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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스포츠가 거둔 역사상 최고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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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2:45:58

오늘의 글은 제가 3~4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매니아에 올렸던 우리나라 여자농구의 역사에 대한 글입니다. 여러 개의 글이 이어지기 때문에 내용이 상당히 깁니다.

 

 

1. 우리나라 스포츠가 거둔 최대의 성과 

 

해방 후 1950년대 중후반까지 우리나라 여자 농구는 학교농구, 즉 여고농구였습니다. 숙명여고, 이화여고, 경기여고, 상명여고, 진명여고, 정신여고 등이 각축전을 벌였고, 숙명, 이화, 경기의 라이벌 구도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했습니다. 1957년 4월에 한국은행 여자농구팀이 창단되어 그해 여고 졸업생 스타들을 싹쓸이했습니다. 한국은행은 창단 첫해에 숙명여고를 41-38로 물리치고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은행이 무적포스를 자랑하던 1958년에 상업은행이 농구부 창단을 선언했습니다. 상업은행의 경영을 이끌던 실세 진영득 전무는 경기상고 시절 농구선수였고, 그 이후로도 줄곧 농구광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진영득 전무는 숙명여고 센터인 박신자 선수를 스카웃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인맥을 동원했습니다. 한국은행도 박신자를 영입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농협은 박신자를 영입해 농구팀을 창단한다는 복안으로 총재의 진두지휘아래 스카웃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박신자는 상업은행을 택했고, 이에 따라 1959년부터 한국은행 대 상업은행의 운명적인 라이벌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1961년 9월에 열린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의 라이벌전에는 3,000명을 수용하는 장충체육관에 7,000명이 운집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습니다. 


1962년에는 한일은행과 제일은행이 여자농구팀을 창단했고, 실업팀인 한국전력, 동신화학, 조폐공사도 여자농구팀을 창단했습니다. 1963년에는 국민은행, 서울은행, 조흥은행이 창단되었습니다. 군사정권은 1963년에 ‘박정희 장군배 쟁탈 동남아여자농구대회’를 만들어 여자 농구 붐에 편승했습니다. 한국의 여러 은행들과 유니티카 일본레이온 일본통운 등 일본의 여러 팀에 대만이 팀들이 우승을 겨룬 그 대회 기간 동안 장충체육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관중들이 들어찼고, 거리의 TV앞에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국기는 단연 여자농구였고, 여자농구의 인기에 그나마 근접하는 운동종목은 프로레슬링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팀들 중에서 상업은행이 절대 강자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상업은행은 국내대회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장군배’에서도 일본과 대만의 실업팀을 물리치고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76cm의 센터 박신자는 독보적인 스타였고, 농구를 떠나서도 깨어있는 선각자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이화여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을 정도입니다.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0cm 가량이던 그 당시였기에 박신자는 우리 국민이 생각할 수 있는 최장신에 가까웠습니다. 


보통 4년마다 열리는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5년 만에 1964년에 페루에서 열렸는데, 참가 예정이었던 이탈리아가 출전하지 않게 되어 우연히 그 자리를 우리나라가 메우게 되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초청이어서 우리나라는 대표팀을 꾸리는 대신 상업은행팀을 내보냈습니다. 당시 상업은행은 박신자, 김명자, 김영자, 엄미자, 신항대, 나정선, 강옥순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갖춘 팀이었습니다.


고산지역인 페루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이 무작정 원정길에 나선 상업은행팀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선전하여 우리나라는 일본을 누르고 13개국 중에서 8위를 거뒀습니다. 준비된 상태에서 명실상부한 대표팀이 출전해서 실력을 발휘한다면 세계 3위 이내에도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농구인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센터 포지션의 박신자는 월드베스트5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월드베스트에 뽑힌 박신자는 페루 대통령과 악수하고 인사말을 나눴는데, 그들 중에 박신자만이 (단 며칠 간의 연습을 통해) 유창하게 스페인어를 구사해 순식간에 페루 대통령을 한국 팬으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선수권대회 이후 상업은행에 맹렬히 도전한 팀은 제일은행이었으나 해체된 조흥은행의 최고스타 김추자가 상업은행을 선택함으로써 상업은행은 박신자·김명자·김추자라는 무적트리오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대만팀의 어느 코치가 이들 트리오를 ‘삼보(三寶)’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별명은 국내에서도 널리 사용되어 이들의 공식 애칭이 되었습니다. 1965년도에 열린 1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 대회(ABC)에서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우리 대표팀은 일본을 두 번(87-85, 85-85)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고, 두 경기에서 60점을 넣은 박신자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습니다.


우리나라가 학수고대하던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이번에는 3년만인 1967년 6월에 체코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농구협회는 명실상부한 대표팀을 선발하기 위해 연초에 설발전을 치러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선수들을 주축으로 12명으로 구성된 대표팀을 선발했습니다. 이들 12명의 명단은 박신자, 김명자, 김추자, 채현애, 신항대 (이상 상업은행), 주희봉, 임순화, 이혜숙, 이영희, 김영임(이상 제일은행), 이소희(국민은행), 서경자(숙명여대)였습니다. 


당시 공산국가였던 체코는 우리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단은 일본의 체코대사관에서 어렵게 비자를 얻어 체코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12개 국가의 대표팀이 참가하는 대회였는데, 자신의 우방국인 체코에서 우리나라 대표가 참가하는 것에 자극받은 북한이 뒤늦게 체코 조직위에 특별 참가신청서를 냈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체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쿠바가 전격적으로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대표팀을 체코에 보낸 북한은 철수하지 않고 계속 우리 선수들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고, 더 잘살았기 때문에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리 선수들과 만났을 때 적극적인 설득과 공작(?)을 벌여왔고, 우리 선수들은 지시받은 대로 북한측 인사들을 피하기 바빴습니다. (1990년 이후 이 같은 상황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당시에 우리 선수단은 방안에 있을 때에도 열쇠구멍까지 막아 밖에서 들여다 볼 수 없게 했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항상 3명 이상 모여서 가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북한 선수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우리 선수단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방해하는 가운데, 한국팀은 첫 번째 경기에서 이탈리아에게 76대 56으로 완승을 거뒀습니다. 예선 두 번째 대결은 홈팀인 체코였습니다. 체코에 패해도 결선 진출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예선리그의 전적이 결선에 반영되기 때문에 그 경기는 결선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체코는 무적팀인 소련 바로 아래 티어를 구성하는 전력인데다 홈의 이점을 갖고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승부라고 여겨졌습니다. 


체코와의 대결에서 전반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34-34 동점으로 끝났습니다. 후반에 우리나라는 분전해서 종료 4분을 남기고 6점을 리드했으나 그때 박신자가 5반칙으로 퇴장당했습니다. 그 사이 체코는 경기를 뒤집어 종료 12초를 남기고 66-65로 앞선 상황에서 공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게는 절망적인 순간이었지만 경기종료 7초전에 교체멤버인 주희봉이 체코의 패스를 가로채 골대 근처의 김추자에게 패스했고 김추자는 수비를 제치며 경기종료 버저와 함께 드라이브인을 성공시켰습니다. 그 순간 심판은 본부석으로 달려가 계시원에게 골과 종료 버저 중에 어떤 것이 먼저인가를 확인했습니다. 본부석에 있던 체코 계시원이 골이 먼저라고 확인해줌에 따라 한국이 67-66으로 승리했고, 우리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모두 코트로 뛰어나와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체코 관중들은 자신의 대표팀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게 패해서 어리둥절하면서도 이후에 코리아라는 나라를 잊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프라하로 옮겨서 열린 결선리그에서 한국팀은 동독을 64-59로 꺾은데 이어 일본에게 81-60으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일본은 1964년 올림픽 개최국인데다 체코에서 열렸던 세계배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었는데, 체코를 꺾은 한국이 일본마저 이기자 체코의 매스컴은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연거푸 내보냈습니다. 한국팀의 다음 경기는 우리와 공동선두를 달리던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1950년대 후반 이후 1980년대 초까지 무려 20여년동안 국제대회에서 전승을 거두게 되는 무적의 팀이었습니다. 2미터가 넘는 장신센터 프로코펜코바를 포함해 주전 중에 190cm 이상이 세 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탄탄한 기본기와 슈팅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팀은 애당초 소련에게 이길 방법이 없었기에 83-50으로 패한 후에도 전혀 기가 죽거나 사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출전 11개국 중에서 6개 나라의 팀이 결선에 올라 마지막 한 경기를 남긴 1967년 4월 21일, 우리는 3승 1패로 2위에 오른 채 유고와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즉, 유고에 이기면 준우승이 확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고와의 경기 전날 우리팀이 김철환 단장이 문공부에서 제작한 한국 홍보자료를 다른 나라 관계자들에게 건내주다 체코 경찰에 적발되어서 24시간 내로 추방을 명령받았습니다. 김 단장은 납치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우리팀 트레이너와 조직위원의 호위를 받은 채 체코를 빠져나갔습니다. 다음날 우리 선수들은 그 소식을 듣고 많이 흔들려 전반전에 11점차로 유고에 리드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반전에 마지막 투혼을 발휘해 78-71로 승리했습니다. 체코 관중들은 우리 팀에 환호와 기립박수를 보냈고, 북한 측 선수단과 요원들은 화를 내면서 바삐 움직였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공식 폐회식이 열리기 한참 전에 준우승국을 위한 간이 폐회식을 열어줄 것을 체코에 요청했고, 그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우리만을 위한 폐회식에서 선수들의 목에 은메달이 걸리고 상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선수들은 눈물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도망치듯 체코를 탈출해 서독 국경에 도달했고, 우리를 쫓아오던 두 대의 북한 승용차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월드베스트5의 명단이 공개되었습니다. 박신자는 최다득표로 1위에 올랐고, 김추자도 베스트 5에 뽑혔습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박신자는 지금 이대로 죽으면 제일 행복할 것이라는 뜻밖의 답을 던졌습니다. 


