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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의 2000년대 - (3) Everything Turns Around

 
  1426
2010-05-14 20:55:30

원문

Blazer's Edge의 Dave씨가 지난 10년간의 포틀랜드를 간략하게 회고한 글입니다.

포틀랜드 팬들에게 유익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번역을 해봤습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과 본문의 평어체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2005-2006


Record : 21승 61패


감독 : 네이트 맥밀란


IN : 스티브 블레이크, 후안 딕슨, 재럿 잭, 보션 레너드, 세르게이 모니아, 브라이언 스키너, 찰스 스미스, 마텔 웹스터


OUT : 샤리프 압둘라힘, 데릭 앤더슨, 모리스 베이커, 지노 칼라일, 리치 프람,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제임스 토마스, 닉 반 엑셀


드래프트 : 마텔 웹스터(6번픽), 리나스 클레이자(27번픽), 리키 산체스(35번픽)


Leading Scorer : 잭 랜돌프(18.0 득점)


Leading Rebounder : 잭 랜돌프(8.0 리바운드)


Most Minutes : 잭 랜돌프(34.4 분)



2005년 가을, 포틀랜드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전의 시즌들은 가면 갈수록 더 실망스러웠다. 로스터 변화는 더 많은 승리가 아닌 더 많은 패배를 불러왔다. 프랜차이즈는 낡은 질서와 PR 문제를 제거했으나, 새로운 영스타들은 똑같거나 더 나쁜 사고를 쳤을 뿐이었다. 페이롤은 높았다. 관중 수는 이보다 더 낮은 적이 없었다. 스몰타운인 포틀랜드는 항상 자신들의 팀을 지지해왔고, 계속 블레이저스가 리그에서 최고 수익을 올리는 팀 중 하나가 되도록 했다. 이 해에 로즈가든의 관중 수는 리그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로즈가든에 대한 파산 분쟁으로 채권자들이 계속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폴 앨런 이하 구단 직원들은 포틀랜드에서의 팀의 미래가 안전하다고 확인해주기를 거부했다. 남아있는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팬들은 내몰리고 괴로운듯 했다. 트레일 블레이저스라는 이름은 대중들 사이에서 언급될 때 eye rolling과 냉소적 비웃음을 샀으며, 지난 수십년간의 환희와 열정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이 팀은 상상 가능한 모든 면에서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마치 프랜차이즈가 병상 위에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환자인 것처럼, 관찰자들은 어떤 희망의 징후도 찾지 못했다. 준비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이 아수라장 사이로 포틀랜드 팬들, 어쩌면 프랜차이즈 자체를 하나로 뭉치게 할 수도 있는 긍정적 존재 하나가 발을 들였다. 포틀랜드에서 180마일 북쪽에 있는 시애틀 슈퍼소닉스는 그들의 감독과 오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 감독은 페이튼-켐프 전성기 때부터 있었던 전직 swing guard이자, 코트 위에서는 터프한 수비수였고,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는 blue-collar guy였으며, 벤치에서도 코트 위에서만큼이나 터프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네이트 맥밀란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사람들이 patchwork roster라고 여긴 로스터를 가지고 플옵에서 선전했지만, 경영진은 전혀 맥밀란과 원만히 지내지도 재정적으로 보상을 하지도 않았다. 2005년의 여름, 50승 32패의 성적과 앞서말한 플옵에서의 선전을 뒤로 하고, 맥밀란은 고향 프랜차이즈를 떠나 포틀랜드에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 교체가 의미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만, 이번에는 대부분의 경우보다는 의미가 있었다. 걸어볼만한 뭔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팬들에게는 최소한 그랬다. 우선, 맥밀란은 이 팀에 스타일상 딱 맞는듯 했다. 팀의 스쿼드는 베테랑 중심으로 마이크 던리비에게 반항하던 시절에서 관대한 모리스 칙스 시절까지 거쳤다. 그러나 이런 변화 중에 팀은 더 어려졌고, 이제는 이기는 농구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 거의 없는 선수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가졌던 영향력은 묵살되었다. 진지한 맥밀란은 팀을 정상으로 만들 것을(혹은 지옥훈련을 통해서) 요청받았다. 그걸 실패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삭에서 밀알을 떨어낼 수는 있을 것이었다. 맥밀란의 인격은 흠잡을 데가 없었고, 선수 시절부터 그래왔었다. 맥밀란은 제멋대로 구는 선수들에 대해 팬들이 바라는 이상형이었다.


