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를 주고받는 적절한 감정적 균형에 관하여
부서 성과평과 가집계도 완료된 시점이고 해서 잠깐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어제 귀국하는 비행기에 앉아서 핸드폰과 수첩을 들고 여행경비를 계산 중이었습니다.
제가 총무를 맡기로 했기 때문에 결산을 해야 했고,
이왕이면 헤어지기 전에 친구에게 알려주는게 좋겠다 싶어 꽤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갑자기 말을 거시더군요.
"혹시 자리 바꿔주실 수 있나요?"
어떤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분이시던데, 뒤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분이 계셨습니다.
상황은 금방 짐작이 되었습니다.
제 친구가 좌측 창쪽, 제가 가운데 자리, 제 오른쪽 자리는 비었고,
건너편쪽도 창가와 그 옆 가운데 자리를 일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커플은 서로 통로를 두고 떨어져 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던거죠.
반면, 저는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혼자다 싶어 말을 건 것이었겠죠.
하지만, 저는 실제로는 옆자리에 친구가 있었고,
혼자였다고 해도 자리를 옮기려면 좌석 아래 둔 제 짐을 다 옮겨야만 이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중에 방해를 받은 것도 탐탁치 않았습니다.
또한, 뭔가 부탁을 하려면 사정 설명도 하고 미안한 기색도 좀 있어야 한다는 저의 관점에서 보기엔
부족한 예의도 없었지만, 저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예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저 남성분에게 설명하려면 너무 길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평소 제 스타일과를 달리 답이 좀 짧았습니다.
"아뇨"
"아.. 예.."
조금 당황하신 것 같기는 하던데 뭐 하여간 그렇게 상황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화장실 가겠다고 비켜달라고 하기에는 좀 뻘쭘한 상황이 되었는데' 하는 생각,
또는 '그래도 조금 부드럽게 받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든가 말이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하지'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물론 그 남성분 입장에서 생각해보다면,
얘기 못할 상황도 아니었고 무슨 반응이 이렇게 까칠하지 싶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부탁을 하려면
그 이전에 충분히 상황을 살피는 노력을 본인이 선행하는게 맞고,
또한 누군가를 일단 불편하게 하면서 시작하는만큼 본인도 그만큼 불편한 반응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상정하는게 이치에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가 부탁을 하고 그에 대한 친절, 혹은 거부를 받는 상황에 있어
어느 정도 형평이 맞는 감정적인 균형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간 제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뇨'라고 말 못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 사람의 오해까지 내가 감당하고 설명할 이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 따른 감정적 소모를 감당할 이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못할 이유가 없는 짧은 언행이었지만,
또 서로 반드시 서로 수용될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그 남성분에게 내가 부드럽게 말하면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과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러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계속 교차하는군요.
물론 제 답변이 필요 이상으로 과민했다는 의견도 충분히 있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 끄트머리에 있었던 작은 헤프닝에 대한 소고 정도인데,
이런 유사한 상황에 대해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싶어 한번 올려봤습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고 싫은 말 잘 못하는데,
이날만 좀 유난해서 지금까지 생각이 많은 한 직장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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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몇시간동안 옆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람이라 괜히 불편한 기류 만들어지기 싫어서 죄송하다고 하는 편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죄송할 일은 없긴 하죠
다소 단호하게 거절하고나서도 '좀 더 부드럽게 할 걸' 이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시는 것 자체로 케이치님이 좋은 분이시라는걸 보여주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