5월 8일에 선수단이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은 환영 인파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국민환영대회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처럼 성대한 국민적 환영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박신자를 비롯한 우리 여자대표팀은 그해 8월말에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해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따낸 유일한 금메달입니다.


유니버시아드 우승 후 박신자는 잠적했습니다. 상업은행은 비상이 걸렸고, 박신자를 찾지 못해 그녀 없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온 국민이 박신자가 돌아오길 기대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팀이 경기하는 날 평상복으로 관중석에 나타났습니다. 26살의 나이, 모든 영광을 겪어본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최정상에서 은퇴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누구의 설득에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업은행은 1967년 11월 그녀를 위한 한국전력과의 은퇴경기를 마련했습니다. 평일에 열린 경기였지만 수천명의 관중이 몰려 대스타의 마지막을 지켜봤습니다.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신자는 주한미군 소속의 문관 브래드너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1980년대 초에 창단한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 초대 감독을 맡아 농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2. 세계 2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



1967년 11월 불세출의 스타 박신자가 은퇴한 이후에도 여자농구의 인기는 여전했습니다. 길고 긴 상업은행의 독주시대가 끝나고 7~9개 팀들이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어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재창단한 조흥은행은 전국시대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박장군배 대회, ABC대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박신자의 팀을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일본은 그녀가 은퇴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도 한국을 외치며 여자농구에 국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1968년 2회 ABC대회 결승에서 한국에게 60-72로 패했지만, 한국팀 고유의 슈팅폼을 벤치마킹 하며 조금 더 멀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드디어 1970년 2회 ABC대회에서 한국을 꺾고 우승함으로써 양국은 본격적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1971년은 브라질에서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64년 대회에서 월드베스트5와 득점왕에 올랐고, 지난 67년 대회에서 월드베스트5와 MVP에 올랐던 박신자 선수 없이도 세계 2위를 지킨다는 목표로 대표 선수들은 오랜 시간동안 스파르타식 훈련을 해왔습니다. 지난 67년 대표선수들 중에는 주희봉과 김영임만 대표팀에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선수들로 채워졌습니다. 박신자의 센터 자리는 강부임이 대체했고, 지난 67년 대회 체코전에서 종료 직전 극적인 가로채기를 성공했던 주희봉은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습니다. 


1971년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은 명실상부한 무적의 팀이었고, 지난대회 2위인 한국을 비롯해 지난대회에서 한국에 버저비터를 맞고 3위에 그친 체코와 홈의 이점을 활용하려는 브라질 그리고 타도 한국의 기치를 내건 일본이 각각 2위를 목표로 출정했습니다.


그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 대표팀이 최초로 참가한 점입니다. 미국 대표팀은 여자 대학생들 위주로 선발되었지만 순수 아마추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 농구팀이 있었지만 학교간의 체계적인 경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여자농구에서 NCAA 디비전1 리그와 토너먼트는 1982년에 들어서야 활성화 되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최초의 대결이 이뤄졌던 예선 첫날에 우리는 미국에게 86-50의 대승을 거뒀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회에 출전한 13팀 중 상위 8팀이 겨루는 결선리그에 손쉽게 올랐습니다. 일본과 체코를 꺾으면 세계 2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팀은 예선 두 번째 날 홈팀인 브라질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심판의 불리한 판정 속에서 우리팀은 주희봉과 조영숙 이외에 모든 선수들이 부진했고, 브라질 센터 가르시아에게 26점을 내주며 63-70으로 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황선애가 20점을 올리는 활약에 힘입어 73-63으로 승리해 여전히 아시아 최강임을 입증했습니다. 또 다른 희소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꺾은 브라질이 체코에게 9점차로 패함으로 인해 우리가 마지막 날 체코에게 8점차 이상으로 승리한다면 세계 2위를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팀은 약체로 평가받던 쿠바에게 의외의 덜미를 잡혔습니다. 전반에 우리가 크게 리드하자 이상훈 감독은 체코전을 대비하기 위해 주전 선수를 전부 쉬게 하고 벤치 선수들을 내보냈는데, 그런 사이에 쿠바가 역전에 성공했고 그 기세를 몰아 주전들이 다시 투입된 우리나라에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브라질의 교민들은 물론 승전보를 기다리던 고국의 팬들도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했습니다. 팀 내부에서도 우울함 속에 작전미스를 탓하는 자책감이 분위기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지난 대회 체코를 꺾을 때 멤버였던 주희봉과 김영임이 각각 20점과 19점을 득점하는 활약으로 대회 마지막 날에 체코에게 74-71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소련-체코-브라질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고, 일본이 5위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차기 올림픽인 1976년 몬트리올 대회부터 여자농구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는 안건이 가결되었습니다. 이제 여자농구는 올림픽 종목이 되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여섯 개의 나라에게 출전권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올림픽에 앞서 열리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여자농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의 여자농구 한일전은 우리에게 가장 뼈아픈 기억으로 남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승자가 금메달을 가져가게 되는 사실상의 결승전에서 우리팀은 이옥자, 김재순, 원영자, 조영순, 유쾌선, 강현숙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후반에 4명이 5반칙 퇴장을 당한 가운데 경기종료 6초전에 1점을 리드한 상황에서 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팀은 볼을 돌리는 대신 원영자에게 슛을 하게 했고, 리바운드를 잡은 일본의 가드 나마이는 종료와 동시에 포기하듯 하프라인에서 공을 던졌습니다. 그 공은 기적처럼 버저비터가 되었고, 일본이 71-70으로 승리하여 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최초의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1975년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는 우리에게 지난 대회에서 브라질과 쿠바에 패했던 아픔을 씻을 수 있는 기회이자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 당한 통한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반드시 3위 이내에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대회 3위까지 몬트리올 올림픽 자동 출전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여섯 나라 중에는 개최국인 캐나다가 반드시 포함되고 세계선수권 대회 1,2,3위 국가가 포함되며, 나머지 두 나라는 추후에 선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1975년 콜롬비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우리나라 대표팀에서는 세대교체가 일어났습니다. 외환은행의 21살 장신(172cm)가드 강현숙이 신인섭과 함께 대표팀의 중심이 되었고, 이들과 함께 원영자, 이옥자, 박성자가 주로 팀의 주전으로 기용되었습니다. 대표팀에 새로 선발되어 이들과 함께 뛸 선수들은 김경순, 정미라, 조경자, 조영란, 박찬숙 등이었습니다. 신장과 스피드를 모두 갖춘 박찬숙과 조영란은 각각 숭의여고 1학년과 덕성여고 3학년 학생이어서 곧바로 주전으로 가용되기는 어려웠기에 175cm의 박성자가 주전 센터로 외국의 장신 센터를 상대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옥자 선수는 야구선수 이광은의 누나로 훗날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모두 여자 프로농구 여성감독 1호를 장식하게 됩니다. 이옥자씨의 남편은 몇 년 후 여자농구대표팀 감독이 되는 정주현입니다. 정주현씨는 80년대 초 남자대표팀 감독도 지냈습니다. 여튼 1975년 국가대표를 돌이켜보면 (강현숙을 제외하면) 주전보다는 후보명단에 오른 선수들이 더욱 쟁쟁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1975년 대표팀은 강팀이라기보다는 과도기 팀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팀을 스파트타식 훈련으로 이름 날린 이경재 감독과 임영보 코치가 혹독하게 조련시켰습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3위에 드는 데 실패하고 5위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 2점 차이로 패하고 결선리그에서 일본과 맞붙었는데, 우리나라 여자 농구가 생긴 이후 그때까지 한국팀이 겪은 패배 중에서 가장 치욕스럽게, 89-62 27점 차이로 무너졌습니다. 한국팀에서 두 자리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강현숙(18점), 신인섭(12점)이 전부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와키다시로가 21득점, 미야모토가 18득점, 아시안게임 버저비터의 주인공 나마이가 16득점을 올리며 우리 수비를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61-55로 꺾은 체코에게도 70-58로 승리함으로써 전승을 거둔 소련에 이어 세계 2위에 오르며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습니다. 


