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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최악의 임금들 5-4 광해군, 중립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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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11-16 23:02:23

 광해군편 이어집니다.

취준중에 짤막짤막 쓰느라 4편까지 늘어지게 되어버렸지만........

광해군하면 떠오르는 대망의 중립외교 및 마지막에 대해 적어 보겠습니다.

취준 중이라 생략된 부분이 많습니다.

 

 1. 급변하는 동아시아

 

우선 적어볼 것은, 광해군 이전의 국제정세입니다.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동아시아는 가히

 대격변이라 할만큼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가장 큰 변화는 명의 동북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명의 치세 기간 동안 분열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눌려있던 오랑캐 여진족이

누르하치란 걸출한 지도자를 통해 굴기했던 것이었습니다.

 

1589년(선조 22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합니다. 이후 1592년 임란 발발 당시 일본의

침입에 고전하며 위기에 몰린 조선을 구원(이 내용은 제가 이전에 적었던 임진왜란 비하인드

시리즈에 짤막하게 나옵니다....)해준다며 원병을 제의하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 이후, 임진왜란 당시 요동 지역에 있던 명군 대다수가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출병하는데

(조선에 파병된 조승훈, 이여송, 송응창 등은 요동방면 지휘관들) 이 때문에 요동의 군사가

비자 자연스레 여진에 대한 명의 통제력은 급속도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 시기를 틈타 해서여진, 몽골의 부족 등을 격파하면서 만주의 패자로 우뚝

올라섰고, 경쟁자 해서여진을 두들겨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주 문자를 창제하고

근거지를 바꾸고, 팔기제를 정비하며 내부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세력을 더더욱 확장한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며 명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독립

국가로 나아갈 뜻을 명백히 밝혔고, 명나라는 단순히 오랑캐로 여겼던 여진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다 건너 열도에서도 큰 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 오대로(五大老)라 불리는 일본의 핵심 다이묘들을 불러 자신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했고, 특히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였고 일본 내 최대의 고쿠다카를

보유해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컸던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들을 지켜준다는

약조까지 받으며 사후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히데요시가 죽고나자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문신파와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무신파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어느쪽에도 서지 않은 채 중립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599년, 문신파와 무신파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며 전쟁을 막던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자 심복이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결국

사망하자, 무신파는 무력으로 문신파를 몰아내려 했고, 문신파의 수장격인 이시다는

급히 도쿠가와에게 달려가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도쿠가와는

중립을 유지하며 균형의 수호자 역활을 자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도쿠가와는 이시다를 보호해 안전히 그의 거소까지 호위해 돌려보낸 뒤,

그를 오봉행 자리에서 파직하는 통수를 저지르는데, 이시다는 이에 격분하여

이에야스의 흑심을 대대적으로 포고했고, 도쿠가와에 적대적인 다이묘들이 모여들어

이시다의 서군이 형성되고, 도쿠가와에 협력하는 다이묘들이 모여들어 동군이 형성되면서

양측은 일본에서 가장 큰 싸움 중 하나이자 '천하를 둔 전투'라 불리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

에서 싸웠고, 패배한 서군의 다이묘들은 목이 달아나거나 영지를 몰수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이 때 미츠나리, 고니시등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황천길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몇십년을 참으며 존버한 끝에 1603년 에도 막부를 세우며 일본의 패권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 정세 이후, 1608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2. 국교회복(부제:주작작 주주작)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끊임없이 희망했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이전부터 이에 긍정적으로 검토한 끝에, 즉위 이후인 1609년(광해군 1년)에

기유약조를 체결하며 10년간 단절되었던 국교를 회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활을 했던 건 고니시의 사위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였는데,

장인을 따라 서군에 참여했던 그는 일본 내에서 누구보다 조선에 대해 정통한 자였기

때문에 장인이 처형되고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공인받는 동시에 고립되어 버린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교 회복이 시급했으나, 국토가 유린당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이와 같은 요구에 지속적으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북방의 정세가 다급해지는 상황 속에서 남방의 정세마저 안정되지 못하면,

남북으로 소요가 일어 전후 피해 복구도 미처 하지 못한 조선에서 이를 감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조선 조정에서는 치열한 찬반논쟁 끝에,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심합니다. 다만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세가지 전제조건을 요구합니다.

