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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king Of An MVP' 챕터 4-'St.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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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3 13:38:00

브라이언 윈드호스트와 테리 플루토가 쓴 브롱의 전기 'The Making Of An MVP' 번역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브롱이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에 친구들과 함께 전학해서 4년간 어떻게 드래프트 1픽감으로 성장했는지를 다룹니다.

먼저 소개드린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챕터 1

챕터 2

챕터 3

챕터 6

챕터 8

챕터 12


1999년 12월 3일 르브론 제임스의 첫번째 고등학교 경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 키스 댐브럿 감독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은 타들어갔고 목은 말라붙었다. 그의 애크런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SVSM) 팀은 관중이 반쯤 들어찬 쿠야호가 폴즈의 한 경기장에서 시합을 할 예정이었다. 관중석에는 특별히 한 명의 대학 감독이 앉아있었다. 신시내티 대학의 밥 허긴스 감독이었다. 허신스는 예전에 애크런 대학을 지도한 일이 있었고 이미 르브론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스카웃에 뛰어들었다. 댐브럿이 처음 봤을 때 6피트 1인치의 7학년 소년이었던 르브론은 이제 6피트 4인치에 170파운드로 자라있었다. 1부 리그 대학 선수의 몸을 14세에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 평생 르브론을 지도할 때보다 더 많은 부담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댐브럿의 말이다. "르브론이 아직 1학년에 불과했음에도, 그 아이가 더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날이 곧 오리란 걸 알 수 있었어요. 분명 프로로 갈테고 많은 돈을 벌테니 말입니다. 단지 대학을 먼저 갈 것인지만이 문제였죠. 전 르브론이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올바른 일을 하게 해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가 금방 성취해낼 수준으로 올라서도록 몰아붙이기도 했죠."

댐브럿은 SVSM에서의 첫 시즌에 16승 9패를 기록했다. 댐브럿에 따르면 그의 접근방식은 "아이들을 대학 농구식으로 조련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긴장과 규율속에 진행됐다. SVSM은 학생 정신을 중시하는 학교였고, 댐브럿은 이를 체육관과 라커룸에서도 적용하기로 했다. 농구부원들은 경기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경기를 생각해야 했다. 그들은 수학 장학생이 몇몇 대학 과정을 미리 수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수들은 대학 농구부의 생활을 미리 체험함으로써 대학 농구선수의 길을 준비하곤 했다.

르브론은 신입생 시절 그와 그의 슈팅스타즈 친구들을 다루던 댐브럿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알고 있던 유대 커뮤니티 센터의 마음 좋은 선생님은 이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아이들이 실수할 때마다 혼을 내고 있었다. 댐브럿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지도한 적이 없었다.

댐브럿도 인정했다. "아마 농구부의 다른 누구보다도 르브론에게 엄하게 대했을 겁니다. 그 아이가 우리 팀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제대로 지도하지 못했을 때 잃을 게 가장 많은 아이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찌감치 원칙을 세웠습니다."

댐브럿은 첫 시즌 초반 르브론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르브론,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댐브럿이 말했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해줄까, 아니면 진실을 말해줄까?"

르브론이 대답했다. "진실을 말씀해주세요."

이제 '진실'을 감당해야 하는 건 르브론이 됐다.

"르브론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할 때마다 말해줬습니다. '네가 진실을 말해달라고 했잖아.'"

팀에는 네 명의 신입생이 있었다. 드루 조이스 3세, 시안 코튼, 윌리 맥기, 그리고 르브론 모두 지역 유소년리그뿐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열린 여름 AAU 토너먼트에서도 최강자였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특히 중학교 꼬마들에겐 드루 조이스 2세와 리 코튼이라는 좋은 코치가 있었고, 그들은 농구를 알았고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의 교훈을 주고 있었다. 르브론의 경우에는 상대하는 거의 모든 선수들보다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댐브럿은 또한 매버릭 카터(훗날 르브론의 마케팅 회사인 LRMR의 대표)나 존 테일러같은 졸업반 선수들도 신경써야 했다. 그들은 마지막 해에 조명을 받아 마땅한 좋은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네 명의 신입생, 특히 르브론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었다. 댐브럿은 신입생들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너희들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선수가 아냐... 너희들은 아직 이룬 게 하나도 없어... 배울 게 많단 말이다."