남은 두 장의 몬트리올 올림픽 티켓을 따내기 위해 우리 대표팀은 10개국이 경쟁하는 캐나다 해밀턴 프리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선전했으나 아깝게도 3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8위에 머물었던 미국이 1위를 차지해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고, 불가리아도 2위를 차지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과 불가리아는 올림픽에서 전승 소련에 이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미국 여자농구팀은 NCAA 디비전1 리그와 토너먼트가 시행된 1982년 이후 순식간에 소련을 위협했습니다. 198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소련이 미국을 꺾고 우승했지만 그 이후에 열린 거의 모든(1992 올림픽과 1994, 2006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습니다.


여자농구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데 실패했지만, 걸출한 신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국내에서 여자농구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1975년에 선경(SK)과 한국화장품이 팀을 창단한데 이어 1976년에는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이 창단되어 두 화장품 업체의 라이벌전이 열기를 뿜었습니다. 한국화장품은 김재박, 황규봉, 김유동 등 대학졸업반 스타들을 싹쓸이해서 야구팀을 창단하여 그 즉시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77년에는 동방생명(삼성생명)이 창단되어 은행과 실업팀을 합쳐 11개팀이 되었고 팀들의 잦은 해체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실업팀의 열풍 속에서도 1976년에 졸업한 조영란은 상업은행을 택해 이옥자와 한팀이 되었고, 그 해에 창단한 태평양화학은 남자농구의 전설인 신동파를 감독으로 영입했습니다. 태평양화학은 창단 첫해에 홍영순, 홍혜란, 박경자, 조향숙 등 각 포지션마다 올스타급의 선수들로 포진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홍혜란 선수가 단연 인기의 초점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홍혜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돌급 여자농구선수였습니다. 물론 강현숙 선수의 인기도 좋았지만 그것은 출중한 실력과 성실한 리더십 때문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반면에 홍혜란 선수에게는 남자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농구하는 자태가 예뻤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실제 홍혜란 선수는 튀는 성격이 아니라 차분한 노력파였습니다. 홍혜란 선수가 국가대표로 태릉선수촌에 입성했을 때, 거의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운동에 전념했던 선수였슶니다. 


그런데 인기 절정인 25살에 홍혜란 선수는 결혼을 하고 은퇴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농구선수 출신이었지만 스타플레이어는 절대 아니고 팀내에서도 크게 존재감이 없던 이왕돈 선수였습니다. (미남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 대신 대화에 능하고 주변 사람을 즐겁고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도 그분의 지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국가대표 출신 진효준 선수가 둘을 소개시켜준 걸로 알려졌는데, 진효준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 이야기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안타까우면서도 뭉클한 이야기이기에 진효준 선수의 블로그 글을 링크합니다.


https://blog.naver.com/jhj5530/100085943734



태평양화학팀의 창단 즈음 우리 체육계는 1979년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를 서울에 유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열리는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는 북한의 평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두 대회 모두 반쪽대회로 전락했고, 1980년과 84년 올림픽마저도 반쪽대회로 전락하는 극한대립이 이어지던 시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과 동유럽이 불참하는 경우 우승까지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기대감의 핵심에는 박찬숙이라는 당대의 스타가 있었습니다.


박찬숙은 홍혜란의 숭의여중, 숭의여고 후배로 중학교 3학년때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고1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활약했던 스타 중에 스타였습니다. 그녀는 중학생때 이미 185cm를 넘는 신장을 지녔고, 고등학교 졸업 시점에는 190cm(사실은 이보다 약간 작습니다)의 공인 신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신탁은행에서 센터로 활약하던 김정련 선수도 박찬숙 만큼 키가 컸지만 스피드, 슛, 패스, 드리블 모두 박찬숙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정련 한명 때문에 서울신탁은행은 최강팀급 성적을 내고 있었습니다.) 박찬숙은 명실상부한 제2의 박신자로 불리고 있었고, 그녀를 잡는 팀은 향후 10년동안 우승을 석권한다는 말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박찬숙은 신체조건과 기본기 뿐 아니라 BQ도 뛰어나고 심지어 플로핑에도 일가견을 보였습니다. 


박찬숙을 잡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한 팀은 태평양화학인데, 거기에 대해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권 실세 개입설이 정설일 정도였습니다. 박찬숙은 박신자와 함께 우리나라 여자농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이고, 실제로 박신자보다 더 오래 대표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은 박신자에 크게 못미쳤지만 박찬숙은 우리나라가 1979년 세계선수권과 1984년 올림픽에서 2위를 기록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박찬숙 시대 한국 여자농구의 영광과 도전 

 


1978년에 박찬숙이 가세함으로써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은 그야말로 무적의 진용을 갖췄습니다. 1978년 태평양화학은 홍혜란, 홍영순, 조양숙, 박찬숙이라는 네 명의 현역 국가대표를 보유했고, 박경자와 송연주도 스타급의 선수였습니다. 태평양화학은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대통령기 남녀농구대회에서 5연패를 포함하여 전국종별선수권대회 4연패 추계여자실업연맹전 4회 우승, 춘계연맹전 3회 우승, 전국종합선수권대회(농구대잔치의 전신) 3회 우승 등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태평양화학은 화장품업체 라이벌인 한국화장품을 비롯해서 동방생명(삼성생명), 선경(SK), 코오롱 등 투자를 아끼지 않는 실업팀은 물론 국민은행, 상업은행, 외환은행 등 전통의 금융팀의 거센 도전을 받았지만 난공불락의 아성을 쌓아갔습니다. 


라이벌 한국화장품은 국가대표선수들이 불참한 1979년 1월 종합선수권대회에서 고교 졸업예정자의 신분으로 팀에 합류한 슈퍼스타 전미애의 활약으로 창단 후 첫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 6월 종별선수권대회 준준결승에서도 박정숙, 전미애의 활약으로 주전이 모두 뛴 태평양화학에 68-67로 승리하는 등 매 경기마다 불꽃 튀는 투혼을 선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국화장품의 전력이 박찬숙의 태평양화학에 비해 열세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국화장품은 게임에서 져도 열화 같은 성원이 뒤따랐습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도 대부분 약팀인 한국화장품을 응원했기에 한국화장품에게는 태평양화학과의 대결이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대망의 1981년이 다가오자 한국화장품은 본격적으로 타도 태평양화학의 기치를 내세웠습니다. 그해 한국화장품은 박찬숙의 숭의여고 후배이자 한국여자농구 최장신인 김영희를 영입해 박양계, 전미애와 국가대표 삼각편대를 이루었고 거기에 장신 포워드 이주영과 슈팅가드 김인순이 포함되는 베스트5는 충분히 태평양화학에 맞설 수 있는 전력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1981년이 시작되자 태평양화학의 우승독식은 예년보다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해 태평양화학은 모든 대회를 휩쓸어 전관왕(5관왕)에 올랐고 창단 5년 만에 18번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국가대표 트리오 박찬숙, 홍혜란, 홍영순에 2년차인 차선용과 신인 권명희로 구성된 태평양화학의 선발진은 어느 해보다 막강했습니다. 태평양화학의 그해 유일한 패배는 11월에 한국화장품에 당한 것이었습니다. 1981년 말의 상승세를 이어간 한국화장품이 1982년 종합선수권대회(농구대잔치)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그때부터 두 팀은 진정한 라이벌이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국가대표 에이스 김화순이 이끄는 동방생명이 그 대열에 가세했습니다.


