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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맨의 마지막 게임-피트 마라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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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16:07:16
지금부터 올릴 몇 개의 글들은 다른 사이트에서 보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 글을 처음 쓴 지도 벌써 4년이 다 돼가네요. 당시 전 매니아가 아닌 다른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설적인 은퇴 선수들에 대한 얘기를 시리즈로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사이트가 게시판을 개편하면서 옛날에 쓴 글이 다 사라졌고 몇몇 개인 블로그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네요. 그리 대단한 글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공을 들인 글들이었던 만큼 아쉽기도 했습니다.
 
매니아가 리뉴얼을 하고 제가 외람되게도 매니아 올스타 팀에 선정됐는데 개인적인 건강 사정때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예전에 타 사이트에 올렸던 은퇴 선수들에 대한 칼럼을 매니아에 다시 올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글만 쓸 수 있었던 당시 환경에 비해 사진이나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매니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2006년에 비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 등을 추가해 일종의 '개정증보판'을 올릴 생각입니다. 물론 기존에 올리던 기사단 소식이나 르브론 관련 번역글, 르브론의 새 팀인 마이애미에 관한 분석글도 계속 올리겠습니다.
 
첫 순서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쇼맨 피트 마라비치에 대한 글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즐겁게 감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프롤로그: 픽업 게임
 
“어이, 피스톨!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 뛰겠어. 잠깐 쉬었다 하자구.”
“하프코트 픽업게임인데 벌써 나가떨어진 거야?”
“자네랑 나랑 같나! 쉴 새 없이 패스를 찔러주는 건 고맙지만, 그때마다 슛하기 위해 일일이 점프해야 하는 나도 좀 생각해 달라고!”
“그럼 잠깐 쉴까?”
 
피트 마라비치와 그의 친구들은 골대 밑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오늘 저녁도 꼬마들 농구 캠프 가나?”
“그래, ‘마라비치 농구 캠프’의 악동들이지. 녀석들 상대하다 보면 녹초가 된다니까.”
“그런데 쉬운 훈련이 아닌데도 자네 학생들은 재미있게 훈련한단 말야.”
“당연하지! 재미있지 않으면 누가 힘든 일을 한단 말인가. 특히 농구는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모두 즐길 수 있어야 돼.”
“하긴, 그게 자네의 농구 철학이었지. 하지만 자네가 농구를 시작한 계기는 그리 재미있지 않았잖나?”
“그래, 재미있진 않았지, 6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농구공을 들고 내 앞에 앉으셨을 때, 그게 내 인생에 무얼 가져다 줄 지, 무엇을 앗아갈 지 알 수 없었지. 그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BAA에서 프로 농구 선수를 하셨던 아버지는 그 무렵 동네 고등학교 감독과 3류 대학 코치 자리를 전전하고 계셨어.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말씀하셨지.
 
“피트, 아빠는 일주일에 96달러를 벌고 있단다. 너를 대학에 보내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농구를 배운다면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다. 프로 선수가 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내가 가르쳐줄 테니 농구를 하거라.”
“하지만 아빠, 저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데 농구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너는 아빠의 이름을 이어받은 ‘Peter Press Maravich'잖니. 분명 아빠만큼 잘 할 수 있을 거야.”
고등학생 시절의 피스톨과 그의 아버지 프레스(왼쪽)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농구를 잘 하는 줄 알고 있던 나는 순진하게도 그 말에 넘어가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지. 하지만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농구’는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네.
 
 여름 내내 하루에 10시간 정도씩 농구를 했어. 아버지는 모든 기술은 기초에서 나온다며 하루 종일 드리블, 패스, 슛 기초만 시키셨지. 내 친구들이 호숫가에 수영하러 가고 있을 때 나는 40도의 찜통 체육관에서 아버지가 ‘농구 숙제’라고 이름붙인 훈련을 해야 했어.
 
