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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한 미녀에서 팜므 파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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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6 00:57:18

지금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엉성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구약성서의 외경 유딧서는 여인 유딧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과 서부아시아 나라들은 바빌로니아의 사령관 홀로페르네스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메데를 비롯한 이웃 나라들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에 모두 항복하였으나 이스라엘만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강하게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아름다운 용모와 깊은 신앙심을 지닌 유딧은 3년 4개월 전 남편이 일사병으로 죽은 뒤 과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잔악한 행동을 들은 유딧은 과부 옷차림을 벗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용모를 요란하게 치장한 뒤, 하녀에게 포도주와 빵 등 먹을 것을 챙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녀를 데리고 몰래 성문을 나서서 홀로페르네스의 군대 진영으로 갔습니다. 유딧을 본 군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미모에 환호했습니다.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에게 인도되었을 때, 그녀의 미모는 그를 감탄시키고 환영받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가 홀로페르네스 진영에 머문지 나흘째 되던 날, 그는 유딧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연회가 끝난 후 홀로페르네스와 단둘이 남게 된 유딧은 그에게 포도주를 계속 권했고, 술에 만취된 홀로페르네스는 침대 위에 쓰러졌습니다.


유딧은 칼을 들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른 후 잘라낸 머리를 하녀의 곡식 자루에 집어넣게 하고는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용기를 얻은 이스라엘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망대에 걸어놓고 상대 진영으로 진격했고, 유딧에게 속은 걸 안 바빌로니아의 군사들은 달아니기에 바빴습니다.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약한 여자의 손을 통해 강한 자를 꺾고 민족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이 유딧서의 이야기입니다.



유딧의 이야기는 중세 시대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의 소재가 되었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작가의 개성에 따라 성격과 표현방식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유딧의 이야기는 악에 대한 선의 승리로서 또 그 주인공은 나라를 구한 미녀로서 중세 시절부터 그려졌는데, 나중에는 악녀의 계략에 걸려들어 파멸한 사내라는 주제로 바뀌어 갔으며, 한발 더 나아가 거세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Judith by Gustav Klimt, 1901]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1901년 작품일 겁니다.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혐오감이나 살해 후의 비장감보다는 승리에 도취되어 황홀경에 빠져 있는 팜므 파탈적인 여인으로 그녀를 표현하였습니다. 황금빛의 쵸커 장식 속에서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을 들고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림트의 유딧은 감상자들을 에로틱한 상상으로 이끕니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서로 관계가 있는 세 종류의 유딧에 대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중에서 첫 번째는 1599년에 완성된 카라바조의 그림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입니다.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의 마술사로 불렸을 만큼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명암대비 효과를 활용해서 살인 순간을 정밀하게 포착합니다. 이 그림에서 유딧은 너무 말쑥하고 여리게 그려져 있어 과연 적장의 목을 벨 힘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순간 얼굴을 찌푸리면서 될 수 있는 대로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합니다. 이런 어설픈 유딧에게 순순히 당하며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홀로페르네스가 어딘지 바보스러워 보입니다. 반면에 늙은 하녀는 언제라도 적장의 목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결연한 표정입니다. 로마 국립 고대 미술관 소장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유딧을 다룬 그림들 중에서 클림트의 그림과 함께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에서 여류화가로서는 최초로 크게 인정받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의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입니다.



1620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오싹할 만큼 사실적으로 처참한 살육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추종자였고, 이 그림 역시 앞서 소개한 카라바조의 작품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목을 베는 현재진행형의 장면, 유딧의 평행으로 뻗은 양팔, 적장의 머리를 움켜쥔 모습, 적장이 얼굴을 돌리고 있는 방향,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뜬 표정 그리고 명암대비 효과 등이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카라바조의 유딧과는 달리 단호한 의지와 기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단 유딧의 팔은 우람하고 망설임이 없습니다. 유딧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 손은 칼자루를 단단히 쥔 채로 목을 베고 있으며, 왼손으로 적장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녀의 하인도 부림을 당하는 종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동지로서 강한 연대감을 내보이며, 온 몸의 무게를 실어 홀로페르네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칼자루를 십자가 모양으로 그려서 이 참혹한 짓이 범죄가 아니라 신의 뜻을 수행하는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이 그림으로 전설적 미녀였던 유딧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의 유딧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결단력 있고 용맹하며, 근육질의 에너지가 넘치는 강력한 여성상을 보여줬습니다. 이 그림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소장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997년에 상영된 영화 아르테미시아의 실존 인물입니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9670
그녀의 삶은 일찌감치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그녀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타시를 강간죄로 고발하고 소송을 걸었지만 타시는 그녀가 이미 성 경험이 있었다고 주장했고, 타시의 진술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는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고 손가락을 조이는 고문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타시는 유죄판결을 받고 8개월간 감옥에 갇혔으나, 아르테미시아가 그 과정에서 느꼈던 오명과 치욕감은 이후 그녀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줬습니다. 강간 재판 이후로 그녀는 여성이 폭력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자주 그림에 담았습니다.



