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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최악의 임금들 5-3 광해군- 대동법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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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
Updated at 2018-10-23 00:55:43

<p>&nbsp;</p>
<p>&nbsp;</p>
<p>박승종과 이이첨의 일화가 나타나는 광해군 말기는 후술하고, 대동법을 먼저</p>
<p>적어 보겠습니다..............취준 중에 쓰는 글이라 너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img style="vertical-align: middle;" src="https://yagumania.com/g2/cheditor5/icons/em/47.gif" /></p>
<p>&nbsp;</p>
<p>&nbsp;</p>
<p>1. 대동법의 배경</p>
<p>&nbsp;</p>
<p>대동법은 조용조(租庸調)
로 나뉘어있던 조선 전기의 수취제도를 전세와 군역으로 나누어</p>
<p>작미(쌀)와 작포(포)로 거두는 형태로 정리하고, 각종 잡세에 대해 조세 정책 안에 포함시켜 </p>
<p>일원화하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정책이었습니다. </p>
<p>&nbsp;</p>
<p>세종 시기 조선에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시행하고, 양전을 철저히 하여 숨겨져있던</p>
<p>은결을 모두 국가의 장부 안에 귀속시키고, 토지에 따라 걷는 세금을 명목적으로나마 </p>
<p>공정하게 거두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렇게 조선 초기에는 주로 전세 위주로 걷던 조세의</p>
<p>비중은 조선 중기에 이르면서 전세의 비중이 줄어들고 공납의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됩니다.</p>
<p>&nbsp;</p>
<p>발단은 세조;;; 시절부터인데, 반정에 공로를 세운 훈구 대신들이 척신화되면서 공로를</p>
<p>내세워 대량의 토지를 얻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대지주들이 여럿 생겨나면서 직전법은</p>
<p>점차 유명무실해져 갔고, 거기에 연산군이 내수사 직계제를 실시하며 왕실 전용 주머니를</p>
<p>합법적으로 차버릴 수 있는 법을 만들어 버리면서 왕실 재정은 초기에 비해 엄청나게</p>
<p>확대되었고, 이 공납을 부담해야 하는 백성들의 부담은 날로 커져 갔습니다.</p>
<p>&nbsp;</p>
<p>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은 이를 개혁해보려 했으나 기묘사화에 의해 쓸려나가면서</p>
<p>이는 전혀 실행되지 못했고, 중종시기 부터 명종시기까지는 김안로와 윤원형을 위시한</p>
<p>권신들이 활개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조세 개혁 문제는 아예 밑바닥으로 가라앉았고</p>
<p>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민란, 대표적으로 임꺽정의 난과 같은 사건이 여럿 발생하며</p>
<p>조선의 수취제도는 계속 썩어가며 병폐가 되가고 있었습니다.</p>
<p>&nbsp;</p>
<p>선조는 공납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수사의 전횡을 최대한으로 막는 한편,</p>
<p>이를 보완할 방안을 강구했는데 신하들도 이에 여럿 나섰으나 가장 적극적이던</p>
<p>것은 율곡 이이였습니다.&nbsp;이이는 선조 즉위 초부터 동호문답을 올리며 공납의</p>
<p>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쌀로 대신해 거두는 수미법을 주장했고, 당시 영의정이던</p>
<p>이준경이 역시 공납의 균등화를 주장하면서 실행되는가 했으나 지주들의 반발과</p>
<p>대신들의 소극적 태도로 이는 결국 혁파되고 말았습니다.</p>
<p>&nbsp;</p>
<p>이이는 그러나 끊임없이 공납의 폐단을 지적하며 공안을 개혁하여 심하게</p>
<p>공납을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자며 개정론을 주장했고, 을사사화로</p>
<p>인해 공신에 등록되었던 공신들의 공훈을 삭제하고(위훈삭제), 이에 연관된</p>
<p>구신들이 밀려나면서 이이가 중심으로 떠오르자 개혁안은 탄력을 받는가 했으나....</p>
<p>&nbsp;</p>
<p>동서 붕당이 일어나면서 어느쪽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던 이이는</p>
<p>(이이는 서인으로 분류되지만 이이는 생전 당파를 배격했고, 이이의 학풍을 이은</p>
<p>사람들이 서인이기에 서인으로 분류됨) 개혁을 주장하다 적을 많이 만들었고,</p>
<p>결국 반대파들이 개혁안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주장을 하며 이를 막아섰고</p>
<p>결국 개혁안은 또다시 흐지부지되다가 실망한 이이가 낙향, 이후 사망하면서</p>
<p>좌초되고 맙니다. 류성룡을 비롯해 다른 신하들 역시 이를 개혁하려 시도했으나</p>
<p>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기에 개혁안은 포류하기 바빴습니다.</p>
<p>&nbsp;</p>
<p>이 개혁안이 전기를 맞이한 것은 임진왜란이라는 초대형 사건 때문이었습니다.</p>
<p>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당장 군량미가 급해진 조선 조정은 받지 않은 모든 공물을</p>
<p>쌀로 받기로 결정하면서 이를 주장할 수 있는 전례가 생기게 됩니다.</p>
<p>&nbsp;전후에도 조선 경제 사정은 전란 피해때문에 여전히 개판이었고, 공물을 쌀로</p>
