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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다섯 도독 이야기(2) : 여몽은 왜 그것을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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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7 12:18:28

0.들어가며 : 해당 시리즈 전제에 대한 설명

매우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고 정치학을 학문으로 배운 적은 없으나, 모든 정치·정책적 결정에는 비단 외부적으로 드러난 동기 외에 역학관계와 같은 내부적 동기 역시 병존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제가 이전에 시리즈처럼 연재했던 한 황실, 그리고 협천자(協天子)에 대한 각 군벌의 태도 및 이합집산(생각해보니 중간에 멈췄군요.)에 관한 글이 그런 취지였으며, 이번 시리즈 또한 그러합니다.

 

결국 이 시기, 오나라의 위나라에 대한 공략에 관하여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들 중 오나라가 왜 그놈의 합비에 집착했을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추측이 가미된 글이라 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전략을 입안한 전략 입안자들의 스탠스와 배경, 그리고 결정에 따른 향후 움직임을 논해보고자 합니다.

 

 

I.여몽의 성장과 배경

 

여몽은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15~16세 때부터 자신의 자형인 등당을 따라 손책군에서 종군하였고, 손씨 집안 최대의 원수인 황조를 정벌할 때에는 선봉을 맡아 적장 진취의 목을 베는 등 전선에서 활약하는 전형적인 무장이었습니다. 주유의 남군 공략 때나 손권의 친정에 해당하는 유수구 전투나 합비 전투 등 대부분의 전투에 종군하며 공을 세웠고, 익양 대치 시점에는 아예 손권의 명을 받고 뭇 장수들을 이끌어 장사, 영릉, 계양 등을 공략했습니다.

 

한편 여몽의 출신은 예주 여남군 출신입니다. 앞선 둘, 그리고 후임자인 육손이 유명한 호족 집안에 해당하였다면, 살펴보신 바와 같이 그 출신에 있어서도 호족 집단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호족에 해당한다는 기록 또한 없습니다. 일단 그 성격을 따지고 본다면 강북에서 강을 건너온 북래 명사 집단에는 해당할 수 있으나, 노숙과는 고향이 다르고 장소로 대표될 수 있는 항복론자들(적벽대전 당시)과는 성격이 아예 다른 입장이고요.

 

결국 여몽은 일반 장수부터 꾸준하게 커리어를 쌓아 한 방면의 군을 이끄는 사령관까지 올라간 군부 출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군부 수장인 대도독으로 임명될 때까지 여몽은 정치적 역할보다는 직접 전선에서 군을 이끌고 전투에 임하는 일선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이 주유나 노숙에 비해 더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적인 비교는 될 수 없겠으나, 굳이 비슷한 것을 찾아보자면 제갈량의 북벌 당시 군부의 최선참이었던 위연의 커리어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또는, 위의 군부에서 장합이 쌓은 커리어가 여몽에 해당하고 사마의와 같은 전략가가 군부로 간 것이 노숙 등에 해당한다고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여몽이 전략을 선택했을 당시에는 주유나 노숙과 같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도 이런 일선에서의 경험, 특히 남군과 유수구 등지에서 위나라의 기병을 상대하며 쌓은 경험들이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실제로 여몽이 손권에게 전략을 입안한 때 직접 언급이 됩니다. 또한, 호족 출신이 아니며 본인이 군부에서 성장했던 만큼 팽창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을 입안함에 있어 더욱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II.여몽의 대전략 : 장강방어선의 구축

 

기본적으로 여몽은 양주에서의 북진을 통한 청서 지방 병탄이라는 계획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손권과 여몽이 서주를 취할 뜻을 의논했던 당시에 여몽은 이런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멀리 황하 북쪽에 있으며, 방금 여러 원씨를 깨뜨리고 유주와 기주를 어루만지느라 강동을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서주 땅을 지키는 병사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곳 지세는 육로의 요충지이며 용맹한 기병들이 달릴 만한 곳입니다. 오늘 서주를 얻는다면, 조조는 반드시 쟁탈을 벌일 것입니다. 비록 7~8만 명으로 그곳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관우의 땅을 취하여 장강을 차지해 형세를 넓히는 것만 못합니다.

 

, 청서 지방을 병탄한다고 하더라도, 위의 핵심 전력인 기병의 빠른 기동에 수비가 매우 어렵다는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육로를 통해 내달릴 수 있는 조조에 비하여, 원군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거점인 양주에서부터 수로를 통해 지원해야 하는 만큼 신속성 측면에서는 불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후연이나 사마의 등이 보여준 기동, 이들이 특별한 것도 있지만 위군이 그만큼 빠른 기동력을 자랑한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기도 하고요.

 

한편 노숙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추천을 받은 여몽이 육구에 주둔했습니다. 전임 노숙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적인 조조의 격멸이었던 만큼 어떻게든 무너져가는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대위 공격 루트가 합비로 한정되면서, 계속해서 공격은 실패하고 있었던 반면 유비는 한중까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여몽은 관우가 강동의 땅을 삼키려는 야심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앞서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장강 유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여몽은 영토 확장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게 됩니다.

