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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멸망 2-2 강유의 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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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19:35:28

 

이전에 쓰고 있다가 다 날아가는 바람에 현타가 찾아왔습니다.

다시 적어서 그런지 이전 글보단 내용이 부실해진 것 양해 바랍니다.

 

https://www.fmkorea.com/best/688763576

 

이 글에서 지도를 참조해서 가져왔습니다.

 

전편에서 비의 사후 강유와 진지가 군사/내정 양쪽으로 신권을 분할한 것은 미리 적었지만

처음부터 이런 구조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비의 사후 신권 1인자이던 강유가

비의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비의 생전에 253년 함께 북벌할 것을

맹약했던 제갈각은 군사를 출병시키면서 촉에 사신을 보내 맹약대로 호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제갈각의 요구에 강유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호응했는데, 아직 비의 사후

권력을 다 이양받기도 전에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면서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거기에다 군을

이끌고 나갔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상황은 안좋게 흘러가게 됩니다.

 

결국 강유는 군권을, 내정은 진지가 잡는 이원화 구조가 확립되는데 힘이 실리게 되었고,

황제인 유선 역시 이를 원했습니다. 유선은 그동안 실권을 잡은 강력한 재상들(제갈량, 장완,

동윤, 비의)이 사망하면서 자신이 직접 국정을 주도하고 운영할 수 있는 힘이 강해졌고

이를 간접적으로 투사하기 시작한 것이 황호를 비롯한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습니다.

진지는 어려서부터 환관과 친했고, 유선 역시 신임했기에 내정을 책임지게 된 케이스였습니다.

 

254년 강유는 독중외군사의 직위가 더해졌고, 적도로 군을 이끌고 출병해서 적도현의 장 이간의

항복밀서를 받은 후 군사를 움직여 양무를 포위하고 이에 대응해 나온 대촉 전담군인 기병대,

정촉호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정촉호군은 제갈량 생전부터

촉과의 싸움을 거치면서 위가 촉 전담 부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2만 정도의 기병 중심

부대였는데, 이를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을 죽이면서 승세를 타고 진격해 적도현, 하관현,

임조현 세 지역의 많은 성을 함락시킵니다. 서질과 싸우던 도중 노장 장억이 전사하는

피해도 있었지만, 당시 위의 서북 책임자인 진태(옹주자사에서 정서장군으로 승진)의

군대가 대응하기 전에 대승을 거두고 주민들을 데리고 철수하며 전과를 남겼습니다.

 

강유는 대촉 전담 부대인 정촉호군을 깨부순 이상, 북벌에 더욱 힘을 실으려 했습니다.

255년에 다시 적도로 군을 출병시키려 하자, 군부에선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강유는 반대파와 대면하여 그들을 설득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고, 그와 동시에 반대파의

대표주자였던 장익을 자신의 북벌에 함께 종군하도록 합니다.

 

 

 

255년, 강유는 자신이 기산, 석영, 금성 세 곳으로 군사를 동시에 기동시킨다는 거짓정보를

일부러 흘린 뒤,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진군하는데, 진태는 거짓임을 간파하고 옹주자사

왕경에게 일단 적도로 나아가 자신이 올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강유의 움직임은 빨라서, 부한현에 군을 집결시킨 뒤 그대로 질풍같이 적도로 내달렸고

강유의 번개같은 습격에 왕경은 조수 서쪽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군사 수만명을 잃으며

가까스로 패잔병을 수습해 적도성에 들어갔고, 강유는 성을 완전히 포위합니다.

 

"왕경의 정예병사는 서쪽에서 참패하여 참사를 당했고, 적들의 사기는 더욱 왕성합니다.

승기를 탄 병사는 감당할수 없고, 장군은 오합지졸로 방금 전쟁에서 진 병사들의 뒤를

잇고있어 장수와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으며,농우는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은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는 손을 자른다.' 고 했으니 (중략)" -진태전-

 

위 발언을 한 사람은 강유 인생 최대의 적수였던 등애입니다.

등애는 왕경의 대패 이후 진태에게 그냥 땅 내주고 강유의 기세를 피한 뒤에

후에 땅을 다시 되찾자는 이야기인데, 그 정도로 위군의 피해는 심각했습니다.