<p>받는 '공물 작미'는 일부 지역에선 여전히 유지되었는데 이는 대동법이라고</p>
<p>하기엔 미약했던 것이, 공물을 쌀로 내는 것이지 '공물의 전세화' 단계까진</p>
<p>나아가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p>
<p>&nbsp;</p>
<p>그러나 선조 전기에 온갖 방안에도 지지부진하던 개혁은 임란이라는 전환기를</p>
<p>맞으면서 후기에 활발하게 논의되는데, 이를 토대로 대동법은 점차 힘을 얻고</p>
<p>현실화되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습니다.</p>
<p>&nbsp;</p>
<p>2. 대동의 길?</p>
<p>&nbsp;</p>
<p>광해군 1년(1608), 영의정 이원익은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을 주장하여 이를</p>
<p>관철시키는데, 서울로 올리는 공물에 한해, 대동법의 형식으로 거두어들이는 </p>
<p>것으로 후에 경(京)대동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것이 대동법의 효시였습니다.</p>
<p>&nbsp;</p>
<p>이원익은 방납의 폐단을 억제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를</p>
<p>실행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원익이 이 분야에 대해 관심과 조예가 깊었던 것은</p>
<p>일찍이 수미법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가 황해 감사로 재직할 시 종사관으로 </p>
<p>그 휘하에 있으며 실무를 직접 담당했던 경험도 있었고, 지방에서 이루어지는</p>
<p>사대동(私大同)에 대해서도 관심있게 지켜보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p>
<p>&nbsp;</p>
<p>광해군이 고평가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대동법의 실행인데, 광해군을 다룬</p>
<p>역사서, 사극 등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지주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단호하게</p>
<p>이를 실행에 옮기는 애민의 군주 광해군의 모습이 주로 그려집니다.</p>
<p>&nbsp;</p>
<p>지주들의 반발은 묘사되는 것처럼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게 반대했고</p>
<p>이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며 대동법을 막으려 애썼습니다.</p>
<p>그런데, 실제 역사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p>
<p><strong>광해군은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strong></p>
<p>&nbsp;</p>
<p>광해군은 명망 높은 이원익의 건의에 이에 동의하긴 했지만, 선혜법 실시에는</p>
<p>그닥 마땅찮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p>
<p>&nbsp;</p>
<p>광해군 원년 봄, 선혜법 두 번째 실시를 앞뒀을 때 광해군은 '송나라 왕안석의 개혁책인 </p>
<p>신법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국에 커다란 재앙이 됐다'며 대동법에 대한 </p>
<p>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이는 광해군이 대동법에 결코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는</p>
<p>것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p>
<p>&nbsp;</p>
<p>이원익은 효과를 보려면 1년만 기다려보자며 왕을 설득했고, 그렇게 선혜법이 시행되며</p>
<p>공물변통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자 지주를 포함한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이 일어났습니다.</p>
<p>그러자 확대 시행을 목표로 했던 대동법은 결국 논의가 더 진행되기는 커녕 중단되어</p>
<p>경기 지역에 국한되고 마는데..................<strong>이는 광해군이 원하던 바였습니다.</strong></p>
<p>&nbsp;</p>
<p>광해군 2년, 의병장으로 유명한 곽재우는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p>
<p>상소를 올렸고, 당시 비변사의 기록에는 곽재우 외에도 양반 여럿이 이에 대해</p>
<p>동의하며 선혜법을 확대할 것을 요구한 것이 나타납니다.</p>
<p>&nbsp;</p>
<p>&nbsp;</p>
<p>&nbsp;조정에서 건의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한 것은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는 데 힘써서</p>
<p>&nbsp;백성을 안스럽게 여기시는 성상의 인자함을 몸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백성을 </p>
<p>괴롭히는 일이 방납(防納)하고서 교활한 방법으로 대가(代價)를 곱절로 징수하는 </p>
<p>폐단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span class="idx_wrap idx_place">경기도</span>의 1년 공부(貢賦) 및 온갖 응역(應役)의 </p>
<p>대가를 절감해 헤아려서 결수(結數)를 계산하여 쌀로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p>
<p>&nbsp;</p>
