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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백번, 천번 얘기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로 끝나는 게 연인관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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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12:18:37


집 근처 스타벅스를 자주 가는 편입니다.
특히 2층 창가자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딱히 할 게 없을 땐 창가 너머로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터미널 근처라 참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어요.
손을 꼬옥 잡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멀리서 봐도 참 꽁냥꽁냥한 커플부터, 단체로 휴가를 나온 거 같은 군인들, 등에 한껏 짐을 이고 가시는 아주머니까지.
걷는 속도, 숙여진 고개를 통해 그들의 기분을 유추해보곤 합니다.
몇 달 전이었을까요, 별 다를 게 없는 토요일 오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참 그렇게 창밖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어떤 남자와 여자가 2층으로 올라오더니 제 뒷자리에 앉더라고요.
'따뜻한 카페라떼 맞지?' '응'
주문을 하려 가기 전, 남자가 여자에게 자연스레 메뉴를 확인받는 걸 봐서 그들은 오래된 연인 사이 같았습니다.
몇 분 뒤 남자가 커피를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고, 남자는 뒷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조용한 토요일 아침. 2층엔 저와, 저 멀리 노트북을 하고 있는 몇 명의 학생 그리고 두 남녀.
창가를 보고 있었지만 자연스레 그들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자세한 대화는 들리지 않았기반 분위기로 유추해 보건대, 그들은 헤어지는 중이었습니다.
언제든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그러지 않는 걸 봐서 더 사람 사이에는 감정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굉장히 큰 벽이 있는 것 같았고, 남자의 뒷모습이 조금씩 들썩일 때마다 여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요, 마시지도 않은 커피 두 잔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나갑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유난히 슬펐던 것 같아요.
2층 창가에서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그리고 여자는 버스정류장쪽, 남자는 그 반대쪽.
10초 정도 지났을까요, 남자는 가만히 멈춰서서 여자가 간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그렇게 잠시, 이윽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완연한 끝.

그들은 이별이 이렇게 쉬운 건 줄 알았을까요.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세먼지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우리처럼, 그들도 그들이 이별할거라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죠.
떨리는 첫 만남,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손을 잡았을 때 심장의 요동소리, 그녀의 주사가 편의점에 들러 메로나를 먹는 거라는 걸 알게 됐을 때,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사랑스런 눈으로 그녀의 자는 모습을 바라볼 때.
유난히 각지고 넓은 남자의 어깨에 자연스레 머리를 기대고, 남자의 넓은 가슴을 두 손으로 꽉 안을 때, 기념일도 아닌데 기분이 안 좋아보인다며 좋아하는 꽃 선물을 하는 남자의 입술에 살며서 입 맞출 때의 떨림.
오직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특권에 행복해하며 영원을 약속했겠죠.

연애의 온도라는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와요.
'사랑한다고 백번, 천번 얘기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로 끝나는 게 연인관계예요.
우연히 만나, 우연히 사랑하고, 우연히 헤어지고 인생 자체가 그냥 우연의 과정인거죠. 어떤 의미 같은 건 없어요.'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우연이었던 걸까요.
그들이 앉아있던 의자에 남아있던 그들의 온기는 금방 없어지고, 따뜻했던 커피는 차갑게 식은채로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있었습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앉아있었을까요,
직원분이 2층으로 올라오셨고
차갑게 식은 커피를 정리하셨습니다.
마지막 그들의 흔적마저 사라지는 걸 본 그 날
유독 씁쓸함의 여운이 오래갔던 기억이 납니다.


16
Comments
5
2019-01-18 12:21:05

진짜 글 너무 잘쓰세요..

WR
2019-01-19 10:54:20

감사합니다! 갈매기도 진짜 농구 잘합니다..

2
2019-01-18 12:21:53

...

WR
2019-01-19 10:54:29
8
2019-01-18 12:27:07

 헤어짐은 '헤어지자' 한마디로는 끝난 것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만남만큼 길어지는 '정리의 시간' 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람의 감정은 디지털 보다는 아날로그에 가깝기에,

 스위치를 많이 돌려 켰으면, 그만큼 다시 돌려 꺼야하죠.

첫사랑과 '헤어지자' 고 한 후 5년정도를 스위치를 껐다 켰다 했습니다.

'헤어지자' 고 하고 서로 쿨하게 헤어질 수 있다면 오히려 얼마나 좋을까요.

과몰입과 집착이 얼마나 어둡고 무서운지 잘 알기에,

깔끔한 이별은 저에게는 오히려 더 아릅답게 보입니다.

WR
2019-01-19 10:54:54

저는 깔끔한 이별도 슬픈 거 같아요.
사실 이별이 행복할 순 없지만요..

1
2019-01-18 12:49:46

사귈 땐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깝지만 헤어지면 제일 멀어지는 사이가 된다는게 참 묘하죠

WR
2019-01-19 10:55:14

참 묘합니다..

1
2019-01-18 14:04:45

 와 필력이... 빠져드네요..

WR
2019-01-19 10:55:36

빠져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19-01-18 15:37:54

 아 항상 너무 감사합니다. 글 스타일이 정말 제가 좋아하는 타입이라

꾸준히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WR
2019-01-19 10:55:46

저도 감사합니다 미첼님

1
2019-01-18 20:46:50

필력은 여유에서 나오는걸까요?  


"집 근처 스타벅스를 자주 가는 편입니다." 

 

딱 여기서 부터..아..나도 이렇게 하고 싶은데..랄까요

뭔가 글에 여유로움이 넘치시는것 같아요 

부럽습니다...

 

 

WR
2019-01-19 10:56:29

감사합니다..
여행이나 액티비티한 활동들을 좋아하지 않고
그냥 카페에서 책 읽거나 생각하는 걸 좋아해서 그럴수도 있을거 같아요.

1
2019-01-19 09:26:54

20대 중반
설 연휴의 어느날.. 친구들과 아파트 내 공원에서 난장까던 새벽에 ‘왜 계속 헤어지자고 하는건데!’ 라며 울부짖던 어린 친구가 생각나네요.
좋게 헤어지는게 뭔지 몰랐던, 그래서 커피숖 이별은 허세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게 가능하구나 싶네요.
떠나면서 뒤돌아 봤다던 모습에서 예전 제가 생각나네요. 늦은 토요일에 봄날은 간다나 봐야겠습니다.

WR
2019-01-19 10:56:55

감사합니다.
봄날은 간다 참 좋은 영화라던데 아직 보지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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