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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바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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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1-06-19 22:35:23
Charles Barkley
(출처는 "Wikipedia" 입니다.)
그는 All-NBA First Team에 5번, Second Team에 5번, Third Team에 1번 선정되었습니다. 11번의 NBA All-Star Game에 참석했고, 1991년, 1993년에는 올스타 MVP에 선정되었고,  NBA 출범 50주년이었던1993년에는 리그의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NBA 역사상 가장 대단한 50인에도 들었습니다.
1992년과 1996년, 미국의 드림팀으로 올림픽 게임에 참가하여 2개의 골드 메달을 받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습니다.
파워포워드 치곤 작은키로, 바클리는 그의 힘과 공격성으로 NBA의 가장 도미넌트한 리바운더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다재다능한 선수로, 2000년도에 NBA 역사상 4번째로 20,000득점, 10,000리바운드, 4,00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은퇴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몸의 데뷔다 자식들아!)
Philadelphia 76ers
바클리는 대학 졸업 1년전 1984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983년도 우승팀 필라델피아에 5번째로 지명되었습니다. 정규 시즌동안 루키로써 그는 평균 14.0득점과 8.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All-Rookie Team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시즌에는, 14.9득점과 11.1리바운드를 기록하였으나,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보스톤에게 4-1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의 2번째 시즌에 바클리는 평균 20.0득점과 12.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주전 파워포워드로 팀에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는 25.0득점과 .578의 야투율, 그리고 15.8리바운드 라는 수치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밀워키 벅스에게 4-3 패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그 해 바클리는 All-NBA Second Team에 올랐습니다.
1986-87 시즌 시작전 모제슨 말론이 워싱턴 불렛츠로 트레이드 되면서 바클리는 좀더 팀의 리더로써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균 14.6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그의 첫번째 리바운드왕 타이틀을 받았는데 그중 5.7개가 오펜시브 리바운드 였습니다. 또한 23.0점을 .594의 야투율로 득점하며 그의 첫번째 NBA All-Star Game에 참가하게 되었고, 2년연속으로 All-NBA Second Team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24.6득점과 12.6 리바운드를 기록함에도 불구, 다시 한번 밀워키 벅스에게 1라운드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다음 시즌, 줄리어스 어빙이 은퇴를 발표함에 따라, 바클리는 팀의 프렌차이져가 되었고, 80경기를 뛰고, 평균 28.3득점, .587의 야투율, 그리고 11.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그의 가장 생산적인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는 2번째로 올스타 경기에 참여했고, 생애 처음으로 All-NBA First Team 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팀은 1974-75 시즌 이후 최초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다음해 25.8득점, .579 야투율, 그리고 12.5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연속으로 올스타, 퍼스트팀에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바클리의 27.0득점, .644 야투율, 11.7리바운드와 5.3어시스트의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팀은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스윕패를 당하는 굴욕을 안습니다.
그 이후로도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올스타 팀과 퍼스트팀에 연속으로 선정되었지만 2년 연속으로 2라운드에서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1989-90 시즌에는 MVP 1위 표를 가장 많이 득표함에도 매직존슨에게 밀려 MVP 를 받지 못했지만 그 다음해 116-114로 승리한 올스타 경기에서는 17득점 2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967년 윌트 체임벌린이 기록한 22리바운드 이후 가장 높은 리바운드 수를 기록하며 올스타 MVP 에 선정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그의 마지막 시즌인 1991-92 시즌에 그는 매직 존슨을 기리기 위해 34번이 아닌 32번을 달고 뛰었습니다. 32번은 원래 빌리 커닝햄을 위해 결번된 번호였지만, 바클리에겐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23.1득점, .552 야투율, 그리고 1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스타와 세컨드팀에 선정 되었습니다. 그는 팀 역사상 총득점 4위에 올랐고 (14,184), 평균득점은 3위 (23.3), 리바운드에서 3위 (7,079), 어시스트에서 8위 (2,276) 그리고 야투율에선 2위(.576)에 올라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플레이오프에 오르기 실패한 그 시즌후에 바클리는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1992년 7월 17일날 그는 피닉스 선즈로 제프 호나섹, 팀 페리, 앤드루 랭 과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우승은 내꺼다!)
(아 그러셔요?)
Phoenix Suns
피닉스로 트레이드된 1992-93 시즌은 바클리와 선즈 모두에게 잘 흘러갔습니다. 그는 평균 25.6 득점, .520 야투율, 12.2 리바운드, 그리고 커리어 하이 5.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선즈를 62-20, 리그 1위로 이끌었습니다. 그 노력으로 그는 리그 MVP를 수상하고 7번째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 이적시즌에 MVP를 따낸 3인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커리어 하이를 작성했으며 피닉스를 1976년 이후 최초로 NBA 파이널로 이끌었습니다. 바클리가 그해는 선즈가 우승할 "운명"이라고 조던을 향해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6차전에서 불스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25.6 득점, 13.6 리바운드를 기록하였는데, 그것은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27.3 득점, 13.0 리바운드, 5.5 어시스트를 포함한 결과 입니다. 그리고 4차전에서는 32 득점, 12 리바운드, 10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트리플 더블을 작성하였습니다.
