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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와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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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13 09:48:49

안녕하세요 히어로즈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전국시대 관련한 아주 간단한 글로 찾아뵈었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0.들어가며

 

일본 내 오다 노부나가의 인기는 항상 상상을 초월합니다. 항상 일본인이 좋아하는 인물 중 삿쵸 동맹을 이끌어 낸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신센구미의 귀신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1~3위를 다투고 있고, 각종 창작물이 난무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창작물 내에서 노부나가는 대부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개혁가로 그려지기 마련이고요. 반면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의 경우에는 그런 노부나가가 만들어낸 흐름, 그리고 노부나가의 성향에 배치되는 보수적인 인물로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노부나가가 전무후무한 개혁가였을까요? 최근의 연구 흐름을 이와 배치되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지적들 중에서 이 매니아 내에서 가장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두 영역에 대해 매우 간단히 정리해보려 합니다.

 

 

I.조총과 노부나가

 

영화 카게무샤가 비치는 비장함은 정말 굉장합니다. 그림자 무사로 발탁된 도둑이 점점 위대한 영주였던 신겐본인에게 빙의되어 가는 과정,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패배와 명장들의 가문을 위한 분사, 그리고 마지막 시점 본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처절히 총에 맞는 묘사는 이 영화가 괜히 명작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 영화는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3단 철포라는 속설을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영화 내에서 노부나가는 높은 목책을 세워 무적으로 알려진 다케다 기마대의 진군을 막고, 조총병을 3열로 세워서 번갈아 사격하여 적을 격멸시킨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 ‘3단 철포작전의 경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사실상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기록 이외에 오다군이 그 당시 활용한 ‘3천 명이나 되는 철포부대를 운용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만약 3단 사격 전술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방식의 경우 조선에서만 해도 승자총통을 운영할 때 이미 사용하고 있던 전술이라는 점들을 들어 특별할 것이 없다는 주장 또한 그 근거로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조총의 위력에 대해서 또한 자국의 전력 강화에 관심이 많던 센고쿠 다이묘들은 각각 조총의 구입과 조총병의 편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당장 보수의 상징으로 분류되는 다케다 신겐 또한 조총을 구입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며, 관동 최강자인 호조 가문과 끝없이 항쟁하던 사타케 요시노부의 경우*에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어쩌면 노부나가보다도 먼저 다수의 조총부대를 주력으로 활용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사타케 요시노부에 관한 글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158841 

 

물론 이 점이 노부나가가 조총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는 결론은 절대 아닙니다. 사카이를 독점하여 조총, 그리고 총을 쏘려면 필요한 화약 등을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만 하더라도 그가 조총을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오로지 능력주의 인사인가

 

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타키가와 카즈마스, 아케치 미쓰히데,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렇게 5명은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총대장으로서 일군을 이끌며 각 지역에서 전역을 직접 주도했거나, 임명된 인물들로서 오다 군의 5대장으로 부릅니다. 특히 이 중 타키가와 가즈마스의 경우에는 닌자 출신이라는 속설이 있다는 점, 아케치 미츠히데의 경우에는 쇼군의 직신,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한 농민 출신이었음에도 대장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을 들어 틀에 노부나가의 인사 방식이 틀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하여 최근에는 많은 지적들이 나오는 중입니다. 특히 지적되는 점은 과연 정말로 능력주의에 입각하여 기존의 틀을 깬 인사를 보였는가?’라는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신진 학자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주역 역시 60% 이상의 대부분이 후다이 가신단으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다이(譜代)’의 사전적 의미는 대대로 그 주인 집을 섬기어 옴; , 그 신하(네이버 일본 사전)’를 의미합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의 원인 중의 하나로 천출인 히데요시에게는 후다이 가신단이 없었고, 결국 내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있을만큼 후다이 가신단의 존재 유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실제로 노부나가 밑의 필두 가로로 여겨지는 시바타 카츠이에, 그리고 추방당하기는 하나 하야시 히데사다, 그리고 사쿠마 노부모리 등은 모두 오다 가문의 후다이 가신입니다. 이들은 각각 호쿠리쿠 지역의 총대장(시바타 카츠이에), 오다 가문에 있어서 중요한 외교의 담당자 및 후계자 노부타다의 부장(하야시 히데사다), 셋쓰 지역 노부나가의 최대의 적이었던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의 총대장을 역임하는 등(사쿠마 노부모리) 이들은 가문 내에서 각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사실상 가신단의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하야시 히데사다, 그리고 사쿠마 노부모리는 각각 이미 노부나가에게 찍혀있었던 것을 지적받아 추방당하는데*, 이런일련의 추방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낀 점이 미츠히데의 반란의 원인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동생을 지지했던 점, 후자의 경우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전선을 무단 이탈했고 게으르다는 점 등이 찍혀버렸습니다.