<p>이렇게 될 경우 대개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벗고 편히 쉴 수 있는 것이 전일 방납한 사람들이 </p>
<p>지나치게 함부로 징수하던 수에 비교하면 몇 갑절이 덜한 정도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p>
<p>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논의가 분분하고, 방납하는 사람들은 그 이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p>
<p>따라서 교란시키니, 일이 장차 중도에 폐해지게 될 형편인지라 진실로 한심합니다.</p>
<p class="paragraph">대체로 일의 이해와 편부는 반드시 1년을 통하여 시험해본 뒤에야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p>
<p class="paragraph">단지 반년 동안만 시행하고 그만둔다면 각사에서 공물(貢物)에 대한 값을 줄 때 방애되는 </p>
<p class="paragraph">일이 많아 이해의 소재를 미처 알 수 없을 것이니, 금년을 한정하여 선혜청의 사목(事目)에 </p>
<p class="paragraph">따라 시행해서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시험해 알아보고 나서 다시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p>
<p class="paragraph">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p>
<p class="paragraph">"서서히 결정하겠다. 내수사 노비는 군대로 편성한다 해도 별로 할 만한 일이 없다. </p>
<p class="paragraph">수영패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p>
<p>&nbsp;</p>
<p>&nbsp;</p>
<p>광해군일기[정초본] 13권, 광해 1년 2월 28일 경진 3번째기사 <span>1609년 명 만력(萬曆) 37년&nbsp;&nbsp;&nbsp;&nbsp;&nbsp;</span></p>
<p><span>&nbsp;</span></p>
<p><span>이 기록은, 광해군이 확대 실시를 주장하는 의견에 천천히 하자며 제지하는 기록입니다.</span></p>
<p><span>&nbsp;</span></p>
<p><span>이후에도&nbsp;신하들은&nbsp;확대 실시를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이를&nbsp;막아서며 반대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span></p>
<p>&nbsp;</p>
<p>&nbsp;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가 모두 '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바치게' 했던 데에는 그 뜻이 있다. </p>
<p>그런데 이번 방납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이 '작미'라는 방법이 있었으니, </p>
<p>이는 그 <b>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b>. </p>
<p>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br /></p>
<p>&nbsp;</p>
<p>-《광해군일기》(정족산본) 권13, 1년 2월 5일 ‘정사’]</p>
<p>&nbsp;</p>
<p>&nbsp;“아뢴 뜻은 알겠다. 다만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는 모두 토질의 형편에 맞추어 공물을 거두었으니, </p>
<p>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는가. 지금 지엽적인 폐단이나 구제하고자 하고 근본을 바로잡는 </p>
<p>계책은 도모하려 하지 않으니, 낭묘(廊廟)의 여러 신하들이 친히 이익을 분석해 보인 계책이</p>
<p>&nbsp;어찌 해로움이 없겠는가. 조정은 다만 기강을 정돈하고 법전을 밝혀 방납하는 사주인의 폐습을</p>
<p>&nbsp;엄격히 금지하고, 곧바로 토산물로 상납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은 무릇 일을 </p>
<p>추진함에 있어서 시작할 때에 반드시 끝을 맺을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p>
<p>&nbsp;</p>
<p>온 나라의 세금을 다 쌀로 내게 하는 것이 어찌 먼 훗날까지 헤아리는 일이겠는가.</p>
<p>&nbsp;경기 이외의 다른 도에까지 점차 미치게 하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p>
<p>경들은 다시 강구하여 조종조의 구례를 그대로 따라 시행함으로써 한 번 두 번 변함에 </p>
<p>따른 고질적인 폐단을 전부 고치도록 하라.”<br />(1610년 12월 25일)</p>
<p>&nbsp;</p>
<p>&nbsp;</p>
<p>광해군이 이렇게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는 것에 소극적이고,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p>
<p>했던 이유는 당시 공납으로 거둬들이는 세입이 조선 전체 조세의 6할을 차지했기</p>
<p>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p>
<p>&nbsp;</p>
<p>지주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컸지만, 가장 큰 이유는...............</p>
<p><strong>궁궐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선 자금이 절대적으로</strong></p>
<strong></strong>
<p><strong>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strong><br /></p>
<p>&nbsp;</p>
<p>&nbsp;</p>
