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Free-Talk

미스커리어스.

 
23
  1516
Updated at 2017-11-22 21:58:44

  저는 집에서 해먹는 카레를 참 좋아합니다. 왠지 한 냄비 끓여놓으면 아사할 일도 없지만 아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안도감. 냄비만 보고 있어도 신물이 올라올 것 같은 만복감. 반찬 따위는 지구상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 그 맛까지. 사실 소믈리에처럼 맛을 미묘하게 구분해내는 수준은 전혀 되지도 못하기에 제 인생에서 카레는 그냥 8사단 천세카레 이런 게 전부이긴 했지만...

 

  지난 번 제가 생일이었죠. 선물로 받은 것이 통으로 된 생닭이랑 카레황제와 이름이 비슷한 인스탄트 카레였습니다. 받고서 이걸 도대체 뭐 어떡해야 하지 고민을 하다가, 남자답게 카레 한 번 끓여보자. 닭 고기를 조막만하게 썰어서 넣는게 아니라 대충 뚝뚝 손으로 찢어 넣으면 비쥬얼도 맛도 그야말로 오호대장 마초의 기운이 느껴지겠지. 오늘은 남자의 카레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미스커리어스라고 한 것은, 카레는 정말 미스테리한 음식입니다. 분명 배가 부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거나, 혹은 제 식사량을 알고 있기에 조절을 하려고 해도 그것이 되지 않습니다. 꼭 카레를 퍼고 나면 카레가 모자라서 카레를 더 퍼면 밥이 모자라서 밥을 더 퍼면 카레가 모자라서... 3일치 카레를 만들건 7일치 카레를 만들건 카레가 사라지는 건 1.5일 이내라는 미스테리. 어려서부터 카레를 많이 먹었고, 카레를 좋아했으며 카레를 싫어했던 적은 맹세코 군대에서 먹던 얄구진 깡통 카레 외엔 없었습니다.

 

  가끔 제게 어떻게 불경을 읽고 인도철학을 공부하면서 질리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면, 그건 당연 카레 파워. 저에겐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 농담입니다. 자제분이 있으시다면, 그 자제분이 훌륭한 절아저씨가 되길 바라신다면 인도 카레로 불교로 인도를... 죄송합니다.

 

  그래서 시작해봤습니다.

 

 

 

 일단 닭을 반으로 잘랐습니다. 사실 칼질을 좀 하긴 합니다만, 그건 위쳐나 스카이림에서 그렇고... 현실에서는 심심하면 손가락부터 자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크게 썰 자신이 없어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뼈를 일단 분지르고 부순 다음에 대충 여기서 잘리겠지 싶은 대로 잘랐습니다. 큽니다. 하지만 전 남자의 카레를 만들거니까 더 자르지 않습니다.

 

 

  마늘. 마늘은 사랑입니다. 곰이 얘만 먹고 버텼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갑니다. 제가 술을 마시지 않던 유아시절에는 쑥떡도 좋아했다고 하니 마늘이랑 쑥떡 먹고 버텼을거라 이해도 갑니다. 그래서 마늘은 최대한 많이. 마늘이 넘쳐나서 싫은 음식 없다. 마늘 많이!

  그래서 마늘은 튀겨서 빼놓고, 마늘 튀긴 기름에 닭고기를 넣어 튀기듯이 구우면 마늘의 향도 배이고 나중에 카레 위에 마늘을 살짝 올려 먹으면 바삭거리는 식감은 물론 맛도...

 

 

  는 개뿔 그냥 투하. 그런거 할 줄도 모르고 하기도 싫고 귀찮습니다. 닭고기 밑간은? 하시겠지만 전 밑간 하고 넣으나 안하고 넣으나 그냥 저 혼자 먹는 음식은 무조건 짭게 만들어서 괜찮습니다. 냄새 죽입니다. 그냥 카레 포기할까 싶었습니다, 이 즈음에 잠깐. 한 손으로 찍느라 좀 흔들렸네요. 결코 술 많이 마셔서 수전증 온 거 아닙니다.

 

 

 

  호호, 이 육수는 어디서 생겨났을까요? 카레를 하기 위해 버터를 녹이고 화이트 와인을 붓기는 개뿔! 그냥 얼마 전에 사놓고 안먹었던 소주 투하! 캬하하하. 소주 냄새가 집안에 가득합니다. 이게 바로 북두신돈 냄새.