1993-94 시즌에 바클리는 심각한 등부상으로 21.6 득점, .495 야투율, 11.2 리바운드를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는 8번째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오른쪽 사두근 부승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바클리가 부상과 싸우는 동안 선즈는 여전히 56-26을 기록하였고 서부 2라운드까지 올라갔습니다. 2-0으로 시리즈를 앞서 나갔지만, 결국 7차전에서 그해 NBA 챔피언 휴스톤 로켓츠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바클리는 골든스테이트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에서 23/31 야투를 성공시키며 그때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3번째로 높은 득점인 56득점을 올렸습니다. 오프시즌중에 은퇴에 대해서 고려하다가 그는 11번째 시즌으로 돌아와서 부상과 계속 싸웠습니다. 시즌 처음 반에 그는 많이 힘들어 했지만, 점차 나아지며 9번째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선즈를 59-23으로 이끌며 평균 23득점, .486 야투율, 그리고 11.1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또 한번 휴스톤 로켓츠를 상대로 3-1로 시리즈를 리드하다가 7차전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바클리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5.7 득점, .500 야투율, 13.4 리바운드를 기록하였으나, 다리부상으로 7차전에는 뛰질 못하였습니다.
1995-96 시즌은 피닉스 선즈에서의 바클리의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23.3 득점을 .500 야투율로 올리며, 11.6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커리어 하이 .777 자유투율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서부에서 최고 투표율로 올스타에 선정 되었고, 11월 22일날에는 그의 18번째 트리플 더블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NBA 역사상 10번째로 20,000 득점 10,000 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선즈는 41-41로 시즌을 마감했고, 바클리는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스윕을 당했지만, 25.5득점, 13.5 리바운드를 올렸습니다. 시즌이 끝난후, 바클리는 샘 카셀, 로버트 호리, 마크 브라이언트, 그리고 처키 브라운의 대가로 휴스톤으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이젠 몸이 예전같지 않구만 그래 에고)
Houston Rockets
1996-97시즌에 휴스톤 로켓츠로의 트레이드는 바클리가 NBA 챔피언쉽을 획득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인중 2명인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팀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클리는 1996년 10월 25일날 있었던 프리시즌 경기중 찰스 오클리와의 싸움으로 시즌 개막전에 출장정지를 먹고 $5,000의 벌금을 지불했습니다. 그의 휴스톤에서의 데뷔전에서 그는 커리어 하이 33 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부상과 싸워나갔고, 시즌중 14경기는 왼쪽 골반 부상, 11경기는 발목 부상으로, 그리고 4경기는 출장정지로 뛰지 못하게 되어, 그저 53경기밖에 뛰질 못했습니다. 그는 19.2 득점을 .484 야투율로 올리며 팀의 2번째 득점원이었고, 루키시즌 이후 처음으로 평균 20득점 이하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올라주원이 거의 모든 슛을 쏠때, 바클리는 리바운드에 집중하며 그의 커리어중 2번째로 높은 평균 13.5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었습니다. 로켓츠는 정규시즌을 57-25로 끝내며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였으나, 6경기 끝에 유타 재즈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1997-98시즌은 바클리에겐 또한번의 부상으로 힘겹게 보낸 시즌이었습니다. 시즌중 15.2 득점, .485야투율, 11.7 리바운드를 올리며, 팀은 41-41을 기록했습니다. 1라운드에서 5경기만에 유타재즈에게 다시한번 패하게 되었는데, 바클리는 부상으로 4경기밖에 뛰지 못하며, 평균 21.8분동안 커리어 로우 9.0득점, 5.3리바운드를 기록하는게 그쳤습니다. 단축시즌동안 바클리는 42경기를 뛰며 16.1득점, .478야투율, 12.3 리바운드를 기록하였고, 그는 NBA 역사상 윌트 채임벌린 이후 2번째로 23,000득점, 12,000리바운드, 4,000어시스트를 커리어동안 작성하는 위업을 세웠습니다. 단축시즌 끝에 로켓츠는 31-19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바클리는 LA 레이커스와의 1라운드, 그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23.5득점, .529 야투율, 13.8 리바운드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그의 플레이오프 커리어를 123경기 평균 23득점, .513 야투율, 12.9 리바운드, 3.9 어시스트로 마감하였습니다.
1999-2000시즌은 바클리의 NBA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그는 평균 14.5 득점을 .477 야투율로 올리고 10.5 리바운드를 잡았습니다. 그의 시즌과 커리어는 1999년 12월 8일, 그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던 필라델피아에서, 왼쪽 사두근을 부상당하며 36세의 나이로 마감하는듯 보였으나,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이미지가 부상으로 남는것이 싫었던 바클리는 4개월 후, 마지막 경기에 돌아왔습니다. 2000년 4월 19일날,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홈경기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오펜시브 리바운드 후의 풋백으로 길이 기억될 슛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그가 부상자 리스트에 오른 후, 하고자 했던것을 성공 시킨뒤, 코트에서 나와 그를 위한 기립박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오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수 없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 해냈어요. 저는 많은 경기를 이기고 졌지만, 저의 마지막 기억은 코트에서 들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코트에서 들려 나가는 것에 대한 정신적 블럭에서 벗어날수 없었어요. 코트위에서 제발로 걸어나가는것이 제게 심리적으로 중요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슛 이후, 그는 바로 은퇴하며 그의 16년 NBA 명예의 전당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마치며...
비록 무관의 제왕으로 남아버린 찰스 바클리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파워포워드중 한명입니다. 노비츠키가 커리어 상으로 더 위라고 할수도 있지만, 실력이 확실히 우위다 라고 할수만은 없을것 같네요. 그는 어떻게 보면 노비츠키보다 더욱 괴랄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슬램덩크의 강백호같은 미지의 존재죠. 가드급의 볼 핸들링과 패싱능력, 그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왠만한 센터들을 능가하는 보드 장악력, 그러면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득점까지.. 제가 직접 경기를 본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스텟만 봐도 이런 선수는 정말 다시 나오기는 불가능 할것 같습니다.