박찬숙의 실업 첫해인 1978년은 7월에 말레이시아에서 ABC대회(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대회)가 열렸고, 12월에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습니다. 이들 대회는 정주현 감독과 신동파 코치가 이끄는 우리 대표팀에게 1979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전력을 점검하는 시험대 같았습니다. 이 두 대회에서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나라는 중국(중공)이었습니다. 박찬숙, 조영란, 강현숙, 정미라가 주축이 된 우리팀은 두 대회의 결승에서 불리한 판정 속에서도 두 번 모두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자연스럽게 1979년 세계선수권 대회도 정주현 감독과 신동파 코치가 유임되었고 박찬숙, 조영란, 강현숙, 정미라를 주축으로 대표팀이 구성되었습니다.


조영란선수는 185cm의 장신 파워포워드로 덕성여고 시절에 국가대표에 뽑혔고, 뛰어난 스피드와 탄력을 앞세워 여자농구계를 이끈 선수입니다. 덕성여고 졸업 후 상업은행팀에 들어가 이옥자 선수와 콤비를 이뤘고, 이옥자 은퇴 후 박찬숙의 실업동기인 최애영과 호흡을 맞춰 상업은행을 여전한 강팀으로 유지시켰습니다. 조영란 선수는 돌파와 슈팅 그리고 리바운드에 모두 능하며 체격조건이 좋은 서양선수들과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선수들 중에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원핸드 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첫 번째 선수였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있는 편이어서 기분파 선수로도 알려졌던 조영란은 최전성기인 1981년 돌연 은퇴하여 미국으로 농구유학을 떠났고, 이후 이탈리아 프로팀에서 활약함으로 인해 프로의 출전이 허락되지 않았던 LA 올림픽 대표로 선발될 수 없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조영란과 강현숙)

 


강현숙 선수는 실력과 리더십 그리고 미모까지 겸비한 장신가드로 1970년대 중반 남녀를 통틀어서 가장 인기 있는 농구선수였습니다. 경기가 끝나면 남성 팬들에게 둘러싸여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였고, 팬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학여고를 졸업한 1973년에 외환은행팀에 들어가 곧바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박찬숙 이전에 국가대표 에이스 역할을 하던 한국 여자농구의 간판스타였습니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오래 주장을 맡았고 매사에 성실하고 솔선수범한 선수로 선수시절 동안 실력과 성품에서 모두 그녀를 둘러싼 부정적인 말들이 전혀 없이 찬사만 받았던 선수였습니다. 초 장거리 슛과 초 장거리 패스로도 유명했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농구와 인연을 이어가서 KBL 최초의 여성 심판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정미라 선수는 167cm의 단신임에도 대표팀에서 오래 동안 주전 가드 및 포워드로 활약하던 선수입니다. 작고 가냘픈 몸매에 귀엽고 예쁜 얼굴로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여자 선수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세고 빠른 선수로 정평이 있었습니다. 대표팀 선수 중에서 운동능력과 허슬 플레이가 모두 최고인 만능 플레이어였고, 당시 여자선수로는 유일하게 더블클러치 레이업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 강현숙 선수가 성인 팬들을 많이 가졌던 것에 비해 깐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미라 선수는 중고생들에게 가장 인기 높았던 ‘누나부대’의 원조였습니다. 숭의여고를 졸업한 1974년부터 국민은행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활약했습니다. 정미라씨는 결혼 후 한참 농구를 떠나 있다 여자프로농구 출범 후 TV해설과 코치 그리고 경기 감독관을 맡으며 농구계로 돌아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정미라 선수)

 



1979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이들 네 명과 함께 주로 주전으로 뛴 선수는 선경의 포워드 송금순과 조흥은행의 베테랑 가드 조은자였습니다. 아래는 1979년 다섯 명의 주전선수가 함께 코트에 있는 모습을 담은 귀한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조은자(5), 정미라(10), 강현숙(11), 박찬숙(15), 조영란(12)입니다. 

 


이들과 함께 세계선수권 대회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는 정경숙, 이향주, 홍혜란, 홍영순, 최승희, 전미애입니다. 송금순이 주전으로 출전한 경기에서는 정미라가 가드를 맡고 송금순이 포워드로 활약했습니다. 조은자가 선발 출전한 경기에서는 정미라가 포워드를 맡았습니다.


1979년 4월 2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막된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는 12개국이 참가했으나 우려했던 대로 소련, 중국, 쿠바를 비롯해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모두 불참한 채 열렸습니다. 일본은 이미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고, 11개국 중에서 전력상 우리에게 두려운 팀은 미국이 유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국제대회에서 미국 대표팀에게 줄곧 이겨왔기 때문에 공산국가가 빠진 1979년 세계선수권 대회는 우리가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전력을 알 수 없었기에 개막전 상대로 미국과 비슷한 팀 컬러를 가졌지만 약팀으로 평가되던 캐나다를 골랐습니다. 하지만 첫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캐나다가 절대 만만한 팀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캐나다팀은 맥길 대학의 스타플레이어인 흑인 포워드 실비아 스위니(Sylvia Sweeny)와 오리건 대학의 주전 백인 센터 벱 스미스(Bev Smith)라는 걸출한 플레이어들을 지니고 있었고, 공격과 수비에서 팀워크도 거의 완벽했습니다. 실비아 스위니는 그 경기에서 우리 수비를 농락하며 24득점을 올렸고, 벱 스미스는 박찬숙과의 대결에서 전혀 밀리지 않으며 16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우리팀은 박찬숙이 22점, 정미라가 17점으로 분전했지만 나머지 선수들이 캐나다 수비에 속절없이 막혀버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실비아 스위니)

 


76-63의 충격적인 첫 경기 패배! 우리나라 선수단은 경악했고, 캐나다를 만만히 봤던 국내 언론들은 그제서야 실비아 스위니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가를 떠들어댔습니다. 순식간에 실비아 스위니는 졸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이 되었고, 어디를 가나 그녀의 사진이 보였습니다. 이 경기 이후 5년 동안 우리나라는 캐나다와 다섯 번 더 경기를 치렀습니다. 결과는 전패였습니다. 캐나다와 역대 전적 6전 6패, 박찬숙 선수는 벱 스미스에 대한 엄청난 콤플렉스를 지닌 채 1984년 LA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LA 올림픽은 오늘 글의 주제가 아니어서 그 내용은 다음 글에 상세히 쓰겠습니다.


첫 경기에서 캐나다에 참패한 이후 우리는 우승의 목표를 버리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훗날 비참한 대회로 기억되게는 하지 말자는 각오로 선수와 코칭 스탭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틀 후 열린 다음 경기에서 우리는 장신의 네덜란드와 맞붙었는데, 박찬숙이 21득점을 올리며 활약했고, 캐나다전과 달리 강현숙, 조영란, 송금순의 공격도 순조롭게 풀려 78-63으로 낙승을 거뒀습니다. 우리는 남미의 약체 볼리비아에 대승을 거둬 캐나다에 이어 조 2위로 결선리그에 올랐습니다. 결선리그는 몬트리올 올림픽 준우승국으로 자동 진출한 미국과 예선을 통과한 한국, 캐나다,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7개 팀이 우승을 놓고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캐나다 전 패배를 안고 다섯 나라와 결선 경기를 치렀습니다.


우리의 결선리그 첫 상대는 미국이었습니다. 예선을 치르지 않은 미국은 대회 첫 경기를 우리와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투지를 불태운 우리팀은 미국과의 경기에서 놀라울 정도로 선전했습니다. 서양의 강팀을 만나면 위축되기 일쑤였던 박찬숙은 이날 인생경기에 가까운 맹활약을 선보였습니다. 박찬숙은 그 경기에서 30득점을 올렸고, 강현숙은 외곽슛으로 20득점을 올렸습니다. 정미라, 조영란, 전미애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 우리는 미국을 94-82로 꺾었습니다. 미국 선수들은 뛰어난 운동능력을 지녔으나 수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특히 우리나라의 외곽슛에 속절없이 당했습니다. 최강으로 꼽히던 미국을 이긴 후 우리팀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고, 우승의 희망이 다시 보였습니다.