 

결국  노부나가의 인재 운영 방식은 한 거대 기업에서 새로운 지점을 열면 본사에서 직접 지점에 지점장을 보내는 것처럼 파견하여(후다이 가신) 협력업체를 활용한다던지(지방 호족) 또는 이미 그 지점이 있는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회사의 사원을 영입하거나(도자마), 그리고 본사 파견사원(요리키)를 보내는 운영방식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요리키 또한 많은 수가 후다이 가신에 해당하고요. 예컨대 시바타 카츠이에게 배속된 삿사 나리마사나 마에다 토시이에,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배속된 이케다 츠네오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배속된 아사노 나가마사 등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운영 방식은 그래도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 방면의 사령관에게 너무 큰 권한을 쥐어준 나머지 노부나가 사후 가문의 분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만(이는 후계자인 노부타다 역시 함께 사망한 것도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직영이 가능했다는 점은 대척점의 신겐, 그리고 다케다 가문과 매우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경우, 신겐의 아버지인 노부토라 때 중앙집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호족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아들 신겐에 의해 추방당했습니다. 신겐은 각 호족출신들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고 가신단을 포섭하여 나갔으나 결국 중앙집권화는 하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아들인 다케다 카츠요리 때 다시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새로운 거성을 만들고, 인질을 두고자 하였으나 다시금 큰 반발이 이어졌고, 키소 요시마사 등 일문에 속하는 필두마저 오히려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여 오다 노부타다에게 항복하는 등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말았던 바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글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153606

 

 

III.마치며

 

물론 이러한 점들은 개혁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들에게 의레 따라오는 지적의 일환일 수도 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라는 말이 아예 검색어에 있을 정도로 개혁 군주로 여겨지는 공민왕의 행보에 대하여도 이것을 반원(反元) 정치라고는 하더라도 개혁 정치라는 행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지적 또한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러한 부분들이 의문으로서 제기되더라도 노부나가의 성과는 퇴색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내부적 한계가 있음에도 순간의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점이나, 강한 적은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을 때만큼 여력이 생길 때까지 승부를 피하고 철저히 대응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관계를 강화하는 등 차분히 기다릴 줄 알았다는 점 등은 그의 가장 돋보이는 재능이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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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13 09:51:17

요새 말 많은 원피스의 코즈키 오뎅이 오다 노부나가, 오로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고 들었네요.

WR
2019-11-13 11:18:57

어렸을 적 노부나가가 미쳐 날뛰었던 걸로 유명하긴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수는 있겠습니다.

2019-11-13 10:54:01

잘봤습니다~

WR
2019-11-13 11:19:18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11-13 11:03:23

얼마전 군사 칸베에 드라마를 보았는데, 노부나가는 기본적으로 아라키 무라시게나 아케치 미쓰히데와 같은 주요 무장들이 모반을 하였습니다.
이는 삼국지로 치면 조조 밑에 장료나 장합이 반란을 일으키는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를 보면서 노부나가에 대해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하다못해 히데요시도 이후 조선 출병으로 영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가신들은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충성했죠. 이후 일부 가신들이 도쿠가와 진형에 가담한것도 어디까지나 미쓰나리에 대한 싸움이었지 가신들은 절대로 도요토미가를 등진다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 암튼 여러모로 노부나가는 부하를 매우 거칠게 다룬것 같습니다.

