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경제성장 그리고 후유증
1981년에 취임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냉전시대 군비경쟁 등으로 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감세에 따른 경기회복을 도모하는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1980년 700억 달러로 GDP의 1% 수준이던 재정적자는 1984년 GDP의 5% 수준을 뛰어넘었습니다. 경상수지도 1982년에는 균형수준이었으나 공급중시 정책에 따라 수입이 크게 늘어나면서 1985년에는 GDP의 2.8% 라는 큰 폭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이렇듯 거대한 쌍둥이 적자가 늘어나자 미국의 의회는 미국에 대해 대규모 무역흑자를 보이는 국가의 상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의회의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레이건 행정부는 보호무역 대신 달러화 가치를 하락시켜 무역수지 적자를 줄이려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최대 무역 역조국은 일본으로 미국의 전체 경상수지 적자규모의 37%인 460억 달러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상황 해소를 위해 1985년 9월 22일 소위 플라자 합의를 통해 그동안 정책적으로 저환율을 용인했던 일본에게 엔화의 가치 절상 압력을 노골적으로 강요했습니다. 그날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인 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등 G5의 대표들은 달러의 하락 및 엔화의 통화가치 상승을 유도하고, 이 조치가 통하지 않을 경우 각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서 이를 달성한다는 내용에 합의했습니다. 당연히 일본은 그러한 합의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대외부채를 갚기 위해 1,000억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발행해서 일본에 지불하고 서로 교역을 폐쇄하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미국은 법률상 화폐의 액면 금액에 제한이 없으므로, 순수하게 이론적으로는 1,000억 달러짜리 지폐도 발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34년에 10만 달러 지폐가 발행된 적이 있고, 1만 달러 지폐는 총 11번 발행되었습니다.
플라자 합의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고,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1985년 초에 달러당 260엔이던 엔화는 이듬해인 1986년 1월에는 200엔대마저 붕괴됐고, 그해 7월에는 150엔대, 다음 해인 1987년 말에는 120엔대로 2년 만에 100%이상 절상되었습니다.
일본의 소니 등 가전제품 기업은 달러당 260엔이던 1985년 초에 200달러짜리 TV를 미국에 팔면 52,000엔을 일본으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월급과 보너스를 넉넉히 줘도 충분히 돈이 남았고, 남는 돈을 신기술 개발이나 투자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달러당 120엔이던 1988년 초에 200달러짜리 TV를 미국에 팔면 고작 24,000엔밖에 일본으로 가져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는 신기술 개발이나 투자는커녕 직원들 월급도 주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습니다. 제품의 가격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미국에서 판매되던 일본의 가전제품, 자동차, 반도체 등의 가격이 1~2년 사이에 1.3~1.7배로 올랐습니다.
가격이 그렇게 올랐지만 일본의 자동차나 반도체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가전제품도 TV와 VCR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들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RCA, Zenith, 필립스 등 극소수만 남은 상태이고, 다른 나라 제품의 품질은 일본에 크게 밀렸습니다. 하지만 일본 상품에 대해 월등한 가격경쟁력이 생긴 상황이라서 멕시코, 아르헨티나, 터키 등 많은 나라의 값싼 가전제품이 미국으로 수입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GoldStar, Samsung, Daewoo 등은 이미 미국에 진출해 있었지만 일본 제품들 때문에 거의 중산층 소비자의 눈길을 받지 못하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산 가전제품의 가격이 워낙 오른 상태라 중산층 이하 소비자들은 값싼 다른나라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나자 GoldStar, Samsung, Daewoo를 제외한 다른 저가 제품들은 모두 미국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GoldStar는 TV에서 Zenith를 합병했고, 일본기업도 고전을 면치 못하던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백색가전에 뛰어들었고 10여년 후에는 그 세 가지 분야 모두에서 세계 1위 기업이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한국산 가전제품은 값싸지만 쓸만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싼 일본제품의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일본 자동차의 값이 크게 오르자 미국진출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현대자동차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갑작스레 소형차 엑셀을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일본차와 외관과 성능이 유사한 엑셀은 미국 상륙 첫해인 1988년에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그해 미국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엑셀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중고차 시장에서 감가상각이 그보다 훨씬 비싼 코롤라나 시빅을 추월했습니다. 