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로 숫자세기 vs 우리말로 숫자세기
불어로 숫자세기
불어는 여러모로 참 복잡한 언어이지만, 처음 딱 배우면서도 아니 이게 뭐야 싶은걸 하나 꼽자면 숫자세기가 있습니다. 1부터 10까지는 이렇습니다.
un, deux, trois, quatre, cinq, six, sept, huit, neuf, dix
그리고 11부터 19까지는 또
onze, douze, treize, quatorze, quinze, seize, dix-sept, dix-huit, dix-neuf
이렇게 각자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6까지는 따로 이름이 있고, 17부터는 그냥 10+7, 10+8, 10+9 죠. 그리고 20은 vingt 이라고 하는데요. 21부터는 따로 이름은 없고
vingt-et-un, vingt-et-deux, ... 입니다. 20 + et + 1 식으로 쓰는거죠. 불어에서 "et"는 "and"이니 뭐 그럴듯 합니다.
30부터 60까지는 또 말이 따로 있습니다.
trente, quarante, cinquante, soisante
20의 vingt 이 2의 deux 와 별다른 상관이 없어보이는 것 과 달리, 이 친구들은 대충 영어의 thirty, fourty, fifty, sixty 처럼, 각각 3,4,5,6 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라는 느낌이 옵니다. 다만 31, 41, 51 등을 쓸 때는 21처럼 가운데에 "et"를 붙이지 않고 그냥 trente un, trente deux 등으로 씁니다.
진짜 이상해지는건 70부터인데요. 뭐 septante 같은 단어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불어에서 70은 soisante-dix 입니다. 60+10 이죠. 71은 soisante-onze, 72는 soisante-douze 등이 됩니다. 음.. 뭐 그래요 좋습니다. 조상님들이 60진법을 썼나보죠..?
그럼 80은? soisante-vingt 이 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그게 아니에요. 80은 quatre-vingt 입니다 (!?) 4 20... 갑자기 곱해요. 그래서 81은 quarte-vingt-et-un 입니다. 허허..
90은 또 그럼 어떡하냐. 70에서 그랬던 것 처럼 80 + 10 이 됩니다. 그런데 애초에 80이 4 20 이었으니까, 90은 4 20 10 해서 quatre-vingt-dix 입니다. 그래서 99를 말하려면 4*20+10+9 해서 quatre-vingt-dix-neuf 라고 해야 합니다.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데 총 99유로 99센트가 나왔다.. 그러면 점원이 아주아주 빠르게 quatre-vingt-dix-neuf euros quatre-vingt-dix-neuf s'il vous plait. 하는걸 들으실 수 있습니다.
좀 더 큰 숫자들을 보면, 100은 cent, 1,000은 mille, 1,000,000은 million 입니다. 그리고 428이나 1992 같은 100단위, 1000단위 숫자를 말할 때 보통 100단위에서 끊어서 four twenty eight, nineteen ninty two 로 말하는 영어와 다르게, (애초에 10단위 숫자를 세는 시스템이 요상해서인지) 불어에서는 quatre-cent-vinge-et-huit, mille-neuf-cent-quatre-vingt-douze 라고 100단위 1000단위를 다 말해줍니다. 숫자 하나 잘못 말하려면 하루종일 걸리는거죠. 파리에 제가 가는 버거킹이 번호표를 100단위까지 쓰는데, 990번대 주문들 몇개가 한꺼번에 나오면 직원이 정말 길게 번호를 말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1,000,000은 million 이니 이제부턴 똑같겠지..? 생각하시겠지만 그럴리가요. 불어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1,000,000,000은 billion 이 아니라 milliard 입니다. 1,000,000,000,000 이 billion 이구요. 그런데 사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더 자연스러운 시스템입니다. 10^6=1,000,000 이 million, 그러니까 "illion" 이 하나 (mono) 인거거든요. 그럼 "illion"이 두개 (bi) 인 billion 은 10^9 보다는 10^12이 어울립니다. trillion 은 "illon" 이 세개 (tri) 니까 10^18이 더 자연스럽구요. 영어가 좀 이상한거죠. 사실 영어만 이상하다기 보다, 라틴어 계열 언어에서 10^9을 부르는 방법이 각각 milliard 와 billion 계열 두 가지가 있었고, 프랑스도 지금은 milliard 를 쓰고 있지만 1961년 이전에는 billion 을 썼습니다. 영어는 반대로, 1974년 이전의 영국 영어에서는 milliard 를 쓰다가 이후에 billion 으로 바꿨구요.
