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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동안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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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6 16:00:54

1. Johann Gutenberg (mass media--movable type for printing) 
2. Isaac Newton (gravity)
3. Martin Luther (Protestant Reformation)
4. Charles Darwin (evolutionist writer)
5. William Shakespeare (Renaissance playwright)
6. Christopher Columbus (explorer)
7. Karl Marx (19th c. political writer)
8. Albert Einstein (physicist)
9. Nicolaus Copernicus (astromony)
10. Galileo Galilei (astromony)
11. Leonardo da Vinci (for science)
12. Sigmund Freud (psychoanalysis)
13. Louis Pasteur (bacteria)
14. Thomas Edison (inventor)
15. Thomas Jefferson (3rd US presiden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6. Adolf Hitler (Nazi leader during WWII)
17. M. Gandhi (led peaceful revolution in modern India)
18. John Locke (17th c. philosopher)
19. Michaelangelo (Renaissance artist/sculptor)
20. Adam Smith (18th c. Scottish philosopher and economist)

 

위 리스트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 A&E가 선정한 지난 1000년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100명 중 상위 20명입니다. 전체 100명의 리스트를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https://wmich.edu/mus-gened/mus170/biography100

 

위대한 과학적인 발견들 중에는 페니실린, 엑스선 등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산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발명품들 뒤에는 강력한 시대적 요청과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21세기를 앞둔 1999년 12월 세계적인 언론사들은 지난 천년 동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들을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이때 Time 이나 Wall Street Journal 등 가장 많은 매체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이 바로 1450년에 발명된 구텐베르크(Gutenberg)의 Printing Press 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들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시사주간지 Time 등에 의해 지난 천년 동안 최고의 발명품에 선정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국민들은 놀라거나, 씁쓸해 하거나, 비웃거나 분개했습니다. 구텐베르크보다 최소 77년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물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금속활자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이냐는 불만스러운 의견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우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구텐베르크보다 100년 이상 앞섰으면서도 왜 세계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나에 대해 한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활자(活字)는 살아 있는 글자라는 뜻입니다. 책의 두 쪽에 들어갈 내용을 모두 새겨서 찍는 목판이나 동판 글자와 달리 여기저기 옮겨 심어서 찍을 수 있는 글자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고려 고종 재위시절 몽골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활자가 아니라 목판인쇄술의 걸작입니다. 목판인쇄는 매우 훌륭하고 아름답게 수많은 권의 책을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나 목판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길고 어려운데다가, 그렇게 어렵게 만든 목판은 오직 한 가지 책을 만드는 데에만 사용된다는 커다란 단점을 갖습니다. 이에 따라 여러 종류의 책을 만드는 데 적합한 방식이 바로 활자를 이용한 인쇄입니다. 활자인쇄는 한번 활자를 만들어 놓으면 잘 간수하여 필요할 때 수시로 판을 짜서 손쉽게 다른 책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자인쇄를 처음 시도한 인물은 11세기 중국 북송 시대의 ‘필승’이라는 이름의 평민인데, 그는 ‘교니’라는 점토를 활자로 이용했습니다. 필승 이후에 사람들은 내구성이 약한 점토를 대체하는 소재를 찾게 되었고, 결국 나무를 소재로 쓰는 목활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중국에서는 청나라 초기까지도 목판인쇄가 대세라서 활자가 책을 인쇄하는데 본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활자를 사용한 인쇄에 대한 시대적 요청은 우리나라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술을 탄생시켰습니다. 1126년에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바다가 되어 관서와 전각에 비치한 책과 목판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1171년에는 정중부의 난으로 궁궐이 또 다시 불타서 그간 수집했던 책들이 다시 불에 타버렸습니다. 1173년에는 문신들이 대거 학살되는 참사와 함께 그들이 소장했던 책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수습되기 시작한 것은 최충헌 일가의 안정된 집권이 시작되었던 13세기 초였습니다. 최씨 일가의 안정적 통치에는 문신들과 문관들의 역할도 중요했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책을 중앙의 서적점에서 관리하며 찍어 펴냈습니다. 그런데 소실된 책들이 워낙 많아서 예전처럼 목판으로 각각의 책을 만들어 일일이 찍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 이래 청동으로 범종과 불상 그리고 동전 등을 정교하게 주조해 내는 기술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술 아래 여러 종류의 책을 만드는 데 있어 활자의 이로운 점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활자를 튼튼히 만들며 판을 손쉽게 짜서 여러 종류의 책들을 수시로 찍어 펴낼 수 있을까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은 우리에게 익숙했으므로 여기에 판짜기용 점착성 물질과 함께, 쇠붙이 활자에 잘 묻는 기름먹만 개발한다면 금속활자 인쇄는 충분히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고려의 금속활자는 짧은 시간에 많은 종류의 책을 인쇄해 널리 배포할 시대적 요청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활기를 띄던 중앙관서의 금속활자 인쇄는 원나라의 지배로 학문이 위축되자 자연스럽게 그 기능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실로 중요한 일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사찰이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불교서적을 찍어낸 것입니다. 그것은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중앙에서 시작되어 지방까지 널리 퍼졌음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그 인쇄물로 1377년 7월 흥덕사가 찍어낸 ‘직지’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금속활자본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직지’의 인쇄상태를 보면 동일한 글자가 같은 모양으로 인쇄된 것이 별로 없고 글자 획의 굵기에 차이가 크며 획이 부분적으로 끊겨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선조의 관주활자와 같이 활자의 크기와 꼴을 똑같게 다량 생산하는 주물사의 방법이 아니라 사찰이 전통적으로 적용해 온 재래식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어진 사주활자본에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금속활자를 사용한 고려의 인쇄술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던 사정 속에서 여러 종류의 책을 만들기 어려웠기에 웬만하면 중요한 것들 위주로 목판인쇄하거나 원나라에서 수입하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조선에 의해서 계승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세종 때 국가사업으로 여러 종류의 책들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농학서적과 의학서적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국가 통치의 필요에 의해 간행되었습니다.

