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득형질의 유전 - 라마르크는 부활하고 있는가?
며칠 전에 제가 올린 범고래와 백상어에 대한 글에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이 있어 거기에 대한 답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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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미국 에모리 대학교의 레슬러 교수와 디아스 박사는 특정 냄새에 대한 생쥐 공포가 그 새끼들의 뇌에 각인(imprint)을 남기는 과정을 연구해 그 결과를 2014년 1월에 Top 저널인 Nature Neuroscience에 출판했고, 이 논문은 곧바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들 연구진은 수컷 생쥐를 아몬드 냄새가 나는 화합물인 아세토페논에 노출시킨 다음, 생쥐의 발에 전기쇼크를 가했습니다. 이 실험이 반복되자 생쥐는 전기 쇼크 없이 아세토페논 냄새만 맡아도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연구진은 얼마 후 바로 그 수컷 생쥐를 일반 암컷과 교배시켰고, 그 결과로 새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새끼들은 자라서 아세토페논 냄새를 맡으면 소리를 내며 기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새끼가 성장하여 낳은 후손들도 아세토페논 냄새를 맡으면 지레 겁을 먹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손들 모두 콧속 후각신경구의 뉴런과 연결된 M71 glomeruli라는 구조체가 비대해진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에모리 대학 연구진의 논문이 큰 이슈를 가져온 이유는 생쥐들의 M71 glomeruli가 비대해져 아세토페논 냄새에 겁을 먹은 이유를 후성유전학(epigenetics)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의 화학적 구성단위인 DNA 염기서열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환경에 반응한 게놈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 유전자의 발현이 달라져서 형질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러한 유전자의 발현 변화의 양상이 다음 세대로도 전달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후성유전학은 오래 전에 무시당했던 라마르크의 진화이론을 상기시키는 등 아직도 논란이 많은 주제입니다.
예전부터 동물들이 천적과 동료를 식별하는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학습에 의한 유전적 각인입니다. 갖 태어난 사자의 새깨들은 독사뱀을 천적으로 인식하며 두려워합니다. 약 1만 5천년 전 인간 가까이에 살며 사람이 먹다 남은 찌꺼기에 의존하는 늑대는 개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자신들의 동료로 각인했습니다. 오랜 동안 돼지는 도살되어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일 말고는 다른 이유로 키워지지 않았습니다. 돼지에게 인간이 천적인 것은 분명한데도 집이나 공장에서 기르는 돼지는 자신들이 곧 도살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돼지들은 도살당하는 순간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지만, 도살장에서 탈출해 살아남아 번식에 성공한 개체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도살당하기 직전까지 인간이 그들의 천적이라는 사실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미국 남부에는 수백만 마리의 야생 돼지들이 서식하며 인간의 농작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조상은 유럽에서 공수해온 식용 돼지였는데 도살장에서 탈출에 성공해서 야생돼지로 번식한 종들입니다. 이런 야생 돼지들은 인간을 명백한 천적으로 인식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연선택의 원리로 유명한 찰스 다윈도 동물의 본성이 변하는 것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획득형질의 유전'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다윈이 남긴 문서에 의하면 개와 고양이에 대한 병아리의 천적 인식이 가축화된 환경에서 조상들에게 획득된 경험에 의해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본성으로 변했다고 다윈은 생각했습니다. 다윈이 반대한 것은 일반적인 획득형질 유전이 아니라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 이론이었습니다. 다윈은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이 진화의 주된 원인을 '의도적인 습성의 지속'으로 이해한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윈이 19세기 후반에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이론을 크게 반대한 이유는 습관이나 노력과 같은 후천적인 요인은 본능적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주된 동력이 될 수 없다고 믿어서입니다.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교수로 재직하던 라마르크는 진화에 관한 책을 출판해 체계적인 학설로서 최초로 진화론을 제시했습니다. 라마르크는 지구에 있는 각각의 동물종은 더욱 복잡한 종으로 진화하는데, 그 방법은 부모가 일생 동안 의도적으로 획득한 형질들을 자손에게 물려줌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라마르크는 그의 이론에 대해 학문적 논란이 한창이던 1829년 85살의 나이로 가난하게 죽었는데, 가족에게 언젠가 자신이 이룩한 연구가 재평가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해 자연선택 이론을 발표했을 때, 다윈의 주장은 20년 넘게 일반인들은 물론 학자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멘델의 유전법칙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윈을 비롯한 당시 학자들은 유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고, 당시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인 캘빈 경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진행되기에는 지구의 나이가 너무 젋다는 반론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나이 논란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쓴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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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20세기 이후 충분한 증거가 발견되어 과학에서 검증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윈 이론은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각 종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만 구조적으로 유사한 상동기관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군도의 다른 특성을 가진 여러 종류의 핀치들 같은 생물지리학적 현상을 설명합니다. 그와 더불어 자연선택 이론은 생물의 적응현상을 설명하고, 발생학적 현상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과학에서 결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이전에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화석의 순서, 상동기관, 생물지리학적 현상, 적응현상 그리고 발생학적 현상을 모두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생명현상들은 자연선택이라고 하는 큰 관점으로 이해되고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 이론이 현대 유전학과 모순되는 것과 달리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20세기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이론들과 전혀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전자 중심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20세기 후반에도 환경을 비롯하여 유전자 이외 요인들이 생명체의 발생현상에 미치는 중요성이 간헐적으로 거론되어왔습니다. 특히 21세기에 와서 생명체에 미친 환경적 영향이 후대 자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새로운 연구들이 이어지면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발생과정에서 후성유전적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21세기 후성유전학의 덕분에 우리는 이제 유전자만이 유전을 책임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고, 후생유전학의 연구는 여전히 원인을 추적하기보다는 결과를 나열하는 수준입니다. 후성유전학으로 원인을 설명하려면 발생학적으로 파고 들어가 생식세포 수준에서 적절한 신호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야 하는데 아직 그런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후성유전학이 주목받음에 따라 라마르크가 다시 주목받는 경향이 보입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을 라마르크 식의 진화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입니다.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과 후성유전의 연구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라마르크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생리적 적응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고 주장한 것이지, 환경이 생명체의 유전자 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윈도 라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생물의 일생 동안 겪는 경험이 유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고, 오히려 후성유전학은 라마르크보다 다윈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신기하게도 세월이 지날수록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문화이론과 언어이론 등 사회현상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 이유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복잡한 설계를 설명하는 일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문화적 진화나 언어의 진화 등에서는 돌연변이는 배척되고 획득형질은 전수되는 경향 때문에 라마르크는 생물학적 진화에서는 틀렸지만 언어와 문화의 진화에 대해서는 옳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물론 문화와 언어의 진화는 다윈주의의 정확한 복제품은 아니고 라마르크 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마르크의 이론은 복잡한 유기체에게 유용한 돌연변이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요소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문 사회적 진화과정에서 모든 창조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그 요소입니다. 이에 따라 현대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도 라마르크주의는 발붙일 곳이 많지 않아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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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을 보니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언어의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네요. 이런 간학문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글 참 좋습니다.
비록 문돌이지만 덕분에 글이 쉽게 읽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