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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king Of An MVP' 챕터 5-'Foot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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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3:05:59

브라이언 윈드호스트와 테리 플루토가 쓴 브롱의 전기 'The Making Of An MVP' 번역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브롱이 농구 외에 학창 시절의 열정을 바친 또 하나의 운동, 풋볼에 대해 다룹니다. 브롱이 풋볼을 통해 어떻게 안정감을 얻었고, 육체적으로 뛰어난 농구선수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소개드린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챕터 1

챕터 2

챕터 3

챕터 4

챕터 6

챕터 8

챕터 12


"말씀드리죠. 르브론은 정말로 풋볼을 사랑합니다."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에서 르브론을 지도했던 제이 브로피의 말이다.
그건 사실이다. 르브론은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에서 풋볼을 했다. 단, 3년간. 그는 3학년때 All-State 리시버에 뽑힐 정도로 풋볼을 잘 했다.

"4학년때도 뛰었으면 오하이오 주 최우수 풋볼 선수에 뽑혔을 겁니다."

이 말은 마크 머피에게서 나온 말이다. NFL에서 12년간 뛰었던 머피는 나중에 아이리시에서 르브론의 풋볼 코치로 근무했었다.

르브론은 4년간 NFL 프로 선수였던 브로피가 1부 대학의 쿼터백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 자신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고등학교 내내 그 포지션에서는 한 번도 시합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르브론은 풋볼공을 최소한 60야드나 던질 수 있었습니다." 브로피의 말이다.

"저는 70야드를 던지는 것도 봤어요." 머피의 말이다. "훈련 시간에 우리는 가끔 르브론을 연습 상대 팀의 쿼터백으로 넣어서 수비팀을 훈련시키곤 했어요. 르브론은 민첩했고 정말 강한 어깨를 지니고 있었으며 라인맨 뒤편을 넘겨볼 정도로 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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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르브론이 빅 텐 컨퍼런스의 쿼터백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브로피와 머피가 생각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르브론의 머리입니다." 머피가 말했다. "한 번만 말하면 다 알아들어요. 공격 포메이션도 수비 포메이션도 모두 말이죠. 르브론 자신이 움직일 패턴도 알고, 다른 리시버들이 움직일 패턴도 압니다. 수비팀이 어떻게 대응할 지도 다 알아요."

기억하라. 이것은 NFL 디펜시브 백이었던 사람의 말이다. 자기 스타 선수에게 반한, 한 번도 그런 재능을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고등학교 코치의 말이 아닌 것이다. 르브론이 쿼터백으로 뛰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뛰어난 농구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다리가 긴 쿼터백은 리시버로 뛰는 것보다 사각지대에서 들어오는 태클을 당할 경우 부상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슈팅스타즈의 멤버였던 윌리 맥기가 좋은 쿼터백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르브론은 쿼터백을 볼 수 있었어요." 머피의 말이다.

브로피는 르브론의 2학년 중반 쯤에 '미국 내의 모든 명문 대학으로부터' 르브론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르브론을 리시버로 스카웃하기를 원했다. 브로피에 따르면 실제로 모든 톱 랭킹 상대팀들이 어떤 수비 뒤로도 뛰어오를 수 있고, 손에 닿는 건 손가락에 진공청소기라도 단 것처럼 어떤 패스든 잡아낼 수 있는 6피트 6인치의 와이드 리시버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팀들은 르브론에게 두세 명을 붙여봤지만, 르브론은 계속해서 엄청난 캐치를 해냈죠." 브로피의 말이다. "저는 르브론에게서 해럴드 카마이클이나 랜디 모스(두 명 모두 NFL 리시버)의 모습을 봤습니다. 저는 몇몇 사람들이 르브론이 좋은 타이트 엔드가 될 거라 말하는 것도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르브론이 리시버가 되길 바랐습니다. 엔드존으로 패스만 띄워주면 도대체 누가 그 아이를 막겠습니까?"

캐칭도 리바처럼 쉽고 빠르게~

르브론이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은 풋볼이었다. 프랭키 워커 씨가 사우스 사이드 레인저스의 4학년이었던 르브론을 처음 본 것은 풋볼 필드였다. 나중에 고등학교 친구가 됐고 애크런 대학의 스타가 된 로미오 트래비스를 처음 만난 것도 풋볼 필드였다.

"처음 붙어본 게 아마 8살 쯤이었을 거예요." 트래비스의 말이다, "르브론은 러닝백이었는데, 필드에서 가장 커다란 녀석이었죠. 볼만 받으면 매번 득점하는 것 같았어요. 진짜 황당했죠."

초등학교 저학년때 르브론은 농구보다 풋볼을 더 많이 했다. 학교에서는 플래그 풋볼(태클 대신 허리에 매단 깃발을 빼앗는 약식풋볼: 역자 주)을 했지만 대부분은 친구들과 동네 풋볼을 했다. 그는 TV로 풋볼 경기를 시청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것은 농구에는 항상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르브론은 플로리다 주립대와 댈러스 카우보이스 팬이 되어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팀들이 1990년대 중반에 전국 최강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많은 경기가 전국 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 사춘기때인 1996년에서 1999년까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운영되지 않았으므로, 르브론은 매주 전국 방송으로 풋볼을 시청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르브론이 고향팀인 브라운스가 아니라 카우보이스의 팬이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르브론은 카우보이스 경기를 보며 자라났다. 그리고 르브론이 어려서 대학 풋볼팀에서 뛰는 것을 꿈꿨을 때는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뛰기를 바랐다.