옹주 전체가 함락될 위기라 할 정도였고, 단순히 죽인 병사의 규모만 보면

제갈량의어느 북벌보다도 뛰어난 전과였습니다.

 

 그러나 진태는 이를 물리치고 강유와 싸울 뜻을 드러냅니다.

 진태는 이유를 하나하나 들어서 강유를 공격해야 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강유의 군사는 주로 경장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평원에서의 회전을 원한다.

 그러니 왕경은 이에 응하지 않고 성벽을 높이고 존버하면 된다.

 왕경을 놔두어 강유가 이를 격파하면 동진할 길이 열리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식량과 포로를 얻는 것은 물론 주위의 강족과 연계할 길이 확보되어 골치아파진다.

 공성을 위해선 준비만 몇 개월이 필요하나 강유는 그럴만한 틈이 없다.

 본진을 오래 떠나있던 강유군은 장비와 물자가 필시 모자랄 것이다.

 그러므로 동원 가능한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강유를 들이쳐야 한다.

 

 진태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강유는 경장보병 위주의 정예병으로 왕경과 진태의 군대가

하나로 합치기 전의 타이밍을 들이쳐 대승을 거뒀지만, 적진 깊숙이 들어온 상황에서

물자도 풍족하진 않고 공성에 필요한 장비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장익은 강유에게

이미 대승을 거둔 만큼 이쯤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하며, 더 나아갔다간 사족이 되지

않을까 우려를 전했지만 강유는 화를 내면서 이 말을 듣지 않고 적도를 에워쌉니다.

 

적도성에 있던 왕경은 만여 명의 병사로 농성전을 벌였습니다. 공성장비가 빈약했던

촉군의 상황상 효과적인 공성은 어려웠고,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진태는 군대를 정말

빠르게 몰아쳐 순식간에 진창과 상규를 넘었고, 밤을 틈타 고성령을 넘으면서 적도의

동남쪽 산까지 오는데 성공했고, 정찰병의 보고에 강유는 크게 놀랍니다. 적도성 뒤에

적을 맞게 된 강유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진태를 공격했으나 산 위에 자리잡아 지형상

우위를 확보한 진태는 존버하며 강유의 군대에 저항했고, 결국 이를 막아냅니다.

 

그 사이 진태의 지원 요청을 받은 양주(서량)의 군대도 적도로 오고 있었고, 왕경과

진태는 서로 호응하여 강유를 둘러싸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강유는 이를 눈치채고

군을 이끌고 종제까지 물러나면서 위군은 최악의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이 열흘 분도 안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궤멸해 옹주를 잃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지만, 위군 수만명을 날려버리면서 종제까지 확보한

강유는 자신의 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비의 사후 공석이었던 대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자신의 커리어 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2. 뼈아픈 패배

 

자신감이 붙은 강유는 256년 또다시 출병을 계획합니다. 강유는 당시 보리 수확기였던

여름에  재차 원정에 나서며 한중도독 호제에게 상규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출병했는데

위나라나 촉나라나 서로 재정비가 필요한 상황이여서 침공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위의

허를 찌른 출병이었고, 실제로 이번에는 진태 역시 촉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진태 외에도 위에는 강유에 대해 능통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등애였습니다.

당시 등애는 왕경을 구한 공로로 안서장군으로 승진한 상태였는데, 등애는 강유가

보리를 노리고 침공해 올 것을 예측하고 군사를 동원해   적도, 농서, 남안 및 기산에

병력을 배치하여 강유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종제에서 기산으로 진군중이던 강유는 기산에 위군이 배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자

군을 돌려 동정으로 간 뒤 남안으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남안으로 가는 길인 무성산에

등애의 군대가 요충지를 막고 지키고 있었고 강유는 이를 공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우회하여 위수를 건넌 뒤 상규를 향해 진군했고, 등애는 강유를 쫓아 군을 움직입니다.

 

얼핏 보면 가는 곳마다 등애의 수비에 막히고 군을 이리저리 돌린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강유는 처음 출병할 때부터 호제와 상규에서 만나기로 약속해 둔 상황이었습니다.