 

1. 먼저 국서를 보내 정식으로 사과할 것.

2. 조선왕릉을 도굴한 일본인을 압송할 것

3. 포로로 잡아간 조선인들을 송환할 것

 

이 같은 조선의 요구를 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사색이 되었는데,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의 책임을 도쿠가와 막부에 요구한다면 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일본의 천황이 사과문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서를 쓰는 것도

난감하고, 이미 전후 10년이 넘었는데 도굴꾼을 찾기도 어려워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조선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일이 성공하지 못할 시 본인의 목이 날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대마도주는 결국 온갖 궁리 끝에 비장의 한 수를 내놓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바로 1번과 2번을 주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마도주는 막부의 도장을 조작하여 국서를 맘대로 바꿔치는가 하면, 잡범을 도굴범으로

둔갑시켜 조선에 송환하는 패기를 보여주는데, 도굴범이라 보낸 범인 송환은 단 6개월만에

이루어져 오히려 조선 조정에서도 이리도 빨리 잡았냐며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안타까운건 이렇게 둔갑된 잡범들이었는데, 대마도주의 네 가족과 재산을 보살펴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조선에 온 그들의 말로는 안봐도 비디오였고..............그들은 참담한

고문을 당하는데, 대마도에서 왔다는 중종의 수습된 시신은 생전에 중종을 본 적이 있던

궁녀들이 이를 확인한 뒤 체형을 보아 중종이 아닌것이 분명하다;;;; 며 반박해버렸고......

 조선 조정에선 이들이 진범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진행되고 있던

협상 과정을 물리기엔 늦은데다가 다시 돌려보내기도 그렇고.....결국 왜적이라면

조선의 적이라는 이유로 그냥 죽여버리기로 결정하여 모두 죽여버립니다.

 

시신 역시 이제와서 찾기는 불가능해보이니 그냥 대충 장례치르고 덮자;;; 라고

처리되어 장례를 치르고 유야무야 덮어버렸는데, 이 과정 도중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고 가는 국서는 단순히 한 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소 요시토시는 국서를

주작하며 마모씨도 울고갈 솜씨를 보여주며 필사적으로 이를 성공시키고자 애썼고

사명당이 파견되어 포로를 송환받으면서 협상은 마무리되어 기유약조가 성립,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재개하게 됩니다..................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기 마련이라, 이같은 주작은 숙종 대에 결국 드러나고 마는데

이미 국교가 재개된지 몇십년이 지났고 담당자들은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지라;;;;;

훗날 하급 실무자 몇명을 처벌하는 선에서 넘어가게 됩니다.

 

 3. 요동치는 북방

 

조선이 자존심과 억울함을 억누르고 일본과 관계 개선에 나선건 북방의 정세가 다급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명과 후금의 북방 전선은 살얼음을 걷는것마냥 팽팽한

긴장관계가 유지되었고, 명은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후금을 압박하는 동시에 군대를

동원해 후금을 밀어버리려 하였고, 선제적으로 교역 금지령을 내려버립니다.

 

아직 농업 체계가 완비되지 못한 후금 입장에서 명의 교역 금지령은 치명타였고,

누르하치는 대규모 개간 사업을 벌이는 한편 농업 진흥을 통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으나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에 후금을 건국하고 명에 칠대한이란 내용으로 선전포고를 하는데

 

예허부를 편애한 것,

개간 사업을 한 세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

천명제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은 것 등의 이유다.

전체적으로 보면 왜 우리만을 괴롭히냐, 하는 뉘앙스 역시 있었는데.............

 

 "하늘이 대국의 임금을 세움은 곧 천하의 공주(共主)로 삼으려 함이거늘,

어찌 오로지 우리나라에게만 원한을 맺으려 하는가?"

