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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책 몇가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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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7:10:54

저는 소설을 소개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단 소설에 대해 쓴다는 것은 소설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고, 가장 나쁜 독자는 누군가의 글을 맘대로 재배열하는 강도같은 자들이기 때문이죠. 제가 한 소설의 부분을 따온다는 것은, 제 생각엔 그 부분이 소설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제 생각이지 작가 스스로의 생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지지부진해질 수 있으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1. 몰락하는 자

 

"음악에 재능이 없어서야! 사는 데 소질이 없어서라구!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살 능력조차 없으면서, 살아 잇을 능력조차 안 되면서 거만이나 떨면서 음악 공부를 하다니!"

 

"그때의 일을 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해. 베르트하이머가 호로비츠 수업이 열리는 모차르테움 2층 교실로 들어와 글렌의 연주를 듣더니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문가에 달라붙은 사람처럼 서 있던 모습, 앉으라는 호로비츠의 말에도 불구하고 글렌이 연주하는 내내 앉지 못하더니 글렌이 연주를 마치고 나서야 겨우 앉아 말없이 눈만 감고 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해, 난 생각했다." 

 

뛰어난 재능이 압도적인 재능을 만났을 때 시작되는 몰락에 대해 묘사한 소설입니다. 호흡이 정말 깁니다. 문장도 특이하고요. 기회가 되면 독일어판을 구해서 읽을 생각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숨 안쉬고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주어의 사용도 그렇고, 서술 방식도 강박증적이고 집착에 가까운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저 스스로는 별로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미 여러번 읽은 책입니다.

 

2. 현기증. 감정들

 

 

"호수의 아름다움과 고적함에 그토록 깊이 감동해보기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벨은 썼다.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그와 마담 게라르디는 저녁이 되면 호수 위에 띄운 작은 배에 올랐고, 어둠이 덮이며 사물의 색채가 단계별로 희미해지는 기이한 어스름의 순간을 보았으며, 잊을 수 없는 고요한 시간을 체험했다"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관리인은 오랜 시간 동안 침묵과 고독을 동반하여 살아온 탓인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인간이라는 흔적이 외관상 역력했고, 오후 네시가 넘은 그 시각 무거운 철문을 열어 유일한 관람객인 나를 들여보낸 뒤 말 한마디 없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내 앞을 지나 신도석을 통과해 벽 뒤편 자신의 대기 공간으로 들어갔다."

 

"베네치아에 도착하여 -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 육지에 발을 디딘 다음에도 한참 동안 그의 육체 내부에서 파도가 흘러넘친다."

 

"그 어떤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내리는 눈은 축축하고 황량한 들판 위에서 자신의 미약한 색채마저 완전히 꺼트리고 있었다." 

 

번역자분이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굉장히 문학적인 번역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많은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제발트의 첫 작품입니다. 카프카를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으면 4편의 옴니버스식 서술이 하나로 엮인다고 합니다. 독특한 독백과 주관성의 묘사가 일렁입니다. 이 책을 읽고 밤 주택가 일방통행로를 산책하니 잔잔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세상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선을 돌려줍니다.

 

3.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본에 도착햇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나는 나의 도착이 기계적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과정은 5년간의 여행에서 생겼다. 플랫폼 내려가기, 플랫폼 올라가기, 여행가방 내려놓기, 외투 주머니에서 차표 꺼내기, 여행가방 들기, 차표 내기, 신문 가판대로 가기, 석간신문 사기, 역 밖으로 나가 손짓으로 택시 부르기. 5년동안 난 거의 매일 어디론가 떠났고 어딘가에 도착했다. 역 계단을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렸고, 손짓으로 택시를 불렀고, 기사에게 지불할 돈을 윗도리 주머니에서 찾앗고,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고, 의식 한구석에서 이런 기계적인 행동에 완전히 길들여진 느긋함을 즐겼다."

 

"술에 취한 어릿광대는 술에 취한 지붕 수선공보다 더 빨리 추락한다."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처럼 아주 조용했다. 그것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고요였다."

 

개방 이후 서독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을 온전히 이해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저도 읽고 나서 설명을 읽은 후 아 그랫구나 하고 회상식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전범의 기억을 잊어가는 독일을 비판한 하인리히 뷜의 책입니다. 초반 부분의 내면 서술은 정말 빨려들어가듯 읽었습니다. 후반부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읽은 책 몇가지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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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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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7:34:01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도 참 좋았습니다..

현기증,감정들은 아직 못 보았지만,

비슷한 느낌일 것 같아요..

 

지인의 죽음에서 비롯된,

극도의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한 여행..

여행지들은 주로 

과거엔 영광과 번성을 누렸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은 곳들...

 

제발트 특유의..

다소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행지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의 기술..

여정의 순간순간을 예민한 촉으로 짚어내어,

그 순간의 감정을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 나가는..

 

내용이나 문장이나 만만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 깊이에 한번 빠져드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제발티안'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저는 그만한 깊이를 가지지 못해서..

토성의 고리도 어렵게 읽었습니다..ㅜㅜ)

Updated at 2019-01-12 17:59:13

매니아에서 이런 종류의 글은 전 처음 보는 것 같아 신선하네요 저는 몰락하는 자 가 궁금합니다 과거 깊이에의강요 라는 책도 생각이 나고 개인적으로 소설은 제 메인이 아니지만 여백이 생기는 대로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Updated at 2019-01-12 17:46:27

몰락하는 자 오래전에 읽었었는데 글렌 굴드와 바흐 골드버그 변주곡?을 찾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클래식 잘 모르지만 음악만큼은 아직도 잘 듣고 있습니다. 책도 오랜만에 꺼내 읽어봐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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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7:54:23

배수아 작가는 번역 활동도 정말 왕성히 하는 분이신데 본래 문체만큼 번역문도 자기 스타일이 확고한 편이어서... 개인적으로 그 분 번역은 책의 성격에 따라 기호가 좀 바뀌는 것 같습니다.

Updated at 2019-01-12 19:18:21

몰락하는 자...
내용이 기대에 못 미쳐서 실망도 했고 애시당초 문장 호흡이나 흐름이 너무 길어서 잘 안 읽히더라고요.
천재를 앞에 둔 범재의 그 시기와 불안, 질투 그리고 몰락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클래식도 좋아해서 굴드를 어느 정도 알기에 그것도 기대했지만 거의 제 3자에 가깝게 나오고요.
저는 최근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이게 또 명작입니다

2019-01-12 22:19:18

제발트는 정말 최고입니다 현기증은 제 인생 TOP20 정도 되는거 같아요

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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