
발매일 2014/12/15


대중문화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날로그 그린벨트. 누군가가 2000년대 디 안젤로의 기행을 목격했다면, 분명히 병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을 터이니. 이건 음악에서도 피차일반이다. 나는 <Voodoo>를 들으면 다른 무엇보다도 '편집증'과 '강박'이라는 신경학적 증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Voodoo>에서 풍기는 뉘앙스를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Black Messiah>의 등장과 함께 끝이 난 것은 15년간의 기다림뿐만이 아니다. 뱅가드의 일원이자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을 디와 함께 작사한 켄드라 포스터는 앨범 작업 과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마치 펑카델릭이 된 듯했어요." 어쩌면 <Black Messiah>는 디의 생애에서 가장 즐겁고 여유로운 앨범일는지도 모른다. 이 기념비적인 걸작에 자신들의 값진 재능을 보탠 장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디의 학자 같은 접근 방식에 대해 언급했다. 동료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는 자신의 창작 과정과 별 관계없는 음악들을 찾아 듣고, 항상 음악 장비에 대해 공부하고, 이력서에 이력 한 줄을 추가하듯이 이 경험을 메모하고 그에 대해 토론했다. 이는 음악을 학문과 연관시키는 관점이 터부시 되는 현대 문화 풍조에 많은 바를 시사한다. 앨범 크레디트에 명시되어 있듯이, <Black Messiah>의 녹음, 편곡, 믹싱, 마스터링 등은 모두 아날로그 방식(카세트테이프와 어쿠스틱 세션)으로 이루어졌다. 전자음이 창조의 원천이라고 간주되는 시대에 이런 뻔뻔스러운 복고주의라니.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켄드라가 부연한다. "디 안젤로와 뱅가드를 처음 봤을 때, 이들은 단지 음악이나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들이 음악이었죠." 





 
03
아티스트 Kendrick Lamar
앨범명 <To Pimp a Butterfly>
장르 Hip-Hop
발매일 2015/03/15


1994년의 투팍이 컴튼의 작은 거인에게. 2010년대의 힙합 이벤트는 <To Pimp a Butterfly>가 깜짝 발매되던 2015년 3월 15일에 모두 막을 내렸다. <To Pimp a Butterfly>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레코드가 되고, 켄드릭 라마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MC가 된다. 심지어 이 예상은 아마존이나 구글의 시가총액보다 전망이 밝아 보인다. 아방가르드 재즈, 썬더캣과 테라스 마틴, 숨 막히는 형식미, 사이키델릭 펑크, 고풍스러운 질감, 골든에라의 향수, 불규칙한 드럼과 리듬, 그리고 투팍의 인터뷰까지. 이 환상적인 배합을 보라. 그러나 이 중에서 굳이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현실적인 켄드릭의 랩이다. 에미넴의 Stan, 티페인의 오토 튠, 수많은 언 크레디트 보컬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나머지, 타인의 인격을 빌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변조한다. 어떤 곡을 들어야 하는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808과 베이스가 난무하고, 서너 개의 클럽 뱅어, 사랑에 관한 냉소적인 시각, 자신의 성장과정,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이 정도면 요사이 발매되는 거의 모든 힙합 앨범을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켄드릭과 <To Pimp a Butterfly>를 어떤 카테고리에 놓아두어야 할까. "팝스타가 자신의 작품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낸 것이 대체 언제였지?"라는 디 안젤로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켄드릭이 <To Pimp a Butterfly>를 통해 화답한다. 이 앨범의 역할은 존재를 위협받는 동시에 상대의 존재를 위협하는 흑인 사회를 향해 켄드릭이 던지는 작은 화두일 것이다. 내가 이전에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던가. <To Pimp a Butterfly>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레코드가 되고, 켄드릭 라마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MC가 된다. 이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02
아티스트 Frank Ocean
앨범명 <channel ORANGE>
장르 Pop
발매일 2012/07/10


불황의 시대에 유일하게 수긍할 수 있는 독과점. 저명한 조류학자 리처드 프럼은 '성공한 종種'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다른 종들보다 더 빨리 태양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기에너지를 자손으로 바꾸는 종." 프럼의 멋들어진 도식을 대중음악에 대입해보면, 태양에너지는 곧 장르 음악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대중음악의 전기에너지는 무엇일까? 프랭크 오션은 그것을 전자음악Electronic이라고 간주했다. Thinkin Bout You의 순환되는 신스와 808 드럼이 Nikes의 몽환적인 뫼비우스의 띠로 변모한다. 이 위대한 싱어송라이터의 여정은 어쿠스틱 기타와 그랜드 피아노가 아닌 전자음으로부터 출발했다. <channel ORANGE>ㅡ그리고 <Blonde>ㅡ는 이 연대가 막을 내리기 전에 이미 고전의 지위를 획득했고, 얼마나 많은 앨범들이 장르를 막론하고 <channel ORANGE>의 아류가 됐는지를 떠올려보라. 본디 예술이 자유라는 관념과 동일시된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얼터너티브를 지향하는 뮤지션들에게 오션의 행보는 거대 자본의 독과점처럼 무자비한 여파를 미친다.