(나는 날으는 냉장고 찰스 바클리니까!)

찰스 경 이여, 영원하라!!
이 게시물은 운영진에 의해 2011-06-19 20:29:59'NBA-Talk' 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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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2011-06-19 17:59:46
많은 전문가들이 다른팀 우승할꺼라 말할때
댈러스가 우승할거라 말해
댈러스 팬분들을 카오스로 만드셨지만
결국은 댈러스 우승을 맞췄어요~
케빈존스와함께 저를 피닉스 팬으로 이끌었던
바클리 형님은 누가 뭐래도 제 마음속 no.1파포~
 
2011-06-19 18:02:36

아 정말 숫자가 많군요

2011-06-19 19:14:50

누가 뭐래도 최고의 스+파포입니다

Updated at 2011-06-19 19:22:45

그리운 그형님. 전성기 기량만큼은 역대 파포 중 넘버 원. 다만 그 시절에 더 좋은 팀이 많았다는게 안타깝군요.
덧붙여 체형은 많이 다르지만 그리핀이 바클리형의 특유의 뜨거운 만능파포 계보를 이어주길 바랍니다.

4
2011-06-19 20:13:46
리바운드 잡고 내려와서 볼을 가슴에 끼우고 팔꿈치 좌우로 휙휙~
어릴땐 그 과장된 동작이 너무 멋져보였었죠. 친구들이랑 농구하다 그 장면을 따라해보곤 했는데
친구들 표정은 "쟤 머하는거야? "
2011-06-19 20:32:12

으익

2011-06-19 21:36:21
1
2011-06-19 20:37:37
스탁턴-밀러-바클리-말론-유잉
 
제가 농구에 관심을 갖는 한 이 팀에 대한 상상은 계속됩니다 쭈욱~
2011-06-19 22:41:21

206의 포가 매직존슨보다 나오기 힘든게 198의 파워포워드+리바운드왕 바클리죠


실제론 더 작았다지요
2011-06-20 08:38:11
가장 볼거리를 많이 제공해줬던 포워드...
 
그를 4번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2011-06-21 02:13:08
제겐 던컨 다음의 PF입니다
팀을 옮기건 어쨌던 몸만 건강하다면 리그맹폭! --> 올라주원과 조던 제치고 시즌 MVP
드림팀1이 결성되니 보란듯이 맹활약! --> 팀내 득점 1위
 
던컨이 워낙에 압도적이어서 그렇지(데뷔하자마자 연속으로 퍼스트팀이라니... 쩝)
데뷔때부터 역대급 PG인 스탁턴과 함께 안정적으로 플레이한 말론보다는
바클리가 더 우위라고 생각합니다
Updated at 2011-06-23 22:06:17

저에게도 바클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수였죠

어렸을땐 바클리를 좌절시킨 조던을 정말 이유없이 상당히 심하게 싫어했고
리바는 말할것도 없고 득점력도... 찍어준 스탯 이상의 선수였죠.
드림팀1에서의 활약만 봐도 동시대 최고선수들이 그의 실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이해갈듯...
정말 몸관리만 조금 했어도 그렇게 잔부상이 없었을거라 생각하기에 너무너무 아쉬운.
휴스턴시절 부상에서 복귀해서 그 마지막 OR 따냈을때..... 
b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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