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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없었지만 특별했던 그 날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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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8 16:17:11

안녕하세요. 이전 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 분과 지난 일요일 조우했습니다.

사실 따로 글을 남길 만큼 드라마틱하거나 특별할 건 없는 하루였어요. 그냥 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떠났고, 여전히 진행중인 싱숭생숭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약속 전날, 아침 비행기로 도착해서 빠르게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온 식당에서 닷지를 사이에 두고 연신 말을 걸던 사장님이 질문을 던집니다. 히로시마엔 무슨 일로 왔냐고. 첫눈에 반한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장난 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짧게 나마 자초지종을 설명해드리자 제 앞으로 나마비루 한 잔을 툭 올려놓으시네요. 일본어로 짧게 말씀하셨는데, 무슨 말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갈 준비하느라 부지런을 떨었더니 약속 시간이 어느새 40분 앞으로 다가왔네요. 서둘러 호텔을 나와 약속 장소인 버스 터미널로 가는 노면 전차에 올라탔습니다. 전차 문이 닫히고 출발을 하는데, 저란 놈이 그렇죠.나올 때 지갑을 두고 왔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천천히 달려가는 전차안에서 헛웃음과 함께 초조함이 밀려 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곧장 반대편 전차로 옮겨 탄 뒤 호텔까지 전속력으로 뛰어갔습니다. 트랜지션 상황을 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뛰었다면 지난주 경기 때 그리 일방적으로 깨지진 않았을거예요.


숫자 욕을 뱉으며 지갑을 집어들고서 곧장 호텔 앞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히네요. 시트와 맞닿은 등허리와 겨드랑이에는 더 이상 처음 나올때의 뽀송함이 느껴지지 않아요. 겨드랑이 젖으면 아무 의욕 없어지는데.


부리나케 달려 터미널 플랫폼에 도착한 시간이 정확히 1시. 에누리없는 13시 00분이었어요. 핸드폰 액정에 비친 지금의 꼴을 확인해 봅니다. 날씨는 왜 이리도 화창한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네요. 옷 소매와 손등으로 옆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 봅니다. 최대한 깔끔하고 멋진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었는데, 마음같지 않네요.

 

기다림의 설렘을 즐길 새도 없이 대합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저 앞 플랫폼 유리창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밝게 웃으며 손 인사를 하는데,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게 그 앞까지 달려가 버렸어요. 반갑게 악수를 하며 손을 꼭 잡았습니다.


"정말 나왔네요. 잘 지냈어요?"

"우리 딱 정각에 만났네요. 뛰어 온 거에요?"


환하게 웃으며 첫 마디를 꺼내는 그녀. 그 때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었구나. 여전히 예쁘네요.


만나서 참 기쁜데, 너무 좋은데, 안부 대화를 나누고 나니 막상 그 다음엔 뭘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무작정 밖으로 나왔어요. 비가 내렸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하늘이 높고 햇살이 눈부시네요. 뛰어갈 땐 참 별로였는데, 데이트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날이 좋았네요.

과일 주스 한 잔씩 손에 들고 평화 공원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벚꽃이 만개해서 공원 주변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건 상관없었어요. 벚꽃은 졌지만, 벚꽃보다 더 화사한 미소가 제 눈 앞에 있는데요.


주어진 단 하루라는 시간. 무언가 특별한 기억을 만들고 싶었던 바람과는 달리 굉장히 평범한 데이트였어요. 공원을 걷고, 벤치에 앉아 얘기 나누고, 밥을 먹고, 번화가를 구경하고, 인형 뽑기를 하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누군가에겐 보통의 하루였겠지만, 그럼에도 더 할 나위없이 즐거웠습니다.

 

단 1초도 허투로 쓰기 싫었어요. 대화 내내 빛나는 눈빛으로 제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친구의 표정과 말투, 이야기들을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사진 찍으며 닿았던 어깨, 코를 간지럽히던 샴푸 냄새, 걷다가 스쳤던 손길까지도요.


