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글을 쓰기 전에 갑자기 궁금해져서 제 프로필을 열어봤습니다. 2008년 가입으로 뜨는군요. 10년 조금 넘게 매니아에서 이런 저런 글을 쓴 셈입니다. 정치게시판이 있을 때는 거기에도 많은 글을 썼고, 제 직업과 관련된 부분이라 자유게시판을 통해 노동법에 대한 몇몇 질문들에 답변 드리고 필요한 분들께 도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NBA는 앤써의 오랜 팬이었다가, 매니아에 가입할 때쯤엔 이미 내쉬와 피닉스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드라기치를 지나, 부커를 응원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다행히 10년 조금 넘게 매니아에 있으면서 지금껏 딱히 징계를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저는 남성이고, 페미니스트라고 하긴 조금 조심스럽지만 대학에서 여성학 복수전공을 준비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취업되는 바람에 한 과목을 이수하지 못해 여성학 전공이 인정되지 않았으니, 딱히 전공자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하려는 얘기는 딱히 페미니즘이나, 정치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의 ‘토론’ 그 전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농사를 조금 잘(?) 짓는 제 고모부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두고 해 주신 얘기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고모부의 얘기를 단어 하나까지 다 적어가는데, 한국 사람들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뜸 하는 얘기가 ‘아는 거네. 뭐’ 라는 겁니다. 그래놓고 정작 집에 돌아가서는 전화로 “네 말대로 했는데 왜 안되냐” 따지고 정작 확인해 보면 다 제 멋대로라는 거였죠.
그게 한국의 국민성 문제인지까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매니아를 포함해 한국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유난히 비슷한 느낌을 자주 받았던 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다 보거나 듣지도 않고 쉽게 단정짓는다. 단정이 빠른 만큼 쉽게 아닌 척을 한다. 작은 부분을 크게 포장하거나 큰 일을 작은 것처럼 얘기한다. 뭐 그런 것들입니다.
사실 매니아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부분은 사실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 조금 조심스럽지만… 저는 제가 ‘법’ 특히 ‘노동법’ 을 다루는 일을 제 직업으로 하고 있는데도 가끔 여기서 법 얘기로 댓글 달 때 당혹스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사실이 아닌 걸 너무 당당하게 사실이라고 적으시거나, 단순히 한 ‘케이스’에 불과한 일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죠. 물론 정말 저보다도 더 법에 대해서 깊이있는 지식, 혹은 실무적인 경험을 가지신 분들도 간혹 뵈었습니다만 사실 그런 경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훨씬 자주 목도하곤 합니다. (제가 술 먹고 로그인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한 조심스럽게 바로잡아드리려고 노력하는데, 몇 번인가는 마치 제가 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 답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럴 땐 조금 난감합니다.
페미니즘이나, 정치 얘기를 할 때도 종종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썰전’을 좋아하는데요. ‘썰전’은 다른 토론프로그램과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작가진들이 양 측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전제(팩트)를 정리해준다는 점이지요.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토론들은 사실 상당히 피곤합니다. 서로 공유하는 전제가 다르면 완전히 어긋나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고, 만약 심지어 그게 어떤 입장의 ‘일부’ 만을 가져온 것이라거나, 잘못된 팩트를 갖고 이야기하거나, 혹은 상대의 입장을 왜곡해 놓은 것이라면 그런 대화는 사실 아무리 길어도 결론 나지 않는 무의미한 대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인 양 다음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면 당연히 서로간 극단적인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죠.
페미니즘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리고 정치적으로 진보이든 보수이든 그 자체는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페미니스트인지, 진보인지 그런 것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전제’ 가 제대로 공유되고 있는지 하는 것이죠. 대화를 위해서 우선 필요한 건 그 '전제' 를 명확히 정리하고 공유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종종 후배들에게 하는 얘기인데요. 어떤 조직이건 사람이 만 명 가량 있으면 그중에 적어도 네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사람이 한 100명은 된다는 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체에서 비중은 고작 1%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대화들까지를 전부 일반론이고, 어떤 단체의 공식 입장인 것처럼 언급한다면 세상에 멀쩡한 단체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겁니다. 제대로 된 토론을 위해서는 그런 (통계적) 특이값들은 서로 배제해야 합니다.
저는 매니아에서 징계를 얘기하고, 글의 삭제 원칙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글을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와, 고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상대의 글을 오해한 부분이 없는지, 내가 가져오려는 ‘전제’ 가 잘못되었다거나 왜곡된 부분은 없는지 그런 검토가 있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징계에 원칙이 없다’ 그런 얘기들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 스스로 징계가 문제되지 않는 글들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더 생산적인 결론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특히 페미니즘이나 정치, 그런 민감한 이야기들을 할 때는 특히 조금 더 그러한 부분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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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