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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글 : 조씨 정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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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 17:33:56

0.들어가며

 

조조가 나의 장자방이라고 불렀다는 순욱. ‘왕좌지재를 타고 났다고 알려진 순욱은 예주 영천 지방의 명사이기도 했습니다.

 

순욱은 자신의 초특급 혈연·지연·학연을 활용해서 조조의 인재풀을 소위 말하는 영천 피라미드를 형성해서 채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순유, 곽가, 종요, 진군 등이 영천계 피라미드를 형성했고, 더해서 사마의(!!), 화흠, 왕랑, 두기 등등 엄청나게 다양한 인물들이 순욱을 통해 조조에게 등용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북을 병합한 이후에는 최염이 또 하나의 하북 명사들의 등용 통로가 되면서 조조의 정권은 각 지방의 수많은 명사들이 이끌어나가는 명사 집단체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후 거대화된 명사 집단들과 조조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만 이것은 추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I.조위 군벌의 형성

 

협천자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조조였지만, 그 역시 출신은 군벌이었습니다. ()은 상서령 순욱 이하 명사들에게 맡겼다면 군부만큼은 자신의 친족들에게 확실하게 맡겼습니다.*(아래 글을 참고하시면 이해가 더 쉬우실 듯 합니다.)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553500&sca=&sfl=wr_name%2C1&stx=Heroes&sop=and&scrap_mode=

 

삼국지 위서 제하후조전에 기록된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조휴, 조진, 하후상등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물론 조인의 경우는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말도 들은 바 있으며, 각자 능력이 출중했고 군공도 많은 개국공신이었습니다만, 일종의 정치 군인성격이 더 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각 전선은 오자양장으로 불리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등이 담당했다면, 그 전선을 총지휘했던 것은 앞에서 언급된 조조의 친족들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조위 정권 1기에서 강동지방(대오전선)하후돈, 옹양주 일대(대촉전선)하후연, 형주조인, 그리고 북방의 이민족은 조조의 아들인 조창이 담당했습니다.

 

-적벽대전 후 주요 배치(옹양주 및 한중 정벌 등 변동은 있습니다.)

 *사진 원본 출처는 https://www.fmkorea.com/918298496 

 

안타깝게도 개국공신 4인방의 자제들은 아버지의 커리어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위나라의 첫 대장군 하후돈의 아들인 하후무는 부마가 되었고, 안서진동장군을 지내며 가절까지 받았지만 무능했습니다. 첫 대사마인 조인의 장남 조태는 이후 진동장군 가절까지 받기는 했지만, 자신의 첫 커리어가 하필이면 본인 아버지 커리어에서 가장 큰 패배였고요. 게다가 조홍은 조비에게 돈 좀 안 꿔줬기로서니 목숨을 잃을 뻔하기까지 하고 말이죠. 그나마 하후연의 아들들은 하후패토촉호군·우장군으로 되는 등 그 형제들이 모두 임용을 받고 성장했지만 이후 2기들과 2기의 자제들에 비해선 성장이 늦어집니다.

 

 

II.2기 조위 군벌과 3기의 시작

 

조비가 조조의 뒤를 잇고 난 후, 하후돈-조인 등 1기 집단이 잇달아 병사한 후에도 이 기조는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하후돈이 세상을 떠난 후에 조비는 조휴진남장군·가절도독제군사로 임명하였다가 이후 정동장군·양주자사정동대장군·가황월을 주어 장료등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진진서장군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 하후상또한 정남장군가절도독남방제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듯 1기 당시 하후돈-하후연-조인의 포지션은 각각 조휴-조진-하후상이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조비 즉위 후 구성

 

한편 하후상225, 조비의 인성짓(...)에 미쳐버리게 된 후 병으로 죽고, 곧이어 1년만에 조비 역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조비는 죽기 직전 자신의 친족인 조휴와 조진, 그리고 친구인 진군과 사마의를 불러 후계를 맡겼습니다. 이에 조예는 조휴대사마, 조진대장군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사마의표기대장군으로 삼는데요. 나아가 2276월에 조예는 아예 사마의를 이전의 하후상과 같이 독형예이주제군사로 임명하면서, 사마의는 조씨 집안이 아닌 사람 중 처음으로 병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III.조휴-조진 그리고 조예의 사망

 

대사마가 된 조휴. 228년 드디어 한 국가의 병권을 총괄하는 대사마로서 큰 맘 먹고 동오 정벌을 위해 병력을 동원했지만, 주방의 낚시에 자신이 직접 만선의 꿈을 이루게 해주면서 큰 참패를 겪게 됩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조휴에 대해서 조예는 숙부라고 대접을 해줬지만, 자신의 패배가 너무 부끄러웠던 나머지 조휴는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조휴 사후에 조진을 대사마로 삼았지만, 마찬가지로 조진 역시 직접 촉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바로 다음 해에 조진마저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결국 조진의 사망 후 위나라 정권의 군권은 대장군 사마의가 장악하게 되었고, 젊은 황제 조예마저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위서 조진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잔도가 끊어져 조예의 명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있지만, 하후연전에 추가로 기록된 하후패전에 따르면 하후패가 230, 조진의 촉 정벌 당시 선봉이 되었고 촉의 반격에 고전하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조예는 죽기 직전 자신의 숙부였던 연왕 조우대장군으로 삼고, 조휴의 아들조조(曹肇)조진의 아들조상에게 함께 뒷일을 부탁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방과 손자 등의 반대로 결국 조예는 조우를 파면했고, 조상전에 따르면 조예가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조상을 침실로 들여 대장군에 임명하고, 도독중외제군사녹상서사로 삼아 사마의와 함께 유조를 내렸습니다.

