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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를 주고받는 적절한 감정적 균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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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12-12 15:35:45

부서 성과평과 가집계도 완료된 시점이고 해서 잠깐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어제 귀국하는 비행기에 앉아서 핸드폰과 수첩을 들고 여행경비를 계산 중이었습니다.

제가 총무를 맡기로 했기 때문에 결산을 해야 했고,

이왕이면 헤어지기 전에 친구에게 알려주는게 좋겠다 싶어 꽤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갑자기 말을 거시더군요.

 

"혹시 자리 바꿔주실 수 있나요?"

 

어떤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분이시던데, 뒤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분이 계셨습니다.

 

상황은 금방 짐작이 되었습니다.

제 친구가 좌측 창쪽, 제가 가운데 자리, 제 오른쪽 자리는 비었고,

건너편쪽도 창가와 그 옆 가운데 자리를 일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커플은 서로 통로를 두고 떨어져 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던거죠.

반면, 저는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혼자다 싶어 말을 건 것이었겠죠.

 

하지만, 저는 실제로는 옆자리에 친구가 있었고,

혼자였다고 해도 자리를 옮기려면 좌석 아래 둔 제 짐을 다 옮겨야만 이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중에 방해를 받은 것도 탐탁치 않았습니다.

또한, 뭔가 부탁을 하려면 사정 설명도 하고 미안한 기색도 좀 있어야 한다는 저의 관점에서 보기엔

부족한 예의도 없었지만, 저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예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저 남성분에게 설명하려면 너무 길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평소 제 스타일과를 달리 답이 좀 짧았습니다.

 

"아뇨"

"아..  예.."

 

조금 당황하신 것 같기는 하던데 뭐 하여간 그렇게 상황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화장실 가겠다고 비켜달라고 하기에는 좀 뻘쭘한 상황이 되었는데' 하는 생각,

또는 '그래도 조금 부드럽게 받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든가 말이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하지'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물론 그 남성분 입장에서 생각해보다면,

얘기 못할 상황도 아니었고 무슨 반응이 이렇게 까칠하지 싶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부탁을 하려면

그 이전에 충분히 상황을 살피는 노력을 본인이 선행하는게 맞고,

또한 누군가를 일단 불편하게 하면서 시작하는만큼 본인도 그만큼 불편한 반응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상정하는게 이치에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가 부탁을 하고 그에 대한 친절, 혹은 거부를 받는 상황에 있어

어느 정도 형평이 맞는 감정적인 균형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간 제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뇨'라고 말 못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 사람의 오해까지 내가 감당하고 설명할 이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 따른 감정적 소모를 감당할 이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못할 이유가 없는 짧은 언행이었지만,

또 서로 반드시 서로 수용될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그 남성분에게 내가 부드럽게 말하면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과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러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계속 교차하는군요.

 

물론 제 답변이 필요 이상으로 과민했다는 의견도 충분히 있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 끄트머리에 있었던 작은 헤프닝에 대한 소고 정도인데,

이런 유사한 상황에 대해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싶어 한번 올려봤습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고 싫은 말 잘 못하는데,

이날만 좀 유난해서 지금까지 생각이 많은 한 직장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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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5
2018-12-12 15:36:05

저 역시도 몇시간동안 옆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람이라 괜히 불편한 기류 만들어지기 싫어서 죄송하다고 하는 편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죄송할 일은 없긴 하죠

다소 단호하게 거절하고나서도 '좀 더 부드럽게 할 걸' 이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시는 것 자체로 케이치님이 좋은 분이시라는걸 보여주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WR
2018-12-12 15:38:41

감정적인 동조를 받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제 생각을 읽고 좋은 쪽으로 말씀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1
2018-12-12 15:38:07

되게 딥하게 들어가셨네요 그냥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셨던 거 같습니다

6
Updated at 2018-12-12 15:42:58

그 남성분도 어쩌면 아니라고 대답해주시길 은근히 바라고 계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한결 마음이 편하실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알콩달콩한 연인 사이더라도 해외에서 며칠 함께 지내고 나면 적어도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만은 (통로 거리만큼이라도) 잠시 떨어져있고 싶을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물론 매니아인으로서도 매우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WR
2018-12-12 15:43:09

역시 저는 진성매니아인이 맞군요.

감사합니다.

10
Updated at 2018-12-12 15:45:45

원론적으로 따졌을 때 잘못한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만, 굳이? 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네요.

사회적 통념상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이 아쉬운 입장이기에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건 당연한데, 그 상황에서 작성자님께서 말씀하신 [충분히 상황을 살피는 노력]에 대한 부분에선 개개인의 의견과 생각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부탁을 받고 거절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대화의 형태는 아래와 같을겁니다.

Q : 죄송한데 제가 이러이러한 상황이라 그런데 자리 좀 양보해주실 수 있을까요?