그런 말이 매일매일 이어졌다.

이걸... 이렇게... 저렇게... 하란 말이다.
너희가 뭐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1학년 주제에!!!(르브론의 회상 중에서)

댐브럿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이들을 낙담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농구에 대해 큰 꿈을 가지고 있는 소년들에게는 아주 작은 것이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댐브럿은 르브론만을 장래 프로 선수로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것은 아니었다. 드루 조이스 3세 역시 1부 대학의 포인트가드가 되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무렵 조이스 3세는 키가 5피트 2인치에 불과했고 절대 5피트 6인치 이상 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명문 대학의 선수가 된다면 '진짜' 선수들에게 타월이나 날라다주고 시합 후 유니폼이나 빨아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들 네 명의 신입생이 댐브럿이 감독인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부 대학에 있었던 감독에게 지도를 받아볼 수 있는 고등학생이 얼마나 되겠나? 그것은 부틀뿐아니라 르브론이 진학할 수 있었던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1부 대학의 훈련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감독에게 매일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고등학교 감독들은 그들의 경력 내내 고등학교에 머물거나, 어쩌면 군소 대학의 코치 경험을 조금 쌓을 수도 있다. 매우, 매우 드문 감독만이 1부 대학 수준 경험이 있다.

게다가, 르브론은 그의 재능에 주눅들지 않는 코치, 르브론이 훈련때 화를 내고 전학가버리는 것을 겁내지 않는 코치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 코튼과 드루 조이스 2세가 모든 훈련에 붙어있었다. 그 둘은 르브론과 잘 알고 그를 보살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댐브럿의 지시에 찬성하면 르브론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든 대학이든 모든 코치는 스타 선수를 혼내는 것을 겁낸다. 그들은 선수가 뛰쳐나가서 땍땍대지 않는 새 코치를 찾을 것을 겁내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팀의 팬들이 스타 선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며 화를 낼 수도 있다. 스타 선수가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 학교는 전처럼 많이 이기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코치는 직장을 잃고, 인생은 훨씬 고달파지는 것이다.

하지만 댐브럿은 그런 식으로 선수를 겁내지 않을 수 있었다. 댐브럿의 권위에 코치나 때로는 아버지의 감정을 더해줄 필요가 있을 때 리 코튼과 드루 조이스 2세가 그의 옆에서 굳건한 지원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게 열쇠였습니다." 댐브럿의 말이다. "그들은 제게 엄청난 도움을 줬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르브론이 어린 시절을 조이스 가족과 보냈다는 겁니다. 그들이 르브론에게 가르쳐준 것은 굉장히 중요했어요."

댐브럿이 훈련때 질러대는 호통과 경기 작전시간에 늘어놓는 장광설에만 신경쓴다면 큰 그림을 놓치는 일이다. 댐브럿은 종종 천사와 악마를 오갈 때가 있는데, 가끔은 15분 동안에도 오락가락한다. 훈련 시작할 때 한 선수에게 고함을 쳐놓고는 곧 똑같은 선수를 끌어안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훈련 끝을 알리곤 한다. 드루 조이스 3세는 댐브럿의 행동이 지닌 뜻을 완벽히 이해했다. 이 작은 포인트가드는 그의 감독이 큰 목표를 달성하고 모든 선수를 향상시키려는 정열에 불타는 심장을 지녔음을 알았다. 몇몇 선수들은 댐브럿이 조이스 3세에게는 그리 많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는 것을 분해했지만, 르브론이 알아차렸다시피, 그것은 드루가 지시받은 일을 한 번만에 해냈기 때문이었다. 드루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상대를 신체조건으로 이기려 애쓰지는 않았다. 드루가 르브론의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행을 이끌었듯이, 그는 모든 선수들의 플레이에 신경쓰며 코트 위에서 진정한 포인트가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르브론이 저를 더 좋은 선수로 만들어줬지만, 저 역시 르브론을 더 좋은 선수로 만들어줬죠." 드루의 말이다.

댐브럿도 동의하며 덧붙였다. "꼬마 드루는 그 나름대로 자신이 르브론만큼 뛰어난 선수라 생각했어요. 르브론에게 한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죠."

