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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군주에서 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당 덕종(唐德宗):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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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21 15:22:57

당나라 덕종(德宗)은 즉위 초만 해도 당나라 황실을 부흥하겠다는 일념 하에 나라를 운영했다. 그의 치세 아래 당나라는 잠시나마 꺼져가던 불빛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끼리의 권력 다툼과 더불어 번진 세력의 난이 일어나면서 그 불빛은 다시 꺼져갔다. 그리고 오랜 영광을 자랑했던 당나라는 다시 병들었고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수도인 장안을 버리고 피신했던 당 덕종이 다시 돌아왔지만, 황제는 이전처럼 개혁 의지에 불타오르던, 의욕이 넘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황실의 부흥을 외쳤던 황제는 오랜 전란으로 완전히 의욕을 상실했다.

의욕을 상실하다

 

첫 좌절은 사람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준다. 그러나 좌절이 계속되면 사람은 끝내 의욕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이는 덕종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만 해도 최우보와 유안, 그리고 양염과 같은 재상들의 치세 아래 무너져 가는 당나라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세 명의 재상이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세상을 떠나면서 황제가 의지할 만한 세력이라고는 환관 출신인 노기밖에 없었다. 설상가상 번진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일이 뜻대로 벌어지지 않았고 수도인 장안을 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덕종의 위엄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사면을 내리며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황제의 위엄을 세워준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양염을 비롯한 대신들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덕종은 이후 자신에게 변치 않는 충성을 보여준 환관들을 신임하기 시작했다. 특히, 환관 중에서도 두문장을 항상 곁에 두었다. 이를 우려한 소복이 당 덕종에게 환관은 고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황은을 믿고 전횡을 일삼기 일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황군에 관한 일을 맡길 수 있을지 몰라도 병권을 주거나 국정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덕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물론, 환관들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조건 환관=악의 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환관이 없으면 황실의 일은 돌아갈 수 없었다. 특히, 환관은 황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말 그대로 황실을 위해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비록 동한(東漢)은 십상시와 외척의 전횡, 그리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에 의해 몰락했지만, () 무제(武帝) 조조의 할아버지인 조등처럼 황권을 수호하던 환관들도 있었다.

 

그러나 환관들은 황제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거나, 어리다면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덕종처럼 이미 개혁 의지를 상실한 황제에게는 환관들이 세력을 형성하기 매우 좋은 환경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환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환관은 황권을 등에 업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기 때문이다. 양염을 견제하기 위해 중용됐던 환관 출신 노기도 이 중 한 명이었다.

 

어쨌든 비록 신주사마로 좌천됐지만, 덕종은 환관 출신인 노기를 신임했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대신들이 황제에게 불만을 토로했으나, 덕종은 이를 불쾌히 여겼다.

 

오랜 전란으로 당나라의 국고는 다시 텅텅 비었다. 그리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 특히, 중원 지역의 피해가 컸기에 당나라 황실은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강남 지역에 대한 의존증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황제는 장연상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장연상은 사람을 무척 가리는 편이었기에 많은 사람의 불만을 샀다. 또한, 유안과 양염이라는 재정적 관리 능력이 탁월했던 대신들에 비해 장연상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도 장연상이 재상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는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 믿을만한 인물이 얼마나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욱이 큰 문제는, 어느 재상이든지 간에 자신이 조정을 장악해야만 일을 펼칠 수 있었는데 장연상인 경우 이성과 제영이 자신을 따르지 않자 그들의 세력을 쫓아내고자 했다. 이는 덕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황제는 이들의 화해를 추진했으나, 장연상이 이를 거절했다. 특히, 이성은 두 가문의 화해를 위해 장연상에게 혼례를 주장했지만, 장연상이 이를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병권을 빼앗았다.

 

당나라의 기세는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반대로 조정에서의 권력 싸움은 계속 됐다. 덕종이 개혁에 대한 의지를 상실해가고 있었던 반면, 조정에서는 육지를 비롯한 개혁 의지에 불타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저지하고자 했던 배연령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권력 싸움에서 패한 육지는 좌천되어 경성을 떠났다.

