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와 개혁
안녕하세요 히어로즈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전국시대 관련한 아주 간단한 글로 찾아뵈었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0.들어가며
일본 내 오다 노부나가의 인기는 항상 상상을 초월합니다. 항상 일본인이 좋아하는 인물 중 삿쵸 동맹을 이끌어 낸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신센구미의 귀신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1~3위를 다투고 있고, 각종 창작물이 난무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창작물 내에서 노부나가는 대부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개혁가로 그려지기 마련이고요. 반면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의 경우에는 그런 노부나가가 만들어낸 흐름, 그리고 노부나가의 성향에 배치되는 보수적인 인물로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노부나가가 전무후무한 개혁가였을까요? 최근의 연구 흐름을 이와 배치되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지적들 중에서 이 매니아 내에서 가장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두 영역에 대해 매우 간단히 정리해보려 합니다.
I.조총과 노부나가
영화 ‘카게무샤’가 비치는 비장함은 정말 굉장합니다. 그림자 무사로 발탁된 도둑이 점점 위대한 영주였던 ‘신겐’ 본인에게 빙의되어 가는 과정,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패배와 명장들의 가문을 위한 분사, 그리고 마지막 시점 본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처절히 총에 맞는 묘사는 이 영화가 괜히 명작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 영화는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3단 철포’라는 속설을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영화 내에서 노부나가는 높은 목책을 세워 무적으로 알려진 다케다 기마대의 진군을 막고, 조총병을 3열로 세워서 번갈아 사격하여 적을 격멸시킨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 ‘3단 철포’ 작전의 경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사실상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기록 이외에 오다군이 그 당시 활용한 ‘3천 명’이나 되는 철포부대를 운용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만약 3단 사격 전술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방식의 경우 조선에서만 해도 승자총통을 운영할 때 이미 사용하고 있던 전술이라는 점들을 들어 특별할 것이 없다는 주장 또한 그 근거로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조총의 위력에 대해서 또한 자국의 전력 강화에 관심이 많던 센고쿠 다이묘들은 각각 조총의 구입과 조총병의 편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당장 보수의 상징으로 분류되는 다케다 신겐 또한 조총을 구입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며, 관동 최강자인 호조 가문과 끝없이 항쟁하던 사타케 요시노부의 경우*에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어쩌면 노부나가보다도 먼저 다수의 조총부대를 주력으로 활용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사타케 요시노부에 관한 글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158841
물론 이 점이 노부나가가 조총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는 결론은 절대 아닙니다. 사카이를 독점하여 조총, 그리고 총을 쏘려면 필요한 화약 등을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만 하더라도 그가 조총을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오로지 능력주의 인사인가
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타키가와 카즈마스, 아케치 미쓰히데,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렇게 5명은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총대장으로서 일군을 이끌며 각 지역에서 전역을 직접 주도했거나, 임명된 인물들로서 오다 군의 5대장으로 부릅니다. 특히 이 중 타키가와 가즈마스의 경우에는 닌자 출신이라는 속설이 있다는 점, 아케치 미츠히데의 경우에는 쇼군의 직신,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한 농민 출신이었음에도 대장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을 들어 틀에 노부나가의 인사 방식이 틀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하여 최근에는 많은 지적들이 나오는 중입니다. 특히 지적되는 점은 ‘과연 정말로 능력주의에 입각하여 기존의 틀을 깬 인사를 보였는가?’라는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신진 학자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주역 역시 60% 이상의 대부분이 후다이 가신단으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다이(譜代)’의 사전적 의미는 ‘대대로 그 주인 집을 섬기어 옴; 또, 그 신하(네이버 일본 사전)’를 의미합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의 원인 중의 하나로 천출인 히데요시에게는 후다이 가신단이 없었고, 결국 내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있을만큼 후다이 가신단의 존재 유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실제로 노부나가 밑의 필두 가로로 여겨지는 시바타 카츠이에, 그리고 추방당하기는 하나 하야시 히데사다, 그리고 사쿠마 노부모리 등은 모두 오다 가문의 후다이 가신입니다. 이들은 각각 호쿠리쿠 지역의 총대장(시바타 카츠이에), 오다 가문에 있어서 중요한 외교의 담당자 및 후계자 노부타다의 부장(하야시 히데사다), 셋쓰 지역 노부나가의 최대의 적이었던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의 총대장을 역임하는 등(사쿠마 노부모리) 이들은 가문 내에서 각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사실상 가신단의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하야시 히데사다, 그리고 사쿠마 노부모리는 각각 이미 노부나가에게 찍혀있었던 것을 지적받아 추방당하는데*, 이런일련의 추방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낀 점이 미츠히데의 반란의 원인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동생을 지지했던 점, 후자의 경우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전선을 무단 이탈했고 게으르다는 점 등이 찍혀버렸습니다.
결국 노부나가의 인재 운영 방식은 한 거대 기업에서 새로운 지점을 열면 본사에서 직접 지점에 지점장을 보내는 것처럼 파견하여(후다이 가신) 협력업체를 활용한다던지(지방 호족) 또는 이미 그 지점이 있는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회사의 사원을 영입하거나(도자마), 그리고 본사 파견사원(요리키)를 보내는 운영방식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요리키 또한 많은 수가 후다이 가신에 해당하고요. 예컨대 시바타 카츠이에게 배속된 삿사 나리마사나 마에다 토시이에,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배속된 이케다 츠네오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배속된 아사노 나가마사 등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운영 방식은 그래도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 방면의 사령관에게 너무 큰 권한을 쥐어준 나머지 노부나가 사후 가문의 분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만(이는 후계자인 노부타다 역시 함께 사망한 것도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직영이 가능했다는 점은 대척점의 신겐, 그리고 다케다 가문과 매우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경우, 신겐의 아버지인 노부토라 때 중앙집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호족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아들 신겐에 의해 추방당했습니다. 신겐은 각 호족출신들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고 가신단을 포섭하여 나갔으나 결국 중앙집권화는 하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아들인 다케다 카츠요리 때 다시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새로운 거성을 만들고, 인질을 두고자 하였으나 다시금 큰 반발이 이어졌고, 키소 요시마사 등 일문에 속하는 필두마저 오히려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여 오다 노부타다에게 항복하는 등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말았던 바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글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153606
III.마치며
물론 이러한 점들은 ‘개혁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들에게 의레 따라오는 지적의 일환일 수도 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라는 말이 아예 검색어에 있을 정도로 개혁 군주로 여겨지는 공민왕의 행보에 대하여도 이것을 ‘반원(反元) 정치’라고는 하더라도 개혁 정치라는 행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지적 또한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러한 부분들이 의문으로서 제기되더라도 노부나가의 성과는 퇴색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내부적 한계가 있음에도 순간의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점이나, 강한 적은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을 때만큼 여력이 생길 때까지 승부를 피하고 철저히 대응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관계를 강화하는 등 차분히 기다릴 줄 알았다는 점 등은 그의 가장 돋보이는 재능이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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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말 많은 원피스의 코즈키 오뎅이 오다 노부나가, 오로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고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