한국이 우승하는 시나라오는 일단 남은 경기에서 전승을 거두고, 미국도 남은 경기에서 전승을 거두고 캐나다는 미국 이외의 팀에게도 패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미국이 동률을 이루고 승자승에 따라 대한민국이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이 이탈리아에게 66-64로 가까스로 이기자 우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는 듯싶었습니다. 우리는 박찬숙이 32점을 올리며 일본을 손쉽게 이긴 후 호주와 대결했는데, 호주팀의 센터 마리 잭슨은 놀랍게도 박찬숙을 압도했습니다. 우리는 조영란이 20득점으로 공격을 이끌었고, 정미라와 조은자의 슛이 호조를 보여 호주에게 76-72로 진땀승을 거뒀습니다. 결선리그에서 우리가 만만히 볼 상대가 없음이 확인된 경기였습니다. 우리는 약체로 알았던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박찬숙이 상대 센터에게 제압당해서 어렵게 경기를 펼쳤습니다. 박찬숙이 11득점에 묶였지만 정미라가 슛이 폭발해 22득점을 올렸고, 조영란과 강현숙은 각각 15득점, 14득점을 올렸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경기막판 맹추격을 따돌리고 76-71로 승리했습니다. 캐나다는 우리의 바람을 저버리고 연전연승을 거둬 우승을 눈앞에 둔 채 미국과의 경기를 남겨놓게 되었고, 미국도 그럭저럭 연승을 이어갔습니다. 


대회 마지막날 우리와 이탈리아의 경기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의 사실상 결승전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박찬숙, 조영란, 정미라가 각각 15점을 올리며 이탈리아에 63-56으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우승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캐나다가 이기면 전승으로 우승하게 되고 우리는 2등을 차지합니다. 미국이 캐나다에게 13점 이상으로 이기면 득실차에 의해 우승을 차지합니다. 우리는 미국이 캐나다를 이기더라도 득실차가 -1점이기 때문에 1등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팀은 후반에 맹공을 펼쳐 실비아 스위니가 24득점으로 분전한 캐나다에 76-61, 15점 차이로 승리해 득실차로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득실차 +4의 미국이 1위, -1의 한국이 2위, -3의 캐나다가 3위로 밀려났습니다. 대회기간 내내 화제의 중심이었던 캐나다의 실비아 스위니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찬숙과 강현숙이 월드베스트5에 선정되었습니다. 우리는 1967년 체코 대회 이후 12년 만에 세계2위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국민들은 만족했고,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표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80년 하계 올림픽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립니다. 그런데 주최국 소련은 공산국가들이 대거 불참한 1979년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를 인정할 수 없고, 우승국인 미국에게조차도 자동 출전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대신 1980년 5월에 불가리아에서 프리올림픽을 개최해서 상위 5개 팀에게 올림픽 출전권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세계2위가 엉터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5위안에 들어야 했습니다. 최강팀 소련은 올림픽 개최국으로 자동출전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프리올림픽에 출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한국팀이 어렵지 않게 5위안에 들 것이라고 안심하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수단장과 코칭스태프는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홈에서 치른 경기에서 우리는 캐나다에 졌고, 호주, 프랑스, 이탈리아에 힘겹게 이겼습니다. 미국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서울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쿠바, 체코, 유고, 폴란드, 헝가리는 모두 강팀입니다. 중국도 우리와 대등한 실력을 갖췄습니다. 무엇보다도 힘의 농구를 추구하는 동구권 국가들은 키가 2미터에 가까운 센터를 보유하고 있고, 포워드들도 박찬숙의 키와 비슷하면서 파워에서 훨씬 앞섭니다. 이들 나라와 대결하는 경우 박찬숙은 수비에 너무 큰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공격을 제대로 펼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상대우위를 차지하는 백코트 선수들이 폭발해야지만 승산이 있는데, 그들의 골밑슛이 우리의 외곽슛보다 적중률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박찬숙은 고등학생 시절 한국 대표팀으로 유럽 전지훈련을 했을 때부터 자신의 체격과 힘, 그리고 스피드로는 동유럽의 빅우먼들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찬숙 말고는 우리나라에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박찬숙은 1980년 5월 불가리아 프리올림픽에서 악전고투 속 놀라운 정신력으로 큰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4. 여자 마이클 조던에게 거둔 극적이고 감격적인 승리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 2위를 기록한 한국팀은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 1980년 5월 불가리아에서 열린 프리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최강팀 소련은 올림픽 개최국으로 자동출전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다른 공산국들은 모두 참가해 총 22개 나라가 5장의 출전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해 세계2위를 차지한 게 엉터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5위안에 들어야 했습니다. 한국팀은 서울 대회의 주역이었던 강현숙, 정미라, 송금순, 조영란, 박찬숙, 홍혜란, 전미애 그리고 새로 합류한 김화순, 김영희, 방신실, 황영숙, 박진숙으로 대표팀을 구성했습니다. 이들 중 김화순과 김영희는 여고생이었습니다. 


불가리아 프리올림픽은 우리 대표팀뿐 아니라 박찬숙 선수에게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대회였습니다. 힘의 농구를 추구하는 동구권 국가들은 키가 2미터에 가까운 센터를 보유하고 있고, 포워드들도 박찬숙의 키와 비슷하면서 파워에서 훨씬 앞서고 더 빨랐습니다. 박찬숙은 공격 테크닉과 패스에서 이들보다 앞섰으나 그 차이는 크지 않았습니다. 박찬숙에게 주어진 임무는 공격보다 수비에서 더욱 막중했습니다. 힘과 스피드에서 앞서는 거인들을 매 경기 몸으로 막아내야 했습니다. 


첫 경기에서 약체인 멕시코를 쉽게 격파한 우리나라는 둘째 날 경기에서 동유럽의 유고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69-70으로 패했습니다. 박찬숙은 수비에 신경 쓰느라 10득점에 그쳤고, 강현숙과 박진숙이 18득점을 올리며 활약했지만 유고의 가드 듀르코비치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했습니다. 체코와의 경기에서도 박찬숙은 수비에 집중하느라 10득점에 그쳤고, 조영란과 강현숙이 공격을 이끌었지만 힘에서 밀려 67-74로 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가국 중에서 최강이라 여겨지던 서울대회 우승팀 미국과 대결에서 불꽃 튀는 공격전 끝에 89-88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박찬숙이 24점, 강현숙 20점, 조영란 19점, 정미라 14점, 전미애 10득점, 미국은 여전히 수비에 허점을 보였고 우리나라에게 외곽슛을 너무 쉽게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나라에게 전승을 거둬 프리올림픽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은 미국과의 역대 대결에서 전승을 거뒀지만 이때가 미국을 이긴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전력을 쏟은 바로 다음날 벌어진 헝가리와의 대결에서 우리는 박찬숙이 고군분투했지만 71-87로 완패했습니다. 5위 이내에 드는 것이 이미 물거품이 된 우리팀은 캐나다와의 대결에서 지난 대회의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박찬숙이 캐나다의 센터 벱 스미스를 공수에서 제압하고 29득점을 올렸지만, 한국팀은 캐나다의 균형 잡힌 공격에 71-77로 패해, 9-10위전으로 밀려나 중국과의 마지막 대결을 펼쳤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61-59로 간신히 이기고 프리올림픽 9위를 차지했습니다. 박찬숙은 평균득점 17.9를 기록해 득점 5위에 올랐고, 우리나라 수비의 대들보 역할을 다했습니다. 


일년 전에 세계2위였던 우리나라가 소련이 불참한 대회에서 9위로 수직낙하 해 올림픽 출전이 무산되자 선수단과 농구계는 패닉에 빠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실력인 만큼 현실을 냉엄하게 수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대회 직후 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면서 친미 국가들에게 올림픽 보이콧을 호소했고, 우리나라도 미국의 뜻에 따라 불참하기로 결정함으로 인해 여자농구의 좌절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프리올림픽은 세계선수권대회도 아니고 어차피 출전도 안할 올림픽의 예선인 만큼 무의미한 대회니까 그냥 잊어버리자는 생각이 이심전심 퍼졌습니다. 농구계는 다시 활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그해 9월 홍콩에서 열리는 ABC대회에 집중했습니다. 


