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글 – 그곳에 산이 있어서 올랐다
안녕하세요 히어로즈입니다. 하루에 세 번째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요
계속 시리즈 물로, 그것도 주기 없이 시리즈가 이어져 가고 있다 보니 너무 흐름이 길고, 에피소드가 이어지면서 흥미가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시리즈와 별개로 위-진 시기와 관련하여 에피소드 글도 종종 올리려 합니다.
0.들어가며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인 조지 말로리는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 말은 등산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명언이 되었고, 우리는 “그곳에 산이 있어서 그렇다.”라는 말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거대한 대륙의 기상을 자랑하는 중국은 당연히 높은 산 또한 많습니다. 중국 남쪽의 윈난성(운남성, 雲南省)의 경우 지역 대부분이 고원 이상이고, 그 유명한 차마고도가 시작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윈난성 바로 위는 삼국 정립 시기 촉나라의 수도였던 성도(지금의 청두)가 있는 쓰촨성, 즉 사천지역입니다.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시안)이 있는 산시성 또한 산맥이 지나는 높은 지역이었고요. 이런 높고 험준한 고원이 잔뜩 있는 지역들에 두 명의 산악인이 역사에 길이 남을 등반을 하게 됩니다.
I.마속, 가정에 오르다
1.북벌을 준비하는 제갈량
이릉대전의 결과로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하게 된 황권을 포함하여 전투 중에 전사한 마량, 왕보, 풍습, 장남, 부융 등 많은 장수들을 잃게 된 촉나라. 이런 촉나라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은 한동안 내치에 힘쓰며 무너진 국력을 회복하는데 집중했습니다.
한편,유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위나라의 조비는 이릉대전과 유비의 사망 사실을 듣게 된 후 손권을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22년의 경우 조비는 아예 대촉 전선의 사령관이었던 조진까지 중앙에 소환하고 병권의 일인자인 대사마 조인을 포함하여 조휴, 조진, 하후상 등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모든 친족 병력들을 동원해서 오나라로 친정하기도 했고, 224년과 225년에도 연이어 친정했으나 동오 정벌에는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반면 조비 사망 후 손권 또한 관우를 무너트린 이후 확보한 형주 루트를 통해 북진을 시도했지만 ‘강하의 비브라늄 방패’문빙과 서황, 그리고 조휴에게 격파되면서 다시 수춘 공략 루트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제갈량은 열심히 내실을 다졌습니다. 내적으로는 옹개, 고정, 주포 등으로 이어지는 반란을 이회, 마충 등의 활약을 통해 효율적으로 진압하는 동시에 남만을 평정하면서 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천연가스(!!!)를 활용하여 암염을 정제하여 소금광산을 만들고, 비단을 특산품으로 삼았고, 이후 초주가 “"평년만 되어도 다른 곳의 풍년, 흉년이라 해도 다른 곳의 평년”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에 계속된 반란 진압으로 잔뜩 전투 경험을 쌓은 중앙군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까지 이어가면서 제갈량은 철저한 북벌 준비를 이어나갔습니다.
2.제갈량의 제1차 북벌, 마속의 등산으로 끝이 나다.
227년, 아직도 중국의 많은 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명문 출사표를 유선에게 올린 1년 후 드디어 제갈량은 북벌에 돌입합니다. 우선 제갈량은 기곡으로 진출한다는 소문을 낸 후 개국공신의 하나인 조운을 의병(疑兵)으로 기곡에 보냈습니다. 이에 위나라의 사령관 조진이 제대로 낚이게 되었고, 조운은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조진의 본대를 묶어두는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제갈량 본대의 목표는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거부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한 장안의 탈취가 아니었습니다. 옹양주에 대한 확실한 세력권 확대가 그 목표였습니다. 조운이 조진을 묶어두는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기곡이 아닌 기산으로 향했고, 이런 제갈량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천수, 안정, 남안3군이 항복하게 됩니다. 삽시간에 옹양주 두 주를 잃게 될 위기에 처한 조예는 다급히 장합에게 5만의 병력을 주고 다시금 3군을 재탈환하고자 합니다. 가장 중요한 지리적 거점이 된 가정. 시간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제갈량에게 상황이 유리했습니다. 험난한 지형의 가정은 단순히 수비만 하면서 시간을 끌기만 해도 제갈량의 계획은 성공할 것 같았습니다. 이에 제갈량을 따르며 군사적 커리어를 쌓고 있던 마속을 왕평과 함께 가정에 보내게 됩니다.
