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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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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1-22 13:05:28

안녕하세요. 계속되는 미세먼지에 건강들은 잘 챙기시고 계신지요.

그나마 내일부터는 한파덕분에(?) 미세먼지가 조금은 덜 할 듯합니다.

추위라면 질색하는 저조차 먼지보다는 차라지 껴입을 수 있는 추위가 낫더군요.

항상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1.들어가며

 

여러분들은 어떤 새해 소원을 기원하셨나요? 부모님의 건강? 시험 합격? 코인 대박? 커리의 파엠?대개의 경우 가뜩이나 힘든 삶에서 조금은 더 행복해지길 기원하면서 희망찬 소원을 빌기 마련일 것입니다.

잠깐 화제를 돌려 불교 용어 중에 칠난팔고(七難八苦)’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의 난과 여덟 가지의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실상 인간에 있어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의미하는 말이죠.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를 달에 빌면서 자신에게 내려줄 것을 기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모 수상말고 전국시대에 말이죠.

 

<초승달을 향해 소원을 빌고 있는 시카노스케>

 

자신의 주가(主家)였던 아마고 가의 부흥을 위해서 제게 칠난팔고를 내려주소서라는 소원을 달에게 빌고, 최후까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했던 희대의 충신,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입니다.

 

 

2.아마고가문 멸망

 

<아마고 츠네히사의 초상>

 

아마고 가문. 전국 3효웅* 중의 하나이자 이즈모의 늑대라는 별명을 가졌던 아마고 츠네히사*, 그리고 그의 손자 아마고 하루히사*의 시기에 쥬고쿠 지역을 제패했던 가문입니다.그리고 시카노스케는 이런 아마고 가문의 가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호조 소운, 사이토 도산, 아마고 츠네히사. 모략에 능했고 하극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2105&cid=58180&categoryId=58309

*창작물에서 유난히 무능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아마고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끈 인물입니다. 하루히사가 갑자기 죽고 나서부터 아마고 가문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웅 시카노스케가 성인식을 치를 즈음에는 아마고 가문은 이미 이전의 세력을 잃고, 모리 가문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젊은 시카노스케는 그 유명한 소원을 빌면서 분투했지만 결국 모리 가문의 총공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본거지였던 갓산토다성은 점점 고립됐고 이 본성에 대한 모리의 총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아마고 가문은 이 총공격을 무려 세 번이나 막아냈습니다. 이 방어전에서 시카노스케 또한 적의 무장을 직접 일기토(!) 그것도 두 번이나(!!) 죽이고 모리 본진에 야습까지 거는 등 맹활약했지만 주군이었던 아마고 요시히사*의 항복을 결정하면서 1567, 아마고 가문은 멸망하게 됐습니다.

 

*아마고 하루히사의 적남

 

 

3.아마고 재흥운동의 시작

 

주군을 따르고자 했던 시카노스케. 그러나 시카노스케의 이런 요청은 주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낭인이 되어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던 시카노스케가 향한 곳은 쿄()였습니다. 이 교토에서 시카노스케는 다른 아마고 낭인들과 함께 아마고 재흥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토호쿠사(東福寺)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아마고 가문의 사람, 아마고 카츠히사를 환속시키고 주군으로 받들게 됩니다.

 

<아마고 재흥군의 대장. 카츠히사의 초상>

 

그리고 결국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모리 가문이 대립하고 있던 큐슈의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기타큐슈로 군을 보낸 사이, 시카노스케와 아마고 재흥군은 이즈모국에 침투했습니다. 그리고 아마고 재흥의 격문과 함께 숨어있던 아마고 가문의 가신들이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작 5일 만에 모인 3000의 병력을 바탕으로 신야마성(新山城)을 공략한 아마고 재흥군, 이후 그 세력을 키워 어느새 6000의 대병력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모리 모토나리*가 토벌을 위해 보냈던 장수들까지 시카노스케의 권유로 아마고 재흥군에 합세하고, 이런 움직임에 고무된 오우치 가문 역시 오우치 재흥군을 결성하는 등 이 재흥운동은 성공할 것만 같았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2088&cid=58180&categoryId=58309

 

