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위기와 유로화의 근본적인 문제점들
2002년부터 유통되기 시작한 유로화는 현재 유럽통화동맹(EMU)에 가입된 19개 나라의 공동 단일통화이며, 유로화를 단일 통화로 사용하는 나라들은 유로존이라 불립니다. 도입될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유로화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달러화에 이어 제2의 국제통화의 위상을 일찌감치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5월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재정위기가 남유럽 국가들로 확산되면서 유로체제는 그 근본 위상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머리글자)라는 치욕적인 약칭으로 불리는 남유럽 4국은 자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통화량을 늘려 경기를 자극한다거나 자국 통화의 가치를 낮춰 수출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조조정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심할수록 이들 네 나라는 유로화 체제 이탈이라는 극단적인 대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채무불이행 사태가 일어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여부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면,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유로화 19개 나라 중에서 3, 4번째 경제규모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경우는 그 파괴력이 그리스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버거운 규모입니다.
유럽중앙은행 등 관계기관이 유로존의 존속을 위해 그리스를 구제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비슷한 상황이 미래에 언제든지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번져갈 수 있기에 그리스의 문제는 단순히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고 유로화로 결제되던 공공 및 민간채무를 드라크마화로 강제전환환 시킨다면 이들 채권을 쥐고 있는 유럽은행들의 막대한 손실로 이어져 또 다른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남유럽의 부채 위기는 전 유럽의 은행위기와 얽혀있습니다.
이들 PIGS 국가는 유로화 채택으로 인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소비와 채무가 가능해졌고, 이로 인한 임금상승효과는 수출경쟁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미국발 금융위기로 외자가 이탈하는 현상까지 겹치면서 발생한 막대한 재정적자와 경상수지적자는 PIGS 국가를 다른 나라 은행의 채무국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리스 채무불이행 위기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는 그들 정부의 거시경제정책과 산업정책이 실패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유로존 단일통화체제의 본질적으로 내재된 문제점에서도 비롯되었다고 보입니다. 남유럽 국가들은 애초부터 유로존에 가맹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국가들은 유로존 가맹으로 인해 초기에 큰 이득을 보는 듯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단일통화 사용에서 오는 부작용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유료존 내 정책조율의 부재로 인해 문제의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리드 등의 위기를 발생시킨 유로존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PIGS 국가들이 유로존에 가맹했다는 것은 자국의 통화주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유럽통화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경기가 침체되고 경상수지 불균형이 확대될 경우, 자국의 경기상황에 맞추어 독자적인 금리, 환율 정책을 수행하면서 경기 조정을 할 수 있고, 특히 자국 통화의 평가 절하를 통해 대외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등 PIGS 국가들은 유로존 가맹으로 통화주권을 유럽중앙은행(ECB)에 양도했기 때문에 금리정책 및 환율정책의 실시권한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단지 재정정책을 활용해서 불균형을 시정해야하기 때문에 대외부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단일환율 적용에 따라 경상수지적자를 해소할 수 있는 환율조정 메커니즘의 부재는 유로존 안의 남유럽과 북유럽 국가 사이에 구조적인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 결과독일, 네덜란드 등 물가수준이 낮고 수출경쟁력을 갖춘 북유럽 국가들은 자국 경제력에 비해 유로화 환율이 저평가되는 이익을 누리면서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반면에, 그렇지 못한 PIGS국가들은 환율이 평가 절상된 상태로 출발했으나 수출 증대를 위해 평가절하 전략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경상수지적자가 확대되어 왔습니다.
독일이 마르크를 유로로 대체하면서 사실상 상당한 평가절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던 덕분에 1990년대 무역적자 국가였던 독일은 2001년 무역수지 흑자로 전환한 이후 계속해서 흑자를 누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말에 이르러 독일은 중국과 수위를 다투는 세계 최대의 수출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달리 독일의 수출시장은 대부분 유럽 내부에 위치했으므로 독일 경제를 추동하는 힘은 국내의 투자나 소비가 아니라 여타 유럽국가로의 수출에 있었던 것입니다.
유로화 도입 이후 환율의 안정과 저금리 기조는 북유럽과 남유럽이 서로 다른 정책경로를 걷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환율 안정에 따라 애당초 제조업에 특화된 북유럽 국가들은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게 되었고 내수보다는 수출주도형 경제모델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유로화 도입 이후 저금리 현상은 남유럽 국가에 차입이 증가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남유럽 국가들은 서비스 산업에 기반을 둔 내수중심의 경제모델을 갖게 되었습니다. 획기적인 채무삭감조치를 통해 남유럽 국가들의 채무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현재 유로존 회원국의 산업특화 구조와 경쟁력 격차 상황에서는 경상수지 불균형이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구조입니다.
