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NBA-Talk
Xp
Free-Talk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야기: 1편-태양이 사라지자 별들의 전쟁이 시작됐다

 
16
  2177
Updated at 2019-05-03 19:33:48

 

태양은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만물에 생명을 안겨준다. 태양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나 태양은 영원히 하늘에 떠 있지 않다. 태양이 저물면 밤의 시간이 시작된다. 밤은 별들의 시간으로, 별들은 밤하늘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 빛을 내다가 사라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랬다. ‘알렉산드로스라는 거대한 태양은 그리스를 넘어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정복했고 여기에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의 나이 불과 만 32살의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왕국이 가장 자기를 필요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세운 거대한 왕국은 이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역

 

문제가 있었던 마케도니아 왕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끌었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급격하게 성장한 국가들은 내부적으로 치명적인 결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마케도니아 역시 마찬가지. 왕국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고 이 과정에서 문제점들 역시 빠른 속도로 생겨났다.

 

일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부터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그 결점은 다름 아닌 피로불만이었다.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나선 군대는 오랜 원정에 지쳤다. 이들은 결국 인도에서 파업을 일으키면서 왕에게 저항했다.

 

이에 대왕은 어쩔 수 없이 인도에서 회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일로 자신의 군대를 불신했다. 페르시아 영토로 돌아오자마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존 마케도니아 병사 만 명을 고향으로 강제 귀향시켰고, 정복지에서 병력을 보충했다.

 

문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은 군대의 불만을 샀다. 오늘날 우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케도니아라고 하면 대부분 팔랑크스 대열을 떠올리기에 사리사를 사용하는 보병대인 페제타이로이를 마케도니아의 주력 부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장 잘 썼던 부대는 기병, 즉 헤타이로이였다. 그리고 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은 방패 부대인 토라키타이도 있다.

 

토라키타이는 본래 필리포스 2세 때 창설된 부대로 엘리트 방패 보병대인 히파스피트스트스가 원형이다. 이들은 기존 팔랑크스의 보병 부대들보다 장비가 가벼웠던 까닭에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으며, 완력과 체력, 왕에 대한 충성심 등이 대단했다.

 

3,000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이후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거나, 대왕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마다 목숨을 다 바쳤던 근위대였다. 이들은 하루 60km 이상을 행군했으며, 사막과 눈 덮인 산등성이 등을 통과했을 정도로 엄청난 전투력과 충성심으로 무장된 무대였다. (그리고 이들은 나이가 매우 많았다. 기원전 316년 당시 토라키타이에 소속된 병사 중 환갑 이하였던 병사는 없었다. 대부분이 일흔이 넘었다)

 

그러나 앞서 상술했듯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지에서부터 얻은 병사들을 기존 병력에 추가시켰는데, 이는 근위대였던 토라키타이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인과 박트리아인으로 병력을 보충했고 이들에게 기존 마케도니아 방식을 싸우도록 훈련했다.

 

이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방식은 엄청난 명예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쳤던 토라키타이를 자극했다. 그동안 토라키타이는 대왕이 페르시아인을 고위 관리로 기용하거나, 페르시아의 복색이나, 궁정 의식을 도입하거나, 대왕이나 지휘관들이 아시아 여자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무리하게 점령지에서부터 병력을 보충하고자 하자 병사들은 이에 거부했다.

 

일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가 그를 도와줄 것이기에 병사들은 한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을 이집트의 아몬 신의 후예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대왕은 이 소문을 오히려 듣기 좋아했었던 까닭에 병사들이 이를 비하한 것이라고 봐야만 한다.

 

이는 당연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분노를 샀다. 격노한 왕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병사들을 해치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즉결 처형했을 만큼 더욱 강압적으로 군대를 통솔하고자 했다. 이후 페르시아 장교들과 아시아 출신 부대들로 토라키타이를 보충하는 조처를 취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페르시아 출신의 신하들이 기존 페르시아 왕들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허용하는 인사법인 입에 입을 맞추는 인사법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와 동시에 자신을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토라키타이를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른바 토사구팽 전략이다.

 

 

마케도니아의 기병대인 헤타이로이

 

문제는 토라키타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헤타이로이인 경우 병사들보다 지휘관이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본인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과감한 전술을 구사했다. 그만큼 헤타이로이에 대한 신뢰가 엄청났는데, 자신이 신뢰하는 부하들은 반드시 기병대장으로 승급시켰다. , 기병대장이 된다는 뜻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최측근이 된다는 말이자 동시에 고속 승진이 예약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병대장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많은 보병대장이 기병대장으로 승급되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다. 기병대장으로 승격되지 못했던 보병대장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기존 기병대장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측근 중에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방식 자체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크라테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측근들에게도 페르시아 및 아시아 출신들의 여자와 결혼을 시켰는데, 40대 후반에 접어들었던 크라테로스는 왕의 이런 방식에 매우 불만을 품었다.