르브론과 함께 1999-2000시즌을 시작한 동료들이 댐브럿의 지도를 힘들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7승 무패와 주 챔피언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들은 상대보다 신체적으로만 뛰어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터프했다. 그들은 공수 모두 빨리 적응했다. 압박감에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온전한 팀으로 뛰고 있었다.

"르브론이 1학년때는 서전트 점프가 겨우 24인치에 불과했습니다." 댐브럿의 말이다. "오늘날 그 아이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죠. 나중엔 점프력이 점점 높아졌고, 기술 수준은 이미 대단했습니다. 정신 자세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전 르브론이 6피트 4인치에서 그만 크게 된다면 프로 선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압도적인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프로 선수 말이죠."

2학년을 맞기 전이었던 르브론은 하워드 가펑클이 열고 고등학교 선수들이 스카웃되는 전설적인 유망주 쇼케이스인 파이브 스타 캠프에 참가했다. 2000년에 가펑클은 지난 수년간 그의 캠프를 거쳐간 여러 뛰어난 선수에 대해 언급했다. 스테판 마버리, 그랜트 힐, 라쉬드 월러스, 엘튼 브랜드 등이었다.

"르브론은 제 캠프에 왔던 그 어떤 2학년생보다도 잘 뛰었습니다." 가펑클은 말했다. "진짜 황당했어요.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죠. 그런 광경은 처음 봤습니다. 르브론은 슛도 할 수 있고 패스도 할 줄 알아요. 농구를 알고 있더군요."

르브론은 여름 올스타 대회에 참가해 유타, 라스베거스, 멤피스, 올랜도와 피츠버그의 파이브 스타 캠프에서 토너먼트를 치렀다. 모두 15살에 이뤄진 일이었다.

드루 조이스 2세는 르브론이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얼마나 울어댔는지 기억하고 있다. 르브론이 11살때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열린 AAU 토너먼트에 슈팅스타즈가 참가했을 때였다. 클리블랜드에서 휴스턴으로 향하는 첫 비행에서 르브론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쏟았다. 눈물이 그친 것은 휴스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나서였다. 시간이 흘러 16살이 됐을 때, 르브론은 이미 항공사 골드 카드 회원권을 지닌 몇몇 세일즈맨보다 더 많은 거리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100개 이상의 대학이 르브론에게 입학 원서를 보내왔다. 미국 내 농구 명문 대학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마 드루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르브론은 신동이었죠. 다른 아이들보다 언제나 크고 우수했어요. 어떤 무대에서든 어설픈 모습을 보이지 않았죠."

"2학년이 되자 르브론은 6피트 6과 1/2인치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마이클 조던과 같은 신체조건이다. 어쩌먼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팔은 구름에 닿을 만큼 길었고 손은 크면서도 민첩해 패스를 쉽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손이 작으면 큰 공을 다뤄야 하는 운동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2학년이 될 때 르브론의 학업 평점은 2.8점이었고 어떤 과목에도 성적 문제가 없었다. 르브론의 성적은 슈팅스타즈 네 명 중 가장 좋았다. 그해 2학년 시즌에 아이리시는 27승 1패의 성적으로 또다시 주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스티브 컬프가 코칭스태프에 합류하면서 또다른 대학 코치 경험을 더했다. 그는 클리블랜드 주립대와 애크런 대학에서 4년간 코치 생활을 했다. 댐브럿과 함께 하기 전에는 애크런 파이어스톤 고등학교 감독이었다. 르브론과 동료들에겐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대학 농구를 모두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르브론이 1학년 초였을 때 전 르브론이 명문 대학을 거쳐 NBA로 갈 줄 알았습니다." 댐브럿의 말이다. "2학년이 돼서 3경기쯤 치른 후에 전 르브론이 아예 대학행을 생각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죠. NBA 직행을 노리고 있었어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전 단장인 짐 팩슨은 르브론을 2학년때 처음 보았고, 나중에 댐브럿의 증언에 동의했다. "저를 처음으로 빠져들게 만든 건 패스 능력이었습니다. 대단히 뛰어난 코트비전을 갖고 있었어요. 파울라인에서 파울라인까지(약 70피트) 코트를 가로질러 바운드패스를 던져 앞에서 달리는 선수의 스텝에 맞춰주더군요. 꽤 뛰어난 NBA 선수도 그런 패스는 못하는데, 르브론은 그걸 고등학교 2학년때 하고 있었어요. 매일밤 르브론이 승리를 위해 뭘 할지 궁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득점이든 패스든 리바운드든지요."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는 르브론이 기량을 꽃피우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훌륭한 코치와 친근한 아버지 역할, 아버지가 없이 오랫동안 안정과 가족을 바래왔던 소년에게 올바른 행동과 학업능력까지 기대하는 엄격한 스승을 가진 곳은 없었다. 르브론은 규율 잡힌 생활을 바래왔고, 그런 생활의 많은 부분이 고등학교에 있었다.