 누르하치도 천하의 중심은 명나라인것을 인정하고, 왜 우리만 박대하고

 타 부족을 편애하는 가에 대한 울분이 담긴 포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너무 커버린데다, 그들 입장에서는 건방지게도 선전포고를 해온

 누르하치를 두고볼 마음이 없었고, 교역 중단 조치에 격분한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무순에 이르럿고, 무순의 성주 이영방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

이영방은 이에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했으며, 누르하치는 그들에게 제일 부족한

인구를 채우고자 무순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만주로 보내는 동시에 무순의 성벽을

허물어 후환을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총병 장승음이 병력 1만을 이끌고 돌아가는 누르하치를 습격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모래바람이 일어나며 명나라군을 덮쳤고 이에 명군이 우왕자왕하자

후금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명군을 들이쳤고 총병 포함 명나라의 주 전력 대다수가

전사하는 참패를 겪게 되었고, 누르하치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임란 당시 호되게 당했던 경험을 살려 조총수를 양성하고 포병을

육성하는 한편, 진법 훈련과 성곽 보수에도 열을 올렸으며 끊임없이 후금에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놀랍게도 이는 광해군 시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선조 때부터 계속되고 있던 일이었는데, 선조는 의주에 피난가 있던

시절, 누르하치의 원병 제안을 받았던 경험과, 북방의 정세를 보고받으며 여진의

위세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일찍이 깨닫고 간첩을 파견해서 '건주기도정기' 라는

건주여진의 책을 내는 등 여진족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아버지의 이와 같은 정책을 이어받아 정보를 수집하며 북방 방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북방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정충신을 만포 첨사로 임명하는

한편 직접 후금을 방문해 눈으로 정세와 상황을 파악하게 하고 방비를 맡겼으며

본인은 후금의 팔기군에 주목해 화포를 개량하고 장교를 육성하는 한편 본인이

북방을 순시하며 훈련 정도나 무기 보유, 성곽 등을 점검하는 노력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남쪽에서 끊임없이 병력을 징발해 북방전선으로 보냈는데

 

 5~6년간 남쪽의 병사들을 징발해서 배치하는 바람에 민심이 나빠지고

나라가 피폐해졌다

 

-인조실록 2년 9월 1일자 기록

 

광해군은 본인의 호위병력조차 북방으로 파견해, 주위에서 이를 걱정할 정도로

북방 방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런데........앞의 5-3에서 언급했듯, 궁궐공사를

위해 삼남의 백성을 쥐어짜는 와중에 인력마저 징발한 탓에, 삼남에선 임금과

조정을 원망하는 저주와 도탄에 빠진 민생 때문에 곡소리를 하는 백성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암담한 상황에도 몰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무순 함락 이후, 명나라는 후금이 정말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강적임을 인지하고

 뿌리뽑겠다는 각오를 한 채 병력을 소집합니다. 1619년, 임진왜란에 참여했었던

 양호가 요동 경략에 임명되었고 심양에 주둔했으며, 사로총지휘를 구상하는데

 한자처럼 네 갈래 길로 군을 운용해 후금을 타격하겠다는 방안이었습니다.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과 총병 경험을 가진 인물이 6명이었는데,

 명나라의 총병은 지금으로 치자면 우리나라의 사단장 급이기 때문에 사단만

최소 6개 이상이 동원된 대병력이었습니다. 두송, 왕선, 마림 등 명나라 북방의

총병들과 임란에 참여해 우리나라에도 알려져 있는 요양 총병 유정,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 등이 참여했으며, 대병력을 동원한 만큼 준비도 나름대로 철저히

하였으며, 조선에도 원병을 요구해  지원군도 파견되어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이를 감독했는데, 이 파병된 조선군을 이끌었던 것이 강홍립이었습니다.

