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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군주에서 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당 덕종(唐德宗):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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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19 22:40:49

당(唐)나라는 원(元)나라 이전에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강대국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당나라 역시 쇠퇴기를 겪었다.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당 현종(玄宗)은 명군 중의 명군이었으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나자 느슨하게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귀비 양씨(양귀비)와 그 일족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안록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으로 당나라 황실의 권위는 무너졌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젊은 군주가 등장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황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당나라 역시 마찬가지. ‘안사의 난’으로 약해진 당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당 대종(代宗)의 장남인 이괄, 즉 당 덕종(德宗)이었다.

 

 

당나라 덕종

 

 

①과감한 개혁 군주, 당나라 중흥을 위해 힘쓰다

 

 

당 덕종은 780년에 당 대종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덕종이 즉위했을 당시 당나라 황실의 상황은 처참했다. 황실은 ‘안사의 난’으로 수도인 장안을 떠나서 사천 지방으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당나라 황실은 위엄을 잃은 지 오래였고 나라는 계속되는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황권 역시 쇠퇴했다. 명장이자 충신인 곽자의가 없었다면 당나라 황실의 수명은 더욱 빨리 단축됐을지도 몰랐을 만큼 나라가 위험했다.

 

당 덕종 역시 이런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황제에 즉위하기 전 사사명의 난을 진압했던 그는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회흘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는데, 회흘의 가한은 덕종에게 “나와 네 아버지는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나는 너의 숙부다. 숙부를 위해 직접 춤을 추라”는 말을 하며 그를 모욕했다. 이에 반대하던 당의 신하들은 가한에게 채찍 100대를 맞고 죽어 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낙양이 수복되자, 회흘의 군대는 대약탈을 벌여 수만 명의 백성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만큼 당나라는 쇠퇴해진 상태였고, 당 황실은 이들을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다.

 

38살의 나이에 제위(帝位)에 오른 당 덕종은 이후 황실의 권위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황제는 즉위 초부터 거대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바로 예법이다.

 

황제나 왕이 죽으면 무릇 국상(國喪)을 치러야 한다. 고대 예법에 따라 신하들은 3년 동안 국상을 치러야 하는데, 이런 예법을 국가에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정에서 3년 동안 국상을 보느라 국정을 보지 않으면 나라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서한(西漢)은 한 문제(文帝) 시절부터 3년 상을 36일로 줄이기 시작했다. 당 대종 역시 “천하의 모든 관리는 단 3일 동안 상복을 입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문제는, 유교 사상이 강한 중국이나 한국 역사에는 이런 황제의 국상을 이용해서 적을 숙청하는 세력들이 존재했었다. 당나라 역시 마찬가지. 당시 상곤과 최우보는 서로 갈등하는 사이였는데, 상곤이 먼저 선수를 쳤다.

 

상곤은 “한 문제께서 상복을 36일 동안 입으라는 예법을 정하신 뒤로 본조의 현종과 숙종께서 승하하시며 상복을 입는 기간 또한, 27일로 줄어들었소. 여러 황제께서 상복을 3일만 입으라는 유지를 남기셨으나, 조정의 군신들은 27일 뒤에 상복을 벗었소. 그러니 신하 된 자라면 27일 동안 상복을 입은 채 상을 지켜야 하오”라 주장했는데, 최우보는 “선제께서 천하의 모든 관리는 3일 뒤 상복을 벗으라는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어찌 신하가 되어 황상의 뜻을 거스를 수 있으며 그 뜻을 따르는 데 관직의 높고 낮음이 상관이 있겠습니까. 황상께서 3일이라고 하셨으니 3일이 지난 뒤에야 천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상복을 벗어야 합니다”라 반박했다.

 

이에 상곤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덕종에게 달려가 글을 올려 “최우보가 함부로 예법을 바꾸려 하는 것도 모자라 국법을 가벼이 여겨 신하로서 도리를 거스르려 합니다. 부디 그를 조주자사로 좌천시켜주소서”라 했다.

 

당시 덕종은 막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선제의 죽음에 슬퍼해야 했기에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 예법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다. (그래야 이상한 말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선제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황제를 불효자라 여겼을 것이고 이는 반대파들에게 황제를 쫓아내는 빌미로 작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상곤의 상주문을 본 덕종은 “일개 신하가 어찌 나라의 예법을 함부로 어긴단 말인가. 상곤의 충정은 칭찬받아 마땅하나 국가의 대계를 놓고 생각했을 때 선조께서 정하신 전례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최우보는 하남소윤으로 좌천됐다.

 

그러나 이후 곽자의와 주차 같은 공신들이 최우보가 좌천됐다는 소식을 듣자 황제에게 반대하는 표문을 올렸다. 이를 받은 덕종은 어리둥절했다.

 

곽자의와 주차는 재상의 자리에 있었으나, 조정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상곤이 정사당에서 홀로 정무를 봤는데, 황제에게 공사(公事)를 올릴 때는 이 두 사람을 대신해 서명했다.

 

이게 문제인 이유는 당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중서와 문하, 상서 등 삼성(三省) 장관이 정사를 논한 뒤 황제에게 이를 알리는 식으로 국정이 운영됐다. 특히, 정사당 회의는 당나라 최고의 행정 기관이었던 탓에 곽자의와 주차의 서명이 적혀있다는 점은 황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상곤이 최우보를 좌천해야 한다는 표문을 올렸을 때는 두 사람에게 이를 논의하지 않고 함부로 서명했다.