"르브론의 성공에 고등학교 생활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댐브럿의 말이다. "르브론은 언제나 좋은 팀메이트였어요.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렇게 행세한 적은 없죠. 항상 동료들과 함께 하려 했고 큰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누가 득점하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전 캐벌리어스 선수인) 다후안 와그너가 (뉴저지의 케이든 고등학교에 대승을 거둘 때)100점을 올렸는데 르브론은 크레스트뷰 고등학교 상대로 50점은 올릴 수 있었는데도 12점만 넣었죠. 그때는 마치 매직 존슨 같았습니다. 인격의 성숙함이 믿을 수 없었어요. 그 경기는 르브론이 동료들을 진정으로 배려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르브론 스스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런 행동은 르브론의 절박한 소속욕구로 인한 것이었다. 워커 가족에 들어가고, 조이스나 코튼 가족과 함께 하거나 슈팅스타즈와 함께 하기 위한 것 말이다. 좋은 친구가 되고 어른들에게 존중받는 것이 자연스레 르브론의 인격이 됐다. 르브론의 농구에 대한 비이기적인 접근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르브론이 11살때는 슈을 던지는 걸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굉장히요." 드루 조이스 2세가 르브론의 드리블 기술이 엉성했음을 덧붙이며 말했다. 르브론은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컸지만, 상대를 등지고 힘으로 밀고 들어가야지만 득점을 할 수 있었다. 르브론은 동료들에게 패스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저 선 채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건 제가 가르친 방식이 아니었어요." 조이스의 말이다. "어느날 (애크런의)동쪽 거리를 지나가다가 전 르브론에게 패스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선수들이 그들의 동료를 얼마나 향상시키는지도요. 슛은 볼 흐름 속에서 기회가 왔을 때만 던지라고 했습니다."

조이스는 11살의 르브론이 알아들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수없이 말해야 할 주의 중 첫 번째를 한 줄로만 알았다.

"제가 르브론에게 슛을 너무 많이 던진다고 말한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르브론은 바로 알아들었어요. 패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리 코튼도 그때를 기억하며 덧붙였다. "르브론은 그를 도울 핵심 선수들이 필요하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어요.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없다는 걸 강조했죠. 외곽슛을 넣기 위해 꼬마 드루를 필요로 했고, 드라이빙 레인을 확보하고 리바운드르 잡아내기 위해 시안을 필요로 했어요. 르브론은 이 아이디어를 좋아했습니다. 팀의 일원이 되는 걸 좋아했죠."

전 아이리시 코치인 스티브 컬프가 말했다. "르브론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어떤 경기에서는 르브론이 슛을 더 많이 던져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저 패스를 해서 다른 친구들을 득점시키는 것만 좋아했어요. 몇몇 사람들이 르브론보고 더 많은 득점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무시할 정도로 자기 게임에 자신감이 있었던 거죠."

조이스 2세도 거들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르브론엑 좀더 슛을 던지라고 말해야 했어요. 르브론은 정말 헌신적으로 팀 플레이를 했습니다."

르브론은 1학년때 평균 18득점을 올렸고, 2학년때는 25점, 3학년대는 29점, 졸업반에는 31점을 올렸다.

"NBA 루키 시즌에 20점씩 올린 아이입니다." 컬프가 말했다. "그건 원하기만 하면 고등학교에서 50점씩 올릴 수도 있었단 뜻이죠."