 

 양호는 준비가 갖추어지자 누르하치에게 서신을 보내 47만의 병력이 너희를

 멸하기 위해 집결했다며 그를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누르하치를 협박하기

위한 과장이었고 실제로는 10만~1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병력만으로도

누르하치를 갈아넣기엔 충분하고도 남을만한 병력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4. 사르후 전투

 

 사르후 전투 당시 명군은 규모가 컸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제가 쓴 임진왜란 비하인드에서도 나오는데, 당시 명군은 정규군의 상태가 심각해

 군벌들이 보유한 정예부대 사병, 즉 가정이라 불리는 정예병이 주 화력을 담당하고

 정규군은 총알받이 및 진형유지, 추격 등을 담당하는 전투 구조였는데.........

 

 문제는 임란을 거치고 만주의 혼란기를 겪으며 가정의 대다수가 소멸되면서

 대다수가 훈련이 부족한 오합지졸의 규모만 큰 군대였던데다, 명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조차 실제 장부에 적혀있는 것의 절반 수준도 아닌 1/3 수준이라는

참담한 현실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명군의 규모는 후금에 비해 훨씬 컸고, 지휘관인 총병도

다수가 동원되었던 만큼 제대로 활용한다면 후금을 누르는 것은 충분했으며,

조선에도 임란 당시 천병을 보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살려준 은혜(恩)을

 

이유로 원병을 요구했는데, 조선 입장에선 이를 최대한 미루고 피하려 애썼으나

결국 재조지은의 논리를 거부할 수는 없었던지라 5도 도원수로 강홍립이 임명,

조선이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정예병 13,000명이 파병되게 됩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졸전에 패배하기 위해선 이렇게 하면 된다를 몸소

교범으로 보여주듯, 패배하기 위해 거의 모든 노답짓을 다 저지르며 대패하는데.....

 

쓸데없는 병력분산 집결지 선택 미스 아군의 상태 파악 실패 작전지형 무시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가장 군대의 상태가 좋고, 최적의 상황에서 했어야 할.........

적지 깊숙이까지 분산해서 행군한 후, 적군 주력 코앞에서 합류하기라는

선택지를 고르는데, 적이 아예 정보를 모르지 않는 이상 포위섬멸로 각개격파되기

가장 쉬운 최악의 판단을 저지른 것이었는데...........

 

대군을 운용하는 이상 분산되어 진군하다 한곳에 합류하는 것은 필수적이긴 하나

이를 위해서는 군을 통합하여 지휘할 지휘관의 역량& 올바른 집결지의 선택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두 가지가 모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총병들은 각기 거의 동급의 계급체계를 갖추고 있어, 서로간 명령체계나 협력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기에 총사령관인 양호가 이를 능수능란에게 묶어 통솔할

필요성이 반드시 있었는데....................

 

양호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촘촘한 연락체계 구성 및 현지 사정에 맞춰서

군대를 지휘할 현장 지휘관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인데, 안했습니다.........

 

결국 전투 시작 전부터 리스크는 엄청난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지휘관인 총병들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산해관 총병인 두송이 공적을 세우기 위해 예정된 기일보다 빠르게 군사들을

몰아쳐 본인이 먼저 진군해버렸고;;;;;; 사방에 척후를 풀어 정보를 얻던

누르하치에게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포착되어 버렸습니다.

 

두송은 계번성으로 향하면서 군을 쪼개서 주둔시켰는데, 어둠을 틈타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군은 어둠을 틈타 명의 군대를 급습했는데, 두송이 이끌고 나간 1만

병력 외에 사르후에 남았던 2만의 병력은 지휘관도 없는 상태에서 야간급습을

받아 전멸했고, 두송의 남은 군대 역시 누르하치가 이끄는 본대에 포위되어

전멸하면서 명군은 시작부터 참담한 대패를 당합니다.

 

두송이 죽고 패잔병이 참살당하던 때에 총병 마림의 군대가 근처에 도착했는데,

마림은 두송의 참패 소식을 듣고는 군을 뒤로 물려 참호를 파고 방비태세를 갖췄는데

마림은 신중론을 펴는 사람이었고, 반종안이라는 지휘관이 5천명의 별동대 병력을

이끌고 가까운 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진형 배치였는데.........