 

이 사건은 덕종에게 상당히 뼈아픈 일이었다. 육지는 번진 세력이 당나라 황실에 대항했을 때 황제에게 조언해준 인물이자, 동시에 난을 평정했던 1등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육지가 경성을 떠났다는 사실은 황제에게 믿을 만한 신하는 사실상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믿을 만한 신하가 있었다고 해도 이미 의욕을 상실한 덕종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만큼 당나라는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당 덕종이 아닌 새로운 황제가 등장하지 않는 한 당나라의 부흥은 사실상 불가능해보였다.

 

당 순종


사라져버린 ()나라 부흥의 꿈

 

황제가 나이가 들고 힘을 잃으면, 황태자가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돌보기 마련이다. 황제는 황태자가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을 시험해보고, 훗날 황태자가 황제에 오른다면 자신이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내각을 구성하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당 덕종인 경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이 역할을 해야만 하는 황태자 이송이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려버렸다는 점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진 황태자는 덕종에게 근심을 안겨줬다.

 

물론, 이송은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왕숙문을 비롯한 자신만의 확실한 지지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송이 황제가 되면 어떻게 나라를 운영할지에 대한 생각이 확실했기에 어떻게든 이송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자 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덕종 역시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했다. 덕종은 잠시 황태자를 바꿀까 생각했으나, 그러기를 포기했다. 오히려 어떻게든 황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리고 덕종은 80522563살의 나이에 붕어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25년하고 8개월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황위를 물려받은 황태자 이송은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다. 당 순종(順宗)이라고도 불리는 이송은 즉위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광릉왕 이순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 순종의 건강이 이처럼 좋지 못했음에도 당 덕종이 어떻게든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장자를 제치고 다른 황자에게 재위를 넘겨줄 경우 황위 계승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교 사상이 강했던 중국에서는 예속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탓에 혈통 문제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손자인 광릉왕 이순이 어려서부터 명군이 될 자질을 보여준 까닭이다. 덕종은 손자인 이순이 6~7살 때 그와 놀아주다가 장난 끼가 들어 너는 누구의 아들이기에 짐의 품 안에 있는가라고 농담했다. 그런데 이순은 주저하지 않고 , ‘제삼천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자신이 할아버지인 덕종과 아버지 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손자의 이 같은 대답에 놀란 덕종은 손자가 명군의 자질이 있다고 직감했고 이후 광릉왕으로 삼았다. 손자에게 당나라의 미래를 맡긴 것이다. 신하들 역시 광릉왕이 무너져가는 당나라의 중흥을 이끌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황태자 이송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장자 계승권 대로면 황태자 이송이 죽으면 손자인 광릉왕 이순이 물려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때 대신이었던 위차공은 순종이 즉위에 어려움을 겪자 태자께서 비록 건강이 좋지 않으시지만, 엄연히 황실의 적정자이시다. 이 또한 나라 안팎에서 모두 알고 있는 것인데 어찌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혹여 그렇다고 해도 황손이신 광릉왕께서 계시지 않은가! 후사를 잇는 데 아무 문제 없거늘 어찌 생기지도 않은 일로 난리를 피운단 말인가!’라며 어떻게든 황태자 이송을 황위에 앉히고자 했다.

 

이는 서진(西晉)의 무제 사마염과 조금은 비슷한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무제는 아들 사마충이 너무 똑똑하지 못해서 그를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고자 했다. 그러나 황태손인 사마휼이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보이자 손자를 위해서라도 사마충을 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진의 무제는 자신을 도운 가충의 딸인 가남풍을 제거하지 못했다. 결국, 서진의 무제가 그토록 기대를 걸었던 사마휼운 가남풍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팔왕의 난의 빌미가 됐고 국력이 약해진 서진은 영가의 난에 의해 멸망했다.

 

 

당나라 마지막 명군으로 평가받는 헌종

 

다행히 광릉왕 이순은 사마휼과 달리 황제가 됐으니, 그가 바로 당나라 마지막 명군이라고 평가받는 헌종(憲宗)이다. 덕종의 기대를 받은 헌종은 할아버지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재위 초부터 명군의 자질을 보여줬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는 너무 쇠약해졌고 당 헌종의 개혁 정치 역시 할아버지인 당 덕종처럼 점차 힘에 부쳤다. 그리고 당나라는 헌종 사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당 헌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시리즈에 계속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당 순종을 도왔던 왕숙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헌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왕숙문에 대해 다루겠다.

 

*왕숙문에 관한 이야기는 8월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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