조이스 2세가 설명했다. "르브론의 신입생 시절 제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키스 댐브럿이 감독이었던 것은 중요했습니다. 대학 감독 경험이 있었고 르브론이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서도록 도와줬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간 훈련마다, 시합마다, 하프타임과 경기전 연설 때마다, 훈련 계획을 짤 때마다 댐브럿 옆에 있으면서 대학 감독 출신에게 배울 수 있었던 조이스 2세도 마찬가지였다. 조이스 2세는 그 전에도 감독이 되기 위해 코치 교실에 참가하곤 했는데, 이제는 매일매일 배우면서 감독이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리시는 미국 내 엘리트 고등부 팀 중 하나가 됐다. 아디다스로부터 용품 공급 계약도 얻어냈다. 아디다스는 유니폼, 트레이닝복, 가방, 훈련복 등을 공급받았다. 수천 달러 어치를 공짜로 받은 것이다. 글로리아 제임스도 아디다스 신발과 트레이닝 복을 자주 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대학 코치였기 때문에 계약을 따냈다고 하더군요." 댐브럿의 말이다. "제가 센트럴 미시건 대학에 있을 때는 용품 계약을 따내려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디다스가 계약을 해줬다.

"이유는 하나, 르브론 때문이죠." 댐브럿이 말했다.

르브론이 15살때 농구화 회사들은 이미 조던의 뒤를 이을 선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르브론과 함께 뛰고 싶을 뿐아니라 농구 용품을 얻고 싶은 지역 운동선수들에게도 멋진 기회였다. 2000년 당시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는 애크런에서 유일하게 용품 공급을 받는 학교였다. 미국 전역의 최고 팀들과 시합을 할 수 있는 전국단위 스케줄을 완비한 유일한 학교이기도 했다. 댐브럿이 믿기에 르브론이 함께 하는 아이리시는 애크런에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팀이었다.

르브론이 2학년 시즌을 마치자 댐브럿이 애크런 대학의 코치로 임명됐다. 드루 조이스 2세가 감독직을 이어받았고 리 코튼과 스티브 컬프가 코치로 남았다. 르브론을 포함한 몇몇 선수들이 댐브럿의 이탈에 혼란스러워했지만, 르브론이 성공한 이유 중 상당 부분은 남아있었다. 엄격한 훈련 태도는 뿌리내려 있었고, 주위의 기대도 높았다. 이제 조이스 2세는 고등학교 농구부 감독이 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어떤 코치도 지난 2년간 르브론에게 쏟아진 집중 조명의 거품을 걷어내고 옳은 지시를 내리기는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르브론의 3학년 경기모습

르브론이 3학년때 아이리시는 주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예상 외의 패배를 겪었다. 다음 시즌, 아이리시는 르브론 재학 4년간 3번째의 주 챔피언십을 찾아왔을 뿐아니라 USA 투데이 선정 전미 고요 랭킹 1위에도 올랐다. 그들은 전국 TV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르브론은 3학년 시즌 중반에 NBA 로터리 지명권 대상자로 예상됐고, 2003년 드래프트에선 상위 5위 안에 지명될 걸로도 지목됐다. 그리고 졸업반 시즌을 시작할 즈음에는 2003년 NBA 드래프트 1순위 지명자로 예상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미 수없이 보도된 논란거리가 있었다. 하나는 글로리아 제임스가 대출을 받아 아들에게 허머 H2 SUV를 사준 것이었다. 아직 서민 임대 주택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대출은 르브론의 장래 수입을 담보로 빌린 것이었다(어떤 자동차 딜러도 신문 스포츠란만 보면 르브론이 6개월 내에 백만장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르브론은 스포츠 용품점에서 벽에 걸 사진에 사인을 해준 보답으로 농구 저지 두 개를 받았다는 이유로 두 경기 출장정지를 받았다. 르브론은 학교가 르브론이 커다란 흥행거리란 것을 아는 프로모터들에게 초대받아 여러 토너먼트에 참가하면서 수천 달러를 받는 등 그의 명성을 이용해 돈을 벌려 한다는 비난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3학년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지 표지모델로 나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잡지는 르브론을 '선택받은 자'라 부르며, 르브론이 조던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르브론은 처음에는 어른에게나 아이들에게나 그들이 내민 잡지 표지에 기쁜 마음으로 사인을 해주곤 했다. 그러다 자신이 사인한 표지가 이베이에서 수백 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걸 발견했고, 그 후로는 아이들에게만 사인을 해줬다.

