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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군주에서 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당 덕종(唐德宗):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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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20 15:43:47

당(唐)나라는 원(元)나라 이전에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강대국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당나라 역시 쇠퇴기를 겪었다.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당 현종(玄宗)은 명군 중의 명군이었으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나자 느슨하게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귀비 양씨(양귀비)와 그 일족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안록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으로 당나라 황실의 권위는 무너졌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젊은 군주가 등장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황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당나라 역시 마찬가지. ‘안사의 난’으로 약해진 당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당 대종(代宗)의 장남인 이괄, 즉 당 덕종(德宗)이었다.

 

당 덕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최우보와 뛰어난 재정 능력을 보여준 유안을 재상으로 삼으며 나라의 부흥을 이끌었다. 무엇보다 황제 자신이 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랐기에 두 신하는 덕종의 강한 신뢰를 받았다.

 

 

당 덕종


 

②중흥의 치, 그러나

 

당나라는 덕종 시절 최우보와 유안이라는 두 신하 덕분에 잠시나마 ‘중흥의 치’를 누리게 됐다. 그러나 1부에서 다루었듯이 당 덕종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는데, 바로 황권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은 예로부터 도가 사상을 놓고 황제와 신하들이 갈등하는 때도 있었는데, 이는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덕종의 발목을 잡았다.

 

당나라의 원재와 유안, 그리고 이필은 도가에 심취했던 이들이다. 이들 세 사람, 그중에서도 원재와 유안은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중 원재는 당 대종 시절 환관 어조의를 죽이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후 원재는 자신의 공을 믿고 자만했는데, 이런 원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좋지 만은 않았다. 이에 국구 오주는 원재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구류했는데, 대종은 유안에게 원재를 심문하라 명했다. 결국, 원재는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일로 유안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원재를 따랐던 이들에게 미움을 받게 됐는데, 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양염이다.

 

양염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조정에서 명성을 누렸던 인물이다. 양염은 최우보가 중병에 걸려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하자 덕종에게 재상 자리에 임명되어 중용 받았다. 그는 ‘양세법’이라는 새로운 세제를 반포하며 당나라의 재정 개혁에 일조했다. 양세법이란 주거지역의 자산에 따라 조세를 걷고 전납을 원칙으로 하여 여름과 가을에 걸쳐 두 차례 세금을 징수하는 법이다. 세금을 하나로 통폐합하여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 쓰였던 균전제를 폐지했다.

 

양염이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덕종의 신뢰를 받자, 그는 원재의 복수를 위해 유안에게 칼을 빼 들었다. 유안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유안의 문제점은 탁지와 염철, 조용, 청묘, 전운 등을 독식하여 나라의 이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정한 인물이 많은 권한을 쥐면 많은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이는 유안도 마찬가지. 그가 덕종으로부터 막대한 신뢰와 동시에 많은 권한을 누리자 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양염은 당 덕종이 신하들을 견제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덕종에게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요직을 유안 혼자 겸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덕종 역시 이를 옳다 여겨 유안의 힘을 분산시키고자 했으나, 이 과정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어 세금이 제대로 거둬지지 않았다. 이에 양염은 환회와 두우를 탁지와 강회 수륙 전운사로 임명하여 유안을 견제한다.

 

유안은 조금씩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안은 도덕적인 결점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양염의 꾐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유안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양염은 덕종에게 “선제(당 대종)께서 황후를 폐하고 한왕 이회의 생모인 독고비를 세우는 일에 유안이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며 덕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 덕종은 예진황후 심씨의 아들이다. 만약 이회의 생모인 독고비가 황후가 됐다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양염이 자신의 아픈 과거를 건드리자 덕종은 분노했고 유안을 충주자사로 좌천했다. 양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함께 유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유준을 형남절도사로 임명해 유안을 견제하도록 했다.