-야 임마 너 그러는 거 아니야 인마-*
몇몇 전략 게임을 해봐도 전투에 있어서 지형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높은 지대가 훨씬 유리한 것도 사실이고요. 문제는 언제나 올라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죠. 마속은 왕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높은 가정을 올라버렸고,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바로 급수로를 끊어버렸습니다. 물이 부족했던 마속은 급히 포위를 풀려고 했지만, 백전노장 장합이 이끄는 위의 중앙군에게 박살이 났습니다. 가정이 뚫리면서 오히려 장합이 이끄는 중앙군과 옹주자사 곽회-양주자사 서막 등이 이끄는 옹양주 방어군에게 협격을 당할 상황에 처한 제갈량은 결국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북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마속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형되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사자성어 ‘읍참마속’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 펌 : https://pgr21.com/pb/pb.php?id=humor&no=326906
II.산에서 길을 잃고 촉나라를 정벌한 등애
1.사마소의 촉나라 정벌 계획
244년 대장군 조상은 촉나라 정벌을 계획합니다. 자신의 약한 입지를 다지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이 정벌 계획은 한중의 험난한 지형을 활용한 왕평의 활약으로 실패하고(흥세산 전투), 조상은 결국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며 이후 정적이었던 사마의에 의해 살해되기에 이릅니다. 이 실패는 그 컸던 정벌의 규모 이상 그 영향이 컸는데 사서(자치통감)에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라고 기록될만큼 옹양주 전체에 대한 위나라의 지배력이 공백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촉나라 역시 이 기회를 활용하여 다시 북벌에 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정권의 일인자였던 장완은 상용 도강 작전을 세우는 등 북벌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미 와병 중이었고, 그 뒤를 이었던 비의는 북벌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의가 암살당한 이후 계속해서 강유는 대규모 북벌을 진행했지만, 또한 내부에서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내부 반발로 인해 강유는 답중에 머물면서 둔전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사마소는 흥세산 전투 이후 20년 만에 촉나라를 정벌하고자 합니다. 사마소는 답중에 머물고 있는 강유의 병력을 묶어두고 검각을 돌파하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등애와 종회를 파견, 등애는 강유를 묶고 종회는 검각을 뚫고 갈 것을 명하게 됩니다.
2.사마소의 계획은 틀렸다.
문제는 사마소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등애와 제갈서가 강유를 답중에 묶어둘 것으로 생각했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 아니 강유는 기지를 발휘해서 한중으로 향했습니다. 제갈서는 미친 듯이 강유를 쫓았지만 결국 강유가 이끄는 본대를 놓치게 됩니다. 결국 강유는 종회가 이끄는 본대를 천혜의 요새 검각에서 무려 한 달이 넘도록 묶어두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질린 종회가 편지를 보내 강유를 꾀었으나 강유는 아예 그 편지를 무시해버렸고 종회는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앞은 강유가 막고 있는 검각, 뒤는 왕함과 장빈 등이 버텼고 그 제갈량 조차 어려움을 겪었던 보급 문제를 역시 종회 또한 겪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주 방어만 성공하면 끝날 것이라고 여겼던 강유였을테지만, 자신을 계속해서 막아냈던 등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발상을 하게 됩니다.
-여기를 오르는 등애-*
등애는 묶여있던 종회와 달리 산길을 통해 음평으로 가서 검각을 우회하여 면죽으로 돌입해 성도를 친다는 뭔가 술을 잔뜩 마시고도 하지 않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같이 있던 제갈서까지 거부한 계획이었지만 등애는 그냥 산을 뚫고 갔습니다. 등애전의 기록에 따르면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라고 되어있으니 얼마나 험했을지는 당연할 것입니다. 산에서 길도 잃고 험난하게 도착한 강유성에는 촉나라의 수비군이 존재했습니다.
3.마막-유선의 연타석 홈런
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고생하며 산을 탄 등애군은 이미 엄청나게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어느 정도 버티기만 했으면 성도에서 올 중앙군과 합류해서 수비에 성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강유성의 수비를 담당했던 마막이 생각 이상으로 똥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마막은 눈 앞에 나타난 등애군을 보고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며 등애의 면죽으로의 진출을 허용했습니다. 바로 앞에 나타난 등애를 막기 위해 촉의 황제 유선은 부마이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을 면죽관으로 보냈습니다. 동오 접경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는 촉나라의 넘버 2이자 우대장군 염우는 나헌에게 2천의 병력을 주고는 직접 수비를 위해 성도로 향했지만, 남방의 사무를 총괄하던 곽익의 원군 파병은 유선은 이를 거부하며 그대로 남중에서 그냥 머물게 됩니다.
제갈첨의 병력이 무너졌습니다. 제갈첨은 아들 제갈상 등과 함께 전사했고 등애는 그대로 성도를 향했습니다. 염우의 병력이 오고 있었고, 남중의 곽익이 이끄는 병력이 온전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촉의 후주(後主) 유선은 항전에 대한 의지 없이 항복합니다. 그리고 염우는 어디론가 역사의 뒤로 수많은 병력들과 함께 증발합니다.
*사진 펌 :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knowledge&page=36&document_srl=3680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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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그분일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