 게다가 훈련이 끝났다고 농구를 안 한 것도 아니었지. 나는 하루 24시간 농구공과 함께 살았어. 집에서 체육관 까지 5마일 정도의 거리를 드리블 하며 다녔고, 자전거를 타면서 드리블 연습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전거 뒷좌석에서 드리블을 하곤 했지. 아버지가 학교까지 차를 태워주시면 나는 뒷좌석에서 드리블을 연습하고 있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차를 아주 천천히 모셔야 했지. 물론 나중에는 훈련 강도를 높이신다며 급출발과 급정거를 반복하시는 난폭 운전자가 되셨지만..... 나는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이 없었네. 친구들과 극장에 가면, 친구들이 영화 보러 들어간 사이 나는 카펫이 깔린 복도에서 드리블 연습을 했거든. 시끄럽다며 쫓겨난 적도 한두 번이 아냐.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려 할 때마다 내 곁에는 아버지가 계셨지. 아버지는 내가 농구를 위해 태어났다며 자신감을 심어주셨어. 그렇게 몇 번인가의 여름이 지나자,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꽤 유명한 고교 선수가 됐지. 실력도 실력이지만, 나와 아버지의 농구가 그때까지의 농구와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네.
 프로와 아마추어를 불문하고, 그 당시의 농구는 센터 중심 농구였어. 센터가 아닌 나머지 선수들은 일단 센터에게 공을 주고 패턴대로 움직이는 게 전부였지. 당시 NBA는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이 점령하고 있었고, 아마추어에서도 센터가 대우받기는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좀 다르셨지. 아버지는 프로 농구가 발전하면 1:1 공격이 중시되고, 외곽 슛과 화려한 개인기가 각광받을 것이라고 보셨다네.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그런 흐름에 걸맞는 선수로 만들려 하셨어.
 
 아버지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코치로 부임하셔서 가족 모두가 이사한 뒤, 아버지는 NCAA에서 당신의 실험을, 나는 계속되는 연습을 견뎌나갔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6피트 2인치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슛과 개인 돌파를 즐기는 테크니션이 되어 있었어. 기술로 날 이길 수 있는 선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지. 개인기를 앞세운 내 농구를 이해하지 못한 고등학교 코치는 나를 벤치에 앉히려 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가 코치를 죽일 것처럼 항의했고, 무엇보다 내 비하인드 백 드리블과 노 룩 패스를 보러 온 관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할 수없이 나를 들여보내곤 했어.
 

천재 강림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자 NCAA의 수많은 대학이 내게 연락을 해왔지. 고향 팀 노스캐롤라이나, 슈퍼스타 카림 압둘 자바에게 패스해줄 선수를 찾던 UCLA, 당시 최강팀 켄터키 등 강팀들이 날 원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지. 나는 중위권 대학인 LSU를 선택했어. 그 무렵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코치직에서 해임되어 실의에 빠져 있던 아버지에게 LSU가 나를 입학시킨다는 조건으로 아버지에게 감독직을 제시했고, 난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던 거지.
 
“자네가 처음 연습 경기를 하던 때가 생각나는군. 나름대로 센세이션이었지, 하하하.”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말야....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내가 코트에 들어서자, 팀 동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 날 쳐다보더군.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다 떨어진 스니커즈 농구화에 후줄근한 루즈삭스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와 우리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던 동료들에게, 아버지는 씨익 웃고 ‘게임부터 한다. 팀 나눠!’라고 소리치셨지. 경기가 시작되자, 동료들은 내 차림새가 아니라 내 농구에 더욱 질려버렸어. 내가 다리 사이로 바운드 패스를 보내자, 팀 동료가 패스를 받는 것도 잊은 채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더군. 나중에는 나와 같은 편이 되어서 내 패스를 받아보려고 싸움이 날 정도였다네.
 하지만 1학년 동안은 아무 것도 못했어. 당시 NCAA에는 1학년은 경기에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거든. 그래서 난 선배들과 함께 몸을 풀다가 경기가 시작되면 벤치로 들어가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웜업 시간에 펼치는 내 플레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경기장은 나를 보러 온 학생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어. 당시 LSU는 미식축구로 유명했는데 축구장에 가야 할 관중들까지 나를 보러 온 거지.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더 이상 내 플레이를 볼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가곤 했어. 선배들한테 괜히 미안해지곤 했지.
 