<p>3. 재정을 파탄내는 궁궐 공사</p>
<p>&nbsp;</p>
<p>&nbsp;광해군은 선조 말년에 재건하던 창덕궁 뿐 아니라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건설하고 </p>
<p>정릉행궁(경운궁)을 확장했으며 경복궁도 간을 보려 했는데, 조선 왕조 전체를 살펴봐도 </p>
<p>광해군처럼 그렇게 <b>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궁궐 공사를 한 사례는 없었습니다.</b></p>
<p>&nbsp;</p>
<p>선조는 전후 한양에 돌아온 이후 창덕궁 중건 공사를 시작했는데, 광해군은 이를 이어받아</p>
<p>창덕궁 중건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정궁인 창덕궁을 기껏 복원시켜 놨는데 광해군은</p>
<p>수시로 창덕궁에 비해 좁고 불편한 정릉행궁(경운궁)으로 행차해 기거했으며, 이 때문에</p>
<p>정릉행궁을 확장했습니다. </p>
<p>&nbsp;</p>
<p>광해군이 창덕궁을 싫어했던 것은 기록에도 남아있는데, </p>
<p>광해군 7년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으로 옮기겠다고 </p>
<p>했다. '대조전은 유암불편하여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창경궁으로 옮기고 싶다'</p>
<p>&nbsp;</p>
<p>라며 두 궁을 확장하고 수리할 것을 지시한 것입니다.</p>
<p>&nbsp;</p>
<p>여기서 그쳤으면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의 3궁 체제로 전란 이전과 같기 때문에 모르겠는데.</p>
<p>이후에는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nbsp;왕기가 있다는 소문에 경덕궁을</p>
<p>짓고, 인왕산 아래에 왕기가 있다는 소리에 인경궁을 지었으며(인경궁은 경복궁의 10배에</p>
<p>달하는 크기였다고 한다........) 북학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듯 건설에 열을 올렸습니다.</p>
<p>&nbsp;</p>
<p>이는 전란을 겪으며 온갖 참담한 상황을 겪은 광해군이 현대에 흔히<strong> PTSD</strong>라 부르는</p>
<p>그 증상을 보였다고 하는데,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신에 깊이 빠지게 되어</p>
<p>술사들을 불러들여 가까이 한 탓도 컸고.............</p>
<p>&nbsp;</p>
<p>궁궐 건축은 예로부터 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쓰였는데, 광해군은 성장 과정에서</p>
<p>워낙 압박과 견제를 많이 받았기에 자신의 권위를 엄청나게 중시했고, 부왕 선조가</p>
<p>전란을 겪으며 위상이 대폭 떨어져 왕의 권위가 살지 못한 것을 보면서 자랐기</p>
<p>때문에........왕기라는 말에 집착한 이유도, 그 험난한 과정을 겪고 왕이 되었으니</p>
<p>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나, 정도가 너무너무 심했습니다.</p>
<p>&nbsp;</p>
<p>광해군은 궁궐 짓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strong>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막았을 뿐 아니라</strong></p>
<p>전국에 영건 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는데 영건 도감 자체가 왕의 </p>
<p>막대한&nbsp;비호 아래 부패해버리면서 정해진 수량에 방납가를 추가해 최대 100배까지</p>
<p>징수하며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는데, 어명을 내세워 수탈을 자행하는 조도사들의</p>
<p>횡포가 너무 지나쳐 광해군에게 보고가 올라가자...........</p>
<p>&nbsp;</p>
<p>&nbsp;<b>"조도사가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다"</b></p>
<p>&nbsp;<strong>라며 오히려 수탈을 종용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strong>.</p>
<p>&nbsp;</p>
<p>이 무렵 호남 지방에는 심각한 기근으로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었는데도 이를</p>
<p>진행했으며, 조도사 중에는 '자신은 도둑질하는 신하' 라며 죄책감을 느끼는</p>
<p>사람도 적지 않았을 정도로 실태는 참담했으나 이는 계속되었습니다.</p>
<p>&nbsp;</p>
<strong></strong>
<p><strong>더 막장인건, 이 무렵 후금과 명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며 병력이 수없이</strong></p>
<strong></strong>
<p><strong>징발되어 국경에 배치되고 있는 상태에, 명에 원병을 파견한 상황에서도</strong></p>
<strong></strong>
<p><strong>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strong></p>
<p>&nbsp;</p>
<p><strong>거기에다...............1619년 원병 파병이 결정되면서 더더욱 참담해지는데</strong></p>
<strong></strong>
<p><strong>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조도사가 삼남에 파견됩니다.</strong></p>
<strong></strong>
<p><strong>&nbsp;영건 비용 원정을 위한 증세 조처가 더 해지며 부담이 따따블로 진화한것.</strong></p>
<p>&nbsp;</p>
<p>또다시 궁궐 영건을 중단하라는 요구들이 당연히 나왔지만.....................</p>