 

결국, 양염은 자기 뜻을 이루었다. 유준은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당 덕종에게 유안이 조정에 양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분개한 덕종은 유안을 죽였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유안은 많은 이권을 쥐고 있었지만, 재정을 담당하는 능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유안이 죽으면서 당나라의 재정 관리 능력은 다시 이전보다 못해졌다.

 

또한, 양염이 노골적으로 유안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던 만큼 양염을 멀리하는 신하들도 많았다. 이들은 그동안 당나라의 재정을 총괄하며 명망을 얻은 유안이 죽자 황제의 결정에 대해 반발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치청절도사이자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였다.

 

이정기를 비롯한 번진 세력이 유안의 죽임에 공개적으로 조정에 항의하자 양염은 당황했다. 유안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조정에서의 문제로 여겼을 뿐이지 이것이 군권을 쥔 번진 세력의 문제로 확산할 거로 예측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만큼 유안을 지지하는 세력은 조정 안팎으로 거대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당 덕종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사사명의 난’을 겪으며 번진 세력에 대한 미움과 그 힘에 대한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황제는 이 사건이 이들을 자극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에 조정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염이 문제였다. 양염은 민심을 추스른다는 명목으로 번진 세력에게 “과거 유안이 간사한 무리와 어울리다가 독고비를 황후로 옹립하고자 선제께 청했다. 황제께서 이 일을 마음의 한으로 여기고 있다가 유안을 죽인 것이지 나와 아무 관련 없다”며 자신의 책임을 황제의 잘못으로 몰고 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덕종의 귀에 들어갔다. 분노한 황제는 양염을 당장 죽이지는 않고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관 출신인 어사대부 노기를 재상의 자리에 앉혀 양염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사진이 없어서 '코에이' 환관 그림으로 대체했습니다.

 

노기를 재상 자리에 앉힌 것은 당 덕종에게 양염을 견제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황제 자신에게 최악의 실책이었다.

 

환관들이 환관의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주로 집안이 가난하거나, 신분이 미천하여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이다. 특히, 남자의 성기를 잘라야 했기에 예로부터 환관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물론, 환관이라고 다 나쁜 인물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환관들은 어렸을 때부터 받은 멸시감 등을 마음속 깊이 숨겨놨다가 권력을 쥔다면 그때 받았던 대우를 앙갚음해줬다. 이는 노기도 마찬가지였다.

양염은 명문가 출신에 준수한 외모와 단정한 몸가짐, 그리고 뛰어난 글솜씨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노기의 외모는 추했으며, 환관 출신이었다. 노기의 조부인 노회신이 재상이었던 탓에 그 후광을 등에 업고 관직을 지낼 수 있었으나, 추한 외모와 환관 출신이라는 결점이 그를 따라다녔다.

 

이런 노기를 경계했던 것은 보정대신인 곽자의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어 잔병치레가 잦아서 업무를 보기 힘들었던 곽자의는 노기가 병문안을 오자 사람들을 물리고 노기를 맞았다. 이후 노기가 집을 나서자 식구들에게 “너희가 노기를 봤다면 필시 웃음을 터뜨렸을 만큼 그는 추한 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 수모를 절대로 잊지 않을 만큼 속이 좁고 흉악한 사내다. 그런 자가 권력을 쥔다면 예전의 치욕을 잊지 않고 반드시 복수하려 들것이니, 미리 조심하는 게 좋다 생각했다”라며 사람을 물린 이우를 설명했다.

 

그만큼 노기라는 인물은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중했던 곽자의와 달리 양염은 노기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기와 정사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이는 노기에게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환관 출신이고 추한 외모를 가졌다고 해도 엄연히 황제가 임명한 재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나라는 재상과 신하들이 함께 식사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신하들은 식사를 통해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다졌다. 그만큼 식사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양염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양염이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자 노기를 비롯한 그의 세력이 양염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 노기는 양염이 유안을 죽인 일로 분개했던 세력들을 끌어모아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리고 양염을 재상 자리에서 쫓아낸 뒤 그를 모함하여 재상 자리에서 쫓아냈고 애주사마로 좌천했다. 이미 당 덕종은 양염을 보호할 생각이 없었기에 양염은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덕종은 2년 동안 유안에 이어 양염까지 죽인 셈이다. 여기에 최우보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2년 동안 무려 3명의 재상이 덕종의 곁을 떠났다.