 

문제는 반종안이 두송마냥 호전적이고 강경한 인물이라 마림과 성향이 전혀 맞지 않아,

마림이 습격당해 치열하게 싸우는데도 가까운 위치에서 이를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림의 2만에 달하는 병력은 격렬한 전투 끝에 패주했고, 누르하치는 이어

속도전으로 반종안의 병력을 몰아치면서 명군은 각개격파되고 맙니다.

 

이 소식은 총사령관 양호에게 전해졌고, 양호는 크게 놀라서 즉시 남아있던

유정의 동로군에게 퇴각을 명령합니다. 유정의 동로군에는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도 함께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여기서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오고야 맙니다.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기를,

"대설 중에 행군하느라 각영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은데다가 도독의 전진하라는

명령도 없었으므로 신들은 주둔하여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도독이 강안찰

함께 양마전으로 와서는 사람을 보내어 신들을 전진하도록 재촉했으므로 신들은 즉시 삼영의

병마(兵馬)에게 명하여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양마전에서 15리 되는 전두산(轉頭山)에 닿았을 때에는

날이 이미 저문 뒤였으므로 여섯 장수와 함께 모두 진을 치고 밤을 지냈으며, 부원수는 유삼(劉三),

교 유격과 함께 전두산에서 십여 리쯤 지나서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습니다. 신 홍립이 가서

도독을 만나보고 각 방면 군사의 수를 물었더니, ‘서남 방면에 대병(大兵)이 일제히 전진하고

있고, 동쪽 방면의 군사는 내가 친히 거느린 장정 수천 명과 각 장수가 거느린 병사가 있을 뿐이니,

 통틀어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고립될 텐데

대인(大人)은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습니까?’ 하고 신이 물었더니, 말하기를 ‘양 대인(大人)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고, 나도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직 벼슬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전(寬田)에 남겨두고 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왜 이렇게 빨리 전진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병가(兵家)의 승산은

오직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고 인심을 따르는 데에 있을 뿐이다. 날씨가 아직 추우니

천시를 얻었다고 할 수 없고, 도로가 질척거리니 지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병권을

잡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답하였는데, 무척 기분이 나쁜 기색이었습니다.

신들이 그 진영에 나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7권, 광해 11년 2월 26일 경진 1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누르하치가 빡대가리가 아닌 이상 이를 가만히 지켜볼 일은 없었고, 결국 명 조선

연합군은 변변찮은 전투 한번 못해보고 패배했는데, 우선 명군이 박살났으며

유정은 폭약을 놓고 자살을 선택했으며, 후금군은 그대로 조선군을 습격하는데.......

 

5. 강홍립과 거짓 투항?

 

밀지설에 따르면 강홍립은 억지로 군을 이끌고 가서, 싸우는 척 하면서 미리 후금에

연락을 취해 밀약을 맺고, 성의없이 싸우다가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항복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썰이 예전에는 신빙성있게 널리 알려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몇 번의 화포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지만, 갑자기 모래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불이 꺼지고, 그 바람 사이로 후금군이 달려와 척살했다'고 되어 있으며,

책중일록에는 '기병이 계속 모여들어 양익을 이루다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진중 안으로

돌파했다'고 되어 있는데, 후금(청)의 기록에도 돌격은 한번이지만, 지갑(紙甲)과 화포로

무장한 솔호(조선)와의 전투에서 큰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돌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기록들을 합쳐서 이를 종합해보면......

조선군은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뒤따르다 유정의 명군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후금의 군대에 박살이 나자 황급히 진영을 꾸렸는데, 후금이 선봉대로 보낸 병력은

총포사격을 통해 격퇴했으나, 모래바람이 일면서 화포가 무력화되는 순간에

후금의 기병이 뛰어들어 양익의 진영이 박살나며 순식간에 승부가 났다에 가깝습니다.