 

크라테로스는 페르시아의 왕족 출신인 아마스트리스를 신부로 맞이했으나, 보수파에 속했던 그는 자신의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페르시아의 풍습을 받아들이는 쪽은 너무 나아가는 것 같다고 직언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런 간섭에 분개했고 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돌아가게 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최측근인 헤파이스티온이 죽으면서 그의 최측근 중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는 페르디카스와 그리스인인 에우메네스 정도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이 모두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문제점은 바로 파격적이었다는 점이었는데, 에우메네스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리스 출신인 에우메네스는 본래 필리포스 2세의 왕궁 서기관이었다. 필리포스 2세 사후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도 그는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런 에우메네스의 다른 면을 높이 평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에게 군대의 업무를 맡기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다름 아닌 기병대를 지휘했다.

 

에우메네스가 보병대가 아닌 기병대를 이끌었던 점은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앞서 상술했듯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오랫동안 따랐던 보병대장들조차 기병대를 이끌지 못했던 이들이 많았다. , 그리스인인 에우메네스가 보병대가 아닌 기병대를 지휘했다는 사실은 주변 이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이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처사는 기존 마케도니아 인사들의 불만을 샀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가 아니다. 이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들이었을 뿐이다. 마케도니아 인사들에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지, 지배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리스인인 에우메네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크라테로스를 비롯한 기존 마케도니아의 보수파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겉으로는 마케도니아를 따르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언제든지 그들을 배신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 마케도니아에는 안티파트로스의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룩한 거대한 왕국은 외부 세력이 아닌, 내부 세력에 의해 언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취약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을 시작으로 왕국은 빠르게 분열됐다.

 

 

알렉산드로스 4세로 추정되는 동전

 

불확실한 후계자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원정 도중 허파에 화살을 맞고 죽을 뻔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바빌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이 죽었다. 이 일로 거대한 상실감에 빠졌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물들을 지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고열에 시달렸고 일주일 뒤에는 말을 하기 힘들었으며,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자 병사들은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그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사망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아마 모기에 물려서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나 싶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의 후계자 문제가 불확실했다는 점이다. 이 마케토니아의 왕은 동성애를 좋아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여러 명의 사생아가 있었지만, 적자가 없었다.

 

페르시아의 호족인 옥시아르테스의 딸인 록사네를 통해서 낳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적자 역시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태어났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전에 드넓은 영토를 물려받을 만한 정통성을 가진 후사가 없었다. 여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뚜렷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던 탓에 사후(死後) 조치가 문제였다.

 

왕국을 이끌어갈 왕이 없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결국, 급한 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인 필리포스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필리포스 3, 그리스어로는 아리다이오스다.

 

그러나 필리포스 3세는 정신지체 증상이 있었으며 정통성에 있어 약점이 있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르던 장군들이 정한 결론은 록사네 배 속의 아이가 남자아이라면 이 아이와 필리포스 3세를 공동 왕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딸이면 필리포스 3세가 단독으로 왕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록사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적자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았다. 그리고 왕국은 두 세력으로 분열됐다.

 

 

페르디카스

 

공동 왕의 시대, 그리고 장군들의 야심

 

마케도니아 왕국은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파인 아이가이 왕조 아래에서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려는 페르디카스의 제국 통합파와 제국을 나눠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제국 분할파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는 페르디카스였다. 군 직책상 헤타이로이의 최선임 천인대장 중 서열이 가장 높았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받은 왕의 인장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의미는 왕이 회복할 때까지, 또는 왕이 죽은 뒤 다음 왕이 등극할 때까지 그가 왕을 대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는 초반부터 위험에 시달렸다. 바로 보병대장인 멜레아그로스가 필리포스 3세를 앞세워 페르디카스를 공격했다. 페르디카스를 비롯한 그의 측근들은 도망쳤고 에우메네스만 남아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자 했다.

 

이후 록사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적자를 낳자 힘의 균형은 페르디카스에게 넘어갔다. 페르디카스는 자신을 죽이려 한 멜레아그로스를 살해하고 전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두 왕이 지배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이제 팽창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운 상태가 됐다.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국인 마케도니아에서는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권력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분열을 알리는 신호탄을 쏜 곳은 다름 아닌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3
Comments
2019-04-20 12:30:53

예전에 2004년에 봤던 콜린 파웰이 나오는 영화 알렉산더가 생각나네요. 가우가멜라 전투 하나는 볼만 했는데...

2019-04-20 15:03:30

에우메네스 하니까 히스토리에가 생각나네요. 연재속도가 극악

2019-05-18 18:28:37

감사히 읽었습니다.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