 

덕종이 상곤으로부터 최우보를 좌천해야 한다는 표문을 받았을 때는 곽자의와 주차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최우보가 좌천되자 곽자의와 주차가 이에 반대하는 표문을 올렸으니, 이를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황제는 곽자의와 주차를 불러 “경들은 일찍이 최우보에게 죄가 있다고 했거늘 어찌하여 지금은 죄다 없다고 하는 것이오”라 묻자 두 사람은 자신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며, 황제에게 올라온 글은 상곤이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라 답했다.

 

이 사실에 덕종은 상곤이 황제를 기만했다며 분개했다. 본래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 신하들은 조정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일을 가장 금기하는 법인데, 상곤이 황제를 기만했으니 당연히 이를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이에 덕종은 상곤을 좌천시키고 최우보를 불러들이며 그를 재상으로 삼아 대대적인 개혁의 칼날을 빼 들었다.

 

최우보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힘쓰려면 젊은 피를 수혈해야 합니다. 천하에서 유능한 준재를 선발해야만 국정 운영이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신은 대계를 위해 더 많은 인재가 활동할 수 있는 일을 열어주고자 합니다”라며 유안을 비롯한 유능한 관리들을 선발했다.

 

대운하
 

 

유안은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을 갖춘 관리였다. 당시 당나라는 오랜 전란으로 군비 지출은 눈덩이처럼 증가했다. 남방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 연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 대종도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힘썼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변수 일대를 오랫동안 관찰한 유안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냈다. 변수는 강남에서 출하한 조선이 황화로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중계지역이었다.

 

당시 당나라는 전란이 끊이질 않았고 오랜 전란으로 나라의 재정이 황폐했던 탓에 돈이 절실했다. 그만큼 당나라 조정은 강남의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척당 양식 1천 석을 실은 배는 회사(淮泗)를 거쳐 변수에 이른 뒤, 다시 황하를 따라 위수(渭水)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경사에 도착했다. 그만큼 여정이 길었던 탓에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변수에서 황하 구간은 물길이 거세고 파도가 높았던 까닭에 위험했다.


따라서 이 구간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더 많은 물자를 싣기 위해서는 큰 배가 필요했는데, 유안은 새로운 배를 만들어 강남의 물자를 좀 더 안정적으로, 그리고 이른 시일 내에 경사에 도착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5년 동안 조운 제도와 소금 전매제를 손보며 재정을 빠르게 회복했다.

 

 

당나라 명장 곽자의

 

황권 강화를 위한 당 덕종의 칼날은 이제 공신인 곽자의에게 향했다. 당 대종 때 여러 차례 공을 세운 곽자의는 선제가 죽기 전 보정대신으로 지명됐다. 곽자의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의 관직명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곽자의의 관직명은 사도·중서령·영하중윤·영주대도독·선우·진북대도호·관내·하동부원수·삭방절도·관내지탁·염지·육성수운대사·압변부병영전급하양도관찰등사로 무려 58글자에 달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곽자의의 위상은 당연히 당 덕종에게 위협적이었다. 덕종은 내침김에 곽자의를 상보로 높여 불렀고, 태위 겸 중서령직을 덧붙여주면서 실봉을 2천 호까지 늘려 줬다. 여기에 매월 1,500명이 먹을 양식과 200필의 말의 식량을 지급했으며 그의 자식과 사위들 10여 명의 관직을 승진시켜 주는 대신 부원수를 비롯한 관직들은 모두 그만두게 하여 군권을 몰수했다. 즉, 강제로 은퇴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곽자의에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애초에 조정 일에 관심이 없었던 곽자의는 여생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손들은 명문가로 대접받게 됐다)

 

이처럼 당나라는 덕종의 치세 아래 조금씩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란으로 쇠퇴했던 당 황실은 점점 그 위엄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모든 일이 잘 될 수만은 없다. 당 덕종도 마찬가지. 젊은 황제들은 한 가지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 실수는 너무 거대한 실수이기에 나라의 국운을 결정하기도 한다. 바로 ‘열정’이다.

 

초기 당 덕종은 황실의 부흥을 위해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열정적이었다. 황제는 무너져가는 당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황권을 강화하기에 급급했는데, 이 과정에서 신하들을 견제하는 강약 조절에 실패하기 시작했다. 특히, 황실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탓에 조그마한 사건에도 한없이 민감했다.

 

사실 황제가 신하들을 견제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무릇 명군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황제들은 그 강약 조절이 매우 뛰어났다. 황권과 신권이 균형이 이루는 일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토사구팽의 대명사인 한 고제(漢古帝) 유방은 천하통일 이후 한신과 팽월, 영포 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들의 존재가 훗날 황실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여겼기에 죽였지 아무나 이유 없이 죽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상국 소하와 번쾌를 죽일 뻔했지만)

 

반대로 황제의 권위가 지나치게 강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명나라인 경우 홍무제와 영락제 시절 때 행해졌던 대거 숙청으로 인해 황권이 지나치게 강력했다. 그러나 이 강력한 황권이 오히려 명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후손이 30년 동안 파업할 줄 본인들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당 덕종은 이런 강약 조절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권력에 관련된 일이면 앞뒤 따지지 않고 곧바로 일을 처리하고 말았다. 설사 그게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였어도 그들을 믿지 못했던 황제가 바로 덕종이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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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7-19 22:45:02

잘 읽었습니다. 1편에서 열정이 가득한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후에 어떻게 실정을 하게 되는지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궁금증이 드네요.

2019-07-20 06:03:34
2019-07-20 10:00:52

안사의 난 정도 되는 똥덩어리 치우려면 어지간한 열정 아니면 안 됐겠죠. 덕종 정도면 인재운도 있었지만 능력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할애비가 너무 심각한 트라우마를 심어준 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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