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벌린 시절 3초룰이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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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1-11-06 10:30:11
체임벌린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체임벌린 시대에는 3초룰이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동안 위의 주장에 대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정정 댓글을 달았습니다만, 해당 글을 보지 않으신 분은 계속 잘못 알고 계실 수 있고, 현재 매니아 시스템에서는 댓글 검색이 되지 않아 정정 댓글을 찾아보실 수도 없으실 겁니다. 그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농구 커뮤니티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체임벌린에 대한 글이 올라온 김에 이 점에 대해 본문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체임벌린 시대에도 3초룰과 페인트존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3초 룰이 처음 농구에 도입된 것은 1936년 미국 대학농구에 의해서였습니다. 3초룰 제정의 단초가 된 것은 1년 전인 1935년 중서부의 명문 켄터키 대학과 동부의 최강자 뉴욕 대학이 미국 최강팀의 자리를 놓고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진 경기였는데, 이 경기는 보기 흉한 육탄전이 벌어진 끝에 뉴욕 대학이 23-22로 승리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도 지역별로 농구 룰 적용이 각기 달랐는데, 동부 지역의 농구를 경험하지 못했던 아돌프 루프 켄터키 감독이 중서부 심판을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은 게 문제가 됐습니다. 당시 동부의 룰 적용은 몸싸움에 매우 관대했거든요. 뉴욕 대학 빅맨들인 어빙 트례센과 어윈 클라인은 당시 대학 농구 최고의 센터였던 켄터키 대학의 르로이 에드워즈에게 폭행에 가까운 몸싸움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동부 심판들은 파울을 불지 않았고, 기가 산 뉴욕 빅맨들은 에드워즈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죠. 결국 실제로 부상을 당하며 페이스를 잃은 에드워즈는 커리어 로우인 6득점에 그쳤고, 켄터키는 스크린을 기본으로 한 중서부 특유의 농구를 전혀 펼쳐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험악한 경기는 미국 전역의 농구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 골밑에서 빅맨들이 지나치게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년간의 논의를 거친 후 '공격자는 페인트존 안에 3초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새 규정을 만들게 됩니다. 3초 룰이 처음 제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3초 룰이 도입되게 한 선수'를 굳이 꼽는다면 체임벌린도 마이칸도 아닌 르로이 에드워즈가 되어야 합니다.
1936년은 농구가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932년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독자적인 룰 제정을 할 역량이 없었던 FIBA는 미국의 농구 규칙을 그대로 도입해 올림픽을 치렀습니다. 즉 1936년부터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대부분의 농구에서 3초룰을 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느 팀이든 득점을 성공할 때마다 축구처럼 센터 서클에서 점프볼을 하던 시대입니다. 골텐딩은 이 때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생겼고요. 농구의 공격자 3초 룰은 이렇게 유서 깊은 룰이고, 제정 이후 FIBA 또는 미국농구 단위에서 한 번도 중단 또는 폐지되는 일 없이 계속 이어져 온 룰입니다.
이후 1946년 NBA의 전신인 BAA가 출범하면서 3초룰도 그대로 룰에 포함됐고, 1949년 NBL과 합병해 NBA로 출발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NBA는 출범할 때부터 3초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초 룰이 제정된 1936년은 공교롭게도 체임벌린이 태어난 해입니다. 따라서 이때 태어나 성인이 된 체임벌린이 NBA에서 뛰던 때 3초룰이 없었다는 말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농구의 주요 룰 중 체임벌린이 뛰던 시대에 없었던 것은 3점 슛과 수비자 3초 뿐입니다. 나머지는 오늘날과 같은 룰 속에서 경기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3초룰이 마이칸 시대에 생겼다'는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마이칸 시대의 NBA에도 3초룰은 있었고, 마이칸으로 인해 변한 룰은 1951년 페인트 존의 길이가 6피트에서 12피트로 늘어난 것과 1944년 골텐딩 룰 제정, 그리고 커리어 말의 24초 룰 제정입니다. 이중 12피트로 늘어난 페인트 존은 체임벌린의 시대인 1964-65 시즌 다시 16피트로 늘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이칸도 체임벌린도 3초 룰이 없는 코트에서 뛴 적이 없으며, 이 둘이 뛰던 시대에 두 번에 걸쳐 페인트존이 넓어진 것이 3초 룰이 생긴 것으로 와전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적어도 매니아에서는 체임벌린 시대의 3초 룰 유무에 대한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올렸습니다.
이 게시물은 운영진에 의해 2011-09-29 01:42:31에 'NBA-Talk' 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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