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패러데이, 위대하지만 겸손한 천재
영국 왕립연구소의 건립을 주도한 럼퍼드 백작은 파격적으로 23살의 험프리 데이비(1778~1829)를 왕립연구소 화학교수로 임명합니다.
(럼퍼드 백작에 대한 것은 지난 번 글 /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1880650&sca=&sfl=mb_id%2C1&stx=kormhs 참조)
[험프리 데이비의 초상화]
데이비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영국 화학계에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그는 이산화질소가 마취제로 쓰일 수 있음을 발견했고, 여러 금속 화합물을 전기분해하여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 바륨, 스트론튬을 발견합니다. 데이비는 또한 염소 및 산소족의 단체성을 예언하고, 산의 성질은 산소가 아닌 수소가 내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농업적 응용 차원에서도 과학을 진흥시켰고, 그 유명한 탄광의 안전램프를 발명했습니다.
데이비는 잘 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덕분에 대중강연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준남작의 귀족 작위를 받았고, 왕립학회장에 선출됩니다. 데이비는 마이클 패러데이를 발굴했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패러데이의 명성이 자신을 뛰어넘은 것에 크게 질투했고, 1824년에는 패러데이가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한 유일한 회원일 정도로 소인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데이비는 그 이후 만성적인 병에 시달렸으며, 51세를 일기로 제네바에서 사망합니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는 샌더만교도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런던의 빈민가에서 자랐습니다. 패러데이는 초등학교 정규교육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패러데이가 형 로버트의 이름을 워버트라고 틀리게 발음하는 것을 고치기 위해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자 어머니가 학교를 자퇴시키고, 주일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수업을 듣게 했습니다.
[마이클 패러데이의 초상화]
패러데이는 14살 때 어느 서점에서 책을 제본하는 수습공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페러데이는 인쇄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모아 실로 꿰매고 다듬어서 손으로 만든 가죽 겉장을 씌우는 일을 했는데, 어는 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꿰매면서 전기에 관한 항목에 매료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그 후 패러데이는 왕립연구소 회원인 윌리엄 댄스의 책을 제본하는데, 댄스는 패러데이의 솜씨와 학구열에 감탄하여 험프리 데이비의 연속 강연에 참석할 수 있는 수강증을 줍니다. 그 강연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험프리 데이비는 더 이상 대중 강연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리기에, 패러데이에게 데이비의 마지막 강연은 더 없이 소중했습니다.
데이비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패러데이는 그의 강연 내용을 수백페이지에 걸쳐 필기한 것과 동봉해서 데이비의 조수가 되길 희망한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때 데이비는 실험 중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어 치료기간 동안 자신의 실험을 기록하며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패러데이를 채용합니다. 임시직이었으나 곧 정식 조수로 전환됐으며, 처음에는 패러데이에게 실험실의 병 닦는 일만 주어졌으나,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데이비는 점차 패러데이에게 연구 과제를 주기 시작했고 패러데이는 당대의 거장인 데이비의 개인지도를 받습니다. 패러데이는 험프리 데이비의 유럽 대륙 여행에 조수로 동행함으로써 볼타와 앙페르 등 유럽의 유명 과학자들도 만나게 되며 그의 세계관은 넓어집니다.
그 이후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추천으로 왕립연구소의 직원으로 채용되고 그곳에서 남은 인생을 보냅니다. 왕립연구소에서 좋은 장비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던 패러데이는 그동안 숨겨졌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뒤를 이어 왕립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거절하며 왕립학회장 제안을 두 차례나 사양합니다. 엄격한 샌더만교도인 패러데이는 사사로운 영광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성숙했고 겸손했습니다.
패러데이가 가장 눈부신 업적을 남긴 분야는 전자기학입니다. 1821년에 패러데이는 전자기 회전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최초의 전기모터를 발명합니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실험의 결실이 맺어져 전기와 자기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수립합니다.
“움직이는 전하는 항상 자기력을 생성하며, 움직이는 자석은 항상 전기력을 생성한다.”
“자기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때마다 자기력은 전기를 유도한다. 자기력의 증감 속도가 빠를수록 많은 전기기 만들어진다.”
이 두 가지 발견은 발전기와 전동기의 기본 원리로 이용됩니다. 발전기는 단순히 자석을 회전시킴으로써 변화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연속적인 전기의 흐름이 유도됩니다. 발전기의 자석에 날개를 달고 날개에 물을 떨어뜨림으로써 자석을 돌리는 것이 수력발전이고, 물을 끓여 이로부터 나오는 수증기를 이용하여 자석에 부착되어 있는 날개를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화력 발전 및 원자력 발전입니다.
패러데이가 발전기 효과를 발견한 직후인 1831년에 영국 수상 로버트 필(Robert Peel)이 왕립연구소를 방문해서 발전기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봤습니다. 과학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이 대화에서 그는 패러데이에게 그 발견이 어디에 활용되는지 묻습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영국 정부가 이 장치에 세금을 물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장치는 영국 정부에게 막대한 세금 수입을 가져다줍니다.
패러데이가 전기력과 자기력의 통합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전기가 유체라는 생각 대신에 역선이 존재하는 장으로 시각화했기 때문입니다. 패러데이는 자연의 힘은 어떤 식으로도 통합돼 있을 거라는 것을 믿은 플라톤주의 자였습니다. 그는 빛과 중력이 전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연구하여 1845년 ‘패러데이 효과’를 발견했고, 이로서 자석이 편광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훗날 제임스 클락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 복사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내며, 패러데이의 전자기유도법칙을 아래의 수학 방정식으로 설명합니다.
위 식에서 멕스웰은 자기장을 B로 전기장을 E로 그리고 증감의 변화율을 시간에 대한 미분 -∂/∂t 로 표현합니다. 또한 자기장의 증감에 따라 유도되는 전기장의 양은 공간에 대한 미분 ∇× 입니다.
패러데이는 1824년에 스승인 데이비의 방해에도 왕립학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해부터 데이비의 전통을 이어받아 왕립연구소 과학 강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려 19년간 크리스마스 때마다 가난한 환경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과학강연을 이어나갔습니다. 현재 영국의 20파운드 지폐에는 이 강연을 하는 패러데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는 1860년 크리스마스 강연회에서 어린이들에게 들려줬던 여섯 번의 강연입니다. 이 강연의 내용은 '양초 한 자루에 담긴 화학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패러데이는 끝까지 자신을 사회적 엘리트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과학적 영예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여, 여러 국가로부터 100개 이상의 상을 수여했습니다. 패러데이의 노년에,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게 사망 후 뉴턴이 묻혀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도록 하겠다는 제의를 하지만, 패러데이는 정중히 거절합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1867년 8월 25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안락의자에 앉아 평화롭게 숨을 거둡니다.
아인슈타인은 패러데이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패러데이의 사진을 그의 연구실에 걸어놨습니다. 패러데이가 전기력과 자기력을 하나로 통합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이상동안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루지 못한 자연의 힘들의 통합하려는 후배 학자들의 시도는 그 이후 물리학의 발전을 이끌었고, 여전히 가장 큰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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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