그러나 가만히 있을 모토나리가 아니죠. 모토나리는 반란 진압을 위해 큐슈에서 아들들*을 철수시켰고, 오우치의 반란부터 진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잘난 아드님들, 모리의 두 화살이라 불리던 두 명장이 큐슈에서 돌아왔습니다. 모토하루타카타게두 희대의 명장은 큐슈에서 본국으로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오우치의 반란을 진압해버리고 아마고 재흥군의 공략에 돌입했습니다.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드디어 시작된 아마고 재흥군과 모리군의 싸움. 그러나 전투의 천재들이 이끄는 모리군은 너무나 강력했습니다.첫 전투에서 패한 재흥군은 본거지인 신야마성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도주 과정에서 시카노스케는 최후에 남아 후퇴를 도왔다고 합니다. 고립된 아마고 재흥군. 어느새 성 두 개 만을 남기고 모든 세력을 잃게 되면서 위기에 빠졌지만, 그들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모리 가문의 영주였던 모토나리가 병에 걸리면서, 킷카와 모토하루를 제외하고 철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아마고 재흥군이 힘을 냈습니다.각 성을 무너트리고 그 모토하루를 몰아세우는 등 활약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다시 반격이 시작되었고, 아마고 재흥군을 이끌던 카츠히사는 신야마성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시카노스케 역시 모토하루의 공격을 받고 붙잡히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남 시카노스케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유폐된 채 감시를 받던 시카노스케는 설사를 핑계로 계속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렸습니다.처음에는 의심하며 엄청나게 감시했던 모리 군이었지만 얘가 자꾸 똥만 싸러 다니니까 귀찮아졌는지, 아니면 익숙해졌는지 점점 감시의 인원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노렸던 시카노스케. 그 틈을 타서 화장실에서 탈출, 이나바국에서 또 다시 아마고 재흥군을 결성했습니다.(아마고 재흥 가즈아아~~~!)

 

<"전국바사라"의 시카노스케. 사슴 졸귀>

 

당시 이나바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사람은 다케다 타카노부라는 국인이었습니다. 이 다케다 타카노부는 모리의 동맹이었고요. 이 타카노부와 대립하고 있던 것은 야마나 토요쿠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시카노스케는 토요쿠니와 연계했고, 이나바국의 거점인 돗토리성을 함락시키고 토요쿠니에게 주는 등 그 연계를 계속 강화해나갔습니다.

이 때 시카노스케는 자신이 돕던 토요쿠니에게 빅 뒷통수를 맞게 됩니다.바로 토요쿠니가 모리와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시카노스케는 일단 모리 공략이라는 꿈을 멈추고, 이나바에서의 세력확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각지에서 모리군과 싸우는 한편, 모리와 대립하고 있던 미우라 가문이나 우라가미 가문, 큐슈의 오토모 가문, 그리고 멀게는 오다 군의 중신이었던 시바타 카츠이에까지 관계를 형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리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카노스케의 숙적인 모리의 두 아드님(이젠 삼촌)47,000의 대병력을 이끌고 온 것입니다. 시카노스케는 자신이 지키고 있던 성에서 둘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이 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들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모리와 대립하고 있던 미무라 가문이 멸망우라가미 가문은 우키타 나오이에의 반란으로 쇠퇴미우라 가문은 모리에 항복이라는 쓰리 콤보가 터지면서 고립됐습니다. 전혀 싸울 수가 없는 상황에서 다시 시카노스케는 탈출해서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4.마지막 분투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 창조"의 시카노스케>

 

두 번이나 박살이 났던 시카노스케. 이런 시카노스케가 의지한 건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교토에서 시카노스케를 만난 노부나가는 멋진 남자라며 칭찬하며 말을 내려주는 등 시카노스케를 매우 아꼈습니다.

이때부터 시카노스케와 아마고 재흥군은 노부나가의 객장으로서 각지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탄바 공략에 함께하기도 하고,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를 따라 카타오카성과 시기산성을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도 시카노스케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탄바 공략에선 퇴각하는 아케치 군의 후위대가 되어 적을 요격하고, 카타오카 성 공략에선 무려 이치반노리*였고 시기산성 공략에서도 니반노리*의 어마무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이치반노리 : 적의 진이나 성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으로, 최고의 군공

*니반노리 : 문자 그대로 두 번째로 들어갔군요

 

이런 활약을 이어가던 중 드디어 노부나가의 모리 공략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로 진군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카노스케와 아마고 재흥군 역시 히데요시의 아래에서 싸우게 됐습니다.

구로다 칸베에의 활약을 바탕으로 하리마국을 평정한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이후 하리마 서부의 주요거점인 코즈키성(上月城)의 수비를 아마고 재흥군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이 코즈키 성에 주군 카츠히사, 그리고 800명의 군사와 함께 들어가게 됐습니다.

시카노스케는 코즈키 성에서도 여전히 시카노스케했습니다.적이 쳐들어오면 뚜까 패주는 것. 실제로 우키타군이 3000의 병력을 이끌고 오자 시카노스케는 야습을 통해 적장을 전사시키고(!!!) 패퇴시키는 등 뭐 그냥 계속 시카노스케했습니다.

그러나 암만 봐도 이 사람, 소원을 잘 못 빌어도 단단히 잘 못 빌었습니다. 소원을 빌거면 제발 고생 끝에 낙이 오게 해주세요.”라고 하던지 왜 때문에 칠난팔고를 빌어서 좀 잘될 것 같으면 또 다시 위기가 찾아오는 것도 시카노스케다웠다는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제 글을 계속 읽어주셨다면 알고 계실 벳쇼의 반란이(아라키 무라시게편 참고) 발생하게 됩니다. 하리마 최대 세력인 벳쇼가 모리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배신, 이 틈을 타 또 다시 지긋지긋한 모리의 두 화살이 시카노스케를 향해 날아왔습니다.(이것도 시카노스케했다면 시카노스케한 것이겠군요.) 그것도 3만의 대병력과 함께 말이죠.

