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 : Scent of a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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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8 19:46:41

심심한 휴일이었다.

마치 동면에 든 곰처럼 방에 웅크리고 앉아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혹독한 업무 강도를 뒤로하고 주어진 시간이기에,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쉼을 가졌다.

오늘은 그 휴일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휴일을 마무리하며 본 영화는 1992년 작인 Scent of a Woman이었다.

영화 속 맹인이 된 퇴역 중령 역을 맡은 알 파치노는 달변가였다.

마치 아직도 군대에 있는 듯 권위적인 말투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부정하는 듯한 과거사 늘어놓기는,

속된 말로 '꼰대'스러웠다.

헤겔은 인류 역사를 '인정투쟁'이라는 개념으로 관통하였다.

알 파치노는 도우미 없이는 산보도 여행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지위를,

과거의 인정 받던 '중령'으로서의 삶을 여전히 극적인 어투와 행동으로 현재에서도 이어가며,

그 스스로 인정 받고 있는 것으로 이른바 '정신승리'하는 다소 처량한 삶을 살아간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의 연기가 공허한 것이었음을.

이는 뉴욕의 친형 집에서 추수감사절 만찬을 하던 중,

설탕회사 영업 부사장인 조카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뉴욕에서의 고급 호텔과 값비싼 음식, 리무진, 고급 양복 등,

과거 화려한 시절의 향수는 그가 의미 없는 삶을 끝내기 전 마지막으로 음미하는 달콤한 독주나 다름 없었다.

그가 삶을 끝내고자 권총을 들었을 때,

그의 도우미로 그가 강권하다시피하여 뉴욕까지 데리고 온 명문고의 학생인 심슨은,

그의 죽음을 막는다.

왜 자신이 죽지 말아야 하는지 하나로도 말해보라는 그의 말에 심슨은,

그렇게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모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항변한다.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유.

그러나 그는 그 말에 구원 받았다.

맹인이기 이전에 그를 인정받게 한 것이 아닌,

맹인으로서 그를 인정한 그 사소한 말에 그는 구원 받았다.

이 미중년 로맨티스트 또는 바람둥이는,

심슨의 말처럼 너무나 우아하게 미녀와 탱고를 추었고,

보이지도 않는데 페라리를 능숙하게 운전하였다.

그뿐일까.

얼핏 허세로 보일지 모르나 그의 때론 감미롭고 때론 강렬하며 심지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언사는,

그를 보잘 것 없는 맹인이 아닌 탁월한 남성성을 가진 노신사로 보이게 한다.

'인정'이란 이처럼 놀라운 일이다.

첫 연애를 시작하기 전,

내 마음을 다하여 고백한 후 받아들여졌을 때,

또는 인정받았을 때,

그것은 내게 작은 구원이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