<p><strong>하지만 광해군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원정군이 후금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strong></p>
<p><strong> 변함이 없었습니다;;;;; 경덕궁의 공사는 광해군 12년 11월경에 거의 끝나갔지만</strong></p>
<p><strong>인경궁 공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br /></strong></p>
<p>&nbsp;</p>
<p>&nbsp;광해군의 지나친 궁궐 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p>
<p>&nbsp;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p>
<p>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p>
<p>퍼져나갔고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p>
<p>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는</p>
<p>보기 드문 광경마저 일어나는 등 상황과 민심은 가히 최악이었습니다.</p>
<p>&nbsp;</p>
<p>&nbsp;더 웃긴건, <strong>광해군의 궁궐병은 후금에 까지 소문이 나 누르하치도 알 정도였는데</strong>...........</p>
<p>조선 통사 박경룡(朴景龍)에게 "듣건대 너희 나라에 궁궐을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p>
<p>"라고 묻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p>
<p>&nbsp;</p>
<strong></strong>
<p><strong>광해군 시기 조선은 전란의 피해를 완벽하게 복구하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strong></p>
<p><strong>그런데 정말 심각한 건, <b>국가의 세입은 전쟁 전에 비해 2/10, 3/1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b></strong></p>
<p><strong><b>지출은 어느덧 전쟁 전의 규모를 회복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b></strong></p>
<p><strong>이유는 누가 봐도 명확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고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strong></p>
<p>&nbsp;</p>
<p><strong>거기에, 국경에선 명과 후금의 군사 긴장이 고조되면서 광해군은 자신을 호위할</strong></p>
<p><strong>병력마저 국경으로 뺄 정도로 국경 방비에도 열을 올렸고, 명의 지원 요청을 받아</strong></p>
<p><strong>파병을 결정하며 군사를 파병하기도 한 상태에서..........</strong></p>
<p>&nbsp;</p>
<p>
&nbsp;<strong>- 임란의 피해복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데</strong></p>
<strong></strong>
<p><strong>&nbsp;- 북방의 정세가 긴장상태라 군비와 군역이 동원되는 상황에서</strong></p>
<p><strong>&nbsp;- 기근마저 발생하며 민초의 삶은 초토화되어가는데</strong></p>
<strong></strong>
<p><strong>&nbsp;</strong></p>
<strong></strong>
<p><strong>궁궐병에 걸려 필요 이상의 궁궐 건축&amp;백성 수탈</strong></p>
<p>&nbsp;</p>
<p><strong>평시에도 이렇게 궁궐을 많이 건축하면 폭군 소리 듣기 딱 좋은데........</strong></p>
<strong></strong>
<p><strong>거의 준전시 상황에 전란 복구도 안된 상황에 대규모 공사를 감행하며 반대 목소리엔</strong></p>
<strong></strong>
<p><strong>귀를 닫은채 오히려 이를 닥달하고 수탈을 종용한 임금.</strong></p>
<strong></strong>
<p><strong>&nbsp;</strong></p>
<strong></strong>
<p><strong>광해군은 폭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최악의 임금이었습니다.</strong></p>
<p>&nbsp;</p>
<p>&nbsp;</p>
<p>글을 더 적으려 했으나 취준 자소서 작성과 시간 부족의 여파로.................</p>
<p>중립외교와 광해군 후반기는 4에서 이어 보겠습니다............<img style="vertical-align: middle;" src="https://yagumania.com/g2/cheditor5/icons/em/111.gif" /></p>
<p>&nbsp;</p>
<p>&nbsp;</p>
<p>&nbsp;</p>


2
Comments
2018-10-23 06:17:06

시리즈 첫 글 이후 뜸해서 몰랐는데 못 본 사이 글 많이 올리셨네요

 

폭군이 너 역적!으로 숙청 시작하면 그 최후는 대부분 진짜 반란인데 광해군이 딱 그 꼴이더군요

중립외교로 인한 거품으로 지나치게 고평가됫었는데 요즘은 예전만큼 빨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궁전 올리는 것도 모자라 파주 천도 시도까지 했으니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이 세자 콤플렉스를 극복하면 성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는 평이 떠오릅니다


 


2018-11-10 13:41:27

항상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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