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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가 특산품 같은 나라,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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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17:41:29

태국의 근대사를 보면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가 쿠데타입니다. 한국 현대사도 두 차례의 군부 쿠데타로 홍역을 겪었는데, 태국의 근대사를 살펴보면 무려 19번이나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전제왕정을 폐기하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1932년의 쿠데타를 필두로 총 19차례의 쿠데타가 있었고,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쿠데타는 2014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5년간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금년 2월 새로운 헌법 하에서 총선거가 있었습니다. 총선거 결과,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 육군대원수 쁘라윳이 총리로 재선출됩니다. 정치적 자유가 회복(?)되었다곤 하나 여전히 문민통제라기 보다는 군부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태국의 근현대사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왕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현 태국의 왕조는 시암왕국으로 현 국왕의 시조는 1782년 짜끄리 왕조를 열었습니다(라마 1세). 짜끄리 왕조는 라마 4세 당시 제국주의의 물결을 따라 영국과 프랑스와 만나게 되었고,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나무 외교를 펼칩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라마 5세는 프랑스와 영국을 사이에 두고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했고 노예제를 폐지하는 등 근대화를 이룩합니다. 방대했던 영토 중 일부를 떼어주기는 했습니다만,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식민지화를막았던 그의 훌륭한 외교는 라마 5세를 훌륭한 국왕으로 칭송받게 했고, 짜끄라 왕조의 유이한 대왕 칭호를 받습니다(쭐랄롱꼰 대왕). 하지만 이러한 짜끄리 왕조의 전제정도 1932년 군부 쿠데타로 인해 무너지게 됩니다.

 

프랑스 군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던 유망주 쁠랙 피분송크람은 무혈혁명을 일으켜 왕당파를 물리칩니다. 그리고 당시 국왕이었던 라마 7세를 폐위시키고 스위스 유학 중이던 라마 8세를 국왕으로 추대합니다. 입헌군주제였지만 파시즘을 신봉하던 피분은 군국주의를 모델 삼아 폭압적인 정치를 실시합니다. 그 스스로 화교 가문이었지만 중국어를 사용하는 중국계를 탄압하였으며, 소수민족을 배격하였습니다. 더불어 2차대전 시기에는 일본 세력에 가담해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날리고 추축국으로 싸웠습니다. 동시에 친일적 행각을 서슴지 않았고,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의 태국이 친일적 성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패전 이후에도 잘 살아남은 피분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척하며 미국의 원조를 받고 반공노선을 띄는 정치행보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1958년 피분의 측근은 왕당파와 연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피분은 쫓겨나 일본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군부독재자는 쫓겨났으나 그를 쫓아낸 것은 또다른 군부독재자였죠.

 

이러한 격변하는 정치상황 속에서 태국의 국왕은 라마 8세에서 라마 9세로 넘어갔습니다. 라마 8세는 의문사(타살)를 당했고, 그의 동생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라마 9세는 입헌군주제 하의 왕이기 때문에 실권은 없었지만 국가의 상징으로써, 권력 대신 권위로써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건강이 받쳐줄 때는 1년 중 1/3이 넘는 기간을 민생행보를 보였습니다. 단순히 고장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을 찾아가 고충을 알아보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습니다. 태국의 주요산업인 농업을 증진시키기 위해 왕실 소유의 토지를 공적으로 사용하도록 허가하기도 했으며, 왕실 재산을 국민 복지에 사용하는 등 정말로 왕국의 어버이다운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라마 9세의 행보는 그를 대왕으로 칭송하게 했으며(푸미폰 대왕), 그의 허가가 없다면 쿠테타에 성공한 세력조차 순순히 물러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국가의 상징이자 심장으로서 국가의 어려운 일(쿠데타)을 처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들로부터 왕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논외로 하면 태국의 왕가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많은 재산을 축적해왔습니다.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태국 왕실의 재산은 100조에서 350조까지 다양한 추정치들이 있습니다. 추정치의 최소 규모라고 해도 매우 거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푸미폰 대왕이 내놓은 왕가의 재산은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인 부의 일부를 내놓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태국은 매우 심각한 빈부격차를 겪고 있습니다. 즉, 왕가에 대한 존경, 왕가의 경제적 선정과는 별개로 일반 국민들은 경제적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1997년 태국 역시 아시아 경제위기를 벗어날 순 없었고, 이는 경제적 취약 계층을 강타합니다. 가뜩이나 빈부격차로 인해 삶이 빡빡해 어려운 태국 국민들은 외환위기로 때문에 더욱 고생을 겪게 됐고 이는 포퓰리스트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바로 탁신 총리입니다. 2001년 탁신은 기존 태국정당들이 무시했던 농촌지역 공략을 통해 집권세력이 됐고, 농촌지역 빈곤문제 해결, 외환위기 타개, 의료보험 확대실시, 마약퇴치 등의 활동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5년 압승으로 재선까지 성공했던 탁신이었지만 기존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탁신은 해외에 나가있던 동안 쿠데타로 정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게다가 쫓겨난 이후 탁신의 숨겨둔 비리가 밝혀지면서 탁신 정권의 정당성도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태국 정치세력들이 무시해왔던 민중에 대해 펴왔던 정책들로 인해 태국은 크게 두 세력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소위 붉은 셔츠와 노란 셔츠의 대결입니다. 탁신을 지지하고 빈부격차가 해소되기를 원하는 빈민/농민 중심 세력인 붉은 셔츠와 왕당파를 기점으로 한 기득권의 노란 셔츠(왕실의 색깔)는 지금도 태국 정치를 논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포인트입니다. 외환위기와 탁신의 집권, 그에 대한 기득권의 반발을 겪는 동안, 푸미폰 대왕은 늙고 병들어 민생행보를 할 수 없었고, 조금 왕실의 권위가 약해져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푸피폰대왕이 2005년 쿠데타를 용인했다고 해도, 이후 총선에서 탁신계는 꾸준히 승리했고 2011년에는 탁신 총리의 여동생 잉락 총리가 집권하기도 했습니다. 즉,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기는 했어도 여전히 탁신 세력은 일반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도 2014년 쿠데타로 뒤집히고 맙니다. 가장 최근의 쿠데타는 잉락 총리를 무력화시켰고, 향후 5년간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군부정의 실시였죠.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총선이 실시됐습니다. 하지만 2019년 총선은 많은 개표소에서 집계된 표의 수가 유권자 수를 초과하는 부정선거임이 드러났습니다. 심한 곳은 투표율이 200%에 이르렀습니다. 말도 안되는 부정선거인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쁘라윳 총리는 군부정에 이어서 재집권에 성공합니다. 민정 이양을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군부정에 가까운 것이죠.