WR
2019-11-13 11:29:15

1.우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노부나가가 '부하를 거칠게 다루었다'는 측면에 대하여는 본문에서도 언급한 하야시 히데사다, 사쿠마 노부모리의 추방이나 언급되진 않았으나 안도 모리나리의 추방,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에 대한 전봉 가능성의 언급 등으로 충분히 생각해볼법한 일입니다. 실제 벳쇼의 반란 등 편입한 지역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고생한 부분도 있으니까요.

2.히데요시의 생전 또는 사후에 도요토미를 등진다고 생각안했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아케치 미츠히데, 오다 노부타카, 시바타 카츠이에 등 주요 정적들을 모두 쳐냈고, 관백에 오르고 난 후 '총무사령'을 내려 아예 다이묘 간의 사적 전쟁을 금지한 바 있습니다. 이미 제압했던 삿사 나리마사가 계속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고, 제압한 지역에서 검지나 전봉 조치를 함에 있어 전 영주의 수하들의 반란도 그치질 않았습니다. 또한 총무사령에도 이를 무시하고 시마즈 요시히로, 호죠 우지마사 등이 전쟁을 일으켰고 이들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제압한 후에도 북부에선 쿠노헤 마사자네가 난을 일으킨 일도 있습니다.

가신들을 아껴서라기엔 애초에 히데요시의 경우에는 가신단이라는 것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있는 가신단 조차 '히데츠구 사건'을 통해 잔뜩 죽어나갔으니까요. 다만 엄청나게 늘려놓은 인척관계와 양자관계를 통한 다이묘들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을 통해 확장된 외교적 영향력, 즉 히데요시 본인 가문의 힘에 더해 그를 지지하는 5대로 가문의 전력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2019-11-13 11:40:22

네... 사실 전 일본 전국시대는 잘 모릅니다.

 

일드로 배운게 전부인데, 여기서 나온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만 놓고 가신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제 일본 지식이 짧습니다). 적어도 드라마상으로는 이 둘은 끝까지 도요토미가를 위해 싸우려고 하더군요. 세키가하라 때도 미쓰나리가 히데요리를 등에 업고 홀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로 보이고, 당시만 해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대놓고 찬탈을 하려기 보다는 이에야스 본인도 히데요시의 신하를 자청할 때라... 어찌보면 가토나 후쿠시마,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아직 젊어서 순진하게 이에야스에게 넘어간 것 같기도 합니다. 나무위키를 찾아봐도 가토랑 후쿠시마 등은 훗날 결국 도쿠가와 막부에게 견제를 당하더라고요...

WR
2019-11-13 12:57:44

그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에 대한 저의 작은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저 역시 많이 모르고 당장 다른 글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당장 onemok님 글을 읽으며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말씀대로 그 둘은 도요토미가의 충신으로 그려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충성심에 대한 기록도 많고, 결국 전봉되는 결과까지 발생하거든요. 젊어서 순진하게 넘어갔다기엔 나가마사의 경우,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보다 훨씬 머리가 팽팽도는 인물인지라 계산 하에 그랬을 확률이 높을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 서군의다이묘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던 점을 고려하면 말이죠. 일단 본인의 신분 자체가 사위기도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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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13:07:33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보다는 가신들을 조금 유하게 다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결말을 보면 별반 다를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오히려 오다가문 보다 더 비참했다고 생각해요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의 권력 기반이던 인물들 중 큼지막한 인물들이 
꽤나 많이 도쿠가와를 지지하게 됩니다.
가토와 후쿠시마만 가지고 히데요시가 가신들을 보다 잘다뤘다고 평하긴 어려운게
언급하신 가토나 후쿠시마는 모두 히데요시의 핏줄입니다.
히데요시의 조카에 해당하는 인물들이고 
오와리 출신 무장파 다이묘의 대표격인 인물들이였죠
이들에게 있어서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에게 있어 충성심이란건 사실 일종의 로망같은 단어에요
사실 자세히 알고보면 이들도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움직입니다.
히데요시는 천민 출신이라 자기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친족 위주의 경영을 해왔고 
(동생인 히데나가와 가토, 후쿠시마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노부나가에 의해 오미의 다이묘로 성장하자 이 지역 인사들을 크게 중용했습니다.
(미츠나리나 오다니 요시츠구 같은 인물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히데요시는 가토나 후쿠시마를 키워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뭐, 이들이 일본사에서 제법 뛰어난 무장이란 측면도 있지만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키워논 결과물중의 하나인 시즈카타케 칠본창은
가토와 후쿠시마를 비롯해 히데요시 자신의 시종 출신들로 이뤄진 집단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이 시즈카타케 칠본창중에 
서군에 가담하기 위해 전쟁에 나선 인물은 카스야 타케노리 한사람 뿐이였습니다.
(가토와 후쿠시마는 말씀하신것처럼 미츠나리가 싫어서 동군에 가담하고
카타키리 카츠모토는 히데요리의 보좌역으로 오사카 성에 머물렀습니다.) 

