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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 이야기: 단 1년 동안 온갖 막장 짓을 한 유송(劉宋)의 유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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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03 23:02:08

로마와 중국 역사를 보면 “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들이 매우 많이 벌어졌다. 특히,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황제들이나 왕들이 경악할 짓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역사는 어디까지나 편향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없다)

 

특히, 삼국시대를 종결한 서진(西晉) 시대 이후 벌어진 일들은 지금 보더라도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좋은 의미로 놀라는 게 아니다) 서진이 멸망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중국 역사 최악의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동진(東晉)을 멸망한 유유가 건국한 유송(劉宋)은 엄청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유송 시대는 비정통인 유소를 포함해 총 아홉 차례 군주가 바뀌었다. 유송의 고조(高祖) 유유는 엄청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평민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영웅 중의 영웅으로 동진의 공제였던 사마덕문으로부터 제위를 선양 받았다. 그러나 고조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이들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번에 이야기할 유자업 역시 그중 한 명이다.

 

①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49년 2월 25일 효무제 유준과 왕헌원의 장남으로 태어난 유자업은 4살 때 유소의 난으로 옥사할 뻔했지만, 난이 평정된 이후 구출됐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해 똑똑했고 문장도 곧잘 지었던 유자업이었지만, 눈매가 날카롭고 입이 뛰어나왔으며, 목이 긴 외모를 가졌고 성질이 급했다.

 

464년에 만 15살의 나이로 효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유자업은 초기부터 남다른 기질을 보여줬다. 무릇 자식이란, 부모의 죽음에 슬퍼해야 한다. 설령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황제라고 해도 남들의 이목을 봐서라도 선제의 무덤 앞에 엎드려 곡을 해야 마땅한데 유자업은 오히려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이부상서 채흥종이 유자업에게 옥새를 바치자 황제는 거만한 태도로 옥새를 받아들었다. 이에 채흥종은 “오늘 황제의 모습을 보니 나라의 화가 머지않았다”라고 근심했다.

 

제위에 오른 유자업 화공들을 불러 선제들의 초상을 그리라 명령했다. 초상화 작업이 다 끝났다는 소식에 종묘로 가서 선제들의 초상화를 살펴본 유자업은 고조 유유의 초상화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는 그래도 영웅이라 칠 수 있지”라고 평가했다. 이어 문제(文帝) 유의륭의 초상화를 보고는 “그는 그럭저럭 생겼는데 애석하게도 말년에 가서 아들 손에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황인 효문제의 초상화를 보더니 “이놈은 술주정뱅이 코를 가졌는데 초상화에는 왜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으냐?”라며 즉시 화공을 불러 효문제의 초상화에 술주정뱅이 코를 그려 넣으라 명령했다. 유자업은 완성된 그림을 보고 나서야 흡족해했고 곧 환궁했다.

 

하지만 유자업의 만행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유자업은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던 은 숙의(참고로 효문제의 사촌 누이로 원래 유(劉)씨였으나, 은(殷)씨로 바꾸었다)와 그의 아들인 유자난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생전에 효문제는 유자난을 신안왕에 봉했을 정도로 총애했다. 반면, 유자업은 달랐다. 효문제가 서쪽으로 순행을 떠났을 때 유자업은 부황의 안부를 붇는 편지를 보냈으나, 효문제는 글자가 조잡하다며 타박했다. 이에 유자업은 사죄의 글을 올렸으나, 효문제는 글씨도 잘 못 쓰고 평소에 글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골치만 썩이니 어떻게 하냐고 꾸짖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자업을 폐하고 유자난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했지만, 대신들의 만류에 포기했다.

 

그런 효문제가 세상을 떠났으니, 유자업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유자업은 7살밖에 되지 않았던 유자난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은 숙의의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유자업의 분은 식지 않았다. 결국, 효문제의 무덤인 경녕릉도 파헤치려고 했다. 이에 태사(太史)가 선제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황제에게 불길하다고 막아서는 바람에 끝내 무덤을 파헤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유자업은 사람을 시켜 경녕릉에 분뇨를 뿌리고 심지어는 직접 욕을 퍼부었다.

 

②내가 어떻게 저런 비린내 나는 짐승을 낳았나

 

그렇다고 유자업이 자신의 생모인 황태후 왕헌원에게 효도했던 것도 아니었다. 유자업이 즉위한 지 몇 달 뒤에 황태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황제를 불렀다. 그러나 유자업은 “환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아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한다는데 짐이 어찌 가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이를 들은 황태후는 “칼을 가져와 내 배를 갈라보라. 내가 어떻게 저런 비린내 나는 짐승을 낳았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황태후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얼마 뒤 사망했다.