 강홍립의 본영은 이미 유정의 명군은 박살이 났고, 좌우 양익을 순식간에 잃어버리자

후금군에 항복하면서 본진의 병력은 살리는데 성공하는데, 이 때문에 밀지설이 떠오른

것이지만 이미 좌우 양익의 진영이 박살나고 병력 5천이 전사했는데 패전이 아닌

밀지에 따른 항복이라 주장하는 것은 구차하고 신빙성이 제로에 가까운 일...........

 

 설사 모래바람이 불지 않았다 한들, 조총병과 화포 중심의 조선 군대여도 후금의

잘 훈련된 수천의 철기병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인데, 그 당시에는 대규모의

기병을 상대로 한 총병의 대기병 방진이 아직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았을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기병과 총기병의 과도기이며, 총병의 대기병 전술이 확립되기 전)

 

사르후 전투의 패배로 후금은 더욱 기세를 뻗치게 되었고, 명의 몰락은 가속화되어

갔으며 조선은 정예 13,000명 중 7천이 증발하고 남은 병력도 후금에 포로로 잡혀

후금군에 편입되거나 후금으로 귀부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생종해 돌아온 병력이

고작 2,7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참담한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 일은 훗날 조선의 북방 경계가 너무나 허술해지는 스노우볼을 굴렸으며, 이미

타격을 입은 조선의 북방 경비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거치며 병자호란에

결국 조선에 치명타를 입히는 원인으로 남고 맙니다..........

 

 6. 외치의 성과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말(談鋒)  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筆翰)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6월 1일

 

이 적들이 요동성에 들어가 버티고 있으므로 중국의 장관들이 차례로 적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 지방의 인재들 2백여 명이 원 경략(袁經略)을 결박하여 넘겨 주었다고 한다.

비록 30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일찍이 오랑캐를 경험하지

못한 군사들이다. 영솔하는 대장들이 과연 이목(李牧)이나 이정(李靖)과 같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의 갑옷과 무기가 파손되어 형편이 없다고 한다. 멀리에서 온 군사들이

어떻게 정예롭고 건장하겠는가.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차관을 만포(滿浦)로 옮겨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체로 이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다시 더 의논해서 잘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

 

광해군은 충돌보다 외교를 통한 해결을 매우 중시했고, 현실주의 외교에 입각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자 하면서 명의 요구를 최대한 피했고, 명나라 황제가 군대를 훈련시키라고

 보낸 막대한 은마저 창고에 쳐박아 명에 군대가 징발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했습니다.

 양쪽의 요구 조건을 모두 최대한 번갈아가며 수용하면서, 명에는 염탐이란 핑계를 대고

 후금과 외교를 이어갔으며 양쪽에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양면 외교를 펼치면서 최대한

 싸움을 억제하기 위해 애썼고, 그와 동시에 조선의 북방을 경비하기 위해 남쪽에서

 끊임없이 병력을 징발하며 방비에 힘써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임란의 피해복구도 미처 끝내지 못한 상황의 조선에서,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고 북방

 방비와 외교로 전쟁을 막아낸 성과를 보여줬고, 이는 광해군의 가장 큰 치적일 것입니다.

 이 무렵 집권당인 북인과, 북인의 핵심 이이첨은 광해군의 외교를 지지하기는 커녕,

재조지은을 주장하며 명의 은혜를 갚고 오랑캐를 무찌르자 말로만 떠들었는데 광해군은

이를 통제하며 이와 같은 성과를 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이와 같은 양쪽에 모두 걸치는 외교 답없는 내치 북인, 이이첨의 전횡으로

숨죽여 지내던 세력이 명분을 얻고 어둠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본인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을 광해군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짤리기에..........

마지막 5-5에선 이이첨, 박승동, 북인, 그리고 광해군의 최후와 평가를 적어보겠습니다.

다음 글은 언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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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8-11-16 22:56:49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형당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는 죽지 않았죠.

우키타 히데이에는 영지 몰수당한 뒤 어느 섬에 유배되어 천수를 다하고 죽었죠.

WR
2018-11-16 23:02:06

감사합니다 빠른 수정하겠습니다.

2018-11-17 14:49:45

재밌게 잘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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