히데요시는 히어로즈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히데츠구 사건 이후 
인망이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습니다.
이때문에 수많은 다이묘들이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를 지지했어요
서군에 가담한 경우들도 보면 지형적으로 서쪽에 있어서 어쩔수 없이
서군에 가담한 경우거나 미츠나리와의 친분 때문이지
도요토미를 지킨다는건 그냥 허울뿐인 명분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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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11:49:10

읽다보니 매니아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순간 누가 썼는지 놀랐습니다.

가신단 이야기는 吉川弘文館 人物叢書 오다 노부나가 편에서 인용해서 이야기했었고,

혁신성 부정은 가네코 히라쿠 선생의 것을,

외교정책 변화는 골자는 다니구치 가쓰히로 선생에 다른 연구자의 논문내용을 섞어서 말했었는데,

이것저것 나와서 조금 놀랐습니다.

 

TV에서 자주 등장해서 센고쿠 시대 마니아라면 잘 알 법한 오와다 데쓰오 교수는 노부나가의 기존 면모를 상당부분 탈피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옹호하기도 하는데, 저는 가네코 히라쿠 선생 쪽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그 정도의 견해 차이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노부나가의 환상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중앙집권을 통한 능력(세력확장)이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센고쿠 시대 마니아들이 노부나가를 물고 빠는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제 주위에도 노부나가 식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점으로 보면, 노부나가는 실패자에 대해 매우 가혹했습니다.

인물총서 시리즈의 노부나가 편 저자였던 이케가미 히로코 선생님은 가신단의 협의체가 없는 상황에서 노부나가의 명령에 복종 아니면 죽음 밖에 없는 시스템은 언젠가는 그 한계가 있다고 보셨습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대 서국전략에서도 모리와 우키타, 미요시와 조소카베를 저울질하면서 어떨 때는 하시바(히데요시)를, 어떤 때는 아케치를 밀면서 전략을 조율하다가도 결국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에 부합하지 않으니 가차없이 잘라버렸기 때문에 많은 세력들이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부 서적에서는 히데요시의 아내였던 네네에게 보낸 편지나, 가신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인간성이나 자애로움(!)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정치적으로는 전혀 해당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의 세력확장에 가장 많이 기여한 것도 후다이 가신들이고, 실제로 말기까지 대부분의 주요영지는 후다이가 대체로 차지했습니다. (이케가미 선생은 아케치를 후다이로 보지 않았고, 대영지를 보유한 세력 가운데서는 상당히 독특한 경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다이들조차 노부나가의 방침에 혀를 내둘렀는데, 그 아래에 있는 부하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겁니다.

 

일부 서적에서는 유독 노부나가에 대한 저항세력의 강도가 심하게 나온 것도 이런 부분에 기인한다고도 하는데, 반반 정도라고 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실패한 ○○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노부나가 시대의 단점을 최대로 보완했던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도요토미의 최대의 문제점은 후다이라고 부를만한 가신이 아주 극소수였고, 그나마도 히데요시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히데나가, 마에다 도시이에)해버림으로써 아들인 히데요리와 그 후견인이 된 요도도노가 믿을 만한 후다이로 삼았던 것이 생전에 히데요시로부터 찬밥신세이다가 말년에 어느 정도 후다이처럼 취급받은 오다씨의 자손들이었습니다. 말 하지 않아도 아시다시피 이 시기의 오다씨 후손들은 그 능력이 일반적인 다이묘에도 미치지 못했었기에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요. 히데요시의 실패원인의 최대요인은 저는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2019-11-13 11:58:46

정말 히데요시는 그 노부나가 밑에서 집신 담당, 조리 담당을 하면서 그 자리까지... 정말 개처럼 주군을 물고빨지 않고서야... 우리입장에서야 임란을 일으킨 불구대천의 원수지만, 일본인들에 히데요시는 정말 출세의 아이콘이네요.

