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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Making of an MVP-Welcome to the N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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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13:50:42

브라이언 윈드호스트와 테리 플루토가 공동집필한 The Making of an MVP 세 번째 순서입니다. 오늘은 브롱이 2003 드래프트 1픽으로 고향팀 클블에 입단해서 폴 사일러스 감독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어떻게 팀에 받아들여졌는지 소개합니다.

평어체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래의 MVP는 숙제를 했다.

그리고 브롱에게 있어서는, 숙제란 학창 시절에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 그 사실을 바로 알아냈죠." 브롱의 첫 NBA 코치였던 폴 사일러스의 말이다.
"르브론은 제가 NBA 선수로 뛰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우승을 맛봤고 좋은 리바운더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 녀석은 심지어 제 경기 모습을 비디오로 봤다고까지 말했죠."

(폴 사일러스는 NBA에서 16년간 뛰며 통산 1만득점-1만리바운드를 돌파한 터프한 빅맨이었습니다. 74년과 76년 우승팀 보스턴에서는 주전 빅맨으로, 그리고 79년 우승팀 시애틀에서는 핵심 벤치요원으로 활약했고 올스타에도 두 번 뽑혔죠. 역대 최고 수준의 터프함을 바탕으로 골밑 몸싸움과 스크린, 상대 빅맨 기죽이기 등을 하던 블루 칼라 워커의 견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80년대의 벅 윌리암스나 찰스 오클리 등은 사일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브롱과 사일러스는 2003년 6월에 처음 만났다. 사일러스는 23년 전인 1980년부터 선수로 뛰지 않았는데, 18살밖에 되지 않은 브롱은 자신을 NBA로 이끌어줄 새 감독을 제대로 연구하고 있었다.

"전 매우 놀랐습니다." 사일러스의 말이다. "그 나이에 NBA로 오는 대부분의 꼬맹이들은 리그 역사에 대해선 제대로 몰라요. 신경조차 쓰지 않죠. 그런 아이들은 농구는 마이클 조던으로부터 시작된 줄 압니다. 하지만 르브론은 오스카 로버트슨, 윌트 체임벌린, 닥터 제이와 모든 위대한 선수들에 대해서 줄줄 꿰고 있었어요."

브롱은 위대한 선수들뿐아니라 준수한 활약을 펼쳤던 많은 선수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커리어 평균 9.9득점 9,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3개의 챔피언 팀에서 뛰었고 2번 올스타에 뽑힌 사일러스같은 선수들 말이다.

대학농구 디비전 I 감독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브롱에게 많은 도움을 준 고등학교 코치 키스 댐브럿처럼, 사일러스는 브롱에게 프로 무대를 가르치기 위해 짐 팩슨 단장과 고든 군드 구단주가 뽑은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클블 입장에서는, 2002-2003 시즌에 거둔 17승 65패라는 최악의 성적 덕분에 똑같이 17승을 거둔 덴버와 함께 2003 드래프트 로터리에서 브롱을 얻을 최고 확률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4보다 낮은 확률이었지만, 어쨌든 로터리 추첨에서 1픽 공은 클블 쪽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클블은 당연히 브롱을 뽑았다.

하지만 클블은 동시에 브롱이 리그 최악의 팀으로 오도록 해버렸다. 브롱은 지난 5년간 감독을 4번이나 갈아치운 팀으로 입단해야 했다. 그 4년동안 클블은 단 한 번도 위닝 시즌이나 플옵 진출을 경험해보지 못한 팀이었다. 재능있는 선수가 없어 허덕이는 팀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이기적인 선수들로 인해, 2002-2003년에는 패배의 한계를 시험해보려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클블은 1픽을 얻어 최고 유망주였던 브롱이나 멜로를 뽑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브롱의 루키 시즌을 다른 위대한 선수들의 그것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브롱이 처음 NBA 선수가 됐을 때 리그에 즉각적인 임팩트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직, 버드 조던과 비교됐다. 1979년 입단한 매직과 버드, 그리고 1984년에 입단한 조던은 현대 농구의 신성 삼위일체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브롱 사이에는 환경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버드는 1979년 세드릭 맥스웰, 데이브 코웬스, 네이트 아치볼트, 피트 마라비치, M.L. 카, 릭 로비와 제럴드 핸더슨이 있던 보스턴에 합류했다. 아치볼트와 코웬스, 마라비치는 커리어가 거의 끝나가는 노장이었지만 나중에 명전에 올랐다. 맥스웰은 올스타급 선수였고 카, 로비, 핸더슨은 모두 좋은 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버드의 루키 시즌을 61승 21패로 마친 후 컨퍼런스 파이널에 올랐다.