A : 아...저도 지금 일행과 같이 가는 상황이라...양보해드리기가 힘들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탁하는 사람이

Q : 혹시 자리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을 했다고 해서, 굳이 대답을 바꿀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A1 : 아뇨.

A2 : 아...저도 지금 일행과 같이 가는 상황이라...양보해드리기가 힘들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죄송할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잘못을 한 상황도 아니지만 A1 이라는 답변을 A2라고 바꾸는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상황을 조금 덜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요령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겐 호구로 보일수도 있는 바보짓일수도 있겠지만, 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WR
1
2018-12-12 15:47:36

저도 전자처럼 하지 않은 부분이 머릿 속에 계속 감도는 중이라

글로라도 정리하고 다른 분들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G.Arenas님이 주신 말씀이 지금 제 맘 한켠에서 어제저녁부터 계속 나오는 말입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1
2018-12-12 15:56:14

위에 장난스런 댓글을 달았지만 (댓글 윗부분은 반쯤은 진심이었습니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더라도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에 계속 붙어있는 건 피로를 유발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리고 저도 개인적으로 케이치님께서 좀더 사회적인 대답을 해주셨으면 적어도 케이치님께서 감정적으로 불편하실 일은 없었겠지만, 자리 교환을 요청했던 청년분께서 그런 사회적인 대화법과 불필요한 감정소요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이라면 처음 요청할 때 저런 식의 화법을 쓰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케이치님께서 거절하셨다는 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을 지언정 케이치님의 화법에 대해 크게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다른 상황(말씀하신 화장실을 가기 위해 부탁해야 할 상황 같은)이나 다른 사람 감정을 위해서보다 케이치님 스스로의 감정적인 평안을 위해 더 좋은 화법과 매너로 응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1
2018-12-12 15:53:56

비슷한 댓글 달려했는데 이미 있군요. 하나더 첨하자면 그냥 확실하게 왜죠? 라고 물어보는게 좋아보입니다. 서로 의도를 짐작하는거는 좋지 못하죠.

2018-12-12 17:21:24

저도 Arenas님 말씀에 동의 합니다.

 

질문하는 사람도 미리 양해를 조금 더 구했을 수 있고,

대답할 때도 그냥 나도 일행이 있다...는 정도만 얘기해도 서로 편안했을텐데,

괜히 뒤에 불편하고 깊게 생각할 일이 생겨버렸다고 봅니다.

3
2018-12-12 15:51:22

근데 그 분 입장에서는 장황하게
이러이러하니 자리를 바꿔달라고 말하는걸 먼저하지않고, 일단 먼저 질문을 한걸 수도 있습니다.

ㅡ 혹시 자리바꿔 주실 수 있나요?

ㅡ 왜 그러시죠?

이렇게 되물었다면 상대도 충분히 이유를 설명했을거 같거든요.

여기서 케이치님이 '아뇨'라고 대답한 순간 상대도 케이치님도 별거 아닌걸로 괜히 찜찜해진거 같습니다.

WR
Updated at 2018-12-12 15:58:49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계산에 원체 집중하고 있다보니 그 분과 눈 마주칠 새도 없이 먼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상황이었습니다.

위 글에는 전체 상황을 다 파악하고 충분히 판단하여 답한 것처럼 썼습니다만,

사실은 그럴 경황이 없어서 답부터 먼저 나온 상황이었죠.

아니었다면 굳이 서로 찜찜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쪽을 택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2
Updated at 2018-12-12 16:01:05

저도 딱 글쓴님과 같은 상황과 고민에 자주 처해요.

불필요하게 까칠했나 고민하다가
내가 너무 생각이 많나라는 고민까지 가죠.

시크하고 까칠하면서도 아무고뇌없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종종 부럽기도 해요.

그치만 내가 좋은사람이고, 일차원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드는 생각이라며 합리화하해요.

제가 글쓴님이라면,
"다음엔 그 사람의 행동과 상관없이, 나를 위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 상황설명을 더 붙혀야겠다." 라며 고민을 끝낼꺼여요.

WR
1
Updated at 2018-12-12 16:03:43

말씀하신 바가 정확한 말씀같습니다.

나의 반응이 굳이 상대에 의해 좌우될 필요는 없죠.

제가 아직 여러가지 의미에서 여유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4
2018-12-12 16:00:37

저도 언젠가부터 거절할 때 '죄송합니다.'가 자동으로 나옵니다. 내가 미안할게 뭐가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요', '싫어요' 이렇게 대답해버리면 당시에는 짧고 강렬하게 내 의사를 전달한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오히려 내 머리속만 복잡해지고 상황이 종료가 안되요 저도..

그래서 저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게 '나는 매우 방해받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니 기분 생각해서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의사를 표현해줬어. 난 할만큼 했으니 여기서 더 나가면 니가 명백히 날 귀찮게 하는거야.'라는 메세지를 던져준거라 생각하고 맘편히 하던 일로 돌아옵니다. 상황 종료가 훨씬 빠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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