 2학년이 되자 나는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어. 아버지의 새로운 시스템은 내 개인기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었고, 나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활약했지. 2학년 때 평균 43.8득점을 기록한 나는 오스카 로버트슨이 가지고 있던 NCAA 한 시즌 최고 평균 득점 기록을 경신했고, 3학년 때 44.2득점, 4학년 때 44.5득점으로 매년 기록을 세워나갔지. 결국 NCAA 한 시즌 득점 기록은 1위에서 3위까지 모두 내 이름으로 채워지게 됐어. 그 기록들이 모두 3점슛이 없던 시절에 세워진 거지. 대학 시절 평균 6.4리바운드와 5.1어시스트까지 기록한 나는 올라운드 플레이를 펼치며 만년 중위권 우리 학교를 상위권으로 이끌었고, 3년 연속 올 어메리칸 팀과 1970년 올해의 선수, 네이스미스 상 수상자로 선정됐어. 대단한 시절이었지. 그 무렵 루이지애나에 유행하던 노래 기억나나?
 
“아, 자네 응원가 말인가? 응원가가 컨트리송으로 만들어진다는 것도 자네다운 특이함이었지.  
“오랜만에 들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는군. 아무튼 나와 아버지의 농구는 그때 만개했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당시 몇몇 언론은 자네를 싫어했지. 그냥 평범한 패스를 하면 될 것을 굳이 노 룩 패스로 한다며 저속한 플레이를 한다고 비난한 신문도 있었잖나?”
“저속? 저속하다고? 그 늙은이들 말 따윈 내 플레이에 아무 지장도 주지 못했어! 내가 수도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을 즐겁게 하면 안 될 이유가 도대체 뭔가? 내가 노 룩 패스를 하면 관중들은 신이 나서 환호를 보내지. 나야말로 묻고 싶네. 도대체 똑같은 패스라도 보는 사람이 즐거운 쪽으로 하면 왜 안 되냐고 말이야. 농구는 즐거워야 한다네. 농구를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튼 그런 평가가 자네의 프로 경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지. 드래프트되던 그 순간부터 말야.”
“그건 그래. 프로 생활 내내 항상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지.”
 
 
오만과 편견
 

 나는 1970년 NBA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애틀랜타에 입단했어. 농구 인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간 거지. 그 해 드래프트는 1순위 밥 레이니어를 비롯해서 루디 톰자노비치, 데이브 코웬스, 캘빈 머피, 네이트 아치볼드 등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았어. 내가 입단한 애틀랜타에는 에이스 루 허드슨과 빅 센터 월트 벨라미 등 뛰어난 선수들이 있는 중위권 팀이었지.
 나는 기대를 가지고 첫 연습에 참가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어. 선배들이 나를 탐탁지 않게 봤던 거지....
 
“무엇이 문제였나? 돈? 성격? 플레이스타일?”
“모두였네. 내 신인 시절 연봉은 2백만 달러였어. 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돈이었지.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뛰고 있던 흑인 선수들은 내 연봉이 백인이기 때문에 턱없이 높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내 연봉을 부담하기 위해 팀 내에서 인기가 높던 조 콜드웰을 다른 팀으로 보내버렸으니까, 나머지 선수들의 호의를 기대하는 건 애시당초 무리였지.”
 