매직은 전 시즌 47승 35패를 거뒀던 레이커스에 입단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픽을 얻었던 이유는 클블이 트레이드로 1픽을 팔아줬기 때문이다;;;). 매직의 팀메이트는 미래의 명전 입성 보장 선수였던 카림 압둘 자바를 비롯해 짐 쵼스, 자말 윌크스, 놈 닉슨, 스펜서 헤이우드, 마이클 쿠퍼 등이었다. 스타로 가득 찬 이 라인업은 바로 그 해 우승을 차지했다.

조던의 루키 시절 상황은 브롱과 가장 흡사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불스조차도 27승은 올리던 팀이었다. 그리고 감독은 노련한 케빈 로거리였다. 불스는 시원찮은 팀이었지만 그래도 2003년 클블보다 10승은 더 거둔 팀이었다.

브롱의 팀메이트 중에서 한 번이라도 올스타에 뽑혀본 선수는 Z맨 뿐이었다. 그를 제외한 선수들은 모두 함량 미달이거나 아슬아슬하게 리그 최저 수준에 걸친 선수들이었다. 전 시즌을 '가계약' 코치인 키스 스마트 밑에서 마친 뒤에는 베테랑의 리더십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규율도 전혀 잡혀있지 않았다.

브롱이 클리블랜드의 밤을 마치 라스베거스처럼 불야성으로 만들며 1픽으로 입성해 미래를 약속하는 와중에도, 많은 NBA 인사들에게 클블은 악마의 섬과도 같은 존재였다. 클블에서 뛰려 하는 선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기존 선수들 중 계속 머무르려 하는 선수는 더 찾아보기 힘들었다(이런 마당에서 끝까지 팀을 지킨 Z맨이니 사랑받을 수밖에 없죠). 팩슨은 수많은 수준급 선수들을 프랜차이즈에 대한 불만 때문에 팔아치워야 했던 것을 떠올리며 진절머리를 냈지만, 꿈을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선 바닥을 쳐야 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브롱을 확보하며 먹혀들었다.

하지만 미래야 어쨌든 드래프트 당시 브롱은 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팀 문화 속에서 패배의식에 가득 차 농구를 하던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1년 전 클블은 미디어 가이드 표지로 대리어스 마일스와 리키 데이비스(두둥~)를 내세웠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있는 프리시즌 미디어 데이날, 마일스는 '늦잠 잤어'라는 한 마디로 오후(오전 아님)에 있을 기자회견에 불참해버렸다. 그 무렵 데이비스는 '아이오와 어딘가에' 있다고 연락이 온 후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트레이닝 캠프가 시작되는데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쓰레기들을 데리고 어떻게 17승이나 거뒀는지 의아해할 정도였다. 이 구제불능의 프랜차이즈에 18살짜리 1픽 루키 한 명이 들어왔다고 승리하는 팀의 마인드가 심어질 거라 생각하긴 무리였다.

팩슨은 이런 상황을 빨리 타개하려면 먼저 코치부터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보는 뉴욕 코치였던 제프 밴 건디와 얼마전까지 뉴올에서 위닝 시즌을 계속하다가 오너와의 갈등으로 코치직을 사임한 폴 사일러스였다. 팩슨은 NBA에서 올스타에 선발됐던 가드였고 사일러스와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6-7, 230파운드의 그 포워드가 무지막지한 덩치로 상대방을 밀어내며 보드를 장악해가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사일러스는 득점을 올리는 데는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리그에는 'pass'란 네 글자를 생각하지 않는 선수들이 많아서 그들을 이기는 데는 리바운드, 수비, 팀워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네츠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사일러스는 나름의 성취를 이룬 감독으로써 엄격하고 비이기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폴이 과거 선수이자 성공한 감독으로써 우리 팀에 규율과 안정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일러스는 회상했다.

그 어떤 선수도 사일러스를 깔보거나 NBA 선수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만으로도 반대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고, 말 한 마디 없이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을 입다물게 할 수 있었다. 소리를 지를 일이 있으면 마치 폭풍과 같이 질러댔다. 그의 목소리는 곰의 울부짖음과 같아서 선수들이 방금 먹은 음식을 토해낼 정도로 호되곤 했다. 그는 언젠가는 이라 뉴블이 애틀랜타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탈의실까지 쫓아간 적도 있었다. 그는 규율을 지키지 않은 팀내 스타 선수를 벤치에 앉히는 걸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사일러스는 클블 감독으로 부임할 때 네 가지 임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1. 브롱이 리그에 만연하고 있던 나 중심의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도록 규율을 심어줄 것. 팀내 이기적인 선수들을 다잡아 코치의 말에 따르도록 만들 것.