2019-11-13 12:33:03

히데요시의 최대 실패원인은 무리한 조선침공으로 본인의 부하들을 소모시켰다는 점
그리고 진정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이에야스가 왜란과 상관없이 세력을 온존했다는 점일겁니다
어차피 최대 실력자인 이에야스를 남겨두고 사망한 시점에서 이후 과정은 필연이었을 겁니다

WR
2019-11-13 13:04:18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 다른 오대로(모리 가, 마에다 가, 우키타 가, 우에스기 가)에 더하여 일문중인 세력(고바야카와 가 등)이 거대 세력으로 존재하고, 자신의 후다이들나 측근들의 세력을 충분히 키워놓았고,(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 구로다) 아예 이전 도쿠가와의 영지에는 자신의 세력들을 분산시켜두었으니(카이의 아사노, 도토미의 야마우치 카즈토요, 스루가의 나카무라 카즈우지 등등) 충분히 견제가 가능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에다 가를 제외한 나머지 오대로 가문은 서군에서 이에야스에 대항했고요. 문제는 내분이었는데, 설마 아예 자기들끼리 부딪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아사노, 야마우치, 나카무라 등 견제를 위해 파견한 다이묘들이 아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정벌에 동행하다가 함께 회군하여 동군에서 활약할 줄은 더더욱 몰랐을테고요. 실책이라면 실책이나, 예상할 수 없던 부분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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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13:31:45
크게 보면 히데요시의 다음 세력은 오우미파와 오와리파로 나뉘는데 이들의 갈등은 소득없는 왜란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고 히데요시 사후 내전으로 발발하게 됩니다
결국 오와리파에 가까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세키가하라 전투도 넘어가죠
뭐, 어떻게 되든 단기간에 급조한 히데요시의 천하는 이에야스를 남겨둔 시점에서 정해진 운명이었다는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WR
2019-11-13 14:17:18

맞습니다. 오우미파와 오와리파로 나뉘는 것은 제 이전 글에서도 이미 언급되던 이야기들에 해당합니다. 다만 제 개인적으로 어쨌든 자기 밑에서 티격태격하는 놈들일지라도 자신이 키운 가신들인데...라고 생각하면서 말년에는 방심했을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최소한 그들이 아니더라도 견제책들을 자신이 세워뒀을거라고 여겼을거란거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까지 치열하게 붙었던 둘인데, 점점 히데요시도 무뎌진 것이겠죠. 일단 이에야스라는 너무도 커다란 2인자의 존재 자체가 애초에 위험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를 합니다. 히데요시 직할령보다 석고 단위로 비슷하거나 더 클 정도라는 점에서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죠.

WR
Updated at 2019-11-13 12:54:23

저도 데릭 로즈님의 댓글을 정독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쩌다보니 이미 댓글로 언급하셨던 부분들과 겹치는 부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연구가 있던 영역이고 또, 최근 토크멘터리 전쟁사 등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주변에서 전국시대나 임진왜란 등에 대한 정보를 쉽고 재밌게 얻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현재의 견해와는 다른 견해들이 많이 제시되면서 토론 역시 활발히 이루어지는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전국시대 이야기 외에 자주 쓰는 삼국지에 관련한 쟁점들, 예컨대 '서주대학살 전략설' 같은 경우도 그래서 더 비슷하게 회자되는 것 같고요. 그러다보니 이와 관련한 부분들도 종종 언급되기에 한 번 제가 알고 있던 견해들을 정리하던 도중이었습니다. 오히려 사실 그 때 읽었던 데릭 로즈님의 그 내용에 비하여는 제 글의 내용이 매우 빈약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당장 말씀하신 주변의 언급들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경영학 관련 책 중에서는 "오다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이라던가 "CEO 오다 노부나가의 경영 10법칙"과 같은 책들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오다 노부나가=혁신성=개혁적=진보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경영학쪽에서 더욱더 혁신성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혁신적인 인재운용을 한다하더라도 이미 그 한계가 두드러진 상황에서 무조건 다르다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한 번 끄적여 보았습니다.