 

간단히 결론 지으면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책을 인쇄한 것은 국민이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최씨 무신정권의 배려와 함께 당시 지배이념의 한 축을 이루던 불교계의 수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조선왕조로 넘어와 태종과 세종 때 금속활자 인쇄술의 커다란 발전이 이뤄진 것도 국가의 통치 목적에 수반된 것이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인쇄술과 활자를 먼저 발명하고도 인쇄문화의 주도권을 서양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양에서는 국가의 통치목적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발명이었던 반면 서양에서는 책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인 요구가 서적 인쇄로 이어진 능동적인 발명이었다는 점입니다. 1450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라틴어 성경을 인쇄하기 전 1세기 동안 유럽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인쇄술의 발명을 필연적으로 만든 시대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중세가 막바지에 다른 15세기 초에 기계장치에 큰 발달이 이루어져 크랭크 축, 회전 속도를 조절하는 캠, 회전을 정지시켰다가 다시 진행토록 하는 멈춤쇠 등을 사용하는 기계장치가 수공업은 물론이고 큰 건물 축조 공사 등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세기 문자사용의 팽창은 종이의 도입으로 촉진되었습니다. 당시 양피지의 1/6 정도의 가격에 팔렸던 종이는 서적 형태의 표준화와 계획된 생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중국인에 의해 발명된 종이는 아랍과 남유럽을 거쳐 14세기 말에 독일에 전해졌습니다. 그 이후 독일의 곳곳마다 종이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그 결과 15세기는 독일문학사에서 종일 필사본의 전성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보관되어 오는 중세 필사본의 70%가 15세기에 종이로 기록된 것입니다.

