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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패러데이, 위대하지만 겸손한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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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5-05-18 10:48:49

영국 왕립연구소의 건립을 주도한 럼퍼드 백작은 파격적으로 23살의 험프리 데이비(1778~1829)를 왕립연구소 화학교수로 임명합니다.

 (럼퍼드 백작에 대한 것은 지난 번 글 /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1880650&sca=&sfl=mb_id%2C1&stx=kormhs   참조)

                                                

                                                  [험프리 데이비의 초상화]


데이비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영국 화학계에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그는 이산화질소가 마취제로 쓰일 수 있음을 발견했고, 여러 금속 화합물을 전기분해하여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 바륨, 스트론튬을 발견합니다. 데이비는 또한 염소 및 산소족의 단체성을 예언하고, 산의 성질은 산소가 아닌 수소가 내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농업적 응용 차원에서도 과학을 진흥시켰고, 그 유명한 탄광의 안전램프를 발명했습니다.


데이비는 잘 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덕분에 대중강연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준남작의 귀족 작위를 받았고, 왕립학회장에 선출됩니다. 데이비는 마이클 패러데이를 발굴했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패러데이의 명성이 자신을 뛰어넘은 것에 크게 질투했고, 1824년에는 패러데이가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한 유일한 회원일 정도로 소인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데이비는 그 이후 만성적인 병에 시달렸으며, 51세를 일기로 제네바에서 사망합니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는 샌더만교도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런던의 빈민가에서 자랐습니다. 패러데이는 초등학교 정규교육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패러데이가 형 로버트의 이름을 워버트라고 틀리게 발음하는 것을 고치기 위해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자 어머니가 학교를 자퇴시키고, 주일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수업을 듣게 했습니다.


                                                   [마이클 패러데이의 초상화]


패러데이는 14살 때 어느 서점에서 책을 제본하는 수습공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페러데이는 인쇄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모아 실로 꿰매고 다듬어서 손으로 만든 가죽 겉장을 씌우는 일을 했는데, 어는 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꿰매면서 전기에 관한 항목에 매료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그 후 패러데이는 왕립연구소 회원인 윌리엄 댄스의 책을 제본하는데, 댄스는 패러데이의 솜씨와 학구열에 감탄하여 험프리 데이비의 연속 강연에 참석할 수 있는 수강증을 줍니다. 그 강연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험프리 데이비는 더 이상 대중 강연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리기에, 패러데이에게 데이비의 마지막 강연은 더 없이 소중했습니다.


데이비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패러데이는 그의 강연 내용을 수백페이지에 걸쳐 필기한 것과 동봉해서 데이비의 조수가 되길 희망한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때 데이비는 실험 중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어 치료기간 동안 자신의 실험을 기록하며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패러데이를 채용합니다. 임시직이었으나 곧 정식 조수로 전환됐으며, 처음에는 패러데이에게 실험실의 병 닦는 일만 주어졌으나,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데이비는 점차 패러데이에게 연구 과제를 주기 시작했고 패러데이는 당대의 거장인 데이비의 개인지도를 받습니다. 패러데이는 험프리 데이비의 유럽 대륙 여행에 조수로 동행함으로써 볼타와 앙페르 등 유럽의 유명 과학자들도 만나게 되며 그의 세계관은 넓어집니다.


그 이후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추천으로 왕립연구소의 직원으로 채용되고 그곳에서 남은 인생을 보냅니다. 왕립연구소에서 좋은 장비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던 패러데이는 그동안 숨겨졌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뒤를 이어 왕립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거절하며 왕립학회장 제안을 두 차례나 사양합니다. 엄격한 샌더만교도인 패러데이는 사사로운 영광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성숙했고 겸손했습니다.


패러데이가 가장 눈부신 업적을 남긴 분야는 전자기학입니다. 1821년에 패러데이는 전자기 회전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최초의 전기모터를 발명합니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실험의 결실이 맺어져 전기와 자기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수립합니다.
“움직이는 전하는 항상 자기력을 생성하며, 움직이는 자석은 항상 전기력을 생성한다.”
“자기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때마다 자기력은 전기를 유도한다. 자기력의 증감 속도가 빠를수록 많은 전기기 만들어진다.”

이 두 가지 발견은 발전기와 전동기의 기본 원리로 이용됩니다. 발전기는 단순히 자석을 회전시킴으로써 변화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연속적인 전기의 흐름이 유도됩니다. 발전기의 자석에 날개를 달고 날개에 물을 떨어뜨림으로써 자석을 돌리는 것이 수력발전이고, 물을 끓여 이로부터 나오는 수증기를 이용하여 자석에 부착되어 있는 날개를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화력 발전 및 원자력 발전입니다.


패러데이가 발전기 효과를 발견한 직후인 1831년에 영국 수상 로버트 필(Robert Peel)이 왕립연구소를 방문해서 발전기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봤습니다. 과학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이 대화에서 그는 패러데이에게 그 발견이 어디에 활용되는지 묻습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영국 정부가 이 장치에 세금을 물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장치는 영국 정부에게 막대한 세금 수입을 가져다줍니다.