2. 브롱의 엄청난 잠재력을 확실히 실력으로 만들 것.

3. 코트에서나 코트 밖에서나 브롱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것. 경기 후에도 브롱이 불량한 선수나 기타 인사와 어울리지 못하게 할 것.

4. 팀의 방향을 위닝팀으로 돌려놓을 것.

사일러스가 브롱의 경기 모습을 처음 본 것은 고교 유망주들이 초청받아 치르는 맥도날드 올 어메리칸 게임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일러스는 자신이 브롱을 지도하게 될 줄은 몰랐고 그저 호기심에 TV로 경기를 봤을 뿐이었다. 그 게임에서 뛴 선수들 중 브롱을 포함한 몇 명은 NBA로 직행했고, 사일러스는 곧 그들의 플레이를 직접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다른 많은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사일러스도 맥도널드 게임을 싫어했다. 그는 그 게임이 우쭐한 꼬마들의 쇼라고 생각했다. 경기는 대부분 달리고 덩크하는 플레이만 반복됐고, 수비 따윈 남의 일이었다. 팀워크는 역겨울 정도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브롱이 그 경기에서 패스를 하려 노력한다는 점을 알아챘고, 그것이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지금 당장 르브론의 운동능력이 차원이 다르다는 건 틀림없습니다," 당시 사일러스의 말이다. "그 꼬맹이는 자기 마음먹은 대로 림에 가까이 갈 수 있어요. 게다가 양손 모두 레이업 마무리가 가능하죠. 사실 NBA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선수가 많습니다. 이 꼬맹이의 약점은 외곽슛인데, 그건 그런 것따위 던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녀석은 원하면 언제든 림으로 돌진해서 점수를 올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고등학생이 이녀석을 막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일러스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보스턴에서 9번의 우승을 일궈낸 레드 아워백이었다. 그는 사일러스가 1972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돼왔을 때는 단장이었다. 사일러스가 보스턴에서 뛸 때 그는 아워백과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눴다. 그는 아워백의 사무실에 가서 그날 경기와 농구 철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아워백은 사일러스가 감독이 되고 싶어함을 알고 있었고, 선수 다루는 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줬다.

먼저 사일러스는 브롱에게 가장 호의적으로 접근하기를 유보했다.

그때까지 입단때부터 브롱과 같은 대우를 받은 신인은 없었다. 조던조차도 브롱이 고향팀에 입단하며 받은 광기와도 같은 집중조명은 받지 않았다. 지금은 상기하는 것조차도 우습지만, 조던은 1984년 드래프트에서 하킴과 보위에 이어 세 번째로 뽑혔다. 대부분의 스카우트들은 조던이 매우, 매우, 매우 좋은 선수고 어쩌면 위대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해 드래프트 최고의 선수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가 득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엄청난 운동능력이 몸에 날개가 달린 걸로 보이곤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당시 조던의 최대 가치는 그의 성장배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흑인 선수와는 달리)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의 중류층 가정에서 부모 모두에게 양육받으며 순탄하게 자랐던 것이다. 조던은 고등학교 시절 농구팀에서 탈락한 일을 자주 말했지만, 그것은 일부분만 사실이다. 그는 2학년때 'varsity' 팀에서 탈락했고, 곧바로 ' junior varsity' 팀에서 뛰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농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조던의 다음 단계는 명문 ACC 컨퍼런스에서 명전 감독 딘 스미스가 이끌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었다. 스미스는 볼 소유를 분산시키는 공격마인드를 지닌 감독이었고 조던에게 1:1 공격을 시키지 않았다. 1982년 NCAA 파이널에서 조던의 위닝 점퍼로 우승했음에도 불고하고 말이다. 그는 항상 팀이 먼저임을 강조했다.

조던의 부모는 아들이 존경심과 규율을 갖도록 교육했다. 그것은 조던이 자신의 득점본능에 볼과 선수의 움직임, 그리고 스타에 의존하지 않는 공격을 강조하는 스미스의 농구스타일을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했다. NBA에 전해져오는 우스개가 있다. "누가 조던을 20점 이하로 묶을 것인가? 딘 스미스 뿐이지!" 조던이 스미스 밑에서 뛴 3년 중 2년 동안 평득 20점 미만을 기록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조던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조던에게 인내심을 가르쳤고 조던의 농구 세계에 계속해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럼 이제 브롱을 보자.