즐거운 순간만을 남기려 최선을 다했지만, 헤어짐의 감정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더라고요.

땅거미가 내려 앉은 창 밖, 대화가 잠시 끊기고 이미 한참 전에 말라 버린 커피잔을 매만지던 제게 꺼내 온 한마디.

 

"이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몇 초동안 서로 바라만 봤습니다. 바라보는 시선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어요. 이 친구는 왜 제 눈을 피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어색함에 웃음으로 고갤 돌렸지만, 자꾸만 두근거립니다.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이 목젖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꺼내지 못하고 되려 이제 일어나자는 말을 먼저 건냈습니다.


밖은 이미 어둡고 밤 공기가 쌀쌀하네요. 춥지 않냐는 그녀의 질문에 괜찮다고 말해놓고서는 괜스레 손에 입김을 불어 넣어 봅니다. 온종일 몇 번이나 망설였던 한마디.


"우리 손잡고 걸을래요?"


웃으며 선뜻 제 앞으로 건네주는 그녀의 손을 꽈악 잡았습니다. 손깍지로 바꿔 쥐고서 얼굴을 바라보니 다시 빙긋 웃어주네요. 지하철 역 까지 걸어가는 10분 동안은 대화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잠깐씩 서로 얼굴 보면서 멋쩍은 웃음 지었던 것 밖에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어색함을 밀어내려, 잡은 손을 괜히 앞 뒤로 흔들어보고, 장난스럽게 주머니 속으로 가져가 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지어 보이지만, 눈치없이 가까워지는 지하철 역 입구가 야속하게만 느껴집니다.


계단을 내려가 개찰구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정말 헤어짐의 순간이네요.

쓴 웃음 짓고 있는 제 표정을 흉내내며 웃어 보이는데, 그 모습마저도 참 예쁘네요.


"잘 지내요."

"그쪽도요."

"되게 많이 보고 싶을 것 같네요."

"다음엔 내가 한국으로 갈게요."

"약속하는거죠?"

"기억 안나요? 그쪽이 나한테 알려준 거."


새끼 손가락 걸고, 처음 본 그날 알려준 엄지 도장, 검지 싸인, 손바닥 복사까지 하고 나서야 잡았던 손을 놓아주었습니다. 짧은 포옹과 함께 멀어지는 뒷 모습을 계속 지켜봤어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겠더라고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찍은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사실 뭘 바랐는지 모르겠어요. 고작 하루 만나서 데이트하고, 연인이 되고, 국제 결혼에 성공하는 판타지를 그렸던 건 아니었어요.

좋은 관계로 이어지고 싶은 욕심은 분명 있었겠죠.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정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솔직한 내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으니까.

 

달콤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마주한 화요일은 가혹했습니다. 밀린 업무 속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네요. 어제 오늘, 이따금씩 사진을 꺼내보고 있는데, 사진 속 제 표정이 참 밝게도 웃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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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Updated at 2018-04-18 16:21:10

보기만해도 설레임 가득하네요 힘내십시오!

2
2018-04-18 16:24:44

정말 꿈같은 얘기네요..!

3
2018-04-18 16:27:41

아름답습니다. 인연 꼭 이어나가시길.

3
2018-04-18 18:04:33

르더킹님 얘기도 그렇고 매냐에는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많네요. 

2018-04-18 18:57:40

제 스토리보다 훨씬 극적이신듯해요.
꼭 인연 이어나가셨으면 좋겠네요.

2
2018-04-18 16:29:07

 아아 너무 행복한 글입니다..

3
2018-04-18 16:33:39

4D로 편지 읽는 기분이라니..
천천히, 포근하게, 즐겁게, 잘 하고 계시네요.
국제결혼 축하드립니다.

3
2018-04-18 16:37:11

 저 정말 추천 잘 안누르는데,, 추천 누르고 갑니다

1
2018-04-18 18:28:28

전 정말 추천 잘 누르는데, 추천 누르고 갑니다(?)

2
2018-04-18 16:39:52

뭔가 일본 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특유의 정적이면서 조용하고 소박한 로맨스가 느껴져요 ...