즉, 강유는 군을 움직이며 등애의 방어 시스템을 테스트했고, 등애가 자신의 방어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게 생각하도록 만든 뒤에 주력군을 이끌고 자신을 따라오게 만든 뒤

상규에서 호제의 군대와 합쳐서 등애의 옹주군을 부숴버리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정작 약속한 호제의 군대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강유는 지쳐버린 자신의 군대만으로 등애의 군대와 싸워 대패했고, 등애전에는

촉의 장수 10여명을 죽였다고 기록하는데, 강유에게 있어 처음 맞는 패전이었습니다.

자치통감과 강유전에서는 이 부분의 서술이 각자 다른데, 자치통감에선 호제가 기일을

맞추지 못했다는 서술이 되어 있지만 진수는 강유전에서 호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고 서술하면서 호제에게 명백하게 책임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호제가 왜 오지 못했는가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로 갈리지만, 이전에 많이 언급되던

호제가 강유를 엿먹이기 위해 그랬다는 설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보입니다. 호제는

대패로 끝난 이 단곡 전투 이후에도 책임을 물어 큰 벌을 받지 않았고, 계속 벼슬살이를

했으며 강유도 호제에게 별말이 없었던 것으로 봐선 뭔가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 나오는 유력한 가설은 군을 이끌고 진격하던 도중 위의 군대를 마주치면서

전투 중 시일이 소요되어 기일을 맞추지 못했다는 설인데, 호제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가설이 제일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만 기록이 없어서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호제의 움직임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강유는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병사들의 원망을 샀으며, 결국 자신의 직위를 대장군에서

후장군으로 스스로 강등시키며 책임을 지게 되는데, 그동안 강유의 엄청난 전과에

숨죽이고 있던 북벌 반대파들은 이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강유는 단곡 전투 패배

이후 서북 지역에 행사하던 강한 영향력과 강족과의 연결고리를 상당부분 잃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는데, 이 상황을 틈타 등애는 방어시스템을 확립시켜 나갔습니다.

 

 3. 고전분투

 

그러던 257년, 위에는 변란이 일어납니다. 회남 지역에서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마소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고, 이 때문에 서북 지역의 방위력은 약화됩니다.

강유는 이를 틈타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다시 북진하는데, 강유가 단곡 전투에서 대패

했다는 기록에도 1년만에 수만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생각만큼 단곡 전투에서 병력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군사 수천을 잃고 장수들이 여럿 날아가는

피해를 입었으나, 주 병력 자체는 살렸기에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마도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분홍색이 강유가 진격한 경로

 

강유는 이전과는 달리, 진천 지방을 목표로 해서 낙곡으로 출병해 진군합니다.

그동안 이쪽 방면으로는 습격이 거의 없었기에 낙곡 방면의 성채인 장성에서는 물자는

풍부했으나 수비병력이 적어 강유의 움직임에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위에서 파견된 대촉 전선 책임자 정서장군 사마망과, 현지 책임자인 진서장군 등애는

강유의 공격에 수비태세로만 일관하며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257년까지는 강유의 군세가 위의 서북지역 군세보단 위였다는 뜻이 되는데,

단곡에서 강유가 엄청난 손실을 입고도 또다시 북진했다면 등애가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음에도 싸움을 회피하고 방어로 일관했다는 것은, 제갈탄의 반란으로

군대가 동쪽으로 동원된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강유의 군세가 자신의 군세보다 강해

싸움을 하기엔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58년이 되자 제갈탄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강유는 별다른 성과 없이 촉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시기 촉에서는 군부 시스템에 개편이 이루어지는데, 군부의

원로인 장익과 요화에게 거기장군을 둘로 나누어 좌거기, 우거기장군의 작위가

하사됩니다. 그리고 강유는 다시 대장군직에 복직하는데, 미우나 고우나 촉한

군부를 이끌 사람은 강유밖에 없었고, 지휘 체계에 혼선이 오는 것을 방지하고

군부의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투항했던 하후패 역시 이 시기에 죽는데, 하후패의 마지막 기록은 255년 강유의

