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바쁜 관계로 주말에 새로운 글을 올리지 못할 거 같았는데, 외로운 오클팬님이 제 글을 언급하면서 글을 올리겼기에 그에 대한 대답의 일환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에 대한 마무리 글은 며칠 후에 올리겠습니다.
국민주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국가권력의 정당성은 나라를 통치하는 권위가 국민들의 동의에 기초하고 있을 때 얻어집니다. 정책의 결정이 가져 올 내용의 결과적인 측면보다 그 과정에 국민들이 공정하게 참여하는 것에서 통치 권위의 정당성이 부여됩니다. 그런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정책은 그것이 초래한 결과가 불공정하더라도 정당성을 갖기 때문에 국민들은 승복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의 국가권력이 위와 같은 의미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1961년 5.16 쿠데타와 1980년 5.18 사태 이후의 군사정권은 국민의 동의 절차 없이 권력을 획득한 경우입니다.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국가권력은 거의 대부분 적합성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통치행위에서 결과의 질적인 측면이 절차적 과정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통치권위의 명령 혹은 정책이 국가와 사회에 이로움을 주기 때문에 국민들이 수용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자신들의 통치행위가 국가이익과 발전에 적합하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짧은 글을 통해 현대 중국에서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적합성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승리하고 중국 본토를 차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권력의 정당성에 있었습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와 미국의 무제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의 민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지지를 얻었던 공산당에게 패퇴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미국은 베트남에서도 같은 실패를 반복합니다.)
당시 중국의 국민들은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산당의 업적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공감대 형성은 국민이 공산당 지배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강력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신 중국 건국 이후 마오쩌둥은 모든 정책과 결정들이 대중으로부터 도출되고 대중에게 검증되어야 한다는 군중노선을 지배이데올로기로 공식화하며 이후 본인 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빈번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혁명동료들에 비해 압도적 권위를 확보한 마오쩌둥의 초월적 지위는 권력 내에서 견제와 균형의 부재로 연결되었습니다. 자원통합과 공업화 추진이라는 대의로 시작되었던 1958년 대약진 운동과 1964년 삼선건설 전략 등은 중국 경제의 구체적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추진된 대 실패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대중은 국가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마오쩌둥의 권력을 위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되었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은 인민의 자발적인 동의의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인민을 핑계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해 나간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연이은 정책 실패에도 마오쩌둥은 지도자의 위상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군중을 부추김으로써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독재 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의 통치권력은 정당성은 물론이고 적합성마저 잃어버려, 중국은 인구만 많았지 모든 면에서 낙후되고 힘을 잃은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사망 후 중국의 최고권력자에 오른 덩샤오핑은 공산당 지배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정당성보다 적합성에 집중했습니다. 마오쩌둥 시대 문혁에서 적합성을 버린 왜곡된 정당성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몸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사회체계를 구축하여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인민들에게 경제적인 실익을 제공함으로써 공산당의 통치권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덩샤오핑 이론의 핵심입니다. 덩샤오핑에 따르면 공산당의 임무는 전심전력으로 인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인민의 이익이 당원의 목표의 기준이고, 개혁의 성공과 경제발전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당의 일당지배가 지속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성장을 통한 인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은 인민들이 공산당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경제성장은 기존의 공산당 지배질서를 강화하는 차원에서만 강조되기에 경제성장에 동반되는 사회적 자유, 언론자유 및 정치적 자유는 여전히 탄압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일인지배가 개인의 오판으로 국가에 재앙적 피해를 초래했다는 교훈에서 일인지배체제가 아닌 집단지도체제로 구조변경을 단행하고 지도체제 구성원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지배의 합리성을 확보하려 했고, 지도부 충원 및 인재양성 과정을 제도화함으로써 공산당 지배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런 성과 때문에 인민들의 동의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경제 사상에 대한 의문 속에서도 덩샤오핑은 생전과 사후에 서방의 학자들에게로부터 민주주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대변혁을 이룬 위대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습니다.