 

  14세기 이후로 전 유럽에 독성용 안경이 보급되었습니다. 14세기 중반 수도원의 살인사건을 다룬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도 안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독서용 안경의 도입은 글을 알지만 시력의 약화로 글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책읽기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런 도구를 통한 독서인구의 증가는 중세 후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독일문학의 주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15세기를 전후해서 글쓰기의 주체가 성직자에서 도시나 관청 등 세속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365년에 비엔나에서, 1386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대학이 설립된 이래 구텐베르크가 활약한 15세기 중엽까지 독일권 나라에서는 약 15개의 대학이 세워졌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부모가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대학 안에는 도서관이 세워졌고, 필사인이나 서적상 길드로 조직된 전문장인들이 학술교재 제작을 위해 대학에 고용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책들이 나오고 대중의 문자 해독률이 점차 높아지면서 더욱 많고 값싼 책들을 요구하는 시장 규모가 갈수록 커졌습니다. 15세기 초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는 책을 복제하는 방법에 대한 요구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책의 엄청난 수요 때문에 ‘필사문화의 황금시대’를 보내고 있었지만 필사를 통한 책의 생산과 복제는 너무나도 느리고 값이 비쌌습니다. 그 당시까지 유럽에서는 책을 만드는데 필사 말고는 다른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인쇄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중국에서 들여온 목판 인쇄술이 500여 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로 진화한데 반해, 유럽에서는 필사에 의존하던 책 생산기술이 고작 10년 만에 모든 중간절차가 생략되고 곧바로 구텐베르크의 Printing Press 로 대체되었습니다. 엄청난 시대적 요구에 의해 구텐베르크 혁명이 이뤄졌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시사주간지 Time 등이 선정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구텐베르크의 Printing Press는 우리 언론이 번역한 것처럼 ‘금속활자 인쇄술’이 아닙니다. 구텐베르크의 Printing Press는 무게가 1톤이 훨씬 넘는 ‘인쇄기’입니다. 안타깝게도 훨씬 먼저 금속활자 인쇄술을 보유했던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인쇄기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요청했던 시대상황은 인쇄기의 발명까지 필요로 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의 Printing Press의 중요 부속품에 해당됩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세 단계로 작동됩니다. 거위 가죽으로 싼 스탬프에 유성 잉크를 붙이고 이 스탬프를 이용해 금속활자에 잉크를 올립니다. 그런 다음 종이 인쇄 기계에 고정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Press)를 활용해서 인쇄합니다. 상당한 힘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AP, UPI 등에서 P는 Press의 약자입니다. 현재도 신문 등 언론을 Press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의 Press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 유타 주에 있는 Crandall Printing Museum에는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지금도 방문객들에게 그 당시 방식으로 인쇄 시연을 합니다. 아래에 유튜브 영상을 첨부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글에 쓰겠습니다.

 https://youtu.be/DLctAw4JZ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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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2-16 16:12:01

한글이 좀더 일찍 보급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놈의 사대....

2019-02-16 16:15:44

잘봤습니다~
인쇄술이란게 생각했던것 보다 어마어마하게인정을 받는군요 대단하네요

2019-02-16 16:17:59

좋은글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

Updated at 2019-02-16 16:24:57

지식의 전승, 전파만큼 무서운게 없죠. 잘 읽었습니다.

2019-02-16 16:25:46

 기술의 발명만큼 위대한 건 그 기술의 보급이죠.

증기기관도 사실 기원전 이집트에서 발명되었죠. 

거의 2천년 간 잠자고 있던 기술을 깨운 것도 큰 공이죠.

Updated at 2019-02-16 16:31:32

알렉산더 플레밍(페니실린)이 36위군요. Top 20 안에 있을법한 업적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단 낮게 랭크되었네요.

WR
1
2019-02-16 16:35:12

페니실린의 스토리는 조금 특이합니다. 제가 예전에 올린 글이 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2801543

2019-02-16 17:43:10

약간 해프닝이기도 했고, 실제 플레밍 외에 다른 연구자들의 공헌도 상당해서.. 적절한 순위같아요. 

