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그 이름 빈스 카터
오래전에 글을 써놨다가 묵혀뒀었는데, 그냥 지우기엔 아깝다고 생각해서 급하게 조금씩 편집하고 영상을 찾아 넣었습니다. 아마 글을 보시고 영상을 보시면 예전 기분이 조금 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린 열풍은 사그라 들지 않는거 같습니다. 타이밍을 잘 맞춰서 글을 올려야 하는구나 싶어지기도 하네요. (추억 팔기는 여러 사람과 함께해야 제 맛이니까요. 하하;;) 과거 이야기 너무 좋아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좋아하는 선수는 꼭 이야기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무리하게 이야기 풀어봅니다. 편의상 비격식체로 쓰겠습니다. 양해 바랄께요.
잊혀져 가는 그 이름 빈스 카터
98년 시카고의 우승과 함께 조던이 은퇴했다. 그리고 nba는 파업을 시작했고 nba의 인기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최고의 상품가치를 가진 선수의 은퇴는 농구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고, 동시대에 활약을 하던 90년대 스타플레이어들은 노쇠화를 겪기 시작했다. 스턴 총재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던 찰나... 농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선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빈스 카터였다.
카터를 정의한다면 어떤 것이 어울릴까? 덩크, 에어 캐나다, Next Generation, 하프 맨 하프 어메이징, Vinsanity 등 멋드러진 별명도 많았던 카터이다. 하지만, ‘태업’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다소 불편한 내용을 다시 들추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선수생활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이라면 조심스럽게 옛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잠깐 98년 드래프트를 살펴보자.
1픽 마이클 올라워캔디, 2픽 마이크 비비
3픽 래이프 라프렌츠, 4픽 앤트완 재이미슨
5픽 빈스 카터, 6픽 로버트 트래일러
7픽 제이슨 윌리엄스, 8픽 래리 휴즈
9픽 더크 노비츠키, 10픽 폴 피어스
노비츠키나 재이미슨 피어스를 제외하면 팀의 주력으로 뛰는 선수는 없다. 카터 역시 현재는 롤 플레이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재미있는 건 카터는 원래 골든스테이트에 지명 됐었는데, 재이미슨과 트레이드가 되었던 것이다. 이 두선수는 같은 대학에서 함께 뛰었었는데 AJ가 카터보다 순위가 높았던 건 대학 때 더 잘했기 때문이다.(당연한 소릴;;) 골스는 AJ를 데려가면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반면, 토론토는 카터를 데려가 캐나다에 농구 열기를 이끌어 냈다. 아이스하키에 미쳐있는 캐나다가 농구장에서 그런 열정을 보여줬던 건 토론토가 농구를 잘해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갑자기 사람들이 미친 이유는 뭘까... 그건 순전히 카터를 보기 위함이었다. 엄청난 운동능력으로 인간이 저렇게도 덩크를 할수 있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던 카터는 연일 하이라이트 필름을 제공해주었다. 물론 팀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어쨌든 토론토 랩터스도 몇년만에 비빌 언덕이 생긴 셈이었다. 이듬해 카터는 토론토 뿐만 아니라 전국구 스타가 되는데, 그가 확 뜨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덩크 슛 컨테스트였다. nba팬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덩콘이 바로 그 계기가 된것인데, 몇 명은 병풍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출전했던 티맥이나 프랜시스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어필 가능했던 실력있는 덩커들이었다. 물론 카터가 몸을 풀기 전까지...
It's over.
덩크 하나로 카터는 일약 슈퍼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지만, 인기 뿐 아니라 실력도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지며 꾸준히 성장을 거듭했다. 적어도 카터의 별명이 ‘에어 캐나다’였던 시절은 토론토=빈스 카터 라는 등식이 성립했었고, 팀은 카터에게 무한애정을 쏟게 된다. 전국구 스타가 된 2년차부터 3년 연속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놨으며, 특히 00-01시즌 앨런 아이버슨과 쇼다운을 펼쳤던 동부컨퍼런스 세미파이널은 아직도 최고의 맞짱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물론 아이버슨의 최전성기 시즌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묻혔던 카터지만, 별 다른 사이드 킥 없이 팀을 그 위치에 올려놨던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토론토가 세웠던 모든 업적은 빈스 카터의 몫이었다는 것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으니까...