감독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맥밀란이 포틀랜드로 왔다는 사실은 또한 활력소를 제공했다. 기적은 드물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생하는데 시간이 걸릴거라 여겼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프랜차이즈의 현 상태에서 다시 살아날 실질적인 방도를 찾을 수 없다는데 있었다. 어둠 끝에 있는 빛은 잊자. 아직은 터널조차 구경하지 못했으니까. 맥밀란이 부임한 것은 최소한 그가 전진에 대한 희망을 보았음을 의미했다. 좀더 냉소적인 관찰자들은 맥밀란이 온 이유 중에서 포틀랜드가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제시했던 거액의 계약을 언급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비용절감과 재정적 위기의 시기에, 경영진은 결국 팀을 공중분해 하기보다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투자했다. 감독에게 수백만 달러를 기꺼이 쓰고 있다면, 아직은 관심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감독을 갑작스레 횡재한 것이 정책의 전반적 변화를 알린 것은 아니었다. 경영진의 임무는 여전히 명확했다 : 모든 것을 삭감한다. 라쉬드 월러스와 본지 웰스로 시작한 대숙청은 이제 다른 베테랑에게까지 확대되었다 : 샤리프 압둘라힘, 데릭 앤더슨, 그리고 가장 눈에 띈 것은 한때 우승의 마지막 퍼즐로 여겨졌던 지역의 영웅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였다. 그들 중 누구도 월러스와 웰스만큼 보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건 아니었다. 그들 모두를 내보낸 것은 프랜차이즈가 과거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더이상 당장의 승리에 집착하기보다 좋아지든 나빠지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렸다.


새로운 시작 중 일부는 수십년만에 가장 높은 드래프트 픽-빛나는 새 3번픽-이라는 형태로 다가왔다. 2005년 드래프트에서 밀워키는 전체 1번픽으로 앤드루 보것을 지명했고, 애틀랜타는 2번픽으로 마빈 윌리엄스를 지명했다. 포틀랜드에게는 다음 PG 중 누구든 뽑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 데론 윌리엄스, 크리스 폴, 레이몬드 펠튼. 그러나 드래프트 전에 포틀랜드는 3번픽을 유타에게 넘기고 6번픽과 27번픽을 받아오기로 결정한다. 유타는 윌리엄스를 지명했고, 나머지 두 PG도 각각 4번과 5번으로 지명된다. 프로젝트형 센터 앤드루 바이넘과 득점형 포워드 대니 그레인저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포틀랜드는 그 대신에 또다른 고졸 드래프티이자 스윙맨 슈터인 마텔 웹스터를 선택했다. 포틀랜드가 가장 높은 픽을 고졸 신인에게 쓰는 것은 이번으로 4년 연속이었다. 포틀랜드는 27번픽을 22번으로 지명된 재럿 잭과 바꿨다.


새로운 시대가 패배, 그것도 아주 많은 패배를 수반하게 될 것은 곧 분명해졌다. 백코트는 세바스쳔 텔페어, 재럿 잭, 새로 영입한 스티브 블레이크와 후안 딕슨 등 단신 가드들로 채워졌다. 이들 중 수비로 유명한 선수는 없었고, 신장이 6-4 이상인 선수도 없었다. 대리우스 마일스와 잭 랜돌프는 수비적 느슨함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 둘다 초기에 맥밀란 감독과 불화를 겪었다. 수비형 센터 조엘 프리즈빌라와 테오 래틀리프는 부상으로 각각 30경기씩 결장했다. 설상가상으로, 로테이션에서 확실한 득점원은 잭 랜돌프 뿐이었다. 포틀랜드는 득점도 못하고, 리바운드도 못하고, 수비도 못하고, 주 로테이션에 건강한 베테랑도 없고,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 시즌 성적은 21승 61패로 프랜차이즈 사상 2번째로 낮은 성적이었다. 유일한 장점은? 지난 시즌이 너무도 시시하고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팬들 중 최소 인원만이 이 코트 위에서의 참패를 지켜봤다는 것이다.


2006년 5월, GM 존 내쉬의 계약 만료가 다가왔고, 팀은 재계약을 거절했다. 내쉬는 라인업과 프런트의 군살을 잘라내고 팀에 철퇴를 내리는 자신의 임무를 해냈다. 그러나 그 임무는 내쉬를 인기없는 인물로 만들었다. 2005년 드래프트에서 포틀랜드가 지명할 수 있었던 3명의 PG 중 2명이 데뷔시즌 후에 이미 명예의 전당행이 미래에 유력해보인다는 사실은 내쉬의 퇴진을 확정지었다. 내쉬가 퇴진했을 때, 눈이라도 깜빡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쉬의 후임은 프런트에서 이미 또다른 주요 임원이었던 구단 사장 스티브 패터슨이었다. 패터슨이 아마도 내쉬를 잡지 않기로 한 결정에 관여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축복일수도 있고 저주일수도 있었다. 또한 패터슨은 지역 언론인들을 불쾌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고, 특히 팀에 대한 보도에서 당시 알짜배기를 차지하고 있던 오레고니언 측과 그러했다. 새로운 시작이든 아니든, 각본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2006-2007