클블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와 애크런 출신의 애송이를 보건대, 그 애송이는 마음씨는 좋지만 성장 과정이 매우 힘들었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18살짜리였다. 가족 사진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드류 조이스 2세나 키스 댐브럿같이 좋은 코치가 있었지만 그건 고등학교 시절 얘기였다. 브롱은 겨우 17살에 SI 표지모델이 됐고, 졸업반을 마칠 때는 나이키나 다른 신발 회사로부터 100밀을 보장받았다. 모두 NBA에서 드리블 한 번 해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브롱이 고등학교때 모범생이었음도 사실이고 코치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겨우 18살이었다. 우리 중 누가 그 나이에 제대로 성숙할 수 있었겠는가? 100밀이 통장에 들어오고 사람들이 그를 '킹 제임스'라 부르는 마당이다. 고등학교 마지막 2년 동안 주위 사람들이 브롱을 상대로 얼마나 '안돼'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NBA 역사상 그 어떤 선수도 입단 때부터 이렇게 부와 명예를 걸머쥐고 들어온 선수는 없었다.

코칭스태프나 브롱의 고용주가 될 프론트의 눈에는 이 농구소년의 앞길을 망칠 함정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걸로 보였다. 그리고 (승리만 해온 이 소년이) 프로 첫 시즌에 겪게 될 수많은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름 그 녀석을 만났을 때 그 녀석은 이미 또래보다 훨씬 똑똑했어요." 사일러스의 말이다. "그 녀석은 벌써부터 영예란 영예는 다 맛보고 있었지만 정말로 농구를 사랑했습니다. 항상 더 배우고 싶어했죠. 적어도 태도면에서는 그 녀석에게 한 마디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연은 브롱이 프리 드래프트 워크아웃을 하러 경기장에 왔을 때부터 시작됐다. 로터리 추첨이 끝난 후 브롱은 자신이 클블로 가게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클블 프런트는 당시에는 군드 아레나로 불리던 경기장으로 브롱을 초대했다. NBA 팀들은 유망주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팀으로 불러들여 워크아웃을 갖곤 한다. 어떤 선수들은 자신을 뽑아줄 팀을 찾아 10개도 넘는 팀에서 워크아웃을 갖는다. 하지만 브롱의 워크아웃은 클블 하나로 끝났다. 브롱의 워크아웃에서는 사일러스와 브롱 말고 아무도 없었다. 사일러스는 브롱에게 슈팅 훈련을 약간 시켰다. 브롱이 슛을 던지면 사일러스가 볼을 받아 다시 패스해주는 식으로 여러 지점에서 슛을 던지게 했다.

"사일러스가 부임한 직후 인터뷰에서 한 말을 기억합니다." 브롱의 고등학교 첫 코치 키스 댐브럿의 말이다. "그는 브롱에 대해 '정신적으로' 프로 경기를 뛸 준비가 얼마나 됐는지 봐야 한다고 언급하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죠. '이봐요 감독, 당신은 지금 누굴 지도하려는지 모르고 있군. 이 녀석은 '정신적으로'는 이미 괴물같은 놈이라고.' 왜냐하면 브롱이는 신체조건도 뛰어나지만 정신적으로는 훨씬 뛰어난 녀석이거든요. 녀석은 농구란 게임과 게임에 임하는 본능에 대해 이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었어요. 녀석은 머리 뒤로도 패스를 던질 수 있었는데 그건 잘난척을 해서가 아니라 동료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볼 필요도 없었던 거죠. 그 녀석은 동료들이 있음직한 곳을 모두 알고 있었어요. 어느 핸가는 풋볼을 하는데, 연습때 쿼터백을 관찰하더니 바로 그 주에 자기가 쿼터백 노릇을 하며 팀을 이끌더군요. 풋볼의 공격을 금방 이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이런 면에서라면 녀석은 단연 천재입니다."

사일러스도 금방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워백이 사일러스에게 해줬던 것처럼, 사일러스도 브롱과 특별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사일러스는 팀에 시기와 질투가 있음도 알고 있었다.

"제 문제는 전혀 르브론이 아니었습니다." 사일러스의 말이다. "우리 팀의 다른 선수 몇 놈들이었죠. 첫 훈련때부터 알아차렸어요. 여러 골대로 나뉘어 자유투 연습을 하는데 아무도 르브론과 함께 훈련하려 하지 않더군요. 몇몇 녀석들은 거의 말도 걸지 않았어요."