 애틀랜타의 선수들은 내 모든 것을 문제 삼았어. 심지어는 내 헤어스타일까지 말이지. 결정적으로, 그들은 내 플레이가 실속은 없이 겉멋만 들었다고 생각했어. 내가 비하인드 백 패스를 찔러주면 그들은 일부러 볼을 놓치곤 했지. 특히 그때까지 주전 가드로 나 때문에 자기가 가린다고 생각한 마흐디 압둘 라흐만의 질시가 제일 심했어.
 선배들의 편견이 1차적인 문제이긴 했지만, 결국 내 오만이 사태를 악화시켰어. 나는 내 플레이를 이해해줄 만한 식견을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 절대 마음을 열지 않았고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지. 코트 위에서 환호를 받을 수 있다면 팀 동료들의 생각 따위는 상관없다는 식이었다네. 나는 콧수염을 멋있게 기르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빗으로 수염을 다듬고 다녔지. 대학 때부터 신고 다니던 루즈삭스도 그대로였네. 팀메이트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았지.
 
신인 시즌 인터뷰에서 프로 적응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마라비치 
 첫 시즌에 나는 나름대로 활약해서, 평균 23.2득점으로 리그 9위에 오르고 올루키 팀에 선발되기도 했어. 하지만 팀 성적은 전년도보다 무려 12승이나 떨어졌고, 나는 대학 때의 활약에 크게 못 미치는 성적 때문에 고민해야 했지. 마음고생은 곧바로 몸의 이상으로 나타났고, 난 이듬해 16경기를 결장하면서 평균 득점도 20점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어. 거품이라는 평가가 따라붙기 시작했지. 아버지는 당신의 작품이 안좋은 소리를 듣는 게 싫어졌는지 관중석에서 코튼 피츠시몬즈 감독에게 큰 소리로 악담을 퍼부었고, 그러면 나에게는 팀 동료들의 비웃음이 쏟아졌지. 정말 괴로운 한 해였어.
 
 이듬해 나는 본격적으로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어. 평균 26.1득점을 기록한 나는 리그 득점 5위권에 진입했고, 커리어 최다인 6.9어시스트로 압둘 라흐만을 제치고 패싱 플레이의 중심으로 활약했지. 나는 그 해 처음으로 올스타와 All NBA 팀에 선정됐어. 팀 내 라이벌 허드슨도 평균 27.1점을 기록해서 우리는 경기당 50점 이상씩을 합작하는 콤비가 됐지만, 우리 사이는 여전히 나빴지. 우리는 플레이 스타일도 전혀 달라서, 나는 화려한 플레이를 선호한 반면 그는 편하게 득점하길 원했어. 우리 콤비는 어느 새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는 뉴스메이커가 돼갔지. 우리 팀은 전년도보다 10승이 더해진 46승을 올리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네.
 
 하지만 이미 갈 데까지 간 나와 허드슨의 관계는 팀에 좋은 영향을 주진 못했어. 이듬해 나는 27.7득점을 올리며 리그 득점 2위를, 허드슨은 25.4점을 기록했지만 따로 노는 플레이 때문에 팀 성적은 곤두박질쳤지. 결국 2월에 있었던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나는 내게 퇴장을 먹인 심판에게 폭언을 퍼부었고, 그 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우리 팀은 뭔가 결단을 내려야했지. 감독이 선택한 쪽은 얌전한 허드슨이었다네.
 
 
 재즈 독주회
 
 1974년, 신생팀으로 첫 출발을 하고 있던 뉴올리언즈 재즈는 팀을 이끌 리더와 관중을 끌어모을 화려한 스타가 필요했고, 애틀랜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를 주목하게 됐어. 마침 나는 LSU에서 전설을 만든 프랜차이즈의 영웅이었지. 재즈는 나와 노쇠화 기미를 보이던 벨라미를 묶어 익스팬션 드래프트로 얻은 빈 머닝거, 밥 커프만, 미래의 1라운드 지명권 2장, 그리고 2라운드 지명권 2장과 바꾸는 초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네. 벨라미가 1경기만 뛰고 은퇴했기 때문에, 재즈가 지불한 저 엄청난 대가는 모두 나를 얻기 위한 것이었어.
 