북벌에 참여했던 것. 260년에 관우, 장비, 황충 등과 함께 시호를 받은 것으로

봐서 259년에는 사망한 것이 확실한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255~259년 사이에

죽었다는 뜻이 됩니다. 단곡 전투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있고, 자연사했을 가능성

도 있으나 기록이 없어 사인은 알 수 없습니다. 하후패는 강유가 후장군으로

스스로 벼슬을 강등한 이후 촉의 군부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명목 1인자였는데,

하후패가 사망하며 강유의 복권에 아무런 장애가 없어진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내정을 전담하던 진지 역시 258년에 사망하는데, 진지와 하후패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촉의 군부와 내정 책임자에 공석이 생겼고 강유는 이를 그대로 이어서

양쪽에 모두 실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진지 생전부터 고개를 들고 황제의 신임 하에 세를 키워가던 황호는, 진지마저

사망하면서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해집니다.  강유는 황호를 처형할 것을 황제

유선에게 권했지만, 유선은 이를 거절해버렸고 강유는 성도에 남아 황호의

세력을 꺾을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항상 군을 이끌고 밖에 나가 있던 강유에게

정치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은 황호를 누를 수도 없었습니다.

 

유선이 황호를 강유에게 가서 사죄하게 하는 것으로 일을 덮으려는 모양새를

취하자 강유는 본인이 성도에 남아있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유선에게 나아가

본인은 답중으로 가서 둔전할 뜻을 밝히고 허락을 구합니다. 황호를 죽여서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유션의 반대로 어렵게 되자, 현실적으로 타협을 통해

서로를 위협하지 말고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강유는 본인이 답중으로 가서 주둔하기 이전, 방어 시스템을 개편합니다.

이는 촉의 멸망을 가져오는 스노우볼이 되는데, 유비가 조조에게 한중을 빼앗은

이후 초대 한중독이었던 위연이 시작해 왕평이 확립한 한중 방어 기본 시스템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한중 방어 시스템은 한중으로 들어오는 험준한 요충지에 군사를 나누어

배치하여 시간을 지연시키고 적을 막아내는 전술이었는데, 강유는 이 시스템은

바꿀 것을 권유하며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했습니다.

 

이 방법은 《주역》의 중문격탁(重門擊柝)에는 부합하지만(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진영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게 하고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병을 투입해 빈틈을  노립니다. 적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요약하자면 적이 공격해오면 각 지역의 요충지를 버리고 한중 내부의 주요 거점들에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막아내며 청야전술을 펴고, 적이 물자와 식량이 부족해지면

한중 내부에 있는 주력군과 별동대가 출격해 전후로 포위하고 쌈싸먹자는 전략인데

적을 끌어들여 한방에 일망타진하는 것에 목적을 둔 시스템이었습니다.

 

자신이 답중에 정예병을 이끌고 주둔하면 자연스레 한중과 중앙에 있던 병력이

분산되게 되기에, 한중 곳곳의 요충지에 전부 병력을 배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방어 거점을 단단하게 세우고 그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한중 내부의 방어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고, 중앙군의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쉬워지는 동시에

답중에 있는 자신이 주력군을 이끌고 적을 교란하고 포위섬멸하는 것을 노리고

짜낸 시스템이었고, 이는 적을 끌어들이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기에 그동안의 공세

보다는, 상황을 지켜보며 선수비 후역습에 가까운 전략이었기에 지속되던 북벌에

지쳐가던 촉 내부에서도 반발없이 강유의 전략이 채택되었습니다.

 

강유는 실제로 258년부터 답중에 주둔, 둔전하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강유는 황호를 제거하고 싶었으나 유선의 비호 덕택에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고,

거기에 항장 출신이기에 항상 불리한 위치에서 단곡 이후 전과가 미약하자 전횡을

일삼던 황호가 강유를 견제하기 위해 우대장군 염우와 결탁해 대장군을 교체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강유를 흔들었고 강유는 이러한 움직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아예 성도로 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강유전)

 

 이 무렵 제갈첨과 동궐은 강유가 공적이 없으니 군권을 회수하고 그를 소환해야 한다며

 탄핵하는데, 강유 대신 대장군으로 삼아 군권을 쥐게 할 사람으로 염우를 추천합니다.