 

정로장군(손교를 의미합니다.)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은 백제에 주둔시키고, 장흠은 기동대 1만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움직이면서 적절히 대응하도록 하며,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점령하겠습니다.”

 

, 형주의 주요 거점인 남군과 양양, 백제까지 점거하여 형주 일대에 대하여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입니다. 손권의 본거지인 건업은 양주에 있으나, 그 양주 일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리고 장강 일대에서 양주를 보호할 수 있는 지역은 형주에 해당하는데, 강하의 일부 지역, 그리고 장사와 계양만으로는 현실적으로 거점을 보호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계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는 이를 교두보로 삼고, 이후 합비 뿐이 아닌 형주에서의 북진을 통해 중원을 도모하는 계획까지 이어지는 구상이었을 것입니다.

 

-계획된 형주 방어선- 

 

 

III.전략의 미완성

 

여몽은 관우 병탄을 위해 오랜 공을 들였습니다. 관우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병에 들었다는 것을 알리고, 육손과 논의를 통해 육손을 자신의 대행으로서 외부 책임자로 세웠으며 내부에 배반자를 만드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고, 결국 주적인 관우를 잡고 형주 일대를 제압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굳이 문제라면, 처음의 계획처럼 양양, 그리고 백제를 아우르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이르지는 못했다는 점일 것입니다.(물론 양양은 이후 조비가 불태워 공백지로 만든 덕분에 점거하는데 성공했으나, 다시 조비의 남정 때 빼앗깁니다.) 그러나 방어선의 미완성 보다도 더 큰 문제는 여몽이 이 작전 실행 직후, 다음 계획을 구상하거나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미완성된 방어선이었으나, 남군을 중심으로 형성된 형주의 방어선은 실제로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릉대전이 그러했고, 조비의 첫 남정당시 서황, 장합, 문빙, 조진, 그리고 하후상 등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원정군을 주연이 강릉에서 막아낸 것이 그러합니다. 어렵사리 동맹과의 외교를 단절해가면서 이러한 방어선을 완성했지만 새로운 진출로로써 활용하는 것에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물론 여몽 사후, 손권은 형주를 직접 공략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강하를 공략했을 때에는 문빙에게 강하에서 막혀버리고, 236년에 양양을 공격하도록 명하였으나 양양성 공략은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합비 공략에 비해서 그 횟수나 규모 면에서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이후 육손 등 또한 이것에 대해 제안한 바는 보이지 않고요.

 

결국, 전략이 미완성으로 끝나고 흐지부지됨으로서 이러한 여몽의 계획에 대해 많은 사학자들과 비판적인 팬들은 근시안적인 계획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라는 거대한 세력만을 좋게 한 행동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제갈각은 합비 공략 전략을 입안하던 당시 세력 구도에 대하여 옛날 진나라는 단지 관서 지역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도 오히려 여섯 나라를 병탄하였는데, 지금 위나라를 옛 진나라에 비교해본다면 땅은 몇 배나 되고, 오와 촉한을 가지고는 옛날 6국의 반도 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오서에서 주유와 노숙이 독자적으로 결단하여 고명한 생각을 건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음을 나타낸 것이며, 확실히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주유나 노숙이 세웠던 계획이 북벌이라는 최종 목표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면, 여몽의 계획은 세력 확대라는 일단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수는 여몽에 대하여도 용감하고 지모가 있으며 군사의 계책을 결단할 줄 알았다.”고 칭찬하며 특히 관우를 제압한 것은 훌륭했다.” 평하며 셋을 하나의 열전으로 묶었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여몽의 선택은 일선 지휘관이자 무관 출신이라는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계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세력 구도를 깨트릴 수 있는 판세를 만들어 낼 만한 판짜기였느냐에 대해서는 저 역시도 의문을 갖게 됩니다. 확인하고 싶더라도, 이 방어선을 바탕으로 한 진출이라는 세력 확대 정책에 대하여 여몽 이후의 도독들이 소극적이었으므로 확인조차 불가능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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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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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7 12:34:15

사실 형주 점령 이후 여몽이 사망한 것도 컸지만, 형주 공방전 전후로 오에서는 여몽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손교, 감녕, 장흠이라는 사령관급만 셋이 연달아 함께 죽은 것도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여몽, 장흠이라는 도독감에 이어 훌륭한 지휘관이던 감녕과 손교마저 한번에 잃어버리는 바람에

오에서는 육손이 군권을 잡기 전까지 이릉대전에서 유비의 파상공세에 휘둘리게 되죠.

WR
2019-11-17 15:52:44

말씀대로 총사령관, 그리고 작전 구상에서 언급된 일선 지휘관들이 한꺼번에 전력에서 이탈한 사실도 있습니다. 다만, 주제가 대전략의 구상과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것이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개나 영향 면에서 다른 부분이라 생각하여 다루지 않았습니다.

2019-11-17 15:58:06

여몽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연의의 손권 시기 오나라가 승리한 전쟁들을 보면 손권때 오나라의 최고 성과를 올린 인물이라고 봅니다

2019-11-19 12:02:57

여몽하면 괄목상대 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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