“고향으로 돌아간 거군.”
“맞아. 처음으로 내 농구를 활짝 꽃피운 곳이니까.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네. 게다가 그 무렵 내게 닥친 큰 불행이 내 태도를 바꾸게 했지.”
“자네 어머니?”
“맞아. 나는 그 무렵 어머니를 잃었네. 하긴, 내가 왜 그렇게 빨리 가셨냐고 말하기에 어머니가 나를 잃으신 시간은 너무 길었지.”
 
어느 날 저녁, 새로운 팀 동료들과 어울리고 있던 나는 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어. 그 무렵 아버지는 LSU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고향로 돌아간 뒤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남편 노릇을 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의 증상이 악화돼서 위독하다고 하셨지. 허겁지겁 달려간 나를 맞이한 건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의 주검이었다네.
마라비치 가족의 단란했던 한때

 
 어머니는 그때 겨우 49세셨네. 젊은 시절부터 나와 아버지를 농구에 빼앗긴 어머니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셨고,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던 무렵에 벌써 알콜 중독 증상을 보이고 계셨어. 우리 부자가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는 동안, 어머니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마신 거야.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어. 나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지. 나는, 나는 그 때까지 날 보는 사람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었네. 그런데 정작 내가 바친 ‘모든 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몰랐던 거야.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길에 함께 있어드리지도 못한 쓸모없는 녀석이었네.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내가 할 말만 했고, 동료들이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 멋진 패싱이 장기라고 자랑하고 다녔으면서도, 정작 그 패스를 받는 선수가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관심 없었던 거야.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는 텅 빈 체육관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네. 우리 팀의 동료들과 함께 뛰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해주는 동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네. 모든 이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면, 주위 사람들의 사랑부터 얻어야 했던 거야.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네. 먼저 수염을 깨끗하게 자르고, 다른 선수들과 같은 양말을 신기 시작했어. 훈련이 끝난 다음에 함께 밥을 먹고, 그들과 연습 게임을 하면서 내 농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지. 그러자 그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네. ‘팀’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이었지.
 
 그 해 개막전부터, 나는 옛날처럼 나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재즈는 신생팀이었고, 한 해에 무려 20명의 선수가 들락날락하는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 나는 득점 욕심을 줄여가면서 리바운드와 수비에서 그때까지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개막 11연패로 시즌을 시작한 우리는 시즌 23승에 그치고 말았다네.
 
 이듬해 더욱 분발한 우리는 팀을 38승으로 끌어올리며 디비전 탈꼴찌에 성공했네. 나를 버린 애틀랜타가 꼴찌여서 기분이 묘했지.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한 뛰는 농구를 시도해 재미를 보기 시작했어. 나는 20경기를 결장했지만 평균 25,7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고, 처음으로 All NBA 퍼스트팀에 선정되었다네.
 
 
전성기, 그리고....
 
“그리고 1976~77 시즌을 맞이했지. 자네 최고의 시즌 말이야.”
“확실히 그 시즌은 최고였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는.”
 
1976~77 시즌, 나는 시즌 13경기에서 40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평균 31.1점을 기록했어. 처음으로 득점왕에 오르는 순간이었지. 올스타와 All NBA 퍼스트팀 선정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해 가장 놀라웠던 일은 한 경기 68득점이었어.
 
 1977년 2월 25일, 우리는 뉴욕 닉스를 맞이해 홈 경기를 펼쳤지. 당시 닉스에는 얼 먼로와 윌트 프레지어라는 최강의 수비형 가드 콤비가 있었어. 우리가 이기려면 내가 그들의 수비를 뚫는 수밖에 없었지. 나는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에게 달려들었어. 하프라인 바로 앞에서 장거리 슛을 연이어 꽂아 넣고, 현란한 드리블로 득점을 올렸지. 나를 막던 프레지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나는 전반에만 31득점 5어시스트 3리바운드 2스틸 2블록을 기록하며 게임을 지배해버렸어. 후반에 뉴욕이 따라붙을 때마다 정확한 슛으로 찬물을 끼얹은 나는, 결국 68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
 
전설의 68득점 경기 장면
 
“그게 자네가 프로에서 가장 빛났던 시즌이었지. 하지만 피스톨, 그 대가는 너무도 컸네.”
“사실 그 시즌은 내가 성한 몸으로 뛴 마지막 시즌이었어. 얇은 선수층 때문에 나는 무리한 활동량을 강요받았고, 결국 무릎에 탈이 나고 말았지. 한 쪽 무릎 인대에만 염증이 생겼을 때 충분히 쉬어야 했는데, 무리하게 복귀했다가 반대쪽에도 염증이 생기고 말았지.”
 