 

이에 유자업은 어머니가 화병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어느 날 꿈에서 황태후가 나타나 “너는 어질지도 못하고 불효하니 황제의 그릇이 아니다. 선황께서는 난폭 무도해 하늘과 백성의 원망을 샀고 황자들 중에는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구나. 앞으로 황제는 문제의 아들더러 맡게 하라”라 경고했다.

 

이에 불길함을 느낀 유자업은 숙부들을 모조리 궁에 가두고 끔찍한 고통과 치욕을 안겨줬다. 심지어 별명을 하나씩 지워줬는데, 상동왕 유욱이 몸이 비대하고 건장해서 그를 ‘돼지 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주 놀렸다. 유자업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물과 진흙을 채워 돼지우리처럼 만든 뒤 유욱의 옷을 벗겨 그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밥과 반찬을 담은 사료통을 던져주며 유욱에게 기어가서 돼지처럼 먹으라 하고 자신은 큰 소리로 웃었다. 어떤 때는 시종들에게 유욱의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유욱의 몸을 장대에 매달아 부엌으로 매고 가는 그날이 돼지 잡는 날이라고 말했다.

 

유욱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휴인은 “돼지야, 죽으면 안 돼”라고 말했다. 이에 유자업이 그 연유를 묻자 유휴인은 “이 돼지를 지금 죽이기에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폐하의 생신 때 돼지를 잡아 간과 폐를 꺼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라며 어떻게든 유욱을 살리고자 했다. 이를 몰랐던 유자업은 유욱의 목숨을 살려줬다. 그 이후 유자업은 여러 차례 유욱의 목숨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유휴인이 재치를 발휘하는 바람에 죽이기를 포기했다.

 

또한, 유자업은 궁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대법흥과 심경지를 독살했다. 그리고 삼국 시대 때 조조가 만들었던 도굴 전문 관직인 ‘발구중랑장’과 ‘모금교위’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③근친상간(近親相姦)을 저지르다

 

유자업에게는 아내 하씨가 있었으나, 하씨가 461년에 죽으면서 황후 없이 즉위했다. 즉, 즉위 당시 본처가 없었다.

 

유자업에게는 누이인 산양공주가 있었다. 부마도위 하집에게 시집을 간 산양공주였지만, 그녀는 남편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친동생인 유자업에게 눈길을 보냈다. 사실 유자업은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산양공주를 탐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밤을 보냈고 기쁜 나머지 그녀를 회계군장공주라는 직위까지 내렸다.

 

황제에 만족하지 못했던 산양공주는 이후 유자업에게 “비록 남녀가 서로 다르나 첩과 폐하는 모두 선제의 혈육이 아닙니까? 그런데 폐하께서는 후궁을 수없이 거느리고 계시고 저는 부마 한 명밖에 없으니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라 말했다. 이에 유자업은 누이에게 미남 서른 명을 주었다.

 

누이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유자업은 이제는 고모인 신채공주에게 눈길을 돌렸다. 신채공주는 당시 서른에 가까웠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유자업은 노비의 이름을 빌려 신채공주를 입궁시켰다.

 

신채공주가 입궁하자 노비는 보이지 않았고 유자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자업은 막무가내로 그녀를 범하고자 했다. 이에 그녀는 완강하게 저항하며 자신은 황제의 고모이고 황제는 이런 패륜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유자업은 “누이와도 이미 동침했는데 고모와 안 될 이유가 무엇이냐”라며 달려들었다. 그래도 신채공주가 계속 저항하자 끝내 칼까지 뽑아 들고 그녀를 위협했다. 결국, 신채공주는 황제에게 굴복했다.

 

유자업은 신채공주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그녀의 작은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서 부마 하매가 애를 태우며 공주를 귀가시켜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에 유자업은 궁녀의 시체를 관에 넣어 그에게 보냈고 공주가 급사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하매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는데, 궁녀의 시신은 분명 신채공주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얼굴은 상처가 가득해서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공주의 예로 장례를 마친 하매는 수소문해본 결과 황제가 자신의 아내를 겁탈했고 궁에 가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하매는 유자업을 죽이고자 했지만, 누군가 이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④황족(皇族)들을 욕보이다

 

유자업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숙부이자 건안왕이었던 유휴인을 시기했던 황제는 그를 죽이기 위해 기발한 생각을 했다. 유휴인의 어머니 진 태비는 나이가 불혹에 가까웠는데, 유자업은 우위장군 유도융에게 유휴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진 태비를 욕보이라 명했다. 그리고 시종들에게 유휴인이 놀라거나, 분노하는 기색을 보이면 당장 죽이라고 했다.

 

진 태비는 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온갖 치욕을 참아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유휴인 역시 표정 하나 변치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참아냈다. 결국, 흥이 떨어진 유자업은 유휴인의 목숨을 살려줬다.

