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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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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6-24 15:51:02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에 글을 써봅니다. 모든 분들이 그러하듯 저도 개인사를 털어놓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스스로 너무 나약하다는 걸 깨닫고 단수가 아니기 위해 조언을 구해보고자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일이지만, 여기가 생각이 났네요. 우울한 이야기이니 좋은 날씨에 기분 가라앉기 꺼려지시는 분들은 읽지 않으셨으면 해요.

가정사를 조금 털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저의 영웅이 죽었거든요. 이렇게 눈물이 나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영락없는 어린애네요.
어릴 때부터 저희 아버지께선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개인 의지로요. 되돌아보면 무기력증에 갇혀서 흐리멍텅하게 화면만 바라보던 모습만 떠오릅니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면서 모두가 갖기 마련인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묘한 감정으로 변해갔습니다. 누가봐도 멋없는 행동인데, 내심 아버지를 존경하고 싶었거든요. 유일하게 내세울 점이었던 아버지의 조그마한 장점들을 극대화 시켜서 자랑하고 다녔거든요. 항상.

당연히 어머니께선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하셨고, 6년간 말 한마디 없이 한지붕 밑에서 지내다 그만해야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땐 아버지 편을 들고 싶어서 어머니 탓을 했는데 이제보니 둘도 없는 불효자였네요.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렸지만, 싫어하는 이의 모습을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건 항상 충격적인 경험입니다. 입버릇처럼 될 대로 되겠지를 연발하던 모습이, 계속 이렇게 사실거냐는 자식의 조심스런 질문에 나도 모른다고 내던 역정이, 그냥 빨리 죽으면 되지라던 말이, 무심코 제 입에서 스며나올 땐 유전과 환경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타지로 대학을 오면서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건강만 하시면 내 인생은 알아서 살아보자며 시작한 제 모습은 곧 기댈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며 24시간을 돈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과외든 아르바이트든 뭐로든 연명하면서요. 어디서 학교 다닐 돈을 구해왔을까 하는 의문은 당신의 카드깡이었음을 알게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그래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잡아보려던 끈이었어요

이삼년도 아닌 거진 십년간 당신은 그 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하셨고, 스스로를 계속 배신하다보니 세상이 당신을 배신하셨습니다. 뇌졸중이 와버려 원래 하기도 싫어했던 운신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게 되었고, 4평짜리 쪽방을 전전하던 생활도 덩달아 끝났습니다. 일찍 취업한 동생에게서 돈을 타서 아무것도 안하는 생활을 다시 하려 했으나, 세상이 벌을 준 것일까요. 동생은 자신이 몇년 간 번 돈을 허비하는 모습을 보고 질려버렸고, 갈 곳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던 당신은 정말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알음알음 걸음을 절며 찾아간 형제들의 집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짐짝이라면서요. 얼마나 모멸감을 느끼셨을까요.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요. 아, 얼마 전엔 합병증으로 망막 출혈이 와 눈이 안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어떡할 거냐는 물음에 노숙자로나 살지라는 대답을 듣고는 더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오늘 아버지가 계신 고모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애비 맡겨놓고 일언반구도 없냐고. 언제부턴가 질렸던 걸까요, 유년기부터 들어온 각자 알아서 잘살자던 당신의 말씀대로 따로 인생을 살자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저 말을 듣고는 눈물이 났습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도 모르는 눈물이 하염없이요. 마음 속에서는 아직 끈을 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주 어릴 때 존경하던 모습에요.

그래서 이젠 정말 그만 두려고 합니다. 연봉이 갓 2000만원 남짓하는 동생이 얼마나 더 당신께 돈을 드려야 할까요. 밥먹기 힘들어 라면으로 하루를 보내는 나에게 여력이 없냐는 당신께 얼마나 노력을 더 해야 할까요. 울면서 전화한 어머니께선, 부모로서 못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진 못할 망정 헛소리를 한다며 역정을 내셨고, 스스로 독립해서 잘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저는 아직까지 부모님께 기대는 어린아이임을 자각하며 더 펑펑 울었습니다.

네 그리고 영웅을 보내려고 합니다. 동생과 저를 위해서요. 이젠 뭐가 어떻게 되든 더 이상 모르겠어요. 아니,알겠어요. 우리를 지속적으로 배신해온 건 당신이고, 세상이 등을 돌린 것도 당신이라고요. 이젠 다신 못봤으면 좋겠단 생각도 드네요.

우울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타 달게 받겠습니다. 한참 적고 보니 이기적인 제 마음이 가라앉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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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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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16:26:30

사실 정말 가족 관계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어디가서 말도 못하고...
어떤 결정이든 신중해지시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의 존재는 모르지만 글 쓰신 분 삶을 응원할게요

WR
1
2019-06-24 20:16:23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감정따라 쓴 글인데 공감해주셔서 힘이 되었어요!

2
2019-06-24 16:39:30

글 읽으면서 엘스티르님께서 그간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힘드실지 가늠하기 조차 힘이드네요. 하지만, 세상은 또 살아가야하는 것이기에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는 대나무보다 갈대가 더 강한 것처럼 가족간의 일은 정답도 없는 문제라 상황에 따라 마음가는대로 어려우시겠지만, 조금은 편하게 마음 먹으셨으면 합니다.

WR
1
2019-06-24 20:17:15

감사합니다. 혹자는 인터넷 상의 글 몇줄이라고 하겠지만, 정신없는 글에 정성어린 대답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3
Updated at 2019-06-24 21:01:47

힘드시겠어요. 엘스티르님은 맑은 사람이시네요. 자책하지 마세요.
남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칭찬해주세요~
잘 살아 왔다고. 잘 하고 있다고.

WR
2019-06-26 20:15:20

허밍님 댓글 정말 감사해요. 넷상이라 형용이 얼마 붙지 않지만 진심으로요.매냐분들 덕에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2
Updated at 2019-06-24 21:59:45

글을 읽다보니 저도 비슷한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저는 엘스티르님보다 심하진 않지만, 어느정도 겪고있습니다. 아니 겪어왔습니다.

 

사람이 살면물 망가지는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현실에 대해 눈을 돌리는거죠. 

물론 불가항력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모든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래서 술도 싫어합니다. 엘스티르님의 그분과 비슷한 저의 그분은 젊었을적, 술을 현실을 회피하는데쓰시더군요. 정말이지...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것과 매일매일을 마주하기가요..

 

한편으론 죄책감이 드실만도합니다. 

엘스티르님은 칭찬을 받고싶으셨던 거겠죠.

 

정말 힘드신거 저도 공감합니다. 무엇인가 풀 수 없는 실타래가 있는듯한 그 느낌...

그 실타래를 풀려면 하나하나 달라져야하는 모습이 보여야하는데, 여지껏 삶을 살아오신분께 그것은

너무나도 큰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합니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설사 나를 바라보는 거울속에서 무심코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더라도, 저는 인지를 하고 있으니

괜찮타고 생각합니다. 엘스티르님도 그러실거에요.

 

힘내요 우리.

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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