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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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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5-03-06 12:36:12

갑자기 생각난 옛날 얘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지 한 두어달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제 사업 때문에 인도의 모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가까운 종합 운동장에 있는 농구장을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곤 했었죠.
그런데 하루는 그곳 직원 중 한 사람이 실내 탁구장에 코리안들이 있으니 가 보라 했습니다.
동족들을 만나기 어려운 곳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에 곧장 달려갔죠.
거기서 본 두 명의 남자분들은 분명 한국인은 맞아 보이는데 우리를 보시며 매우 당황하며 경계하는 눈빛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북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재치있는 드립을 날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었죠.
"반갑습네다. 내래 남조선에서 왔시요!"
30대 전씨는 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50대 김 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20대 시절 세계 선수권 2위, 당시 아시아 최강의 탁구 선수였고 전씨는 폴란드 유학파로 통역관 신분으로 그 주 대표 선수들을 육성하기 위해 청빙되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원어민 같은(?) 북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웃기는 남한 사람인 저와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우리가 종종 가져다 드렸던 우리집 반찬 도시락을 좋아라 하셨습니다.
조금은 연출된 제 반미 성향은 그들의 마음을 열었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치적으로 김씨 왕조에게 얼마나 세뇌되었으며 그들 내면에 깊숙히 자리 잡은 유물론적 가치관과 비인간적인 정서의 심각성을 금새 알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자신들에게 정치적 생명을 주셨고, 한국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것이며, 인육을 먹기까지 만연한 처절한 기아의 현실조차 외면하는 그들의 실상을 알면 알수록 북받치는 슬픔을 억누르기 어렵더군요.
이 외에도 복잡하고 민감한 내용까지 꺼내놓고 논쟁도 벌였지만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동질감으로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식사라도 함께 하자 초대할 때마다 전씨는 마음이 있지만 자신의 상관인 김 선생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꼭 오겠다 하고는 번번히 약속을 취소했었죠.
한번은 만두를 대접하리라 하고 눈물 글썽이며 만두를 빚는데 못 온다 연락이 와서 크게 상심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두 분이 정말로 우리 집을 방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집안에 있는 남한 가전 제품들을 보시며 애써보지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시더군요.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름 정성껏 한민족의 밥상을 준비했죠.
상추쌈도 마련했는데 그날 밥상 위에 놓여있던 쌈장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일전에 고추장이 떨어져서 김 선생님께서 북한 고추장을 좀 주셨는데 한국에서 공수해온 된장과 섞어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의 고추장과 남한의 된장이 하나가 되었다 해서 '통일 막장'이라 이름 지었다 했죠.
그 이름을 들은 우리 모두는 함박 웃음을 지었고 참으로 애틋한 정감이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며칠이 되지 않아 두 분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작별 인사조차 없이 떠났다는 것이 너무나 석연치 않았고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무척이나 염려되었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볼 수도 없고 그 어떤 기약도 없이 그렇게 이별한 일이 마치 우리의 분단된 설움을 말하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디 두 분이 별 일 없이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 잘 지내시길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지만 나누인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그 날 평양을 가보리라 다짐했죠.
전씨의 집이 있다는 '통일 거리'에 가서 이렇게 외쳐볼까 했어요.
"전X호 동무, 전X호 동무 날래 나와보시라요. 남조선에서 옛 친구가 왔시요. 얼른 나와서리 글케 자랑스러워하던 평양 맥주 한 잔 사주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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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5-03-06 00:11:28

잘 읽었습니다.

1
2015-03-06 00:17:51

허허...... 소접 님 같은 마음으로 북한을 대하면 통일도 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고, 전 씨와 김 씨 두 분과 꼭 만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1
2015-03-06 00:22:00

한 편의 소설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2
2015-03-06 00:23:54

감동적인 글에 오타가... 섞어인데 썩어가ㅜ.. 본문내용에 큰영향을 끼친것같아말씀드립니다

WR
2015-03-06 00:38:29
1
Updated at 2015-03-06 00:35:28

통일 막장, 맛있겠네요. 

6.25때 이북에서 내려오신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저로서는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고향을 만날 통일이 남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솔직히 점점 그 희망은 사라져가는 게 현실이죠. 독일은 기어이 하나가 되었는데... 우린 점점 남이 되어가네요.(남이 아니라 원수인가) 한숨만 나옵니다.
2
2015-03-06 00:42:34

평화 통일은 뜬구름 잡는, 어린 왕자의 꿈이라는걸
확실히 보여 주고 있는 요 몇년간의 기류를 볼 때...

통일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게 될 남한의 아까운 모든 것들이
부디 가능 한 한 최대한 많이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3
2015-03-06 00:55:47

통일은 해야합니다. 다만 평화적이고 자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북한 정치의 생명이 희미해질때쯤 우리 젊은이들이 피흘리지 않고서 통일을 이야기해볼수 있지않을까요.. 전쟁은 정말 슬플것같거든요..

이 글을 읽고 나니까, 통일이 된다면 요즘 메마르고 궁핍해진 우리들의 세계에 신선한 활력을 줄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
2015-03-06 01:57:21

저도 통일은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적으로 힘든것 또한 사실이죠

너무너무하고싶네요 통일

영화같은 일화 잘읽었습니다.

1
2015-03-06 06:44:23

중간에 인사하실때 빵 터졌네요!~~

유머감각은 타고 나신것 같습니다!~


꼭 '공동경비구역 JSA' .'베를린' 같네요!~~

워낙 감시체계가 있는  철저한 곳이라서,

그래도 잘 지내고 계실거라고 믿습니다!~



2
2015-03-06 07:15:07

개인적으로 시장경제의 힘은 막강하다고 생각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북한 주민들에게 돈맛을 보여주면 북한은 우리 영향권안에 있을 겁니다.

1
2015-03-06 08:08:28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2
2015-03-06 08:28:33

어릴때 '나 군대갈때쯤엔 통일 되겠구나'.. 전역한지 3년이 다되가는군요.

1
Updated at 2015-03-06 08:48:06

통일이 되기엔 너무 먼길을 와버린거 같네요. 국제상황도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고..어릴적 생각한거지만. 앞으로 몇세대만 더 지나면 남북한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서로 남남이 될것 같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수백년만에 민족이 다시 결합하고 그랬도 문화적 이질성이 덜한반면..요즘같은 초고속화사회에손 그것도 옛말이 되어가죠. 서로같의 공통점보단 차이점을 찾는게 더 쉬워질테니..

 

당장 이산가족분들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이 해가 갈수록 줄어가고..

어쩌면 제가 노년이 되었을땐 남북한이 한민족이었다는건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들려질지도 모르겠네요.

 

글은 정말 잘읽었습니다.

1
2015-03-06 09:27:31

여러 글에 댓글 다실때도 그렇지만 소접님이 어떤 분이신지 많이 궁금합니다


출근해서 정신없이 읽었네요 오늘 덕분에 좋은 하루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1
2015-03-06 10:07:27

이런글 너무 좋네요.

20대까지는 통일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전공도(공학인데) 북한과 통일에 접목시켜 보는 등 나름 노력을 해보다가 지금은 삶에 치여 조금씩 잊고 있었는데 소접님 글 보며 예전에 했던 새터민 청소년들 과외봉사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WR
2015-03-06 13:08:14

추천과 덧글 감사해요.

1
2015-03-06 15:40:44

통일되도 그 이후 20-30년간 서로 맞춰갈 복합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면 참 막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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