 

또한, 양염과 노기, 황제의 이런 행동은 이정기를 비롯한 번진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덕종이 의심이 많고 도량이 넓지 못하며 법을 지키는 점에서 엄격하여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여겼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고 조금씩 조정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그리고 올바른 정치로 당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덕종의 다짐은 황제가 된 지 불과 2년 만에 사라져버렸다.

 

 

이정기의 난

 

③절도사들의 반란, 그리고 속죄

 

덕종은 지나치게 황권에 집착했다. 특히, 젊은 시절 안사의 난을 겪었기에 절도사들의 권한에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여기에 그가 유안과 양염에게 보여줬던 행동과 노기를 중용했던 일은 그가 개인적인 일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보여준 부분이다.

 

공교롭게도 번진 세력 역시 황제를 두려워했다. 특히, 덕종이 유안과 양염을 몰아내기 위해 취했던 행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던 탓에 이들 번진 세력은 머잖아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당나라 조정은 예로부터 북방 민족을 경계했지만, 동시에 이들을 받아들여 인구를 충원했다. 당나라 이전부터 하북과 하남 지역은 흉노나 돌궐 같은 북방 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았던 탓에 인구가 많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북방 지방은 계속 공격을 받았고 당나라 조정은 이들을 막기 위해 절도사를 뒀다. 이들 절도사는 군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력을 쥐었는데, ‘안사의 난’의 안록산과 사사명 역시 절도사였다. 이들 절도사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던 덕종은 이들의 힘을 줄이기 시작했다.

 

780년 건중 원년 때 유문희가 조정의 명을 거부했다는 죄명으로 황제로부터 문책을 받았다. 이정기를 비롯한 이들이 황제에게 유문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덕종은 “별것도 아닌 죄인 한 명 제거하지 못한다면 어찌 천하를 호령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리고 유문희의 목을 이정기가 보낸 사절에게 집어 던져 경고했다.

 

이정기를 비롯한 번진 세력은 자신들에게 머잖아 화가 닥칠 것이라 여겼다. 설상가상 유안이 양염에게 목숨을 잃고 여기에 양염까지 죽었다. 번진 세력은 분명 황제가 온갖 트집을 잡아 자신들을 붕괴시킬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황제가 절도사의 세습을 허락하지 않자 불안감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결국, 이정기는 주변 절도사들과 함께 당에 대향하는 ‘4진의 난’을 주도했다. 이정기와 번진 세력이 조정을 향해 반기를 들자 덕종은 오히려 기뻐했다. 이들 번진 세력을 해체할 수 있는 확실한 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종은 치밀함이 부족했다. 이정기를 비롯한 번진 세력이 조정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는 말은 곧 다른 번진 세력 역시 이들과 뜻을 호응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덕종이 유안과 양염을 죽임으로써 당나라 황실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상당했다. 이정기는 이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당나라 조정을 위협했다.

 

또한, 번진 세력은 막강한 군권을 쥐고 있었던 탓에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전란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당나라 조정은 이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군대가 없었다. 아니, 군대 자체를 유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병력으로나 질적으로나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조정은 처음에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시간은 당나라의 편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휘청거렸던 당나라 재정은 이정기와 번진 세력의 난으로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이에 덕종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한 거상을 상대하면 쉽게 500만 관에 달하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 여겼지만,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문무백관들은 이를 구실로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거나, 재산을 은닉하는 등 부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 설상가상 노기는 권력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자신의 정적들은 어떻게든 제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심은 당나라 조정이 아닌 이정기와 그 외 번진 세력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정기는 자신을 따르는 세력과 함께 병력을 조주에 집중했고 전면전을 벌인 끝에 대운하를 차단해 조정의 재정을 위협했다. (하지만 이정기는 781년에 낙양에서 황달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아들인 이납이 뒤를 이었다)