우리말로 숫자세기
다른 나라 언어를 공부하는 재미 중에 하나는, 내가 익숙하지 않은 이 언어를 좀 공부하다가 이 뭔 이딴 말이 다있어!? 하고 5분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말이 얼마나 더 이상한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숫자를 세는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거죠.
우리말의 숫자 세기 시스템은 참 희한한데, 일단 숫자를 세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으로 가는 순우리말 시스템,
일 이 삼 사 오 육 ... 으로 가는 한자어 시스템.
그리고 우리는 이걸 우리 맘대로 씁니다. "연필 1자루"는 [연필 한자루] 라고 하지 [연필 일자루] 라고 하진 않죠. 그리고 "물 1리터"는 [물 일리터] 라고 하지 [물 한리터] 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는, 외래어 계열에서 한자어 숫자인 일이삼사를 쓰고 우리말 내지 한자어 단위에서는 하나둘셋넷을 씁니다. 그런데 또 이게 항상 그렇지가 않아요. "물 1컵"은 [물 일컵]이 아니라 [물 한컵] 이거든요. 컵은 분명히 외래어인데도요. 그 외에도 [한 피스 두피스], [일성 이성] 등 저 외래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가 아주 많습니다.
다른 설명으로는 애초에 자연수개로 나뉘는건 우리말단위, 연속적인걸 임의로 끊은건 한자어 단위를 쓴다는건데요. 쉽게 말하면 "쩜오"를 얘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는거죠. 그런데 우리말 단위에도 "반"이라는게 있어서, [물 일점오리터] 도 있지만 [사과 한개반] 도 있습니다. 또한 위에 말했던 [일성 이성] 에서도 별 갯수가 연속적이지 않은데 한자어 단위를 쓰구요. 사실 "반" 외에도 이 설명이 적용되지 않는 예시가 아주 많은데, 일단 시간이 그렇습니다. 시간을 말하는게 참 골때리는게, "1시 1분 1초" 는 [한시 일분 일초] 입니다. 유독 시에만 우리말단위를 써요. 시분초는 모두 한자어 단위이고 전부 시간이라 다 연속적인데도 이렇게 다르게 씁니다.
그리고 높은 숫자로 가면 이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배추 일포기] 하면 확실히 이상하고 [배추 한포기] 해야 맞는데, [배추 이십포기] 쯤 가면 좀 위화감이 덜해지더니 [배추 구십포기] 가면 또 그냥 그런가보다 싶고, 100 부터는 아예 우리말 단위를 안씁니다. 그냥 [배추 백포기] 하죠. 이건 같은 한자어 숫자를 쓰는 단위들 사이에서도 약간 느낌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데, "포기"는 그래도 [배추 아흔포기] 쪽이 좀 더 많이 쓰이고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개" 에서는 [자유투 아흔개] 보다 오히려 [자유투 구십개] 가 더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아마 엄밀하게는 [아흔개]가 맞는 표현일텐데, 평소에는 따로 의식하지 않으면 [구십개] 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우리는 저게 두가지라는것 조차도 의식을 못하고 그냥 쓸 때가 많은데, 이걸 외국인에게 설명하려고 하니까 도저히 답이 안나오더라구요. 그냥 어..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거의 절대로 혼용은 안되고 단위마다 숫자 세는법이 정해져 있다.. 규칙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ㅜㅜ 정도로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뭐.. 우리말이 어렵다는걸 아무리 인식해봤자 내가 공부하는 외국어가 쉬워지진 않지만, 그래도 모든 언어들에는 각자 이상한 부분들이 하나둘씩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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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들이 20진법을 써서 그렇게 됐는 이론이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