ABC대회 한국대표팀은 송금순이 빠지고 박양계가 새로 들어온 것을 제외하고는 불가리아 프리올림픽과 동일했고 신동파 감독과 조승연 코치가 새로운 사령탑을 맡았습니다. 자신들의 앞마당인 홍콩에서 벌어지는 대회인 만큼 중국은 자신 있게 타도 한국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의 컨디션은 역대 최고급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109-54, 더블스코어로 이겨 중국과 결승에서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결승경기를 전국에 생중계했고, 관중석은 중국을 응원하는 열기로 가득찼습니다. 우리나라도 결승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중공으로 불렸던 중국은 6.25 전쟁에서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은 원수로 여겨지고 있었고, 일본, 북한과 더불어 우리가 국제경기에서 절대 패해서는 안 되는 상대로 인식되었습니다. 홍콩 엘리자베스 체육관에서 벌어진 결승에서 우리팀은 조영란이 24득점, 박찬숙 23점, 김화순이 21점을 기록하는 등 모든 선수가 펄펄 날았고, 무려 101-68로 중국에 압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 이후 강현숙, 정미라, 조영란이 대표팀을 떠났습니다. 박신자 이후 우리 대표팀의 기둥들은 26살을 넘기지 않고 최전성기에 은퇴하는 악습(?)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한국과의 결승에서 패한 이후 중국은 등소평(덩샤오핑)이 노여워했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감독은 물론 대표팀 선수의 90퍼센트를 물갈이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장신선수와 인재들을 찾아내 한국을 이기기 위한 맹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중국 대표팀에 새로 들어온 선수 중에는 215cm의 장신 진월방(천위에팡)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ABC대회(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는 남자와 여자 모두 2년마다 열립니다. 우리 여자 대표팀은 1978년과 1980년에 우승을 차지해, 3연패를 노리고 1982년 4월 도쿄 ABC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강현숙, 정미라, 조영란이 빠진 공백은 우리에게 컸습니다. 신동파 감독은 중국의 센터 유청(류칭), 진월방을 막기 위해 박찬숙, 김영희, 권명희, 김복순이라는 4명의 센터를 대표팀에 포진시켰습니다. 우리는 홈팀인 일본을 86-60으로 완파하고 결승에서 다시 중국과 만났습니다. 한국팀은 결승에서 홍혜란, 홍영순, 김화순, 박진숙, 박찬숙을 스타팅으로 내세웠습니다. 홍혜란과 홍영순은 태평양화학 창단멤버로 대표경력 5년차의 베테랑이지만, 이 대회에서 처음 주전으로 기용되었고 전성기를 약간 넘긴 선수들이었습니다. 


한국은 전반 초반에 중국에 6점을 리드당했지만 박양계와 권명희가 투입되면서 활기를 찾아 전반전을 37-38로 마쳤습니다. 후반들어 박찬숙과 권명희가 상대 센터 유청을 제압하고, 속공이 잘 풀려서 47-42로 리드했으나 교체투입된 장신 진월방의 연속 득점으로 57-58로 리드당했고, 그 이후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졌습니다. 64-63으로 중국이 1점 리드하던 종료 41초전에 공을 갖고 있던 중국이 바이얼레이션을 범해 우리에게 역전 챈스가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공을 돌리다 종료 16초전에 박진숙이 정면에서 중거리슛을 성공시켜 65-64로 역전했고, 경기종료 3초전에 진월방에게 골밑슛과 리바운드를 계속 내줬으나 골밑을 수비하던 김영희의 타이트한 챌린지에 진월방의 슛은 계속 빗나갔고 그렇게 65-64로 경기는 종료되었습니다. 막판에 진월방을 밀착 수비해 승리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김영희 선수를 제외한 네명의 선수들은 부둥켜 안고 펑펑 울며 코트에 뒹굴었습니다. (국내 경기에서도 팀의 승리 후 김영희를 제외한 4명이 부둥켜 안고 환호하던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밤에 중계된 이 경기는 거의 온 국민이 지켜봤고 집집마다 환호성이 울렸습니다. 


결승골을 기록한 박진숙 선수는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습니다. 22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박진숙은 부산 혜화여고를 졸업하고 1979년부터 선경의 간판스타로 활약하던 선수입니다. 177cm의 비교적 장신임에도 국내에서 가장 슛이 정확한 선수로 평가되고 있었는데, 1982년 도쿄 ABC대회로 명실상부 스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우리에게 1점 차이로 패배한 중국은 몇 달 후인 11월에 열리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우리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며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새로 구성된 팀인만큼 중국의 기량은 매달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예상대로 우리는 뉴델리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다시 중국과 대결했습니다. 당시 대표팀은 과도기적 성향이 강한 선수구성이었고, 삼천포여고 1학년생인 16살의 성정아 선수가 대표에 선발되었습니다. 동방생명의 차양숙과 코오롱의 우은경도 새롭게 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중국과의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우리팀은 홍혜란, 박양계, 김화순, 권명희, 박찬숙을 주전으로 내세웠습니다. 중국은 6개월 전의 팀이 아니었고, 박찬숙과 권명희는 진월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여자팀은 중국에게 67-75로 패해 은메달에 머물었습니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우리 여자농구는 중국에 추월당했습니다. 우리 여자농구가 추월당한 것은 또 있었습니다. 우리 남자 대표팀은 부상에 시달리던 신선우 선수가 복귀해 포인트 가드로 리딩을 맡으면서 일본과 중국에 모두 1점차로 승리하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중국과의 결승전은 뉴델리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명승부였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로 우리나라 남자농구는 여자농구의 인기를 추월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1회 점보시리즈(농구대잔치)가 열렸을 때 팬들의 관심은 남자농구에 있었습니다.


1983년 7월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가드진의 세대교체를 단행했습니다. 홍혜란, 홍영순이 은퇴했고 그 자리에 최애영과 이형숙이 선발되었습니다. 이들은 1년 후 LA 올림픽의 주역이 됩니다. 최애영 선수는 수원여고 출신에 상업은행 소속으로 박찬숙과 실업동기이지만, 박찬숙보다 9년 늦게 대표팀에 선발된 대기만성형 스타입니다. 167cm의 단신이 핸디캡이지만 중거리슛이 뛰어나고 위기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입니다. 이형숙 선수는 팀 선배인 박양계 선수와 함께 한국화장품의 최고 가드진을 이끌던 선수로 스피드와 수비능력이 발군입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기대를 뛰어넘는 성적을 올렸습니다. 김화순 선수는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담당하며 공격을 이끌었고, 박찬숙 선수는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수비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대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 쓰기로 하고 오늘 글에서는 우리나라 여자농구 역사상 가장 짜릿한 역전승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대회 준결승리그에서 개최국인 브라질을 만났습니다. 상파울루 경기장에는 2만 여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브라질 팀에는 세계 여자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오르텐시아 마르카리(Hortencia Marcari)가 있었습니다. 마르카리는 올해 리우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성화 최종주자 3명 중에 두 번째로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당시 24살이던 마르카리는 이 대회에서 평균득점 29점으로 득점왕에 올랐고, 득점 2위는 평균 18점의 김화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브라질과 대결에서 시종일관 박양계와 최애영이 마르카리에게 이중으로 들어붙어 마르카리는 대회 최저득점인 18점에 그쳤습니다. 그 경기에서 브라질은 전날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30득점을 올린 김화순을 막기 위해 박스앤드원 작전을 구사했고, 전반전은 팽팽히 진행되어 45-45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후반에 우리는 김화순, 차양숙의 슛이 연달아 들어감으로써 10분을 남기고 65-59로 리드했으나 그 직후 일방적인 편파판정으로 박찬숙이 5반칙 퇴장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브라질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경기종료 3분을 남기고 72-77로 리드 당했습니다. 


경기종료 40초전, 브라질은 79-76으로 3점을 리드하는 상태에서 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선수들이 시간을 끌기 위해 공을 돌리던 중 박양계 선수가 재빨리 가로채 드라이브인을 성공시켜 79-78이 되었습니다. 경기 종료 20초전 공을 잡고 있던 브라질의 가드가 마르카리에게 패스했고 우리팀의 차양숙과 박양계가 마르카리를 둘러쌌습니다. 패스할 곳을 찾던 마르카리가 종료 5초전 뒤쪽의 동료에게 공들 던졌습니다. 그 순간 박양계 선수가 몸을 날려 그 공을 가로챘고, 재빨리 골대를 향해 치달아 종료 1초전에 레이업슛을 성공시켰습니다. 80-79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둔 우리 선수들과 임영보 감독, 조승연 코치는 박양계를 겹겹이 둘러싸고 한없이 통곡했습니다. 브라질 관중들과 마르카리 선수는 패닉에 빠졌고 이 경기에서 승리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 4강에 재진입했고, 패배한 브라질은 5위를 차지했습니다. 박양계 선수의 인터셉트와 레이업 장면은 일주일 내내 TV를 장식했습니다. 