 

또한, 덕종은 절도사들의 세력을 빼앗기 위해 절도사들끼리 경계하도록 했다. 황제는 조정에게 충성을 맹세한 절도사들마저 의심하여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절도사 왕무준이 분개한 나머지 조정에서 보낸 칙서를 갈가리 찢어버렸고 절도사 주도와 함께 반기를 들었다. 본래 하북에서만 벌어졌던 전쟁의 불길은 이제 중원으로 번졌다.

 

악재는 계속됐다. 이제는 병사들이 불만을 품었다. 경원진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장안성에 도착하면 후한 상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병사들의 포상을 담당했던 경조윤 왕굉은 전황이 급하다 보니 격식을 차릴 여유도 없었던 탓에 포상을 주지 않고 출병을 재촉했다.

 

결국, 병사들은 분노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놀란 덕종이 병사들에게 황금과 비단 20수레를 하사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으나, 병사들은 황제의 위선적인 행동에 분노했고 궁 밖에 진을 쳐서 황제를 위협했다. 황제는 금군을 불러들여 이들을 진압하고자 했지만, 동원 가능한 금군이 없었었다.

 

 

장안중심고루유적

 

뾰족한 수가 없었던 당 덕종은 장안(長安)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당시 덕종이 이 사실을 비밀로 했던 탓에 황제가 성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신하들은 없었다. 그러다가 한림학사인 육지가 이 사실을 입수하자 함양으로 쫓아갔다.

 

이 사건은 당 덕종과 당나라 황실, 그리고 조정의 무능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동안 조정에 충성을 다했던 신하들조차 거대한 충격을 받았고 백성들 역시 안녹산의 난 이후 천자가 수도와 백성을 버렸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다.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자 결국 당 덕종은 육지의 건의 하에 최후의 카드를 빼 들었다. 육지는 황제에게 “지금 도적 떼가 천하를 뒤덮고 있고 어가 역시 천하를 떠돌고 있으니, 민심을 감화하려면 폐하께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시고 이를 마음 아파하셔야 합니다. 과거 성왕(成王)과 탕왕(湯王)께서는 스스로 벌하여 태평천하를 일구셨고 초(楚)의 소왕(昭王)은 뛰어난 언변으로 나라를 부흥시켰으니 폐하께서도 진정으로 천하를 향해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며, 피휘(避諱)의 번거로움을 없애소서. 소신이 비록 아둔하오나 폐하의 뜻을 받들어 역도의 무리가 불온한 마음을 바로잡고 어진 정치에 감회되어 폐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를 청하옵니다”라 건의했다.

 

끝내 당 덕종은 “짐은 대사면을 실시하겠소. 역도의 무리도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은 물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봉천으로 달려온 장수들에게는 충신의 이름을 내릴 것이니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오”라며 대사면을 내렸다.

 

황제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대사면을 내렸다는 사실에 천하가 진동했다. 조정에 반기를 들었던 세력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황실에 다시 충성을 맹세하는 세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됐고 덕종은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이승만 전(前) 대통령은 6.25전쟁 때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서울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후 서울이 수복됐고 국회의원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할 것을 의결했다. 이에 장택상과 신익회, 조봉암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그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는데 “내가 당 덕종이야?”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안으로 돌아온 당 덕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만 해도 혈기가 넘쳤고 당나라의 부흥을 이끌겠다는 젊은 황제가 아니었다. 오랜 전란과 계속된 실패는 황제를 지치고 또 병들게 했다. 그의 치세 아래 잠시나마 힘을 되찾아가던 당나라는 다시 병들었다.

 

이후 이야기는 3부에서 계속. 3부에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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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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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0 21:26:16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3부도 기다릴께요~

2019-07-20 23: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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