 

유자업이 저지른 만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왕의 비빈과 공주들을 입궁하게 명령한 황제는 시종과 신하들에게 모두 옷을 벗고 그 자리에서 그녀들을 겁탈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기겁한 여인들이 도망쳤지만, 결국에는 시종들에게 붙잡혔다. 이에 남평왕 유삭의 왕비인 강씨는 황제에게 “이 여인들 모두 폐하의 친척인데 어찌 이토록 욕을 보이십니까”라고 비판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황명을 거역하면 그녀의 세 아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강씨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그녀를 채찍으로 100대를 때렸고 세 아들 모두 잡아와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이를 본 여인들은 차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고 시종들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황제는 이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즐기고 박장대소했다.

 

하매가 죽자 이제야 신채공주와 마음 편히 궁에 살 수 있게 됐다고 여긴 유자업은 그녀를 귀빈에 봉했다. 또한,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성을 사(謝)씨로 바꾼 후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귀빈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며 극구 사양했다.

 

⑤재위 1년 만에 삶을 마감하다

 

잔인한 황제들은 결국 머잖아 목숨을 잃는 법이다. 매일 주색에 빠졌던 유자업도 끝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죽림당에서 궁녀들과 시종들에게 옷을 벗고 음란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던 유자업은 이에 싫증이 났는지 갑자기 개와 말, 양, 원숭이 등 동물들을 데려오게 하더니 동물들과 성관계를 맺으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한 궁녀가 이를 거절하자 그 자리에서 그녀를 죽였다. 결국, 궁녀들은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했고 유자업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날 잠자리에 든 유자업의 꿈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방탕하고 음란한 황제는 죽어 마땅하다”며 그를 저주했다. 이를 찜찜하게 여겼던 유자업은 꿈에서 본 여자와 닮은 궁녀를 찾아내 죽였다. 그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조금 전 죽인 여인이 꿈속에 나타나서 “너 때문에 내가 억울하게 죽어 하늘에 너를 일러바쳤으니 아무 데도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황제를 저주했다.

 

이를 두렵게 여긴 유자업은 ‘후원에 귀신이 있다’는 말에 “귀신이라면 별일 아니다. 내가 어려서 ‘법사(法師)’라 불렸는데 설마 이런 잡귀신을 무서워하겠느냐”라며 산양공주와 육궁(六宮)의 비빈과 궁녀, 그리고 박수들까지 데리고 귀신을 잡겠다며 죽림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유자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제가 아닌 그를 죽이고자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언제 황제의 손에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시종들은 유욱과 결탁해 그를 죽일 음모를 세웠다.

 

유자업은 활과 화살을 들고 귀신의 흔적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박수들에게 지푸라기로 사람을 만들라 명하고 그것을 높이 매달아 화살을 쏘면 귀신을 잡은 것으로 쳤다. 유자업은 귀신을 잡았다고 신났고 죽림당에서 술자리를 마련했다.

 

바로 그때 칼을 든 무리가 황제에게 들이닥쳤다. 유자업은 너무 놀란 나머지 활을 쐈지만, 모두 빗나갔다. 이에 겁이 난 황제는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신복인 수적지가 자신을 뒤쫓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유자업은 수적지에게 호통쳤지만, 수적지는 황제를 암살했다. 유자업의 나이 17살 때 일이었다.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의 일이었다. 유자업의 시신은 오랫동안 죽림당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았다.

 

유자업이 죽은 것을 확인한 유휴인과 유휴우는 유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수적지에게 “상동왕이 태황태후의 명을 받아 미친 주인을 제거했고 상황은 평정됐다”고 선포하라고 일렀다.

 

유자업이 죽자 황제의 누이인 산양공주는 음란죄로 사형을 받았고 꽃미남 서른 명도 모두 순장당했다.

그리고 유자업의 시신은 얼마 후 황욱의 건의 하에 거두어졌다. 유자업은 ‘폐제(廢帝)’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렇다면 황제로 즉위한 유욱은 성군이었을까? 아니다. 그도 성군이 될 재목은 아니었다. 유욱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여러 차례 구해준 유휴인과 유휴우를 죽였다. 또한, 자기 자신도 유자업처럼 음란한 짓을 저질렀으며 방탕한 생활을 답습했다. 그의 아들인 유욱 역시 유자업에 뒤처지지 않은 폭군이었고 끝내 폐위당했다. 그리고 유송은 479년 남제(南齊)의 고조 소도성에게 멸망했다. 유자업이 죽은 지 불과 14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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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03 23:52:54

남북조시대는 상상 그 이상이군요
글로 봐도 끔찍한데 현실에서 실현된게 믿어지지가 않네요

2019-11-04 01:25:25

아니 17살에 어떻게 저런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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