 이에 제갈첨과 동궐이 황호와 결탁해서 벌인 일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은 강유의 군권을 회수하고 불러들이는 대신 익주자사를 제수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익주자사 직위 때문입니다.

 

 촉은 명분상 조위를 대신하는 정통 한실의 후계자를 자부했지만, 국토는 사실상

 익주 지역에 한정되었고 때문에 익주자사는 익주 지역에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내정의

 핵심 요직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익주목이었고,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과 비의는

 대장군과 함께 익주자사 직위를 받아 군권과 내정의 실권을 각각 행사했습니다.

 

 즉, 대장군 자리를 회수한다는 것은 강유의 군권을 뺏는다는 뜻이지만, 익주자사를

 주라는 것은 내정의 실권을 강유에게 내리라는 뜻과 같았습니다. 제갈첨과 동궐의

 의도는 아마도 강유와 황호를 동시에 견제하려는 묘책으로 보이는데, 강유의 군권을

 뺏고 황호와 친밀한 염우에게 대장군 자리를 주면서 강유를 견제하는 동시에 황호를

 안심시킬 수 있고 동시에 강유가 촉 내부로 들어와 내정을 잡으며 황호를 견제할 수

 있게 하여 지속되는 북벌 시도를 차단함과 동시에 황호의 전횡도 막으려는 의도로,

 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둘이었으나 이 시도는 유선의 거부로 차단됩니다.

 

 황제인 유선이 이 제안을 거부한 이유는 각각 황호와 강유를 신임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실상은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강유가 군권을 놓고 내정에 개입하면

 강직한 강유의 성격상 이전의 재상들마냥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걸고 나설 것이고,

 그리 되면 자신이 제멋대로 하고 있는 정치를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유선은 자신을 맨투맨으로 마크하던 동윤 탓에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고,

 동윤 사후 장완과 비의를 거치며 자신의 실권을 강화하고 진지가 내정을 잡게 되자

 이미 죽은 동윤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며 진지를 칭찬하고 진지가 죽자 크게 아쉬워

 하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유추할 때, 강유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싫었던 것.......

 

 촉에 강유만한 군사능력자가 없고, 자신의 황권 유지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속내는 자신이 제멋대로 하는데 방해되기에 강유를 대장군 직위를 유지시킨 채

 외방에 쫓아내어 눈에 보이지 않게 했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강유는 답중에 쭉 주둔하다가 262년 마지막 군사 행동을 나서는데, 군을 이끌고

적도로 출병하려는 강유에게 노장군 요화는 되지도 않을 짓을 벌인다며 디스합니다.

결국 강유는 요화의 말처럼 후화에서 또다시 등애에게 패배하며 후퇴하게 되는데,

강유의 대표적인 패배로 단곡과 후화가 언급되니, 큰 패배였다고 보이지만 반대의

시각도 존재하는데, 후화 전투는 기록이 매우 부실해 패배의 원인과 과정, 피해

규모 등의 기록이 없고 전투 장소도 촉의 국경 근처라는 것으로 미루어 큰 교전이

아닌 일종의 국지전이나 대치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고, 강유의 후화 패배 기록이

'종회전'에 나오는 것으로 볼때 허세를 좋아하는 종회의 과장일지도 모른다는

의견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강유가 등애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렇게 강유는 위의 서북 지역에서 끊임없이 싸웠고, 그가 상대한 적수들은

곽회, 진태, 등애, 사마망 등 위의 뛰어난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농서와 옹주 지방

일대를 뒤흔들며 위에 위협을 주는 동시에 위군에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히며

자신의 군사적 재능과 능력을 입증했지만 스승처럼 결국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하면서 울분을 속으로 매번 삼켜야 했습니다.