세 번째 그림은 아르테미시아와 동세대였던 피렌체 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1577~1621)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딧’입니다.



1613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알로리의 그림 속 유딧은 팜므 파탈의 모습이지만 어딘가 부드럽습니다. 실제로 이 그림속 유딧은 앞서 소개한 그림의 작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소문이 지금까지 돌고 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180662

하지만 이 그림의 유딧은 그가 사랑했던 정부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La Mazzafirra라는 별명의 정부는 그의 다른 그림에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목이 잘린 홀로페르네스는 알로리 자신입니다. 알로리는 자기보다 16살 어린 화가 아르테미시아가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지만 둘 사이가 연인이었다는 건 소문일 뿐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알로리의 유딧은 자신의 정부에게 돈도 마음도 모두 빼앗기고 거세된 상태나 다름없는 무념과 황홀의 상태를 그림에 담은 것입니다. 알로리는 이 그림을 여러 차례 그렸고 이에 따라 몇 가지 버전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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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5-06-26 01:12:32

저도 펜션 갈때마다 마주친 저 특이한 그림은

대체 뭐길래 가는곳마다 있는가했었는데

유재석과 서프라이즈 덕에 클린트라는 걸 알게되었었죠

저 유명한 그림 외에도 유디트를 몇점 더 그렸습니다..

WR
2015-06-27 00:57:38

그렇군요. 클림트의 저 그림은 참 유명하지요.

아쉽게도 서프라이즈는 한번도 본 적이 없네요

1
2015-06-26 04:50:23

같은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건 여러모로 참 부담될 거 같아요. 이전에 그려진 작품과 늘 비교가 될 테니까요. 그것이 유명한 작품이라면 더욱. 그럼에도 이렇게 같은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는 건 자신의 역량에 자신감이 있었다고 봐야겠죠? 또는 같은 소재라도 보여주신 것처럼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던가.

젠틸레스키의 스토리를 알고 그림을 보니 저 그림 속의 여인은 유딧이 아닌 젠틸레스키의 욕망을 표현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유딧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켰다고 할까요. 자신을 강간한 남성에 대한 분노에 의해 좀 더 강인한 느낌의 유딧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림 속의 남성을 자신을 강간한 자라고 생각하며 목이 잘리는 모습을 더 잔인하게 표현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스토리를 알고 봐서 그런가 봐요. 몰랐다면 그런 생각 못했을 거 같은데 하하..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실제 유딧의 모습은 어느 그림과 가장 닮아있을까 하고. 

오늘도 잘 배워 갑니다. 미술과 많이 떨어져 살았는데 덕분에 조금이나마 건드려보네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글 천천히 쓰셔요. 글 올려주시는 게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됩니다. 양질의 글을 대가 없이 읽기만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도 들구요. 우선은 그동안 쌓인 피로부터 푸시길 바라요. 글 쓰시는 게 그 피로를 푸는 수단이라면 더 드릴 말은 없구요. 하하. 
건강하세요! 얍얍!!
WR
2015-06-27 01:03:00

유딧이 실제 인물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한 그림들 말도고 참 많은 그림 속에 등장했습니다. 말씀처럼 젠틸레스키의 그림은 그녀가 남성에 대해 품었던 혐오를 드러낸 듯 합니다. 이 그림을 주문한 토스카나 대공도 그 잔혹함에 놀래서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숨겨놨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경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바쁜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대신에 몸이 조금 약해졌습니다. 글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습니다. 쉴때와 똑같습니다. 그동안에는 잠을 줄여가며 글을 써서 많이 피곤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1
2015-06-26 09:28:05

어릴적부터 미술 백과사전? 보면서, 신비로운 느낌으로 감상했었는데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감회가 새롭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WR
2015-06-27 01:03:21

네^^ 감사합니다. 좋은 휴일 되세요

2015-06-26 12:03:14

감사합니다...

WR
2015-06-27 01:03:39

저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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