덩샤오핑의 권력을 이어받은 장쩌민과 후진타오 역시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경제발전과 국가 위상 제고라는 성과를 통해 공산당의 지배를 정당화했습니다. 장쩌민은 2000년 3개대표이론을 통해 자본가들의 입당을 허용하며 공산당을 계급정당에서 집권정당으로 전환시켰고, 후진타오는 2007년 개인의 사적소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물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집권시에는 덩샤오핑 시대에 지나치게 강조된 적합성 때문에 약해진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헌법질서를 준수하려는 노력 등의 법치주의가 강조되었습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절에는 빈부격차 등 많은 부작용 속에서도 공산당 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단순히 국가위상 강화나 경제성장에 의존하기보다 인민들의 동의를 적극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인 절차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후진타오 정권의 2인자인 원자바오 총리는 틈만 나면 공식석상에서 정치개혁을 언급했고, 미래의 중국은 경제성장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갈수록 열린 길을 걸어갈 것처럼 보였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면서 그 대안으로 중국 모델인 베이징 컨센서스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시진핑 집권 시까지 이렇게 중국은 경제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미국을 바짝 쫓아오고 있었고, 당시 미국은 오히려 지금보다도 중국의 추격에 대해 더 크게 긴장했던 시절입니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외교전략인 도광양회를 받들어 중국의 경제 발전을 우선하면서 서방을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행보를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이어왔고, 군사적으로 굴기를 과시하는 일은 더더욱 벌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2000년부터 2012년사이 동남아에서 크게 증가했지만 그 이유는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만사를 제쳐놓고 임기동안 중동 지역에만 몰두했기 때문이고, 그 이후 금융위기 때문에 미국이 동남아에 신경 쓸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말에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초 국가주석에 오른 이후 중국은 덩샤오핑에서 시작되어 30년에 걸쳐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로 이어진 점진적인 정치개혁과 인사관행 및 후계구도에 대한 투명한 청사진은 물론 제도화된 인재양성 과정까지 눈에 띄게 뒷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시진핑은 전임자인 후진타오처럼 순조롭게 권력을 승계 받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내란에 가까운 권력투쟁이 있었습니다.) 훨씬 엄격해진 사회통제와 함께 그 동안 열띠게 논의되었던 중국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토론도 봉쇄되었습니다.
시진핑은 국가주석에 취임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슬로건으로 제시했고, 재집권 후 경제굴기, 군사굴기, 기술굴기, 우주굴기 등 온갖 굴기를 내세우며 2050년 세계 최강국으로 우뚝 서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세계 패권에 대한 도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시계는 20년 이상 뒷걸음질 쳤습니다. 시진핑은 집권 직후인 2013년 국가안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시대에 역행하는 법들을 잇달아 제정하여 내외국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진핑의 재집권이 있기 직전인 2017년 6월에 전인대에서 통과된 ‘국가정보법’은 시진핑 권부의 통제강화의 결정체입니다.
국가정보법에 따르면 공안부와 국가안전부, 인민해방군의 정보요원은 국가안전을 위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과 외국 단체까지 조사할 권한이 있고, 정보수집을 위해 통신장비, 건축물 등에 도청장치나 감시시설을 설치하거나 압수 수색할 수 있으며 출입 제한장소까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법은 통신장비업체들에게 정부의 정보활동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화웨이 장비에 첩보 활동을 위한 백도어가 심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부분 중국 정부가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시진핑 정부는 2014년부터 일부 지방정부를 대상으로 빅데이터 수집을 통해 모든 시민의 등급을 매기는 사회신용시스템(Social Credit System)을 시범적으로 실시해왔는데 내년인 2020년부터는 국가 차원으로 확대해서 전면적으로 사회신용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의 끝이 어떻게 결말날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중국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사수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걸 믿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중국이 지난 7년처럼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장기 레이스에서 중국이 최종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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