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경중을 언론이 정하는 것
TV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세상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더 이상 자생하기 힘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한 안타까운 사연들이 하루에도 수 번씩 전파를 타고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유니세프에서는 기아를 도와달라고 정액기부를 권하며, 적십자에서는 헌혈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지역방송이나 TV프로그램에서는 가난에 허덕이는 특정 사람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며, 재해로 인한 피해는 뉴스에서 비중있게 다루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반응합니다.
언론에서 어떠한 사건을 다루면 그로 인한 파급효과는 대단합니다. 여러 단체에서 구호품을 보내 오기도 하며, 뜻이 있는 봉사자 분들이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며 자원으로 모이기도 하며, 상상하기 힘든 수치의 기부금이 모이기도 합니다. 이런걸 보고 있으면 혹은, 그에 동조할 때면 마음 한 켠이 따뜻해 집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을텐데 그들 전부를 도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일 겁니다.
(특정 캠페인이나, 사건들을 언급하는건 본래 글의 의미전달이 퇴색될 우려가 있기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언론에서는 모든 사건을 다룰 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들 전부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론과 우리는 그들을 선택적으로 돕고 있다는 이야기기 됩니다.
그 선택 과정에서 다수의 환자분들 중에 아주 소수만이 충분한 혜택을 누립니다. 또 억울한 재해로 비슷한 피해를 입어도 전혀 다른 수준의 국가보상이 책정되기도 하며, 어떠한 사고에는 막대한 기부금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이고, 또 다른 곳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언론이 다루면 그 사건의 중요성은 부각 됩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선택권, 선택의 폭이 이미 의도된 것이었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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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없던 시절에는 아예 그런 사건들 자체를 알 경로조차 없었죠. 요즘같이 고도로 발전된 미디어 기술로는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사건의 정보를 알수 있죠. 언론이야 돈되는 정보를 중점적으로 전달할테니 선택의 폭이 조절되기는 하지만, 돈되는 정보라는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정보라는 뜻도 되니 내재적으로는 그 의도된 선택권을 대중의 의도한 것일수도 있죠. 언론이 완전하게 투명할 경우의 얘기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