 

더욱 심각한 사안은 개정된 헌법입니다. 그전 헌법에서는 상원의원의 절반을 보통선거로 선출했었지만(100%가 아닙니다), 이제는 단 한명도 유권자들이 뽑을 수가 없습니다. 100% 군부에서 임명한 사람이 상원의원이 되는 것이죠. 하원에서 아무리 군부반대세력이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상원에서 그 법안을 폐기시키면 하원 집권세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구조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14년의 쿠데타를 푸미폰 대왕이 인정했고, 악화일로의 개헌을 현 국왕이 승인해버린 것입니다.

 

생존 당시 가장 긴 즉위기간을 자랑하던 푸미폰 대왕은 2016년 지병 때문에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아들인 현 국왕 와치랄롱꼰이 이어받았습니다(라마 10세). 문제는 새로운 왕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라마 10세는 기득권이 싫어하는 탁신과 친하다는 설도 있으며, 부왕과는 반대되는 방탕한 사생활로 인해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즉, 국민적 인기가 떨어지는 국왕입니다. 아무리 헌법에서 국왕의 신성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왕가를 모독하는 사람은 최대 15년형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친탁신세력을 바탕으로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에게 있어 작지 않은 위협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변화의 기조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나 정치가 크게 변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국민의 92~95%가 불교 신자이며, 태국의 국민정서가 불교적 세계관(윤회)에 기반한 사눅과 나아를 띄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눅은 '잔잔한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현생, 현재의 즐거움을 매우 중시합니다. '나아'는 갈등을 회피하고 조화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즉, 윤회적 사상을 배경에 두고 설명하면 지금의 나의 빈곤한 신세, 어려운 환경은 어쩔 수가 없으니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을 띄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은 안분지족 같은 현생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는 개혁보다는 안정, 최선을 찾기 보다는 주어진 선택지의 차악을 고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 정치 행위를 하기 보다는 주어진 선택지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 행위를 모색하게 만듭니다. 이는 총선거에 참여하는 투표율이 평균적으로 80%를 넘는다는 점에서 높은 정치참여율을 보여주지만, 현실적으로 여전히 군부 쿠데타의 위험이 상존하는 역설을 설명해줍니다.

 

(이러한 문화는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문화적 풍토를 만들기도 합니다만, 정치적 상황에서는 역효과를 불러오는 셈이죠.)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패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발전된 나라입니다. 넓은 영토와 농업생산력, 수출주도형 경제, 발전된 관광산업 등으로 동남아에서는 가장 발달된 나라입니다. 하지만 정치는 늘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왕가가 있다고는 해도, 그 왕가가 기득권을 옹호하고 빈부격차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그 존경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로인해 현재의 붉은 셔츠와 노란 셔츠의 대립을 초래했습니다. 하지만 태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민정서로 인해 급진적인 개혁은 일어나기 힘들 거 같습니다. 외려 다시금 쿠데타가 발생해도 이를 수용하고 왕가의 선택만을 바라보는 현재의 경향이 지속되지 않을까 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태국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왕가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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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6-16 00:50:05

 "지금의 나의 빈곤한 신세, 어려운 환경은 어쩔 수가 없으니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갈등을 회피"

이 부분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피곤하게 사는게 안타깝기도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이 정도 발달한거 같긴 합니다. 우리는 비교적 잘 사는 나라인데도 헬조선이라 하는데, 태국은 사정이 훨씬 안 좋은데도 어쩔 수 없으니 개선하지 말고 현재나 즐기자는거네요. 

2019-06-17 15:21:14

태국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는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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