오늘날의 'Chosen One'을 만들어낸 SI 표지

이제 그 모든 일들을 되돌아보면 그 일화들은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다. 특히 여린 스타 운동선수들이 벌이는 수많은 범죄 및 개인사에 비하면 말이다. 그들 대부분은 르브론이 그랬던 것처럼 10대에 전국 방송에 의해 철저히 파헤쳐지지는 않는다.

"특별한 재능을 가졌었지만 그걸 쓰레기통에 쳐넣은 모든 친구들을 생각해보세요." 댐브럿의 말이다. "좋은 길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꺾으면, 그냥 끝나는 겁니다. 저는 (센트럴 미시건 대학에서)실수를 저질렀고 그건 제게 큰 대가를 치르게 했죠. 르브론에게 여자, 약물, 그리고 열심히 운동하는 것에 대해 계속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전 르브론이 옳은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드루 조이스 2세, 리 코튼, 스티브 컬프도 마찬가지였다. 코칭스태프는 그들이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선수를 맡았음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르브론이 자신의 재능을 엉뚱한 데 쓰지 않았음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컬프, 그리고 특히 코튼은 르브론의 성공에 있어 한 번도 찬사를 받은 적이 없다. 코튼은 언제나 헌신적으로 감독을 보좌했다. 조이스 2세든 댐브럿이든 말이다. 그는 경기장으로 향하는 차를 운전하기도 했고 유니폼도 세탁했다. 댐브럿이 말처럼. "리는 우리가 필요한 때는 언제든 준비돼있었습니다. 좋은 사람이죠." 컬프는 4년간의 1부 대학 코치 경험을 살려 매경기 활력소가 돼줬다.

"항상 르브론뿐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는지 자문했습니다." 조이스 2세의 말이다. "승리하는 데는 엄청난 압박이 있었어요. 우리가 이기면 그건 르브론과 아이들 덕분이고, 지면 키스가 더이상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란 거죠. 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조이스 2세가 '르브론의 코치'라는 멍에를 이겨냈다는 것이다. 그는 르브론과 함께 주 우승을 차지했고, 2009년에도 아이리시에 또다른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르브론은 자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줬어요." 댐브럿의 말이다. "제가 르브론은 없지만 그럭저럭 좋은 팀에 있었다면 전 아마도 아직 세인트 V. 감독에 머물러 있거나 어딘가의 코치로 가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1부 대학의 감독이 됐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요."

댐브럿은 2001년 애크런 대학 코치로 임명됐고, 2004년 감독으로 승진했다. 그는 드루 조이스 3세에게 농구장학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1부 대학 감독이었고, 이 포인트가드는 가방 담당을 맡았을 뿐아니라 나중에 학교 통산 어시스트 기록을 갈아치웠다.

"꼬마 드루가 부틀에 입학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친구들이 따랐다고 생각해보세요." 댐브럿의 말이다. "르브론은 그래도 NBA에 갔을 겁니다. 하지만 부틀은 지역 리그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세인트 V.처럼 전국 단위 스케줄을 뛰지는 못했을 거예요. 르브론과 친구들은 강력한 경쟁을 해볼 수 없었겠죠. 그 전국 단위 경쟁이 진정한 르브론 제임스를 만들어냈습니다."

댐브럿의 요점은 Most Valuable Player는 진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리틀 드루가 세인트 V.로 가는 바람에 드루 아버지도 그 학교를 지도할 수 있었죠." 댐브럿의 말이다.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제가 르브론을 지도하면서 많은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애크런 대학이 저에게 대학 팀을 지도할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했죠. 르브론 덕분에 용품 계약을 얻고 모든 학생들이 르브론처럼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제가 코치로 뽑힌 겁니다. 그래서 전 꼬마 드루를 데려올 수 있었고, 꼬마 드루는 뛰어난 대학 선수가 될 수 있었죠. NBA 수준에서조차,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감독)마이크 브라운은 르브론을 지도한 덕분에 (2009년)올해의 감독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르브론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향상시켜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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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10-03-04 13:20:18

정말 잘보고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2010-03-04 13:40:07

mvp는 주위사람을 향상시킨다 라는 말이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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