 

크으 

2
2018-04-18 16:41:29

한편의 영화같은 만남이었네요!
반가웠던 설레임과 헤어짐의 아쉬움도
4D처럼 다가오네요.
더 좋은 기회로 만들어가시길 바래요.

2
2018-04-18 16:43:05

두근두근하네요. 봄입니다~ 봄이에요

3
2018-04-18 16:44:46

 이거 본인 실화인가요?

 창작소설인줄 알고 읽었습니다..정말 아름다운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셨네요!

 다음 이야기 기대하고있을께요!

2
2018-04-18 16:47:30

너무 설레고 읽는것만으로 행복하고 특별한거 같아요^^

제발 또 좋은 소식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멋지세요^^ 용기 본받겠습니다! 작문능력은 덤으로!!

3
2018-04-18 16:50:54

순간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이 참 아름다워요

2
2018-04-18 17:04:38

읽는것만으로도 설레입니다
매니아 솔로분들을 대표하여 응원합니다.

2
2018-04-18 17:05:24

민남편도 올려주세요^^*

3
2018-04-18 17:06:07

글 너무 잘 쓰시네요. 그 당시의 글쓴님의 감정이 오롯이 전달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데이트도 후기 부탁드려요!

5
Updated at 2018-04-18 17:11:25

글 읽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3
2018-04-18 17:14:20

소름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글이에요

9
2018-04-18 17:17:40

그러니까 저번주에 트렌지션 상황에서 잘 뛰지 못해서 완전히 깨지셧단 말이죠??

2
2018-04-18 17:24:29

이 영화 언제 개봉합니까?

2
2018-04-18 17:29:47

와.. 가독성 엄청나군요. 해피 엔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
2018-04-18 17:33:25

연애하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2
2018-04-18 17:51:13

봄 같은 글이네요~~

1
Updated at 2018-04-18 17:51:53

Where amazing happens to normal people.
NBAmania!

3
2018-04-18 18:05:07

책상 던지기도 싫을정도로 예쁜 만남이네요 

1
2018-04-18 18:31:08

이거는 현실판 냉정과 열정사이?

2
2018-04-18 19:00:13

글을 읽고있는 저도 너무 행복해지는거 같습니다.

 

다음 번 글도 기대가 되네요.

WR
6
2018-04-18 19:09:36

댓글 달아주신 분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아직도 감정 정리가 잘 안되네요. 설레임보다는 아쉽고 애틋한 마음이 훨씬 더 커요. 슬픈 감정은 분명 아닌데,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는 날, 그때의 이야기도 이곳에 남기겠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1
2018-04-18 19:12:52

너무 잔잔하게 잘 봤습니다.

좋은인연 만들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2
2018-04-18 20:31:21

연애관련 이야기에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읽는게 거의 처음인듯..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네요.

오랜만에 연애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글입니다.

1
2018-04-18 20:38:34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1
2018-04-18 21:46:51

두명이 세명 네명되서 더욱더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정말 바래봅니다. 제게 올 많은 행운들 중 몇개라도 글쓴님에게 옮겨져 작은 행운이 님의 큰행복으로 이어질수 있다면 기꺼이 제 행운을 드리고 싶네요.

WR
2018-04-19 07:46:54

말씀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2
2018-04-18 22:01:36

왜 제가 눈물이 다 나죠.

1
2018-04-18 22:41:35

와 제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웹툰이나 단편영화 제작인데..

실례가 되지않는다면 이야기를 조금 가져가도 될까요?

훗날에 다시 만난다면 그 이야기도 꼭 들려주세요!

WR
1
2018-04-19 07:52:47

결말도 없고 그냥 일상의 글이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2018-04-19 12:10:37

감사합니다! 좋은 결말로 흐를거에요 걱정마세요!

1
2018-04-19 00:31:43

우와... 이런 아름다운 필력이라니...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합니다
무례할지 모르겠으나... 그 여자분 사진이 궁금할 정도로 스토리가 영화같이 매력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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