둘째, 유럽중앙은행의 단일금리정책의 적용에 따라 유로존 편입 이후 과거 물가 불안으로 고금리를 유지했던 남유럽국가들이 저금리의 메리트를 향유하면서 해외차입이 빠르게 증가하고 소비가 확대되면서 수입의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자금조달비용이 낮아지자 PIGS국가들은 독일, 프랑스 등 유로존 내 핵심국가들의 은행으로부터 과다하게 자금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조달된 재원은 산업경쟁력을 위한 투자에 사용되지 못하고, 주로 부동산, 서비스등 비생산적인 투자나 소비, 수입증가에 주로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스페인, 그리스 및 아일랜드 지역에 부동산 버블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발생시켰습니다.
즉, 유로화 도입으로 차입 비용이 대폭 줄어든 나라에서는 유로화 자체로 버블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스는 이 사실을 감추며 잘못된 정책을 사용했으나 스페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스페인의 경우 건전한 거시경제 정책을 따랐으며 국가채무 수준을 유럽 평균 이하로 유지했음에도 엄청난 부동산 붐이 일어났고 결국 거품이 꺼지자 실업률 20%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으며 부동산 대출에 적극 관여한 금융기관들도 심각한 부실상태에 빠졌고, 부실기관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지원은 국가 부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 유로화는 출범부터 불완전한 통화였습니다. 중앙은행은 있지만 재무기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의 압력이나 제도적 견제 없이 화폐정책의 목표 및 운용과 관련된 절대적 주권을 갖고, 통화가치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하며 화폐정책은 다른 어떤 경제정책 목표와도 연계되지 않습니다. 일반 연방국가의 중앙은행과 달리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의 국채를 구매할 수 없고 따라서 회원국의 재정적자를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별국가는 적자재정을 충당하려면 금융시장에서 국채를 판매해야만 하는데, 그들이 발행하는 국채의 이자율이나 신용등급은 금융시장에 의해 결정됩니다. 단일통화에 의한 단일금리는 이러한 모순 속에서 유지됩니다.
게다가 회원국은 유럽중앙은행에 투자한 자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유럽중앙은행의 전반적인 건전성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나아가 유럽연합은 조세권이 없고 유럽 차원의 재무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권적 실체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로화는 출범부터 지금까지 불완전한 통화인 것입니다. 이러한 재정통합 없는 단일통화체제는 유럽재정위기를 발생시킨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같은 화폐를 쓰면서도 화폐가치의 안정을 뒷받침하는 재정건전성 문제는 각 회원국에게 맡겨 놓는 구조이기 때문에 일부 국가가 부채 차입을 통해 방만한 재정지출을 하는 것을 통제하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어떤 통화관련 연합도 재정 및 정치적 연합 없이는 존속하기 힘듭니다.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 등 몇 개의 주가 예산위기에 직면했을 때, 재정연방주의라는 전통에 따라 이러한 주 단위의 지역적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풀어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유로존의 각국은 미국의 각 주들이 연방정부의 재정부담을 나눠 책임지듯이 유로존 가맹국의 문제를 함께 짊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3. 회원국의 국가부도위기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유로존 체제에서는 위기를 풀기 위한 대응책이 취약하다는 점이 이번 그리스 채무불이행 위기가 수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유럽의 헌법적 조약들 안에는 탈퇴와 관련된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유로화를 버리는 것은 곧 유럽연합을 탈퇴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현재 그리스의 위기가 유럽통화동맹과 관련해서 어떤 결과를 나을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연합 탈퇴 시 공산품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은 그리스 경제의 특성 상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등, 현재로서는 그리스가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후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찬가지로 채권단이 제시한 엄격한 수준의 긴축 프로그램 수용은 그리스 국민들이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의 세월을 가져올 것이 명백하며, 고통스러운 긴축정책이 경제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인가에 대한 의문점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2001년에 자국 통화를 버리고 유로존에 가입한 이후 그리스 국민의 실질구매력이 하루아침에 뛰어올랐고, 한동안 높은 경제성장률로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듯 했지만, 그리스의 현재 상황은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암울합니다. 오직 명백한 것은 유로화 사용지역에는 고통분담구조가 결여되었다는 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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