“피트, 왜 그랬나? 팀 프론트도 자네에게 충분한 휴식을 부탁했네. 그런데 도대체 왜 굳이 무리하게 복귀했던 건가?”
“이보게, 나는 그 때 동료들과 팬들을 위해 뭔가 해야 했네. 우리 팀은 느리기는 했지만 한 해 한 해 성적이 나아지고 있었어. 플레이오프 진출이 바로 목전에 있었단 말일세. 우리 팬들도 생각보다 훨씬 빨랐던 우리 팀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해줬어. 나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네.”
 
 나는 철 보형물을 무릎에 꽂은 채 아픔을 참고 슛과 패스를 했네. 그러던 어느 날, 버펄로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레그 스루 패스를 하다가 잘못 떨어져 무릎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지. 1977~78 시즌, 나는 50경기에 출장해서 평균 27득점과 6.7어시스트를 기록했네. 우리 팀도 39승을 올려 플레이오프 진출에 단 두 경기만 모자라는 성적을 거뒀지. 난 행복했네. 동료들은 진심으로 날 좋아해줬고, 연습 시간에 내 플레이를 따라해 보려 하곤 했지. 나는 리더로써 팀을 이끄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네.
 난 이듬해에도 출장을 강행했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창의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지. 나는 단 49경기에만 출장해서 평균 22.6점을 올렸지만, 그건 어린 시절 혹독한 훈련 끝에 몸에 밴 기본기와 센스로 해낸 것일 뿐이었어. 내가 뛰지 못하자 팀 성적도 전 시즌보다 13승이나 적은 26승으로 곤두박질쳤지. 나는 더 이상 ‘피스톨’이 아니었네. 팬들은 나를 여전히 올스타에 뽑아줬지만, 나는 스스로 선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어.
 
 
마지막 발걸음
 

이듬해, 프랜차이즈가 뉴올리언즈에서 유타로 옮겨지면서 프론트와 코칭스태프가 바뀌었네. 나는 팬들에게 멋진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오프 시즌 동안 투혼을 불태웠지만, 새 코치 톰 나이살크는 더 이상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네. 그는 새로 영입한 애드리언 댄틀리를 팀의 새로운 간판으로 내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를 벤치에 묶어뒀어. 심지어는 한 달 내내 나를 출장시키지 않은 적도 있었지. 나는 화가 치밀었다네. 구단이 내게 이럴 수는 없었어. 마지막을 그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네. 나는 단장실에 가서 그만 날 놓아 달라고 했고, 나는 웨이브 공시가 됐네.
 
“그러자 자네를 원하는 구단들의 전화가 쇄도했지.”
“다행이었네. 최악의 경우 무적인 채로 은퇴할 수도 있었거든.”
 
닷 새 동안 고민한 끝에 보스턴 셀틱스로 가기로 했네. 전 시즌까지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했던 보스턴은 래리 버드가 신인으로 입단하면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었지. 리그 최고의 명문 팀인 그곳에서라면 내 마지막을 훌륭히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보스턴의 팬들은 나를 환영해줬어. 아워백 단장은 기자들 앞에서 보스턴 유니폼을 입은 날 가리키며 “피트 피스톨 마라비치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시대 최고의 공격수죠.”라고 선언해 내 자리를 마련해 줬어.
 보스턴의 코칭스태프는 원래 날 주전으로 쓰려고 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난 스스로 식스맨을 제안했네. 매 경기 많은 시간을 뛰게 된다면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어. 내 마지막 모습은 팬들에게 화려하게 기억되어야 했네.
 