오르텐시아 마르카리는 세계 최고 선수였지만 크게 좌절했습니다. 마르카리는 박찬숙과 동갑인 1959년생입니다. 박찬숙이 그 다음해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데 반해 마르카리는 계속 브라질 대표로 남아서 1986년과 1990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습니다. 1990년 말레이시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브라질은 정상권에서 멀었지만 마르카리는 평균득점 (무려) 31.5로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브라질은 마르카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1988, 1992년 연달아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1990년에 31살의 나이로 평균득점 31.5를 올렸을 때 오르텐시아 마르카리의 별명은 여자 마이클 조던이었습니다. 


마르카리는 1994년 35살의 나이로 호주 세계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마르카리는 평균 27.6으로 득점왕에 오르면서 대회 MVP를 차지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브라질은 4강에 올라 미국과 대결했습니다. 미국은 1983년에 소련에게 패한 이후로 11년 동안 국제대회에서 전승을 거둔 그야말로 무적의 팀이었습니다. 여자농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미국과 브라질의 준결승에서 마르카리는 40분을 풀로 뛰면서 32득점(13-24, 54.2%)을 올려 브라질이 110-107로 미국을 꺾는데 최고 수훈을 세웠습니다. 마르카리는 중국과의 결승에서도 27득점을 올려 브라질이 중국을 96-87로 이겨 대망의 우승을 달성하는데 주역이 되었습니다. 마르카리는 브라질에서 펠레와 동급이 되었고, 마이클 조던이 은퇴해서 돌아와도 이루기 어려운 업적을 달성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마르카리는 드디어 은퇴를 선언했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그녀가 2년 후에 열리는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뛰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마르카리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브라질이 결승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결승에서 미국에 패해 브라질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마르카리는 37살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5. 우리 대표팀이 일본에게 고의로 패배한 이야기 


우리나라 농구 역사에서 정주현(1935~) 감독은 아주 독특한 커리어를 갖고 있습니다. 광신상고 재학시절에 팀의 실질적인 코치를 맡았었고, 그 이후 경희대에 진학해서도 선수 겸 코치였습니다. 기업은행 선수시절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은 후 조기 은퇴하여 모교인 경희대 코치를 맡았습니다. 그는 큰 부상의 후유증으로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겪으면서도 제일은행과 코오롱에서 여자농구팀 감독을 지냈습니다. 제일은행 감독 시절인 1974년에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에 선임된 이래 1978년부터 여자 대표팀 감독을 맡아 그 해에 ABC대회와 방콕 아시안게임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듬해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정주현 감독은 당시 국내 농구계에 가장 뛰어난 이론가로 정평이 있었습니다. 여자팀 전문가로 알려졌지만 1982년에 남자 대표팀 감독을 맡아 중동과 대만, 홍콩에서 존스 컵 등 국제대회를 치렀고, 제가 어제 매니아진에 올렸던 서울 국제초청 남자농구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을 이끌었습니다.


정주현 감독은 자타공인 대표적 이론가이면서도 당시 스포츠계에 만연되었던 폭행이나 욕설 등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이 선수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던 덕장이었습니다. 정 감독은 1980년에 여자 대표팀을 후배인 신동파 감독에게 물려주고 소속팀인 코오롱의 농구부장으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 대표팀에 시끄러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다시 감독을 맡아 대표팀을 이끌곤 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대표팀이 8개국중 7위로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둔 후 정주현씨는 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우리 여자팀이 중국을 꺾는 큰 이변을 일으키며 금메달을 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4년 후 1994년 호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 대표팀이 일본에게 20점차로 참패하면서 10위를 기록하는 초라한 성적을 올렸습니다.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하지 못한 농구협회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40일 남기고 환갑 나이의 정주현 감독에게 또 다시 대표팀을 맡겼습니다. 


또 다시 세대를 역주행해서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된 정주현 감독은 주장 윤영미를 비롯해 정은숙, 전주원, 박현숙, 천은숙, 유영주를 주축으로 하여 한현선, 이희주, 손경원, 하숙례, 정선민, 조혜진으로 대표팀을 구성했습니다. 중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4년 호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한 압도적 강팀이었고, 일본도 홈코트 이점에다 넉달 전에 우리에게 20점 차의 승리를 거둔 적이 있어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농구계에서는 우리 여자팀이 일본에게 복수하고 중국에 이어 은메달만 차지해도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주현 감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가 여자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1970년대 후반 이래 우리나라와 중국의 여자농구 맞대결은 대부분 일반적인 예상과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 여자대표팀은 1980년 중국의 앞마당인 홍콩에서 열린 ABC 대회 결승에서 중국에게 101-68의 대승을 거두었고, 1984년 적지에서 열린 상하이 ABC 대회 결승에서도 중국에게 62-61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전력 면에서 절대적인 열세라고 예상되었던 LA 올림픽에서도 중국을 꺾고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에서는 안방에서 중국에 패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1992년 서울에서 열린 ABC 대회에서도 중국과 두 번 대결해 모두 패배했습니다. 반면에 2년 전인 1990년에는 베이징 아시안게임 예선리그에서 15점차로 패한 것을 포함해서 그 대회 게임 결승 직전까지 우리는 중국에게 4전 4패를 기록 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승에서 정주현 감독의 지휘아래 중국을 77-70으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중국과 우리의 대결은 객관적인 전력 이외에 더 큰 무언가가 결과를 지배해왔습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 저는 미국에 유학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안 게임 경기를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1983년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진월방의 백업 센터를 맡았던 정해하는 중국 발음대로 정하이샤로 불리며 세계 최고의 센터로 각광받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여전히 송효파, 진월방, 정해하라는 이름들이 더 익숙합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여자농구 대회에는 모두 여섯 나라가 참가했습니다. 6개팀이 풀리그를 벌여 1위와 2위가 결승에서 금메달을 다투고, 3위와 4위가 동메달을 다투는 방식이 다시 한번 채택되었습니다. 정주현 감독은 중국과의 예선전에서 센터에 정은숙, 가드에 전주현과 박현숙, 포워드에 천은숙과 유영주를 스타팅을 기용했습니다. 천은숙과 유영주는 신장이 각각 175cm와 177cm에 불과했고 볼핸들링과 외곽슛이 좋았기에 우리나라의 스타팅 포진은 사실상 1센터에 4가드 시스템이었고 식스맨으로 활약한 손경원도 171cm였습니다. 경기기 시작되자 놀랍게도 정은숙이 중앙에서 약간 노쇠해 보였던 정하이샤를 일방적으로 농락했습니다. 이날 정하이샤는 넉달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차지할 때의 기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팀의 4명의 외곽 공격수들은 공을 기가 막히게 잘 돌렸습니다. 속공이면 속공, 지공이면 지공 모두 잘 먹혀들었고 거기에다 손경원, 박현숙의 3점슛과 모든 선수의 자유투가 던지는 족족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날 중국팀에게 103-73, 무려 30승 차이로 압승을 거뒀습니다. 


충격에 빠진 중국팀은 전열을 가다듬어 그 다음 경기에서 일본에게 91-82, 9점차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우리는 예선 마지막 날 일본과의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한중일 3개국의 득실 차이는 한국이 +30이며 일본이 -9, 예선 경기를 모두 끝낸 중국은 -21이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게 50점 차이로 패하더라도 득실차로 결승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결승 시나리오는 간단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이기면 한국과 중국이 결승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우리가 일본에게 패하면 (52점 이상으로 대패하는 경우만 아니면) 결승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게 되는 것입니다. 


농구협회와 코칭스탭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중국을 다시 만나는 경우 또 이길 수 있을까? 일본에게 고의로 패배할 경우 만일 우승을 놓친다면 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1984년 프로야구에서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마지막 두 경기에서 연거푸 롯데에게 고의로 패배를 지시함으로 인해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골랐다가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에게 4승을 내주며 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주현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팀은 일본과의 경기에서 주전을 기용하며 승리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정 감독은 우리팀은 일본을 이겨 4개월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결승에서 중국과 정정당당하게 금메달을 겨루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팀이 일본과의 경기에서 어떤 각오로 임했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1984년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롯데에게 져주겠다고 거의 대놓고 말한 상태였습니다. 투수는 치기 쉬운 공을 주고, 타자들은 티가 안날만큼 적당히 스윙하고 주루플레이도 대충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롯데와의 2연전에 첫 경기는 그런 식으로 패배했습니다. 타율 0.340을 기록하던 이만수는 두 경기 모두 결장했고, 0.339로 타격 2위이던 롯데의 홍문종은 타석에 설 때마다 고의사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경기에서 삼성 선수들이 대충 휘두른 방망이는 투수의 공을 매번 제대로 맞췄습니다. 황당하게도 삼성은 1회 초에 무려 6득점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삼성이 그 경기를 이긴다면 롯데가 아니라 OB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삼성과 맞붙게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경기에서 삼성은 롯데에 져주기 위해 온갖 추태를 다 보여줬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져주기 경기에 관객들은 분노했습니다.