컨퍼런스 파이널 50득점
코비도 그랬고, 페니도 그랬듯 카터도 조던의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나 카터의 행보는 조던의 그것과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같은 대학, 엄청난 운동능력, 클러치 능력, 덩크 슛 그리고 올림픽 때 배정받은 백넘버까지 쉴새 없이 카터를 괴롭혔다. 카터는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조던과의 비교는 부담스러워하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모든 건 인정 하더라도 조던의 수비만큼은 따라갈 수 없다는 주위의 악평이 계속 되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마 그의 승부욕 이야기도 그런 유연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기는 날도 지는 날도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던 카터였으니 비교하기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물고 늘어지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그런 카터에게 첫 시련이 다가왔는데, 그것은 바로 부상.
어느 정도 부상이었는지 카터가 가장 잘 알고 있었겠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때 그냥 길게 쉬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부상을 안고 뛰는 카터는 누가 봐도 예전만 못했고, 결국 그런 무리한 출장은 무릎을 수술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운동능력에 기반한 플레이를 펼치는 카터에게 무릎부상은 치명적이었다. 다음해에 어렵사리 돌아왔지만 또 다시 부상, 그리고 다시 돌아와 또 부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건강한 카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예전만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런 그에게 팬들과 팀은 지쳐갔다. 이미 카터는 nba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인기는 여전히 엄청났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카터와 팀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카터의 모든 투정도 받아주던 팀은 점점 카터를 차갑게 대했고, 그런 카터도 팀에 못마땅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터진다. 카터는 토론토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듯 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을 의지하고 믿어주던 팀이 이젠 자신을 홀대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마치 철 없는 어린애들 땡깡 부리 듯 카터는 트레이드 시켜 달라며 경기장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정녕 이것 밖에 안되던 그릇이던가 생각이 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캐나다의 모든 것이던 그가 단 한번의 잘못 된 판단으로 역적이 되 버리는 순간이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던 팀은 카터 중심에서 새로 들어온 신예 크리스 보쉬체제로 개편한다. 이미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팀과 카터였기 때문에 토론토 랩터스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음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뉴저지와 계약을 성사 시킨다. 예전에 레지밀러는 르브론이 팀을 옮긴것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스몰마켓 팬들은 그들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무슨 짓을 하던지 인정하고 미친 듯이 서포트해 줍니다. 그런 그들을 배신하는건 옳지 못한 행동이에요.’
르브론은 정당하게 팀을 옮기면서도 그런 안 좋은 소리들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물론 르브론에게 실망했던 사람들은 그가 팀을 옮겨서가 아니라 ‘디시전’ 이라는 쇼를 보여주면서 분노했던 것이었지만, 카터가 팀을 옮기는 과정은 그 질이 아예 달랐다. 그는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됬다. 당시 나는 그의 팬이었지만, 그런 덜 떨어진 행동을 하는 카터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했었다. 그때 나는 연인들이 이별 할 때 가장 더럽게 끝나는 모습을 토론토 랩터스와 빈스 카터에게서 볼수있었다.
팬들은 떠났지만, 카터의 기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건강하다는 단서만 붙는다면 그는 여전히 최고였으며, 어느 팀에 있어도 자기의 몫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어떤 사람은 정체되어 있던 카터의 능력을 끌어 올려준 것이 키드라고 하지만, 꼭 키드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카터가 홀로서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뉴저지에서의 카터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처음 가져보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고, 새 보금자리가 된 뉴저지는 카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다. 그는 예전처럼 높이 뛸수 있었고, 예전처럼 화려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을 만큼 건강했다. 하지만, 이젠 그를 ‘에어 캐나다‘ 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고, 플레이의 화려함은 여전했으나 그를 서포트 해주던 팬들은 예전만 못한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카터는 쿨했다. ‘이런 내가 싫어? 그럼 말어!’ 마인드의 소유자가 바로 빈스 카터였다. 한때 카터에게 열광했던 내가 가장 못마땅하던 점이 이거였는데, 만약 코비의 독기를 반만이라도 따라했었다면 지금 카터는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의미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그만큼 그의 긍정적이고 유연하기만 했던 성격이 팀의 에이스로서 조금은 아쉬웠다는 것이다. 뉴저지는 키드와 RJ, 카터가 함께했을 때는 플레이오프 걱정을 하지 않았던 강팀이었지만, 우승과는 인연이 없던 팀이기도 했다. 결국 리빌딩을 위해 세 선수는 해체해야 했지만, 함께 하는 동안 키드의 속공전개 속에 극강 피니셔들이었던 RJ와 카터의 마무리는 수많은 하이라이트를 제공해주었다.