패러데이가 전기력과 자기력의 통합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전기가 유체라는 생각 대신에 역선이 존재하는 장으로 시각화했기 때문입니다. 패러데이는 자연의 힘은 어떤 식으로도 통합돼 있을 거라는 것을 믿은 플라톤주의 자였습니다. 그는 빛과 중력이 전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연구하여 1845년 ‘패러데이 효과’를 발견했고, 이로서 자석이 편광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훗날 제임스 클락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 복사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내며, 패러데이의 전자기유도법칙을 아래의 수학 방정식으로 설명합니다.


위 식에서 멕스웰은 자기장을 B로 전기장을 E로 그리고 증감의 변화율을 시간에 대한 미분 -∂/∂t  로 표현합니다. 또한 자기장의 증감에 따라 유도되는 전기장의 양은 공간에 대한 미분 ∇× 입니다.



패러데이는 1824년에 스승인 데이비의 방해에도 왕립학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해부터 데이비의 전통을 이어받아 왕립연구소 과학 강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려 19년간 크리스마스 때마다 가난한 환경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과학강연을 이어나갔습니다.  현재 영국의 20파운드 지폐에는 이 강연을 하는 패러데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는 1860년 크리스마스 강연회에서 어린이들에게 들려줬던 여섯 번의 강연입니다. 이 강연의 내용은 '양초 한 자루에 담긴 화학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패러데이는 끝까지 자신을 사회적 엘리트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과학적 영예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여, 여러 국가로부터 100개 이상의 상을 수여했습니다. 패러데이의 노년에,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게 사망 후 뉴턴이 묻혀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도록 하겠다는 제의를 하지만, 패러데이는 정중히 거절합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1867년 8월 25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안락의자에 앉아 평화롭게 숨을 거둡니다.


아인슈타인은 패러데이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패러데이의 사진을 그의 연구실에 걸어놨습니다. 패러데이가 전기력과 자기력을 하나로 통합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이상동안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루지 못한 자연의 힘들의 통합하려는 후배 학자들의 시도는 그 이후 물리학의 발전을 이끌었고, 여전히 가장 큰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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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5-05-12 00:57:57

매번 잘 보고 갑니다.

WR
2015-05-12 01:00:58

고맙습니다. 편한 밤 되세요^^

2
2015-05-12 05:10:39

와 패러데이가 나오다니 너무 반갑네요.
누구든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제가 항상 첫 번째로 꼽는 사람입니다.
옛날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된사람, 난사람의 개념이 나오는데...패러데이는 된사람이자 난사람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는 느낌입니다.

WR
2015-05-12 08:39:45

그렇죠.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패러데이는 여전히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과학자입니다.

마츠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2015-05-12 07:40:35

이런 사람 정말 좋네요. 오히려 자신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주어진 것이라는(타고난) 생각이 있다면 더 겸손해야 할텐데 그런 사람 찾아보기 쉽지 않죠.

제 친구 중에도 공부를 너무 잘하면서도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는 녀석이 있었는데 서울대 치대 졸업하고 군의관 제대하자마자 의료봉사하러 나가서 해외 오지에 짱박혀 살고있습니다. 참 누릴 수 있는 게 많은 친구인데(집이 부자) 존경스럽더군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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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2 08:44:22

친구분도 대단하신 분이네요.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는 다른 그분만의 가치관에 충실하신 듯 합니다.

시야를 넓혀 세상을 잘 들여다 보면 재활농구인님 친구분 같은 훌륭하신 분들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Updated at 2015-05-12 11:18:31

패러데이.. 자기 자신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런가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데 아주 능숙했다고 하죠. 오늘도 잘봤습니다. 데이먼 베일리님 글 덕분에 학구열이 (아주 조금이지만) 살아나서 아이러니하게 데이먼 베일리님 글 읽을 시간은 더 줄었네요.  몰아놨다 틈틈히 보고 있습니다.

WR
2015-05-12 11:53:54

패러데이는 이후에도 수학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자연법칙은 쉽게 설명될 수 있는 본질을 가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끈이론가들이 패러데이처럼 생각했다면 지금의 난장판은 없었을 겁니다.

아카이님은 공부 열심히 하시고, 틈틈이 이곳에서 활력소를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Updated at 2015-05-12 13:27:08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패러데이가 이렇게 겸손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았네요.
그런데 한 가지, 아인슈타인이 패러데이와 더불어 뉴턴, 맥스웰의 사진을 걸어놨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요? 
WR
2015-05-12 13:33:50

고맙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패러데이의 사진만을 걸어놓았다는 건 확인하지 않고 예전에 들은 것을 쓴 글입니다.

패러데이가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marineya 님 말씀대로 세분의 사진을 걸어놨을 거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맥스웰의 영향을 더 받았으니 맥스웰의 사진도 걸어놨을 거 같네요.

확인되는대로 수정하겠습니다.

WR
2015-05-12 15:15:37

찾아보니 marineya 님 말씀대로 패러데이와 더불어 뉴턴, 맥스웰의 사진을 걸어놨던 게 맞습니다.

본문은 아주 간략히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5-12 16:43:12

저도 긴가민가했던 사실이었는데 직접 확인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5-05-13 12:03:04

글을 읽을때 마다 제 자신이 겸손해지는 걸 느끼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되네요.

좋은글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WR
2015-05-13 14:00:29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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