 

 

 

  저기에 야채도 좀 넣어서 어쩌구 하다가 물 넣고 카레가루 투척. 뭔가 사진은 그럴싸하지 않은데 냄새는 그럴싸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아는 그 냄새. 양파를 갈색빛이 나도록 볶으라고, 어느 반백권쯤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카레만 요리하던 만화에서 그러던데 전 그러고 나니까 양파 씹는 느낌도 안나고 그래서 그냥 대충 조금 기름칠만 하고 바로 끓여버립니다.

 

 

  뭐라더라, 무슨 가루랑 무슨 가루랑 있던데 입맛에 맞게 조절하라는데 그런거 개뿔 하나도 할 줄 모릅니다. 천세카레엔 그런거 없었습니다. 있는거 남겨놨다 어디 쓰겠습니까. 고민할 거 없이 무조건 투하! 눈썰미 좋은 분들이 질문 안하시겠지만 왜 물이 늘어났냐구요? 좋은 지적입니다. 저러고 방구석 기타리스트랍시고 기타 좀 치다가 늦어버려서 물 좀 더넣었습니다.

 

 

  사진이 돌아갔네요. 구양봉도 아니고 물구나무 서서 먹진 않았는데... 자취생은 일단 밥먹을 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옛날에 보던 영화라도 하나 틀어놓고 밥을 먹어야죠.

 

  그 맛은..!! 여러분이 익히 아는 그 맛! 와, 신기하게도 뭔 짓을 어떻게 해도 똑같은 그맛! 앞으로 이런거 잘 안해야겠습니다! ^^..

 

  그리고 미스테리는 지켜졌습니다. 분명 밥도 한 솥을 다 했고 카레도 한참 있었는데.. 지금 보니 얼마 없네요. 어디갔지? 정말 카레는 못말립니다.

 

 

14
Comments
1
2017-11-22 22:06:14

제가 사랑하는 음식과 선수군요..! 맛나게 식사하셨길 바랍니다!!!

WR
1
2017-11-22 22:08:54

전 사실 커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최근에 카레도 잘 안먹고 있었습니다. 맛있게 먹은 건 문제가 아닌데 얘 칼로리는 문제네요...

2
2017-11-22 22:07:23
WR
1
2017-11-22 22:09:12

다음에 기회 되면 사나이 요리 한 번 보여드립죠!

1
2017-11-22 22:27:40

그래서 저기에 곁들이신 메인 디쉬 알콜은 무엇입니까 메인이 안나온 사진이네요

WR
2017-11-23 00:06:33

진심 배가 불러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콜 좀 넘어가면 그대로 꼮꼬댁 하고 다시 살아나올 것 같아서 ... ㅠ_ㅠ

1
Updated at 2017-11-22 23:05:07

아이고 스님~ 고기잡숴도 갠춘한거에여??

WR
2017-11-23 00:06:49

지옥가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므하하하!!

1
2017-11-22 23:23:02

글솜씨와 내공이 매우 깊어보여요!
다음번에도 이런 글로 찾아오실꺼죠~?

WR
2017-11-23 00:07:23

동네 노는 평범한 바보인데... 다음 글을 뭐로 쓸지 면벽수행하면서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ㅠㅠ

1
2017-11-23 04:38:36

오 닭을 통째로 저렇게 넣는건 처음 보는데 참신하네요 보기에도 먹음직 스럽고요.

WR
2017-11-23 04:56:09

늘 저도 닭가슴살을 썼는데 불현듯 순살 치킨은 손도 안대는 놈이 왜 카레엔 이랬을까, 하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마 카레를 저처럼 많이 드셨으면 훨씬 먼저 생각하셨을 거예요. 시도해볼만 합니다. 꽤 흥미로워요.^^

2
2017-11-23 20:07:10

'꼭 카레를 퍼고 나면 카레가 모자라서 카레를 더 퍼면 밥이 모자라서 밥을 더 퍼면 카레가 모자라서...'

누가 제 얘기하는줄 알았습니다. 제가 카레 귀신이거든요

WR
2017-11-23 20:23:39

카레 닭발도 도전해봐야겠군요!!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