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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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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03:01:43

제가 고등학생, 정확히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당시 지하철 7호선이 바로 앞에 다니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지라 자주 몰래 야자를 빼먹고 7호선이 다니는 서울과 경기도 곳곳을 구경하러 다녔습니다. (지금도 혼자 어딜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날도 어느 날과 같이 저는 야자를 빼먹고 7호선에 몸을 맡겼습니다. 보통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저녁을 먹은 후 나오면 6~7시쯤이 되는데 이 때 쯤은 모두들 아시다시피 러시아워 시간대라 지하철이 사람들로 완전히 꽉꽉 채워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지요. 역시 그 날도 사람으로 지하철은 상당히 혼잡했습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해 인파 사이에 끼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중에 저는 계단 중간쯤에 누군가가 계단 한 쪽을 막고 있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얼핏 보니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으신 중년 여성분이 혼자 허리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짐 두 개를 들고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서 계시더군요.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여성분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제가 그 여성분 옆을 지날 때 쯤, 어떤 훤칠한 젊은 남성분이 그 여성분께 다가가는 것이 제 눈에 포착됐습니다. 그냥 그 옆을 스쳐 지나가던 저에게 우연히도 그 남성분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May I help you?”

 

저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그 쪽을 쳐다봤습니다. 그 남성분은 놀랍게도 외국인이었습니다. (사실, 백인이었기 때문에 그냥 봐도 외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죠.)  통근 지하철 시간에 계단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저 지나가던 한 외국인만이 그 여성분께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겁니다. 그 때, 저는 여성분을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여성분의 대답은 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 외국인 남성분을 향해 여성분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Xie Xie.”

 

그렇습니다. 그 여성분 또한 외국인,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인이었던 겁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저는,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 다음에는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걸 직접 봤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여성분이 혼자 힘들여 그 큰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보면서도 도와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때까지 제 자신을 상당히 도덕적인 사람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도덕심을 발휘할 기회가 눈앞에 왔을 때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계단 위의 그 누구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모두를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그런 비난은 옳지 못하기도 하고요.)

그 계단을 그냥 지나쳐갔던 우리는 그저 타인에게 어느 정도 무관심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은 그것이 단순히 뭔지 아는 사람이나, 그것에 대해 그저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은 바로 그것을 위해 행동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날 이후로 그런 상황이 오면 최대한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요.^^;

 

이렇게 한 발짝씩 나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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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7-05-29 09:00:34

좋은 글 남겨주셔서 danke~

 

별 거 아니라도 남을 돕는 행동을 하고나면 뭔가 상쾌하죠.

내가 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으쓱하기도 하구요.

 

2017-05-29 09:35:50

may i help you란 말이 되게 아름답게 들리네요

2017-05-29 17:24:15

저도 지난 주에 독일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도와드렸는데.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시는 할아버님 이셨어요. 해서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퇴근하고 지친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뿌듯해 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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