 

 

IV.3(?)의 등장과 낙곡전투, 그리고 고평릉 사변

 

조예 사후, 조예의 미움을 받고 있던 하후현은 친척인 조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정서장군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가 되어 이전까지 조진이 담당했던 바로 그 대촉 전선을 지휘하게 됩니다. 어쩌면 3기 조위 군벌의 시작이었을까요? 동시에 하후상의 친척동생하후유가 정촉호군으로 대촉전선에서 근무하다가 정남장군·도독형예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하후패가 하후유의 뒤를이어 정촉호군이 되어 하후현을 보좌했고요.

 

-3기의 등장?

 

하지만 이 시스템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지 싶습니다. 하후유는 태상의 직위를 받게 되며 중앙 정계로 들어오게 되었고 결국 병권을 잃게 됩니다. 왕창전에 따르면 왕창이 정시 연간(年間), 240~249년 사이에 정남장군가절도독형예제군사직을 받는데, 이미 241왕창은 이궁의변을 틈타 형주 내 오나라의 영지를 침입했고 그 공으로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후유는 생각보다 훌륭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249년의 고평릉 사변을 전후해서 병권을 잃은 것입니다.

 

여기에 군통수권자인 조상은 비록 황제의 종실로서 조진의 아들이었지만 군사 커리어는 대장군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없었습니다.조상은 244, 직접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낙곡으로 향했습니다. 한편 이 당시에 촉나라의 정권은 장완제갈량의 지위를 승계한 상황이었습니다. 239년에 대사마가 되어 촉의 병권을 장악한 장완은 부현에 주둔했습니다. 비의는 대사마로 승진한 장완의 뒤를 이어 대장군녹상서사로 성도에 있었고, 마속()등산*에 함께 했던 왕평진북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한중을 다스리고 있던 상황입니다.

 

조상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한중의 수비병은 채 3만이 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마속의 등산이 준 경험 덕분이었을까요? 다른 장수들은 성을 지키며 수비하자고 했지만 왕평은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시도했고 결국 부현의 본대와 성도에서 바둑두다가 달려온(...?) 대장군 비의의 군대가 도착하면서 조상의 입촉 계획이 저지됩니다.

 

-한중 및 옹양주의 지형 (시안시는 당시의 장안시입니다.)

 

조상전 기록에 따르면 조상은 낙곡으로 들어가 수백 리 행군했지만 적군이 산세를 이용하여 굳게 수비하여 계속 나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또다시 촉한의 험난한 지형으로 인해 보급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조상은 결국 보급을 위해 관중(옹양주)의 백성들에 더해 위나라와 가까웠던 저족과 강족들을 동원했지만 결국 제공을 하다 하다 소··노새·나귀 등을 죽여가며 제공했고 이 상황에 백성들은 한족과 이민족을 가리지 않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이 패배로 모두의 존경을 받던 하후현 조차 당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하니, 그 패전의 후유증은 어마무지했습니다.

 

그러나 조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나름 큰 정책을 입안하고 계획했으나 완전하게 그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면 자중해야 했겠죠. 조상 일당*은 뇌물을 요구하거나 조상 본인이 황제와 같은 권력을 자랑하는 등 권세를 뽐냈습니다. 그리고 틈을 타서 사병을 기르던 사마의가 결국 고평릉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 쿠데타에는 고유, 장제* 등 위나라의 오랜 신하이자 고관들 또한 동조했습니다. 결국 조상을 포함해 그 형제들은 병권을 포함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줘야 했습니다.

 

*하안의 경우에는, 학문뿐 아니라 하안이 주도하고자 했던 정치 개혁 및 계획 등은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장제는 사마의가 병권만 뺏을 것이라며 조상을 안심시키고 데려왔지만 결국 사마의에 의해 조상의 삼족이 목숨을 잃게 되자 결국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고평릉사변 이후 앞서 언급한 하후유의 경우와 같이 하후현또한 병권을 빼앗기고 중앙으로 소환되게 되자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패는 아예 원수의 국가였던 촉나라로 귀순하기까지 합니다. 하후패는 촉의 귀순 직전 친척인 하후현을 만나 함께 갈 것을 권유하나 하후현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결국 사마씨들이 기다리고 있는 중앙 정계로 돌아갔고, 이후 조위의 마지막 충신의 하나로 존경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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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2-24 18:45:51

삼국지 특히 조위를 보면

군재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건지 조금 알수 있는것 같습니다.

WR
2019-02-24 20:59:03

군재도 군재입니다만, 하다못해 단순한 군공을 쌓는 것도 제대로 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 싶습니다. 각국이 교착상태에 빠졌던만큼 그렇겠죠.

2019-02-24 19:05:34

조예가 아버지 만큼만 살았어도...

WR
2019-02-24 21:01:41

워낙 말년에 맛이 훅하고 가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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