 

당장 저 같은 경우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혁신'이라는 이미지가 있고 '제육천마왕'의 이미지가 있다보니 공부하기 전까지 아예 외교도 막장으로 할 줄 알았거든요. 정작 미노 공략 후 후방 안정을 위해 다케다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고, 카츠요리의 아내가 죽자마자 다시 적남과의 혼약을 맺거나, 우에스기와의 직접 충돌 전까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던 것을 보면 오히려 거의 마키아벨리스트에 가깝게 여겨지는 신겐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 히데요시에 대하여는, 츠루마츠 죽음 전후로 평가를 달리해야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히데츠구 사건 전후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견해가 기본적인 견해이지만, 아예 행태자체가 달라진 듯한 모습이거든요. 말씀하신대로 후다이 가신단의 부족을 어떻게든 메우고자 했겠으나 그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후다이 가신단이 중심이었던 도쿠가와 가문의 경우, 이후 후다이 다이묘들은 생각보다 도자마 다이묘들에 비해서는 덜 대우해줬음에도(영향력과 별개로 석고차원에서요. 이는 정치적 분배에서 기인하겠죠.) 반발이 억제되었던 것은 결국 후다이 가신단과의 뼈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도 진짜 배우고 갑니다.

1
Updated at 2019-11-13 13:29:45

이 말이 사실인진 모르겠는데

히데요시는 주군이던 노부나가를 가르켜 유능제강을 모르던 인물이라고 평했다고도 하죠

저도 도요토미 최대의 실패원인은 후다이 가신과 같은 지지기반 미약

그리고 후계자가 너무나 늦게 탄생한 것이라고 봅니다.

(히데요리 이전에도 아들이 있었다곤 하지만 다들 요절 크리를...)

 

그리고 위에 애니프사님도 적어주셨는데

이에야스가 남아있다는것 자체가 정말 필연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봐요;;

간토 6개국을 그대로 영유하고 옛 영지이던 토카이도 일대의 영향력도 건재했으니;;

이에야스의 석고가 250만이였는데 사실은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던 셈이죠  

2019-11-13 13:59:02

어쩌다 노부나가 글에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글이 잔뜩...

 

노부나가에 대해 진짜 제 견해 한마디만 더 적자면,

노부나가는 진짜 운빨 대박인 것 같습니다.

 

노부나가의 최대 강적이라면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키 겐신인데, 다케다 신겐이 이에야스를 격파하고 이제 아무도 신겐이 노부나가 뒷통수 치는 걸 막을게 없던 상황이었는데... 신겐 급작스레 이 타이밍에 사망... 이어 우에스키 겐신도 쳐들어오나 할 때 겐신 사망... 이어진 다케다 아들은 꼴아박. 진짜 운빨이...

 

여기에 딱히 적수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 서쪽의 모리, 동쪽의 호조(제 짧은 지식으로 알기론...)인데... 모리는 당주가 어리고 나가려고 해도 우키타 세력이 빈집 털가봐 머뭇머뭇... 호조는 뭐 수성만 하는 스타일... 진짜 노부나가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난 사람인데... 

 

근데 멸망의 원인이 내부에 있었다니...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이말이 괜히 일본서 속담처럼 관용구로 쓰이는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운빨 대박에 능력 출중해도 자기 내부를 못 다스리면 망한다는 뭐 그런 교훈이러나요?