3만의 대병력에게 포위된 코즈키성. 이 소식을 듣게 된 히데요시는 아라키 무라시게*와 함께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아마고 구원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모리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코즈키는 포기하고 미키성을 공략하라는 노부나가의 잔혹한 명령이 도달하게 됩니다.

 

<고립된 아마고 부흥군. 지도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결국 코즈키성은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지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 성주인 카츠히사는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성 안에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할복했습니다.(반성해라 무라시게)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카노스케가 또 다시 사고칠 것을 걱정했던 걸까요? 인질이 되어 끌려가던 도중 시카노스케는 모리 세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게 됐고, 시카노스케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6.마치며

 

<시카노스케의 초상화>

 

비록 생전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시카노스케였지만, 사후 그의 충절은 모두에게 칭송받았습니다. 시카노스케의 칠난팔고 일화는 일본 교과서에 실렸고, 후세사람들에게 비운의 영웅이자 무사도의 시그니쳐와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한편 주군이었던 카츠히사와 시카노스케 사이의 미담도 전해집니다. 멸망 직전 시카노스케는 카츠히사의 구명을 위해 매우 노력했다고 합니다. 항복의 과정에서 시카노스케는 세 번이나 카츠히사를 살려달라 요청했지만, 적장 깃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카츠히사가 할복하지 않으면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다며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시카노스케는 카츠히사에게 모리가 내민 항복 조건을 말하는 동시에 자신이 항복하는 대신 어떻게든 모토하루를 암살하고 죽겠다.”고 울며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카노스케에 대해 카츠히사는 너가 아니었으면 난 승려로 끝까지 지낼 몸이었는데, 덕분에 아마고의 대장이 되었다.”짧은 시간이지만 좋은 꿈을 꾸었다. 내가 죽어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대장으로서 행복한 일이다.(보고있나 무라시게?)암살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시 아마고 가문의 서자를 찾아내 다시 재흥을 꿈꿔줬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끝까지 한 뜻을 위해 고생하던 둘의 끈끈한 유대감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비록 카츠히사의 부탁을 시카노스케는 들어줄 수 없었지만, 아마고가문의 유신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시카노스케와 함께 아마고 재흥군에서 활약하던 카메이 코레노리는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하고 있던 터라 살아남았고, 코즈키 성 함락 때 목숨을 구한 아마고의 유신들은 카메이의 가신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메이 코레노리는 도요토미-도쿠가와를 섬기며 다이묘로 성장했고요.

 

자신의 꿈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신념을 향해 끝까지 노력하는 것. 어쩌면 이 자체로도 개인에게는 가장 뜻 깊은 일이 아닐까요? 오늘의 이 글을 통해 결과만큼 중요한 과정의 의미를 한 번 쯤 돌이켜 보시는 것도 어떨까요? 오늘의 이야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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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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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11:03:49

솔직히 전국시대를 좋아는 하지만 아무래도 개개인에 대해 공감과 연민은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 인물 하나만은 일생이 자체가 고난과 충정 그 자체 인지라 참 좋아라 하는 인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임진왜란에 직접 출병한게 서국쪽 무장들이 대부분인지라 다 관련이 있죠. 

그래도 지역별로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 잘 읽었습니다.

*하루히사는 신구토 일로 무능하다는 꼬리표가 붙은것 같기도..

WR
2018-01-22 12:46:49

말씀 감사합니다. 그냥 지역별로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그 사건 이후에도 사실 아마고 가문은 잘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래저래 꼬리표 붙은게 크겠죠. 

2
2018-01-22 14:25:29

좋은 글에 재를 뿌리는 것 같아서 저어하지만...

일전에 논문에서 읽었는지, 책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칠난팔고 이야기 자체가 허구라는...

게다가 이게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국민성 고취로 조작되었다는 연구 운운...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확실히 시카노스케 이야기인지는 좀 뒤로 물러서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10년도 전에 본 거 같은데 도저히 그 책인지 논문인지는 못찾아서 아직도 사실확인을 못하고 있지만요.

 

게다가 일부러 저걸 빈다는게 좀 의심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아마고 재흥을 빌었으면 현실적이기라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WR
2018-01-22 16:22:52

전형적으로 전체주의 국가에서 일종의 의식교육으로 쓰기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런게 있었군요
안그래도 시카노스케가 과연 충신이 맞는가에 대한 지적도 있다는 글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하기사 말씀처럼 저게 정말 소원이 맞나 그것부터 의심이 들만한 말이긴 하죠. 말씀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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