 


일본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팀은 정주현 감독의 말처럼 열심히 경기에 임했습니다. 필승의 의지가 엿보인 경기였습니다. 경기종료 10분을 남기고 우리는 일본에게 15점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때 작전타임이 있었고, 그 이후 우리 선수들의 플레이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경기종료 2분을 남기고도 한국이 리드하자 우리팀은 아예 대놓고 골밑을 비워줬습니다. 심판이 우리 주장인 윤영미에게 몰수게임을 선언하겠다고 경고할 정도였습니다. 경기 막판 한국팀의 의도적인 실수남발과 공격루트 허용에 힘입어 일본은 우리에게 84-80으로 승리했습니다. 마침 한글날이던 그날에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내면서 국민과 언론의 모든 관심은 황영조 선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 우리 대표팀을 질타하고 자성하는 목소리는 마라톤 금메달에 묻혀버렸습니다. 


나흘 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여자농구 결승이 열렸습니다. 그 전날 분기탱천한 중국은 3,4위전에서 대만에게 화풀이하듯 83-31로 승리한 바 있었습니다. 일본과의 결승에서 우리팀은 시작부터 모든 것이 안 풀려 전반 8분 만에 4-18로 크게 리드당했고, 바로 그때 공격의 핵인 윤영주가 5반칙으로 퇴장 당했습니다. 두 명의 심판은 노골적으로 일본에게 유리하게 휘슬을 불어댔습니다. 정은순의 골밑슛으로 공격의 활로를 뚫은 한국은 전반 종료 직전에 골을 성공시켜 37-44로 따라붙은 채 전반을 마쳤습니다. 후반 들어 전주원의 3점슛이 연달아 터지며 맹추격을 벌인 우리팀은 6분경에 손경원의 3점슛 성공으로 54-53을 만들어 경기 시작 후 처음으로 리드했습니다. 그때 또다시 심판은 틈만나면 휘슬을 불었고, 그때마다 한국의 반칙이 선언되었습니다. 


경기종료 8분을 남긴 상태에서 전주원이 5반칙퇴장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팀은 정은순이 골밑을 장악했고, 천은숙의 3점슛이 고비마다 터졌습니다. 경기종료 47초전, 75-74로 한점을 리드하던 한국은 상대의 파울로 얻은 자유투를 박현숙이 두 개 모두 성공시켜 77-74로 승기를 잡았습니다. 일본에게 77-76 추격골을 허용한 우리팀은 남은 시간 17초 동안 공을 돌렸습니다. 박현숙에서 천은숙으로, 그리고 정은순으로 넘어간 공이 다시 윤영미로 .. 일본선수들은 파울을 하기 위해 따라다녔지만 매 순간 공이 더 빨랐고 우리팀의 실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77-76, 종료 휘슬이 울려 퍼지자 한국 선수들은 모두 마루에 쓰러졌고, 벤치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선수들과 코칭스탭은 모두 뛰쳐나와 함께 얼싸안았습니다. 체육회가 우리나라 대표팀을 구성할 때 여자농구는 아예 금메달 예상종목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1990년 베이징 대회 우승에 이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음지에서 일궈낸 1994년 히로시마 대회 우승으로 정주현 감독은 모든 언론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대표단이 귀국한 후 젊은 농구인들이 주축이 되어 정주현 감독의 징계 인책을 체육계에 요구했습니다. 승리만능의 구시대적인 고의 져주기 작전은 스포츠 정신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금융실명제 등 문민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개혁정신에도 어긋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인책론은 서서히 흐지부지되었고 정주현 감독은 해임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중요대회에서 대표팀 감독을 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 감독은 코오롱이 해체된 1997년 일본으로 건너가 WJBL 샹송화장품 감독에 취임했고, 감독을 맡은지 5년째에 팀을 WJBL 챔피언에 올려놓았습니다. 정주현 감독은 80세가 넘어서도 아내인 이옥자씨가 감독을 맡고 있는 WJBL 아이신의 기술고문으로 현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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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6-27 13:30:28

너무나 좋은 글 잘봤습니다..글인데도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재밌게 읽었네요

박정은이 박신자씨 조카인 걸로만 알았는데 박신자가 그리 대단한 선수였던건 덕분에 처음 알았네요

WR
2019-06-27 14:29:45

말씀 감사합니다.

2019-06-27 13:49:31

박신자 씨 관해서 예전에 궁금했는데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WR
2019-06-27 14:29:59

고맙습니다.

2019-06-27 13:54:25

이젠 근현대사 배구까지...

항상 지식도 지식이지만 글을 읽히기 쉽게 쓰는 능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WR
2019-06-27 14:30:44

고맙습니다. 배구 이야기는 아니고 우리나라 여자농구 황금기의 스토리입니다.

2019-06-27 15:37:29

 ....  알림에 있어서 봤더니  어처구니 없는 오타네요   글도 읽었는데 

네 농구 이야기죠 

2019-06-27 14:06:43

전 손경원 선생님 제자입니다.저희 팀이 제일 먼저 만들어져서 제일 오래 배운 제자이기도하고요.팀이 사라진 이후로 몇번 길에서 우연히 뵌 게 끝인데 오랜만에 한 번 찾아가봐야겠네요

WR
2019-06-27 14:32:13

반갑습니다. 손 선수는 은퇴 후 오랫동안 소년농구 지도자를 하셨지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2019-06-27 16:30:08

지금은 스포츠 아카데미 운영하고 계십니다.뵌지 한 1년반~2년 정도 된 것 같네요.정말 가르침 받을 때 가드로서 여러가지 배울 수 있어서 덕분에 그 시기 정말 많이 발전했던 것 같습니다

Updated at 2019-06-27 14:26:28

이왕돈 선수의 아들인 이광재선수는 지난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죠.

 

그리고 사소한 것 하나... 정은숙 선수가 아니고 정은순 선수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부동의 국가대표 센터였죠. 당시 조문주선수와 더블포스트를 많이 섰고, 뒤에 가서는 정선민선수와 많은 활약을 해주셨죠. 다음 포스팅때 LA올림픽을 언급하실 예정이지만, 시드니올림픽에서 4강 진출의 쾌거도 다루어주셨으면 좋겠네요.

WR
2019-06-27 14:34:42

말씀 고맙습니다. 읽어보니 이름에서 몇 군데 오타가 보입니다. 태평양화학 조양숙 선수를 조향숙이라고 썼고 말씀처럼 정은순을 정은숙이라고 잘못 썼네요. 그런데 글 후반에서는 정은순이라고 계속 맞게 쓰고 있었습니다. 사소한 오타는 그냥 놔두는 게 매니하 하면서 생긴 저의 습관입니다. 시드니올림픽 이야기도 그 당시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바빠지는 바람에 여기서 멈췄습니다. 그때까지가 여자농구 황금기였죠.

2019-06-27 16:07:15

위에 쓰신 글 중에 마지막 세대를 참 좋아했었습니다. 전주원,유영주,정은순. 그리고 약간 후에 합류하는 정선민 선수까지요.
그 윗세대 선수들은 이름만 들어 봤네요.

1
2019-06-27 17:04:37

친구 어머니가 위에 자세히 거론된 여자 국대 선수중 한분이신데, 직접 만나뵙진 못했지만 생각했던것보다 어마어마한 분이셨군요.... 헐..

2019-06-27 17:45:35

와 정말 말그대로 대단하십니다..
이랬던 여농이 이젠 ...
마음 아프네요

2019-06-28 23:52:25

제 올타임 선수들이네요

전주원 유영주 천은숙 정은순

제가 유일하게 여농 보던 시기의 스타들이죠

기량은 정은순이 제일 좋았지만

유영주 특유의 파이팅 때문에

유영주를 제일 좋아한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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