 그 해 나는 눈부신 경험을 했네. 엄청난 패스를 구사하는 두 신인을 본 거지. 바로 우리 팀의 래리 버드와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이었네. 그들은 전성기의 나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뛰어난 패싱 플레이어였지.
 
 버드는 나에게서 무엇이든 배우려 항상 내 주위를 서성거리던 연습벌레였네. 나는 그에게 각종 패스 기술과 드리블 기술을 가르쳤지. 내가 한 손으로 하는 탭 패스를 가르쳐주자 그 친구는 그걸 하루종일 연습한 끝에 다음날 경기에서 완벽한 탭 패스로 어시스트를 기록했다네.
 매직은 참 재미있는 친구였지. 레이커스와의 경기가 있던 날, 그 친구는 나에게 오더니 큰 손으로 악수를 청하며 “피스톨, 전 당신 플레이를 따라하면서 자랐어요. 오늘 당신은 6피트 9인치 짜리 피스톨을 보시게 될 겁니다.”라고 말하고 씨익 웃어보였어. 그리고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두 명을 제치더니 엄청난 노 룩 패스를 날리고는 벤치의 나에게 또다시 씨익 웃고는 달려가 버렸다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 나를 능가하는 선수가 내가 은퇴하기 전에 나오다니... 그것도 둘이나 말이야.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것은, 농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내 농구가 저급하다며 비난할 때도, 내 플레이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날 따라하려 노력했던 어린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야. 아버지와 난 틀리지 않았던 것이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예상했던 농구가 바로 그때 펼쳐지고 있었어.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었네. 이제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지.
 
 우리는 버드를 앞세워 정규 시즌 61승으로 동부 1위를 기록했네. 전 시즌에 비하면 32승이나 오른 기록이었지. 나는 식스맨으로 전체 43경기를 출장해 평균 13.7점을 기록했네. 승패가 걸린 중요한 순간에 나와서 게임을 지배하곤 했지. 그 해 처음으로 3점슛 제도가 생겼는데, 원래 장거리 슈터였던 나는 모두 15개의 3점슛을 던져서 10개를 성공시켰네. 나는 여러 모로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서 태어났던 모양이야.
 우리 팀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올라 필라델피아 76스와 맞붙게 됐네. 나에게는 첫 번째 컨퍼런스 파이널이었지. 비록 줄리어스 어빙과 앤드루 토니를 막지 못해 탈락하고 말았지만, 나는 더 이상 여한이 없었네. 은퇴 발표를 했지.
 
“보스턴에서처럼 식스맨으로 뛰었으면 더 뛸 수 있었지 않나? 아직 32세였는데 왜 그렇게 빨리 은퇴를 결정했나?”
“더 이상 팬들에게 내 농구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네. 마지막에는 깨끗하게 물러나고 싶었어. 보스턴 팀도 버드를 중심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나는 그때 너무 지쳐 있었다네.”
 
1984년 은퇴선수 경기에 출전한 마라비치
 
 은퇴 후 나는 신앙생활과 농구 캠프에 모든 걸 바쳤네. 어머니를 잃은 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던 나의 마음은 하느님과 만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았지. 나는 간증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고, 첫 전도 대상은 우리 아버지였지. 농구 캠프는 농구에 대한 내 마지막 헌신이었네. 나는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내가 창안한 농구를 가르쳤고, 아이들은 농구를 즐거운 운동으로 받아들여나갔어. 아버지도 가끔 우리 캠프에 들르셔서, 레그 스루 드리블을 흉내 내려고 애쓰는 꼬마녀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셨지.
 
“자네 아버지가 편안한 모습으로 운명하신 것도 신앙 생활의 영향이었군?”
“그래. 작년 아버지는 암으로 눈을 감으셨네. 당신의 농구가 보편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가셨으니 여한은 없으셨겠지.”
 
