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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 5권 간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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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12-11 23:01:21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보통 결말을 미리 알고 보는 이야기를 반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예외다.

이 책의 결말이 아니라 작가의 생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지만, 이 정도의 작은 모순은 별로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이루는 각기 다른 이야기와 형식의 중단편들 모두는 작가의 현실적인 삶을 낭만이라는 창으로 관통하여 흘린 피로 쓰고, 자신의 헐벗은 마음을 낯 뜨겁게 반영하며 흘려낸 부끄러움 가득한 눈물로 쓴 자서전이기에, 작가를 아는 것이 곧 이 책의 혼을 마주 보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산책을 하며 중얼거리는 말들을 마치 실시간으로 엿듣는 듯한 비계산적인 자발성(spontaneity)이 담긴 문체와, 그 끝에 아무렇지도 않게 남겨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함은 독자를 작가의 심연 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전달한다.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난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키이기 때문에 뭔가 다를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

내가 이 책에서 보고 싶은 것은 확고했다. 난 하루키가 거쳐간 수많은 유럽 도시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하루키의 마음속을 유랑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나는 내 목적을 달성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몇 가지 느낀 점은 하루키가 내가 그려오던 것과 달리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툭하면 화를 내거나 짜증내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확고한 직업 정신과 가치관들에 매료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처음엔 관심도 없던, 생전 처음 들어 본 여러 섬과 도시들에게 조금씩 알 수 없는 애정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루키의 관점으로 본 타국을, 하루키를 조금씩 알아가며 이해하려고 시도함에 따라 그 시점과 장소들에게도 조금씩 애정을 가지게 되는 묘한 여정을 경험 했다.

 

 

 

 

 

 

 

비어 있는 중심, 김정란

이처럼 아름다우면서 명료한 비평집이 있을까. 이 책은 문학평론집에서 보기 힘든 어떤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시로 태어나 시와 사랑에 빠지게 된 시인이 시로 살기 위해 이 절대성과 마주 보려 하는 그 순수성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문학계의 소중한 보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평론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매끄럽게 해낸다. 바로 자신 고유의 시선과 경험, 그리고 지식을 통해 매우 자연스럽게 주류와 궤를 달리하는 강직함이다. 

한국 근대문학평론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책.

 

 

 

 

 

 

 

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디자이너가 쓴 디자인에 관한 책이지만, 정작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야 할 소중한 지식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져야 할 예술성에 대한 존중을 인지해주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거창하고 부가적인 이물질만이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에서 실용성이나 경제성 외에 숫자만으론 산출할 수 없는 오묘한 예술성이 첨가되는 게 진정한 디자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삶의 모든 요소에는 조금씩의 창작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접하는 모든 이들이 디자인을 알 때 삶은 진정 윤택해진다고 믿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책 머리말의 품질이 책의 전체적인 품질을 좌우한다는 말을 여러 번 접했다. 매번 동의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만큼은 머리말의 문장력에서부터 난 이 책에 매료되었고, 초입에서 정교하게 보여준 작가의 글에 대한 애정과 진솔함은 내가 이 책을 엄격하게, 때론 다정하게 아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만일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수많은 감정들 중 딱 두 가지만 말해야 한다면 그건 "배려"와 "존경심"이다. 그는 언제나 그 어떤 사물 또는 대상을 대할 때도 이를 향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배려심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신중하고, 이 예의는 곧 그의 글들을 더 견고하게 만듬과 동시에 약자들에게는 세심하고 따뜻하게 감싸안아준다. 또한, 그는 항시 예술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예술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사회의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묘약은 예술이란 레시피에 담겨있기에, 이에 대한 글은 그의 고독을 토로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삶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종의 소심한 의사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산문이 나아가야 할 한 가지 방향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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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8-12-12 09:03:58

독서를 하시는 습관에 경의를 표하며...

2018-12-12 09:56:38

읽고 있는책들을 다 읽어서 뭐 읽을까 했는데 안본게 3개 있네요!

재미있어 보이네요 감상해보겠습니다.   

2018-12-12 23:50:15

퀄이 출판사 서평인 줄 알았네요ㄷㄷ 발저 빌려보려는데 혹시 다른 작품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WR
2018-12-13 21:14:41

소설도 괜찮으시다면 <벤야멘타 하인학교>나 <타너가의 남매들>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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