WR
1
2019-02-16 16:35:40

지금 외출하는데 제가 오늘은 매니아에 못 들어올 거 같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9-02-16 16:42:48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당시 기득권 세력에게 큰 위협이었고 변혁을 불러 일으켰죠

3
2019-02-16 16:44:36

기술 보급과 관련해서는 통화 결제 수단이 생각나네요. 현금 - 카드 - 스마트폰 페이로 진화하는데, 스마트폰 페이가 가장 진보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현금이, 한국에서는 카드가 쓰이죠. 중국에서는 페이가 쓰이고요.
Pc와 모바일 환경 역시 비슷한데, 2010년대에 경제발전해서 과거에는 비교적 pc를 접하지 못했다가 스마트폰 환경으로 넘어온 사회는 한국보다 친 모바일적인 환경입니다. 한국은 한때 pc인터넷 쇼핑몰이 시대를 휩쓸고 그것이 모바일 환경으로 넘어가는 중인데, 신흥국들은 바로 소셜 미디어 중심의 모바일 환경으로 넘어갔죠.

6
2019-02-16 16:47:19

구텐베르크는 우리나라에서 유독 무시당하는 인물이죠.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금속활자가 우월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인데, 사실 고려에서 발명한건 활자 뿐이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당대의 최신 기술(활자, 잉크, 제련술, 압축기)을 집대성한 물건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2
2019-02-16 17:09:22

라이프니츠,폰노이만과 테슬라도 에디슨 아인슈타인에 못지않은 어쩌면 더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볼수 있을텐데 없는게 참 아쉽네요

2019-02-16 17:11:46

다윈이 마르크스보다 높은 순위에 있군요

Updated at 2019-02-16 17:27:46

저라면 빌 게이츠 같은 사람 대신 튜링 넣겠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리스트는 1도 중요하지 않겠지만요..)

 

추가 : 웃긴게, watson과 crick은 리스트에서 유일하게 두명이군요. 운명공동체라 이건가요. 근데 한 사람처럼 표기되어 있네요. &이라도 붙여주지..

4
2019-02-16 17:22:42

 트..트와이스가 없군용

2019-02-16 17:25:04

무턱대고 우리나라가 앞섰다면서 서구언론을 욕하면 안되겠네요...애초에 꽤 다른영역이군요.

2019-02-16 19:04:41

마하트마 간디가 왜 17위나 될까요?
비폭력 무저항주의자, 인도 독립운동가라는 것 외에 무엇이 간디를 저 순위에 올려놓았나요?

2019-02-16 20:40:12

비폭력 무저항주의자, 인도 독립운동가만으로는 저 순위에 합당하지 않나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2019-02-16 20:55:38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인이라고 해서요.

존경받을만한 위인인건 인정하는데 인류 역사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는가 하면 아닌것 같아서요. 

Updated at 2019-02-16 21:17:54

인류사는 그동안 예외없이 힘의 논리로만 이어져왔었는데 그걸 부정하는 비폭력 투쟁, 평화주의를 가지고 의미있는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 아닐까요?(물론 보기에 따라선 간디의비폭력 투쟁이 먹힐수있었던 주변상황을 힘으로 볼수도 있겠지만요.) 현대의 사상가들에게 아주 큰 영감을 줬을거 같은데요. 

 

제가 견식이 짧아서 일수도 있지만 간디 이전에 비폭력 투쟁이란 말을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폭력으로 정의한 마르크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반례가 있을수있다는 것을 보여준 간디의 영향력도 크지 않나 싶기도해요.

2019-02-16 19:27:00

현대의 인물들이 지나치게 저평가 받았네요. 옛 인물들에게 평가가 쏠린듯 합니다.

2019-02-16 20:39:22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잘 봤습니다. 

2019-02-16 23:08:16

지나치게 서양, 백인 위주로 구성된 것 같긴합니다...그렇다고 저기 들어갈 동양인이나 흑인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만ㅠㅠ

2019-02-18 00:31:50

사실 3백년전에 이 리스트를 뽑았으면 전부 중국인이였을..

2019-02-17 10:46:38

3번인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사실 금속활자인쇄술의 보급으로 인해 성경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읽히기 시작되면서 가능했죠. 그전까지는 성직자들만 성경을 독점하면서 온갖 구라를 치며 속여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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