Record : 32승 50패


감독 : 네이트 맥밀란


IN : 라마커스 알드리지, 댄 디카우, 스테판 그래험, 프레드 존스, 레이프 라프렌츠, 자말 맥글로어, 제레미 리차드슨, 서지오 로드리게즈, 브랜든 로이, Luke Schenscher, 이메 우도카


OUT : 스티브 블레이크, 빅토르 크리야파, 보션 레너드, 세르게이 모니아, 루벤 패터슨, 테오 래틀리프, 하승진, 브라이언 스키너, 찰스 스미스, 세바스쳔 텔페어


드래프트 : 타이러스 토마스(4번픽), 조엘 프리랜드(30번픽), 제임스 화이트(31번픽)


Leading Scorer : 잭 랜돌프(23.6 득점)


Leading Rebounder : 잭 랜돌프(10.1 리바운드)


Most Minutes : 잭 랜돌프(35.7 분)



이전 시즌의 성적표를 받아든 포틀랜드는 앞으로 전진하기 전에 중대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2006년 오프시즌에 가장 분명한 경향은 현 체제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프랜차이즈에서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윗싯 시대의 베테랑 루벤 패터슨과 내쉬 시대의 테오 래틀리프, 빅토르 크리야파, 세르게이 모니아, 하승진, 그리고 세바스쳔 텔페어마저 포함되었다. 과대 선전과 기존의 다큐멘터리에도 불구하고, 텔페어가 자신의 경기에 대한 재능은 있었으나 수비에는 전혀 열정이 없음이 곧 분명해졌다. 외곽슛이 전무하다는 것까지 더해져 텔페어는 네이트 맥밀란이 원하는 PG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2006년에 분명해진 두번째 주요 경향은 드래프트를 통한 리빌딩 시도였다. 포틀랜드는 드래프트 당일 6건의 트레이드를 했고, 위의 문단에서 언급된 많은 선수들과 드래프트 픽을 묶어서 목표로 정한 선수들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그 목표들은 다음과 같다.


- 라마커스 알드리지 : 전체 2번픽, 텍사스 대학 출신의 6-10 포워드로, 득점이 가능하고 신장과 더불어 민첩성을 지니고 있었다.

- 브랜든 로이 :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6-6의 SG로 드래프트에서 가장 즉시전력감으로 평가받았다.

- 서지오 로드리게즈 : 스페인 출신의 어린 PG로 서지오의 묘기는 새크라멘토 시절 제이윌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오프시즌에 로이와 알드리지의 능력을 직접 본 사람은 극소수였고, 만족스로운 스토리는 조엘 프리즈빌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2년전 모험적인 FA로 영입된 프리즈빌라는 자주 부상당한 테오 래틀리프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임무 이상의 것들을 해냈고, 팀에 부족한 리바운드와 수비를 주었다. 프리즈빌라는 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해졌고, 당시 우승권 스쿼드였던 샌안토니오와 디트로이트 같은 팀들로 부터 러브콜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황을 살핀 연후, 프리즈빌라는 포틀랜드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 전년도 오프시즌에 회생을 확신하는 감독을 데려온 것이 잔류를 가능하게 했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프리즈빌라의 잔류는 현시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포틀랜드를 선택한 선수가 하나 생긴 것이었다. 드래프트 당일의 움직임과 프리즈빌라의 잔류로, 팀을 둘러싼 분위기는 시즌 개막이 다가올수록 실제로 긍정적이었다. 최근 몇년간과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코트 위에서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1999년 이후 어떤 종류의 발전도 없었기 때문에 32승 시즌조차도 비교적 대단해보였다. 공격을 지휘할 노련한 PG의 부재로 인해 포틀랜드의 전략은 단순해졌다 : All Zach, All the time. 모든 하프코트 셋(그리고 포틀랜드는 많이 달리지 않았다)은 랜돌프로부터 시작했고, 대개 랜돌프로 끝났다. 부페에서 랜돌프는 배불리 먹었고, 그밖의 선수들은 나머지를 먹었다. 랜돌프는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화답했고, 포틀랜드의 공격은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다. 수비는 완전히 또다른 문제였다. 모든 득점을 해내는 그 선수가 수비에는 관심이 없었고, 완전한 무관심으로 계획된 모든 전략을 망쳐버렸다. 프리즈빌라는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포틀랜드 출신이자 의외의 베테랑 SF 이메 우도카도 그러했다. 외곽슛과 강력한 position defense는 우도카를 포틀랜드의 브루스 보웬으로 만들었다.


