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이 만약에 기주를 먹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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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10-12 14:12:09
삼국지의 역사는 공손찬 쪽으로 흘렀겠죠?
원소랑 기주를 반반하기로 했는데 배신당해서 동생도 죽은걸로 알고있습니다.
한때 원소와 세력이 비등했는데 왜 유명했던 장수는 많이 없었나요?
기주를 먹었으면 전풍과 저수도 한복 신하였으니 엘리트 참모들도 생겼을 거고
정말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그만큼 올린 공손찬이니 괜찮은 참모만 있었으면 조조가 아닌 공손찬쪽으로
흘러가는 삼국지가 될 수도 있었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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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의 경우 호족, 사대부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점쟁이, 상인들을 등용했다고 하죠. 저는 이러한 인재 등용이 등용된 인재들의 이름이 남지 않은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풍 저수 등등도 모두 기주의 호족 출신이라 아마 공손찬은 이들을 죽여버렸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네요.
그리고 공손찬과 원소의 기주를 놓고 벌어진 싸움은 단순하게 볼 만한 것은 아닙니다. 순서대로 보면,
1. 반동탁연합군 해산 이후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음
2. 원소가 공손찬에게 같이 한복을 칠 것을 제안함
3. 공손찬이 한복군을 격파, 한복은 공손찬을 더 무서워해서 원소에게 항복
4. 원소가 약속한 기주 절반을 주지 않음
5. 공손찬이 동생 공손월을 파견하여 원술과 협력하여 원소를 공격함.
6. 원소가 주앙, 주흔 등을 지원해 원술을 저지. 이 때 공손월 전사
7. 분노한 공손찬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원소 공격
8. 원소가 공손찬에 사과하면서 발해태수 자리를 공손범에게 양도
9. 공손찬은 발해군 접수 후에도 공세를 멈추지 않음
10. 계교 전투에서 원소군 승리, 이후 일진일퇴로 승부 나지 않음
대략 이정도네요. 원소도 첫 근거지인 발해군(남피)을 양도한 것 보면 서로 할만큼은 한 것 같고, 누가 딱히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8과 9번쯤 사이에서 청주에 20만 황건군이 몰려드는데, 공손찬이 이를 모조리 박살내고 물자를 노획합니다. 이때가 공손찬 최전성기였고, 자기 사람으로 기주 청주 연주 유주자사를 다 지멋대로 임명하죠. 그런데 여기서 계교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 정말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겠네요. 그러나 기존 사회질서를 매우 혐오했다는 점에서 통일엔 한계가 있지 읺았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