  <channel ORANGE>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백'이 될 것이다. 오션이 의도적으로 남겨 놓은 여백 덕분에, 누군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안식을 되찾고, 누군가는 새로운 장르에 탐닉하고, 누군가는 약물에 취한 듯 앨범의 심연 속으로 정처 없이 빠져든다. 앨범에 대한 저마다의 리뷰와 감상, 해석과 분석, 단상과 심상을 포함해, <channel ORANGE>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이 모두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이 여백이 실은 당신(청자)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벤져스의 영웅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고흐와 고갱, 멜빌과 헤밍웨이, 마젤란과 콜럼버스, 엘비스와 잭슨,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그 색이 자신을 대변하길 소망했는가. 그렇게 수많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열망하던 탐스러운 주황빛은 영원히 프랭크 오션의 소유가 됐다.






01
아티스트 Kanye West
앨범명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장르 Hip-Hop
발매일 2010/11/22

Album of the Decade!(※ TMI: 이 글을 작성 중인 2019년 11월 기준으로,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는 빌보드와 콤플렉스를 포함 총 11개 매체의 연대 결산에서 1위를 차지했다.)칸예 웨스트가 MTV 시상식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이크를 빼앗지 않았더라면. 생방송 기부 행사 도중에 조지 부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21st Century Schizoid Man과 Avril 14th를 무단으로 샘플링하지 않았더라면. 빨간 모자를 쓰고 도널드 트럼프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칸예는 했다. 그의 인생은 터무니없는 작위의 연속이었다. 칸예는 다프트 펑크를 샘플링했고, 오토 튠을 무그가 자리한 반상 위에 올려놓았으며, 래퍼로서 노래하는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고, 하고, 또 하고.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는 번뜩이는 영감의 초상화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작위의 총합에 가깝다. 칸예의 멘토 노 아이디에서부터 우탱 클랜의 르자에 이르기까지, 니키 미나즈에서 길 스콧 헤론에 이르기까지, 스모키 로빈슨에서 본 이베어에 이르기까지, <Dark Fantasy>를 이루는 원소들을 보고 있노라면 별다른 감상과 근거를 요하지 않는 앨범의 일체감이 불가사의처럼 느껴진다.

  "<Dark Fantasy>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영향을 받았다."라는 논평은 앨범의 핵심을 드러내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이지만, 이제는 위상이 뒤바뀌어, 모든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지향점이 <Dark Fantasy>가 됐다. 이는 당신의 삶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음악적 체험이다. Devil In A New Dress를 들어보라. 이 곡은 앨범에서 칸예의 지분이 없는 유일한 곡이지만, 그가 샘플링을 주 작법으로 선택한 순간부터 꿈꿔왔을 그런 곡이기도 하다. 하물며 Runaway는 또 어떠한가. 칸예는 이 세상의 모든 래퍼와 뮤지션들이 탐낼만한 곡을 자신의 노출증을 표출하고 보코더로 목소리를 뭉개는데 소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반된 감상은 앨범의 일체적인 콘셉트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10년 전, 발매 일주일을 앞두고 유출된 1장의 앨범이 우리가 앨범 단위의 예술 작품을 사유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영원히.      



---
  

이렇게 해서 2010년대 결산이 끝이 났습니다. 

속이 다 후련하네요.   

 

100장의 앨범들을 쭉 나열하고 나니

저 역시 당대의 취향과 군중심리의 영향력 앞에서    

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다크 판타지를 처음 들었던 건    

10년 전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서 였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흥과 감정이 

마치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합니다.

  

어쩌면 다크 판타지의 순위는 

텅 빈 실험실에서 르자의 루프에 맞춰 춤추던 순간에 

정해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의 앨범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항상 70년대나 90년대의 음악이 현대의 음악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즉, 과거 예찬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10년을 고스란히 겪고 나니 알겠더군요.

왜 어른들이 옛 음악의 향수에 젖어 자신의 시대를 최고라고 일컫는지. 

모름지기 자신이 온전하게 지나쳐온 순간들이

가장 아름답게 미화되는 법이니까요.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2010년대는 정말 축복 같은 연대였습니다. 

이 10년을 빛낸 예술가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에게 

다시금 깊은 감사와 존중을 전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길! 

:P  

 

7
Comments
2020-01-18 20:20:07

또식님 리스펙!!! 추천 또 추천입니다

Updated at 2020-01-18 20:23:22

10년대는 확실히 흑인음악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항상 오션의 정규 두장은 10년대 베스트에 업치락 뒤치락 하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Blonde를 Channel Orange보다 높게보고 더 좋아합니다

2020-01-18 20:25:07

프랭크 오션 너무 좋죠 저도 두 앨범 모두 좋아합니다

2020-01-18 20:40:09

오 님 엘이 회원이시죠

2020-01-18 20:42:43

언제나 좋은 노래, 좋은 앨범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1
2020-01-18 20:43:48

1위는 예상하고 쭉쭉 내렸네요....리스펙합니다!!

2020-01-18 21:57:41

매앨범마다 음악적 진화를 이룬다고 느끼는 뮤지션이 라디오헤드와 본 이베어입니다.

2,3,4집 다 너무 좋지만 향수 때문인진 몰라도 제일 좋아하는 건 1집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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