시즌이 진행될수록 루키 라마커스 알드리지가 뎁스 차트 위로 올라왔다. 알드리지가 득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분명해졌다. 이 부문에서 아직 랜돌프 수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자기 몫은 해낼 수 있었고 랜돌프보다 동료들을 편하게 만들었다. 또한 수비에서는 랜돌프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랜돌프의 움직임이 농구골대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알드리지가 더 많은 경기를 뛸수록 (공정하게 말하면, 이 시즌도 포틀랜드는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더 많은 respect와 출전시간을 얻었다.


하지만 시즌의 주인공은 단연 브랜든 로이였다. 로이가 공격수라는 것은 곧 분명해졌다. 로이는 아마도 3점라인을 제외하고는 코트 위의 어느 곳에서든 꾸준히 득점할 수 있었다. 로이는 어느 방향으로든 드리블이 가능했고, 이는 골대쪽으로 향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비록 로이가 라이더나 드렉슬러와는 다른 유형의 가드이며 훨씬 더 파워가 부족하고 불안정하긴 했지만, 아이재이아 라이더 시절 이후 이런 득점력을 가지고 돌파하는 가드는 포틀랜드에서 처음이었다. 로이는 또한 평균 4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공격의 귀재인 동시에 팀 플레이어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팀성적이 11승 향상된 것과 더불어 이는 로이가 신인상을 수상하기에 충분했고, 포틀랜드 팬들을 기뻐 날뛰게 하는 성과였다. 포틀랜드는 수년간 수상 경력이 없었다. 포틀랜드의 드래프트는 실망스러운 단계에서 나락까지 떨어졌었다. 이제 갑자기 포틀랜드는 잭팟을 터뜨렸다. 알드리지까지 고려하면 아마도 두배였다. 이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로이의 영광에 찬 행진이 계속될수록, 그 공의 상당부분은 2년전에 잠시 감독을 맡았던 바로 그 영리하고 젊은 간부 - 케빈 프리차드 - 에게 돌아갔다. 프리차드는 드래프트 당일 움직임의 전반에 걸쳐 관여했고, 구단주 폴 앨런은 관전하고 사장 겸 GM 패터슨은 뒤에서 조언하는 가운데 드래프트 당일에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한다. 또한 프리차드가 드래프트 전에 크리스 폴을 지지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프리차드는 물 위를 걷고, 맨손으로 토마토를 자르며, 돌진하는 코뿔소를 단번에 멈출 수 있었다. 2007년 봄, 언론에서는 스티브 패터슨과 폴 앨런 간의 수뇌부 회의를 보도했다. 회의의 결과, 패터슨은 연단으로 올라와 사임을 발표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까지 패터슨은 스스로를 기피인물로 만들었고, 밥 윗싯이 기고만장 할때조차 결코 얻지 못했던 수준의 경멸을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크게 기뻐했다. 신문에 웃는 얼굴과 하트 모양의 폰트가 허용되었다면, 패터슨의 퇴진 기사는 그렇게 인쇄되었을 것이다. 팬들 역시 패터슨의 퇴진을 반겼고, 성장의 시대가 도래한 이상 패터슨은 쓸모없고 환영받지 못한 붕괴의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었다.


패터슨의 후임은 당연하게도 케빈 프리차드였다. 프리차드는 팀을 부끄럼없이 응원하는 켐페인을 시작했고, 라디오, TV, 인쇄매체, 인터넷에서 신뢰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프리차드의 "just one of the guys"라는 태도와 "culture plus talent"라는 주문으로 프리차드는 포틀랜드 팬들에게 훨씬 더 사랑받았고, 프리차드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거의 모든 포틀랜드 팬들은 열화와 같이 자발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05-06에서 06-07시즌으로 넘어가는 모멘텀이 good이었다면, 06-07에서 07-08로 넘어가는 모멘텀은 excellent였다. 로켓은 연료가 채워져서 발사대에 놓였고, 지휘자는 조종 중에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로켓을 저너머 궤도 위에 올려놓을 스파크 뿐이었다.


그 스파크, 아니 화염방사기는 2007년 5월 22일 폭발했다. 그날 포틀랜드 팬들이 라이브로 수천명, 인터넷으로는 수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틀랜드는 1992년 파이널 진출 이후 최대 사건을 경험했다. 다음 10년간의 dominant center와 dominant scorer가 모두 나선 드래프트에서 포틀랜드는 1번픽에 당첨되었다.


체통은 잊어두자. 포틀랜드는 다시한번 정말 정말 정말 훌륭해지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pnics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0-05-17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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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10-05-15 01:13:04

근데 부상이;;;;;; 이놈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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