Did you see? VC!! 그리고 보웬
선수생활의 중반이 넘었을 무렵 카터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쉽게 우승 타이틀을 놓친 올랜도는 하워드를 도와 내외곽을 흔들어 줄 선수가 필요했고 그 자리는 카터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넬슨-카터-히도-루이스-하워드 라면 충분히 대권을 노릴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히도가 올랜도와 재계약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넬슨이 조율을 도와 히도가 하워드를 컨트롤하고, 루이스의 외곽과 이리저리 활개치고 다니는 카터의 모습을 상상했을텐데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그건 그냥 꿈으로 끝나버렸다. 한마디로 카터가 들어오며 히도가 아웃되는 상황이 됬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마무리 되었다. 카터는 공격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예전만큼의 폭발적인 모습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카터의 수비는 플레이오프에서 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결국 보스턴에게 제대로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 시즌보다 더 일찍 탈락을 맛봐야 했다. 준우승팀이 허무하게 탈락하자 모든 여론은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 화살은 죄다 카터에게로 향했다. 카터는 인정했고, 그의 팬들도 이젠 예전의 카터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음 시즌 역시 카터는 올랜도에 녹아들지 못했고, 팀은 더 늦기 전에 그를 트레이드 해버린다. 그런데 웃긴건 트레이드 상대가 히도였다는 것이다. 올랜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이빠이 올렸던 히도는 다른 팀에선 거의 무기능이었고, 선즈는 그런 히도를 처리하려고 카터를 받아준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히도나 카터나 선즈로서는 그 밥에 그 나물 수준이었지만... 내 기억엔 빈스 카터는 선즈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기껏해야 아직 운동능력이 ‘살아 있구만 살아있어’ 정도의 이야기만 나왔을 뿐 팀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어서 제 발로 나가줬으면 하는 선즈팬들의 푸념 섞인 한숨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빈스 카터의 부활은 이제 삼성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버렸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선수가 고향팀에서 까지 버려지는 쓴맛을 봐야했지만, 빈스 카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인기에 맛을 보지도 못했던 선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굴곡이 없을테지만, 카터처럼 정상의 맛을 봤던 선수는 그 달콤함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한번의 실패로 그저 그런선수가 되어 사라지게 될지 모르지만, 카터는 정상에 있을 때도 실실거리며 긍정적이었었고, 바닥을 쳤던 그 순간에도 실실거리며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댈러스에서 그 나이에 덩크 슛을 꽂아 넣고 오토바이 세레머니를 하는 카터를 보면 ‘역시 덩크는 니가 촹이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미워 하려했었고, 어쩔땐 정말 미웠지만 그렇게 예전 기억을 끄집어 낼수 있게 만드는 플레이를 보여줄 때마다 다시 흐뭇해지는건 어쩔수가 없는 것 같다. 남들이 쓰레기라고 말하거나 승부욕 없는 철없는 선수로 기억하더라도 내겐 마지막까지 응원해주고 싶은 선수가 빈스 카터다. 아닌척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팬이니까. 누가 뭐라해도 그는 나에게 영원한 '에어 캐나다' 니까.
샷 미스 후 쿨한 미소
억지로 다듬고 다듬어서 겨우 완성했습니다. 왠지 내용의 핵심은 없고 카터의 이력만 쭉 늘어 놓은듯하네요.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