사실 르브론이 고등학교 신입생이 돼서 풋볼팀에서 뛸 때는 농구와 풋볼 중 어는 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농구부 감독인 키스 댐브럿은 농구가 르브론의 미래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댐브럿은 르브론이 풋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풋볼 첫 시즌에는 짐 메이어가 고학년부 코치였다. 르브론은 먼저 신입생 팀에 들어갔고, 곧이어 고학년 2군 팀으로 승격됐다. 시즌 마지막에 르브론은 고학년 1군 팀으로 올라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8개의 패스를 잡아냈다.

"르브론의 재능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죠." 메이어의 말이다. "저희 지도가 르브론이 그렇게 빨리 리시버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르브론은 저희가 지도할 수 없는 것도 해냈어요. 필드로 나가서, 어떻게든 근처로만 볼을 보내면 바로 잡아냈죠."

르브론은 2학년이 돼서도 풋볼 필드로 돌아와서 금방 고학년부 선발 와이드 리시버가 됐다. 그는 42번의 캐치에서 820야드를 전진했고 7개의 터치다운을 해냈다. 르브론이 풋볼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몇몇 스카우팅 북은 16세의 르브론을 오하이오 주 넘버원 와이드 리시버로 기록했다.

"전 르브론이 풋볼을 한것이 굉장히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르브론의 첫 두 시즌 동안 풋볼 감독이었던 메이어의 말이다. "고등학교 소년이 한 종목만 집중해서 하는 데는 큰 부담이 따릅니다. 고등학교 선수 100명 중 오직 한 명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장학금을 받거든요. 고등학교 생활에는 친구들과 다른 팀에서 뛰어보는 것도 마땅히 필요합니다. 그것도 르브론이 풋볼을 한 이유 중 하나였죠."

정말로 그랬다. 윌리 맥기와 시안 코튼도 풋볼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슈팅스타즈의 핵심 멤버 중 유일하게 풋볼을 하지 않은 멤버는 드루 조이스 3세였다. 이 포인트가드는 5피트 2인치와 100파운드에 불과했다. 풋볼은 그에게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로미오 트래비스가 2학년때 전학왔을 때는 르브론과 농구 코트에서만 함께 한 것이 아니라 풋볼도 같이 했다.

"키스 댐브럿은 아이들이 풋볼을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메이어의 말이다. 농구를 하기 위해서도 터프해야 하지만, 풋볼을 하는데 필요한 정신자세는 또 다르죠. 야외에서 뛰기 때문입니다. 더러워지고 추워지고 흠뻑 젖게 되죠. 코치는 호통을 쳐댑니다. 상대편은 몸을 부딪쳐오고요. 희생을 하면서 팀에 맞추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감독들에 따르면 르브론은 풋볼 일과를 좋아했다. 그들은 르브론이 '한 번도 늦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브로피는 르브론이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있는 토요일 아침 미사에 참석하러 왔던 것을 기억한다. 코치가 선수들에게 그저 부탁했을 뿐인데 르브론은 그대로 따랐다.

르브론은 2학년때 오하이오 주 미스터 바스켓볼에 선정됐고, 16살의 나이에 ABCD 캠프에서 전국 각지의 농구 캠프 출신 영재들을 누르고 MVP가 됐다. 그해 여름이 지난 후, 르브론 측은 4학년을 마친 후 대학에 가지 않고 NBA에 직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계획이었다. 농구선수로서 르브론의 앞날에는 수백만 달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르브론은 3학년 때 풋볼을 하지 않는 것을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브로피의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르브론이 다치기를 바라지 않았죠. 그건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르브론은 친구를 잃어야 했죠. 자기는 뛰지도 않을 거면서 풋볼 훈련하는 주위를 어슬렁거리곤 했습니다."

르브론은 아이리시가 가필드 고등학교에 승리를 거둔 시즌 첫 경기에서 풋볼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학교 마크가 붙은 재킷을 입고 아이리시 벤치 뒤의 펜스 너머에서 친구와 동료들을 응원했다. 맥기가 선발 쿼터백으로 좋은 경기를 펼쳤다. 시안 코튼은 공수 라인맨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트래비스는 디펜시브 엔드로 뛰었다. 브로피의 기억에 따르면, 시합이 끝나자 르브론이 펜스를 기어올라 필드로 나가서 선수들과 함께 환호했다고 한다.

같은 주말에 젊은 팝 가수 알리야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르브론은 알리야의 팬이었고, 그녀의 충격적인 사망소식은 르브론의 마음 속에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새겨넣었다(르브론은 지금도 자주 이 말을 인용한다). 가필드 전 승리와 가수의 갑작스런 죽음은 르브론이 인생에서 중요한 일 중 어떤 것도 빠지고 싶어하지 않게 했다. 풋볼도 포함해서.

