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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늦잠의 기억 (부제: 젊음을 자신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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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0 22:07:01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을 적어봅니다. 

우연히 어제 잠자리에 들기전에 펀게에서 봤던 지각글을 보고 제 인생 최대의 실수 중 하나이자, 끔찍했던 지각의 기억을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때는 2018년 3월 2일 금요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주 3월 5일부터 미국에서 개최되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쥐어짜 데이터를 만들고 발표자료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스토리를 마무리 짓고 마지막 리허설을 동료들과 마친 후 저녁 8시즈음 집으로 귀가하였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 먼저 가있던 수퍼바이저한테 발표본 최종본을 보내주고, 짐을 이것 저것 싸던 와중에 수퍼바이저한테 연락이 오더군요. 데이터를 좀 더 수정하고 보완하면 좋을 것 같다네요. 평소에는 하루 이틀 지나고 나서야 답장이 오던 그 인간이 어찌나 그날은 빠르던지..

 

어영부영 피드백에 맞춰서 데이터를 정리하다보니 어느 덧 시간은 12시가 되었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 탑승까지는 약 7시간 정도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잠을 잤어야 했습니다. 아니, 수퍼바이저의 피드백을 과감히 무시하고 얼른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치만 저는 아직도 제가 그 20대 초반 젊은 날을 살고 있는 줄, 제 스스로의 젊음을 과대평가한채 밤을 새고야 말았습니다. 

 

그치만, 역시 몸은 정직하더군요. 잠시 누웠던 침대에서 눈을 뜨니 창밖에 새들이 지저귀고, 해가 밝은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적어도 5시에는 집에서 나섰서야 했는데, 눈을 뜨니 이미 7시 반이었습니다.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더라구요. 이제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외에는.. 

 

다급하게, 그리고 매우 격양된 목소리로 수퍼바이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생각보다 쿨하게 저를 진정시키더군요. 그리고 당장 다음 비행기를 끊고 오라고 합니다. 다행히 저희 연구소는 교통권을 연구소 공용 시스템을 이용하여 구매하기 때문에 자비를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쿨하게, 마치 영화에서 보듯이 당장 2시간 뒤 LA로 향하는 비행기를 끊고 여행을 마칠 수 있었죠..

 

물론, 학회 다녀와서 수퍼바이저를 비롯하여 연구소 소장 등등.. 아주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처음 발생한 일이라서, 저에게 추가 금액을 부담시키진 않더라구요. 그 이후로 깨달은게 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는 절대 끊지 말 것. 그리고 절대 자신을 믿지 말 것... 몸은 정직합니다. 

 


10
Comments
7
2019-05-20 22:10:26

글이 재미있어요
아찔하고 무시무시한 추억(?)이시군요.

WR
2
2019-05-20 22:16:52

어찌나 밖에서 들리는 새 울음소리가 얄밉던지요... 그 날 이후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1
2019-05-20 22:46:13

시험기간 밤새고 잠깐 눈붙였다가 새소리에 눈뜰때...진짜 끔찍하죠 공감합니다

WR
2019-05-20 22:52:03

잠깐 눈을 감고 등을 뉘는 순간... 끝난거죠

1
Updated at 2019-05-20 23:41:24

전 좀 다른 이야기인데...

 

예전에 미국의 아주 큰 아웃도어 브랜드 부사장과 미팅을 잡았는데, 같이 가기로 한 사수가 몸에 문제가 생겨 미국에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그 때 제가 대리였는데, 혼자 미팅을 끌고 나갈 일이 걱정되어 밤새 잠도 못자고..대리 나부랭탱이가 그 대기업 부사장을 독대하려니 너무 긴장되서 밥도 안들어가더라구요. 제가 진짜 긴장을 안하는 스타일인데도요.

 

미팅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나갔어야 했는데, 영어에도 자신감이 좀 없어서 밤새 1인 2역을 하며 스크립트를 만들고 막 별짓을 다 하다가..이것 저것 준비하고 누우니 2시...근데 너무 긴장되니 잠도 안와서 바닥에 누웠다가 침대에 누웠다가 욕실에 누웠다가 별 쌩쑈를 다하다가 새벽 6시에 잠이 들었고...어찌어찌 7시에 일어나서 미팅시간을 맞추기는 맞췄어요. 시차에 1시간 밖에 못자고 물 한잔 마시고 미팅 들어갔더니 제 얼굴보고 뭔 일 있었냐며...ㅋㅋ


근데 제가 만든 스크립트는 쓸 일도 거의 없었고, 그냥 무난하고 무난하게 3시간여의 미팅을 마쳤습니다.

항상 현실은 걱정한 것 보다는 낫더라구요.

WR
1
2019-05-20 23:43:27

엄청 긴장되셨겠네요! 사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회 발표 자료 준비하면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근데 막상 발표 당일이 되니까 큰 질문없이 조용히 끝나더라구요. 

 

항상 사람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고민을 일삼는 것 같습니다.

1
2019-05-21 06:51:36

그러한 걱정과 고민 시행착오를 통해 지금의 글쓴이 님이 있는게 아닐까합니다.
이미 글에 열정이 묻어나는 모습에 훈훈하네요.

WR
2019-05-21 15:18:39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19-05-21 09:47:18

늦잠 특징 : 몸이 가볍고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새 지저귀는 소리 들림

WR
2019-05-21 15:21:03

항상 예외없는 공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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