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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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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12:15:55

3시간 전이었을까요, 서울에 있는 친구가 눈이 많이 오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사무실 밖을 나가봤더니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네요. 근데 30분 정도 지나니.. 역시나..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라는 소설 아시나요? 도입부가 굉장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소설입니다.
'강원도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세계적인 작가도 인정한 강원도 클라스입니다.
(뻘소리입니다. 원래는 강원도가 아니고 국경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다를 끼고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편이죠. 그래서 부산은 눈이 아주 귀합니다.
20년 전일까요, 98년 월드컵 강호 멕시코를 상대로 선취골을 넣었던 하석주 선수가 백태클로 퇴장당했던, 그리고 귀신 같이 참패를 했던 그해였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부산의 초등학생처럼 저도 눈을 좋아했습니다. 살면서 눈이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해가 바뀌고, 겨울이 올 때마다 자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했던 거 같아요.
'하나님, 이번 겨울엔 꼭 눈이 와서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게 해주세요.'
제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요, 그 해 처음으로 눈이 내렸습니다. 비록 친구들과 눈싸움을 할만큼 충분히 쌓이진 않았지만 너무 행복했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그런 제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봐주시던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저에게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숙제나 과제물같은 걸 일일이 챙기셨고,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쥐꼬리만큼 주셨습니다. 애정표현도 안하셨습니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 아시나요? 그래서 전 이버지가 어려웠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대화가 줄어들었고, 기숙사 고등학교를 간 후에는 얼마 없던 대화마저 증발하게 됐죠.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요,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봤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인생 상담도 받는 모습들이 참 아름다워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연락드려봤습니다.
잘 지내시냐고 여쭤보니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를 못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눈물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힘든 내색 잘 안하시거든요.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매번 부모님의 엄격함에 불평불만만 했던 것 같습니다. 왜 나는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했을까라는 한탄만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돌아보면, 부모님이 저에게 주신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머리는 크지만 건강한 신체를 주셨고,
올바른 가치관을 함양해주셨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태도를 길러주셨고, 항상 발전적으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질문을 바꿔봤습니다. 왜 나는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부모님께 금수저가 될 수 있을까?로 말입니다.

요즘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 전화를 했을 땐 뭔 일 있냐, 돈 필요하냐 라고 의심하셨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신 것 갘습니다. 적응하시겠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엄격했던 부모님의 모습은 흐려지고, 어린 시절 제 옆에서 저를 바라봐주셨던 따뜻한 부모님의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눈이 많이 오네요. 부산은 어떻냐고 전화 한 통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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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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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12:50:40

 저는 군을 다녀온 이후로 집 밖에 있으면 날마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가끔 술에 취해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덕분에 걱정도 하시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녘은 굉장히 따듯합니다. 아마 부산은 더 따뜻하겠죠? 아침에는 차에 성에가 끼어서 알콜 분무기로 한참을 뿌려댔지만, 햇살이 퍼지니 새삼 포근한 기분까지 듭니다. 이 날씨만큼이나 원주민님의 글이 포근한 기분에 젖게 만드네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사람의 따뜻한 마음인가 봅니다. 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WR
2018-12-13 15:43:45

신돈옹! 너무 감사합니다.
진주 내려가면 꼭 연락드릴게요.

1
2018-12-13 13:08:52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WR
2018-12-13 15:43:28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18-12-13 15:23:19

뭔가 떠오른 드립이 있기는 한데,

진지한 얘기에 엄한 농담 적는 건 아닌 것 같고,

좋은 얘기라도 제 글의 톤도 그렇고,

자꾸 하면 기분 나쁘실 것 같아서,

하지 않구요...

 

페북 하다가,누군가 올린

아버지에 대한 짤들을 모은 게시물을 봤는데,

뭉클하던 중에..글 보니..

 

나의 아버지..나..

어린 시절..현재..

어머니의 사랑과는

확실히 다른 그 무엇...

WR
2018-12-13 15:43:15

라이트님 아닙니다 ㅎㅎ
저는 라이트님의 드립 너무 좋아해요
.. 이게 또 라이트님의 포인트 아닙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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