 

제갈량 생전에 장완, 비의, 동윤등이 남아서 내정을 책임졌음에도 북벌에 필요한

지원이 충분치 못해 매번 물자부족으로 퇴각해야 했던 상황은 강유에게는 더더욱

심각하게 다가왔습니다. 강유는 중앙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거기에 250년을 전후로 죽어나가기만 하는 촉의 인재풀 탓에 제갈량 북벌만큼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매번 북벌만 반복하며 촉의 국력을 소모시킨

강유에 대한 비판도 일리는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강유가 아니고선 위나라에

이만한 피해를 강요할만한 사람은 당시 촉에 누구도 없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강유가 거둔 엄청난 전공에도 위의 엄청난 물량은 피해를

입혀도 계속 꾸역꾸역 이를 회복해내면서 수비할 여력을 계속 확보했고, 마치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소련군 사단을 날리면 뒤에 또다른 사단이 계속 편성

되는 것마냥, 교환비를 무시하는 물량 앞에 결국 버티지 못했다는 점이 첫째고

 

둘째는 이런 강유의 북벌 전과가 제갈량 당시보다 뛰어났음에도, 제갈량 사후

후대 기록이라 관심 없이 그냥 묻혀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냥 강유가 열심히

싸웠지만 역부족이었고, 등애가 강유를 이겼기에 강유보다 뛰어나다는 그저

결과에 입각한 단편적인 평가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등애는 분명 뛰어난 인물은 틀림없으나, 강유와는 주어진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단편적인 비교는 불가능하고, 강유의 의도를 막아냈기에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뒀다고는 주장할 수 있으나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유의 군사적 재능 자체는 정말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강유가 답중에 주둔하며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사이, 위에서는 사마소가

지속적으로 분탕질을 치는 촉을 없애고 사마씨 정권을 확립하려는 계획을 짜고

종회와 정촉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정벌군을 후에 함께 이끌게

되는 등애는 오히려 촉 정벌에 회의적이었고, 종회가 등애를 설득해내고, 주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마소가 정촉을 밀어붙이며 정벌군이 편성됩니다.

 

이미 유선과 황호가 제멋대로 하는 촉의 조정은 그 무렵 완전히 개판이었습니다.

오나라에서 촉에 사신으로 왔던 설후는 촉의 내부 사정을 '촉의 중신들은 자기 보신에

바빠 바른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백성들의 얼굴빛이 채소빛이다' 라고 보고하는데,

사마소가 정촉을 결심한 배경에도 답중에 있는 강유를 잡아두는 사이 검각만 돌파하면

유선을 사로잡고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촉군이 진군했고, 사마소의 예측과는 다르게 검각은 도저히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답이 없던 상황에서, 음평 산길을 올라가는 미친 늙은이가 하나 있었고.........

그는 등산왕으로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길이길이 알리게 되는데.............

 

 정촉과 촉의 멸망은 마지막 2-3에서 계속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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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4-15 19:52:53

'환관' 하면 이미지가 나쁘지만 보통은 중국 황제가 친정 강화할 때 환관 기용 등이 많아지고 상대적으로 귀족, 고관등의 영향력이 내려가게 되죠. 이 물갈이를 잘 하는게 명군의 소임이지만요. (환관 내에서도)


후한말~촉은 아주 나쁘게 터진 케이스.

1
2019-04-15 19:57:18

삼국지 게임 시리즈를 하다보면

강유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간접체험가능하더라구요

막아도 꾸역꾸역 내려오는 미친 물량들...

역공은 무슨 막기 바쁘죠 

 

 

1
2019-04-15 20:01:10

삼국지 게임을 하다보면 맹획으로 촉 먹기 쉽습니다 쉬워요.

1
2019-04-15 20:17:59

그래서 맹획부터 정리해서 보급지로 써야 하죠

2019-04-15 21:48:28

이 정도 내용이 부실하다 하시면 그 전에 날려 먹은 내용은 어떤 내용일지 상상이 되질 않네요.
다음 글 기대합니다.

2019-04-16 09:01:22

녹상서사직에 있었지만 정계 내부에 무관심했던 강유의 탓도 있지 싶습니다. 물론 항장 출신이다보니 자신의 세력은 군부 뿐이었겠지만요. 촉나라 정권 내 핵심세력이었던 형주계(장완, 비의, 제갈첨, 동궐까지 모두 형주계죠), 하다못해 익주계(장익, 초주)의 지지조차 얻지 못한게 강유가 고립되는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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