"르브론이 시합을 뛰고 싶다고 했을 때 저희는 그 아이가 트레이닝 캠프를 빠졌음을 말해줬어요." 머피의 말이다. "저희는 이 사안을 졸업반 학생들에게 가져가서 르브론이 뛰어도 되는지 투표에 붙이겠다고 말해줬습니다."

졸업반 선배들은 모두 르브론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재능있는 선수와 좋은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르브론 복귀에 표를 던졌다.

"르브론 어머니는 풋볼을 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브로피의 말이다. "그녀는 제게 계속해서 부탁했어요. '우리 아들좀 잘 부탁해요!' 하고 말이죠. 저희는 르브론을 수비나 런 플레이, 중앙선을 넘어가는 패스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메이어, 브로피, 그리고 머피 모두 풋볼 필드가 르브론이 농구에서 느껴야 했던 압박감과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훈련하러 가기를 좋아했다. 그는 훈련 전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 바닥에서 낮잠을 자곤 했다.

"르브론은 지도하기 쉬웠어요. 코치를 존경하고 말을 잘 들었죠." 머피의 말이다. "그 아이는 그저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 시즌에 르브론은 3학년 13경기에서 61개의 패스를 잡아내며 1,245야드를 전진했고 16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다. 팀은 디비전 4 주 준결승까지 올랐다. 그는 언제나 상대의 사각을 찾아다녔지만 필드 한복판으로는 뛰어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아웃되는 볼을 잡으려 뛰어들었다. 그렇다. 그는 풋볼 선수였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경기했다. 훈련 시간에는 아무도 르브론에게 태클을 걸 수 없었다. 물론 모든 것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코치들은 러닝플레이를 하기 전에는 가끔 르브론을 경기장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상대편이 르브론의 무릎에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거친 태클을 걸까봐 조심하고 있었다. 그래도 르브론은 여전히 오하이오 주 풋볼 퍼스트 팀에 올랐다.

"(오하이오 주립대 풋볼 감독인)짐 트레셀이 저희 학교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르브론이 아니라 다른 몇몇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요." 브로피의 말이다. "르브론이 트레셀 감독이 와있다는 걸 듣더니 저를 찾아와서 트레셀 감독에게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는 만약 르브론이 대학교에 가서 풋볼을 했더라면 아마도 오하이오 주립대로 갔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트레셀이 스카웃한 것은 시안 코튼이었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벅아이즈에서 2년간 백업 라인맨으로 뛴 후 다른 학교로 전학갔다.
재미있는 것은 그 학교의 농구가 그리 흥미를 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르브론이 친구를 따라 (오하이오 주립대가 있는) 콜롬버스로 가려 했다는 것이다.

르브론은 풋볼을 하다 새끼손가락이 부러졌지만 그것이 졸업반 때 풋볼을 그만둔 이유는 아니었다. 디신 그 결정은 그가 시카고에서 열린 AAU 농구캠프에서 손목이 부러졌을 때 내려졌다. 덩크 콘테스트에 나갔다가 넘어지면서 오른쪽 손을 잘못 짚어서 일어난 부상이었다. 그 부상은 르브론이 모든 여름 농구 캠프를 뛰지 못하게 했다. 심각한 부상을 겪은 후 4학년때는 풋볼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확실히 내려졌다.

"르브론은 만약 손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풋볼을 했을 거라 말했어요." 브로피의 말이다. "저는 그 아이의 말을 믿습니다. 저희 팀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건 르브론에게 큰 의미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르브론이 풋볼을 하는 걸 그렇게 걱정했는데 고등학교에서 르브론이 겪은 유일하게 심각한 부상은 농구에서 당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르브론이 4학년때 마음을 바꿀 경우에 대비해서 브로피는 그의 보호구와 유니폼, 심지어 사물함까지 준비해놓았다. 르브론은 방과 후에 계속해서 풋볼부에 왔다. 웨이트 트레이닝 장비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직도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풋볼 필드는 또한 그가 모든 에이전트와 농구화 회사가 쏟아내는 스카우트 경쟁과 수백만 달러 계약 얘기가 주는 부담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르브론이 NBA에서도 자신을 풋볼 선수로 부를 때면 기분이 좋습니다." 브로피의 말이다. "전 풋볼을 한 것이 르브론이 더 좋은 농구선수가 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르브론은 코트 위에서 육체적으로 압도하고, 끊임없이 일어나서 더 열심히 뛰고 있으니까요. 그 아이는 리그의 다른 여러 선수보다도 충돌과 통증을 잘 다룹니다. 단지 크기만 할 뿐아니라 터프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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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0-03-05 20:10:59

잘 봤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2010-03-05 21:31:21

러닝백? 쿼터백? 리시버? 라인맨?

얘는 풋볼도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네

2010-03-07 10:53:20
정말 대학때까지 풋볼을 했더라도 결국은 제2의 찰리 워드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텍사스 A&M 농구부시절 마텔러스 베넷에 대해 알고 계시는분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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