WR
Updated at 2019-11-13 14:14:22

항상 운은 좋아야하죠. 조조 역시 원소가 병사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그 운을 기다릴 줄 아는 실력이 노부나가에게는 확실하게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겐을 좋아하는 저임에도, 당시 대치 상황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이 했던 뻘짓으로 인해 엄청나게 존망의 위기에 몰렸을까는 회의적이기는 합니다. 당장 신겐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진정한 의미의 상락인지, 아니면 미카와-미노-오와리의 일부 지역에 대한 병탄인지에 대하여도 최근에는 말이 나뉘는 상황입니다. 또한 시바타 카츠이에가 이끄는 군이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대패하긴 하였어도, 이미 당시에 오다 세력은 혼슈의 본거인 오와리-미노에 더해 긴키-호쿠리쿠까지 병탄했기 때문에 세력면에서 워낙 우월해서 사실 엄청나게 핀치에 몰릴법한 위기가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 둘과 최대한 전면전을 피할 만큼 둘이 압도적으로 전투에 능한 상황이지만요. 판을 짜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기회를 찾는 것까지 결국 전투는 몰라도 전쟁에 워낙 능했던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이점은 신겐 또한 마찬가지였거나 노회한 외교술에서는 신겐이 더 뛰어났을 수 있겠지만요. 카츠요리 같은 경우는 꼴아박이라고 표현은 되는데, 사실 이미 성과를 내던 입장이었고 당시 다케다 최대 판도를 형성한 것도 카츠요리였습니다. 카츠요리의 가장 큰 실패는 결국 우에스기 분열에서 카게토라가 아닌 카게카츠를 선택했다는 점이겠죠. 호조라는 가장 거대한 동맹을 놓친게 너무 컸습니다. 호조는 전략 자체가 관동 경영에 있었습니다. 사실 관동에서만큼은 수성만 하는게 아니라 사타케, 사토미 등과 계속 대립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고요. 물론 오다 노부나가와는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좀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 모리 같은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일 수 없던게, 우키타 나오이에가 애매했던 것도 있지만, 사실 큐슈의 오토모와도 계속 대립하는 사이였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간지-모리 연맹은 기본적으로 거리 자체가 멀긴 했고요.

 

수직적인 명령체계에서 갑작스런 세력 확대, 그리고 각 방면 사령관에게 부여된 엄청나게 큰 세력권을 고려하면 큰 반발을 맞게 될 수 있겠죠. 아직도 미츠나리가 왜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토론이 활발하고 연구가 활발할 정도로 뜬금없다는게 특징이니까요. 내부관리의 차원이라는 말씀은 정말 좋은 말씀같습니다.

2019-11-13 15:08:45

 예전에도 이런 질문을 드린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적어놓은게 없어서 질문드립니다.

 

혹 전국시대 참고하시는 책이 있으신지요 

WR
Updated at 2019-11-13 15:53:07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 책을 원하시는지요? 일본 내 유명한 교수님의 글이더라도 번역이 제대로 된 경우는 많지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위에 언급된 이케가미 히로코 선생님 등이 쓰신 크로니클 전국전사만 해도 번역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번역이 된 서적도 사실 최근의 연구 경향이 기록된 건 많지 않거나 너무 전문적이기도 하고요.

2019-11-13 16:49:26

너무 전문적이면 추천해주셔도 읽기 힘들 것 같고, 번역이 안된 문제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로서의 전국시대를 알고 싶은 정도라서요. 굳이 말하자면 군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경제/외교적인 측면에서 노부나가/이에야스 등이 일본 패권을 쥘 수 있었던 이유라면 조금 더 깊게 들어가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WR
1
Updated at 2019-11-13 17:07:01

앗 번역에 대한 말씀을 드린건, 당연한 일이지만 소설보다도 역사서 쪽이 더 번역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국내에서 일본사 분야만큼은 압도적이신 구태훈 교수님께서 쓰신 오다 노부나가 책을 추천드립니다. 이 역시 최근 경향이 반영되어 있지는 못하다는 평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나 전문성에서만큼은 이분야 탑이실 박수철 교수님이 쓰셨으니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사사지배와 천황'같은 책도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해전국무장 책이 가장 편히 읽으실 책이라 생각되고요.
그리고 사실 저보다는 아마 위에 계신 데릭로즈님께 여쭈어보는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9-11-13 17:11:06

제가 말을 이상하게 했군요.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로서의 전국시대를 알고 싶다, 수준의 관심이기 때문에 너무 전문적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번역 문제 얘기는 일어/영어 서적이라면 볼 수 있어서 상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추천해주신 책 중에 박수철 교수님의 책 지금 사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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