농구장에서_사람_바보만들기.AVI
 
“피스톨, 자네의 선수 인생을 돌아봤을 때 후회는 없었나? 프로에 들어와서는 제대로 돌아간 게 하나도 없었잖아.”
“글세.... 내가 처음 입단했던 애틀랜타에서는 몸도 건강했고 뛰어난 동료들도 있었지만 내가 그들과 마음을 나누지 못했고, 재즈에는 마음 맞는 동료들과 건강은 넘쳤지만 뛰어난 팀 전력이 떨어졌지. 그리고 보스턴에서는 뛰어난 동료들과 마음을 함께 했지만 그땐 이미 내 건강을 잃었고 말야. 모든 것이 갖추어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뛰어난 동료와 마음 맞는 동료, 멋진 플레이를 10년간 할 수 있던 몸이 있지 않았나? 불평하기보다는 내가 가졌던 행운에 주목하려 하네."
 
 이보게, TV를 켜고 NBA 경기를 보게. 이제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노 룩 패스 같은 것은 더 이상 신기한 플레이가 아니야. 리그의 거의 모든 선수들이 그런 플레이를 하네. 나는 행복하다네. 후회는 없어.
 
"....이제 라디오 방송 시작하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았군. 한 게임 더 할텐가?“
“그러지, 피트. 이른 아침부터 게임을 하니까 기분은 상쾌하군. 자네는 어떤가?”
“나도 그렇네. 기분이 굉장히 좋아(I feel great)!"
 
 
에필로그: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I feel great!"
 
이것이 ‘피스톨’ 피트 마라비치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1988년 1월 5일,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한 농구장에서 친구들과 3:3 픽업 게임을 하던 마라비치는,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친구의 품에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마라비치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그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습니다. 1월 5일 오전, 농구를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친 마라비치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의 코트에서 농구를 하기 위해 머나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언론은 일제히 위대한 쇼맨의 죽음을 긴급 속보로 타전했습니다. 그의 사망 보도를 본 유명 컨트리 가수 밥 딜런은 하루 만에 ‘Dignity(위엄)’이라는 노래를 지어 고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밖에도, 마라비치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영화와 전기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마라비치의 사망을 보도한 당시 스포츠센터 영상
 
 마라비치와 그의 아버지가 확립한 농구 스타일은 80년대 들어 매직과 버드에 의해 꽃을 피웠으며, 마라비치의 플레이는 매직과 토마스가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현재는 거의 모든 선수들이 마라비치의 플레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마라비치는 1985년 유타 재즈에서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고 1987년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었으며, 그의 사후인 1997년 ‘NBA의 위대한 5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1997년 올스타전 하프타임 시간에 윌트 체임벌린,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NBA의 위대한 50인’시상식에서 그의 자리를 지킨 것은 그를 꼭 닮은 두 아들, 조슈아와 제이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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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0-10-11 16:23:04
크~ 역시 헬탄트님은 글을 잘 쓰시네요. 마라비치에 대해 잘 몰랐는데,
한수 배우고 갑니다 ~
2010-10-11 20:00:09

존경하는 선수에 대한 글을 이렇게 멋지게...
잘 읽고 갑니다

2010-10-11 22:58:08

정말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2010-10-12 00:01:12
커리어의 거의 전부를 3점슛이 없었던 시기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게임에서 3점슛에 관한 최상위 능력치를 부여받고 있다는 점만 해도
마라비치가 시대를 좀 지나치게 앞서간 천재였다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죠...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2010-10-12 00:18:00
 
 
예전부터 네이버에서 헬탄트 님 글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잘 풀어서 써주시는 글 잘 읽어 봤습니다.
2010-10-12 00:20:34

너무 멋진 글이네요...

2010-10-12 08:53:13

잘봤습니다. 

2010-10-12 17:37:24
멋지고 유용한 글이 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0-10-12 18:16:30

남들이 조던 보면서 연습 할때 저는 이선수를 먼저 봤던 기억이나요~~

2010-10-15 14:25:25
한편의 드라마를 본듯한 느낌입니다 마라비치라는 선수가 더 가까이 다가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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