당시 현대차는 품질관리가 안된 상태에서 엔고만 믿고 너무 급히 미국에 진출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현대차는 미국에서 품질 나쁜 저가브랜드 낙인이 찍혔다가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또다시 발생한 엔고 기회에 극적인 이미지 만회가 이루어져 세계적인 브랜드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플라자 합의 이후에 세계는 엔화가치 상승 및 달러가치 하락, 국제금리의 하락, 국제유가의 하락이라는 3저 현상 시절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플라자 합의와 3저 현상의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금리와 달러 하락으로 외채 상환부담을 덜었고 제품의 생산원가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1987년에는 민주화 욕구가 분출되면서 격변이 일어났고 노동조합이 활성화되면서 억제되었던 임금이 급상승했지만, 그러한 비용 이상으로 제품의 품질이 향상됨으로써 더욱 큰 수익이 창출되었고 국제적으로 신흥공업국 대열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1970년부터 25년 동안 우리나라의 1인당 GDP의 변천상황입니다. 플라자 합의 후 급격히 올랐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세계의 학자들은 이런 결과에 주목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3저 국면을 맞았는데 왜 그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크게 떠오를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기회를 맞아 그 기회에 뛰어들었지만 우리나라는 그들 중에서 가장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대박을 허용합니다. 우리나라가 1960~70년대에 엄청난 투자와 인재 키우기를 통해 눈물과 땀으로 뿌렸던 씨앗이 플라자 합의라는 기회를 통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거의 파산상태였으나, 여성근로자들이 공장에서 하루 10~12시간씩 고된 일을 해서 만든 경공업제품을 수출해서 국가위기를 극복했습니다. 1965년도 시간당 임금 통계를 보면 일본이 56센트이고, 필리핀이 22센트, 태국이 20센트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0센트였습니다. 이 임금은 도시에서 성인 한명이 생활하기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여성근로자들은 방 하나에 여러 명이 같이 살고 돈을 절약해 고향의 보모님 생활비와 동생의 학비를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동생이나 남자친구의 학비를 대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근로자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한국의 DNA 중에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교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의 교육열은 예나 지금이나 높습니다.
이렇듯 한국경제는 1960년대의 여성노동력을 바탕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66년에는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에 참가해서 종합 4위에 오른 이후 1970년대 이후에는 11번 종합 1위에 오르는 등, 글자 그대로 기능올림픽을 휩쓸었습니다. 처음에는 양복, 제화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반공, 자동제어 등의 기술혁신 부분에서도 월등한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을 때부터 우리의 기술력은 이미 남달랐습니다.
우리나라가 급속히 세계수준에 진입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권위주의 군사정권의 선택과 집중에 의한 차별적 육성화 정책이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 철강, 석유화학, 기계, 반도체, 전기전자, 자동차 등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및 전략적 자원배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차별적 밀어주기 전략은 수혜를 입은 대상들이 대부분 대기업집단을 이루면서 경제력집중 및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한국적 재벌문제와 불신에 기초한 사회양극화를 만드는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취동기가 높은 대신에 성공한 사람이 정도를 밟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분노합니다. 분노는 정당한 노력 없이 성공에 지위를 누리는 사람에게로 향하고,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회적 불신이 싹트게 됩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창 산업화가 추진되었을 당시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특혜를 받았거나 내부정보를 얻었거나 줄서기를 통해 기회를 얻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적인 것에 대한 불신이 싸일수록 역으로 편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집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들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 가장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권위주의 정권이 정당성보다는 비교우위에 의한 편법적인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성공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전략이 결과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발생한 불신과 계층화는 후대 사람들에게는 큰 짐이 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입니다.
플라자 합의 후 일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서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는가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전히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내일은 1박 2일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간은 걱정이 되지만 건강히 다녀와서 월요일 밤에 이어지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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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