신인 길들이기는 NBA의 일부다. 클블에서는 루키가 가게에 들러 선배들을 위해 도넛을 사놓곤 한다(작년엔 힉순과 잭순, 지금은 그린이 그 일을 맡고 있죠). 어떤 베테랑들은 일부러 신인과 거리를 두기도 한다. NBA에 그런 관습이 있긴 하다. 빌 러셀은 신인들의 이름은 아예 부르지 않았다. 러셀에게 신인 선수는 누구든 '룩'이었다. 2년차가 돼서야 이름이 불리는 것이다. 조던의 경우 신인들을 출신 대학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헤이, 밴더빌트!"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일러스는 브롱이 이런 것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연습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속이 보이는 일이었다. 그들은 구단 버스에 올라서도 브롱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동료들이랑 같이 퇴근한 적도 별로 없었죠." 사일러스의 말이다. "그 녀석이 외로움을 느꼈던 순간이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겨우 18살 아닙니까. 게다가 그 또래 애들처럼 클럽엘 갈 수도 없는 몸이고요. 그래서 우리 경비원인 마빈 크로스를 그 녀석에게 붙여서 말동무를 하게 했죠. 제가 진짜 짜증났던 건 리그에서 밥값도 못하는 녀석들이 그 주제에 르브론에게 험하게 굴었다는 겁니다."

사일러스는 그 선수들이 브롱에게 위기의식을 느꼇다고 느꼈다. 그들은 브롱을 프로 게임에서 함께 어우러지도록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사일러스를 분노시켰다. NBA는 승리가 우선이고, 이 형편없는 팀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가 브롱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건 브롱이 농구를 시작한 5학년때부터 그때까지 항상 동년배와만 농구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애크런 AAU(유소년) 농구대회에서 '슈팅 스타즈'란 팀명으로 전국 투어를 다니며 농구를 배워갔다.

지난 8년간 브롱의 인생에서 쌓여온 신뢰와 성실을 생각해보라. 프랭키 워커 가족과 살며 브롱이 보인 정에 대한 굶주림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가톨릭 고등학교에서 많은 선생님들과 쌓아온 정을 생각해보라. 브롱이 얼마나 '가족같은' 분위기를 갈망해왔고, '슈팅 스타'에서 같이 농구를 한 친구와 코치들이 얼마나 그 갈망을 채워왔는지 생각해보라. 브롱의 가슴에는 큰 구멍이 생겨버렸다.

클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브롱에게 그런 짓을 한 선수들은 대부분 매년 팀을 옮겨다니는 저니맨들이었다. 팀의 미래따윈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 득점이나 올려서 내년에 좋은 계약을 맺을 것만 생각하는 선수들인 것이다. 브롱에게 루키 시즌은 농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혼자임을 느낀 시간이었다.

"르브론을 더 힘들게 만들었던 건 우리 팀에 포인트가드가 없었다는 겁니다." 사일러스의 말이다. "제가 르브론에게 그런 얘길 하니까 르브론은 자신이 포인트가드로 뛰겠다고 하더군요. 그 녀석은 제 공격 전술을 팀내 누구보다도 빨리 습득했어요. 게다가 코트 위에선 누구보다도 비이기적인 녀석이죠. 처음엔 물어볼 말이 많았지만, 르브론을 알게 된 후엔 포인트가드 롤을 소화할 수 있다고 믿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풋볼 감독이 루키 러닝백을 갑자기 쿼터백으로 쓰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둘다 공격조의 포지션이고 백필드에서 플레이를 시작하지만, 두 포지션에 요구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야구에 비교하자면, 1루수에게 포수를 맡기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두 포지션 모두 볼을 잡는 게 주 임무이긴 하다. 하지만 포수는 볼을 잡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볼을 어디로 던지게 할 지도 선택해야 한다. 쭈그려 앉은 자세로 1루수 때와는 전혀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브롱은 스몰포워드였다. 패싱보다는 슛과 득점을 더 중시하는 포지션이다. 물론 그는 훌륭한 패서다. 하지만 백코트에서 자기 플레이 뿐아니라 동료들에게 올바른 포지션을 지시하며, 그들이 제대로 득점찬스를 잡도록 신경써가며 뛰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사일러스가 요구하고 브롱이 곧바로 동의한 건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던 몇몇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선수들은 브롱을 동료로 받아들이게 됐다(패스 안해주는데 별 도리 있나...). 브롱은 더이상 자유투 연습을 혼자 하지 않게 됐다. 적어도 몇몇 선수들과는 구단 버스에서 웃으며 얘길 나누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규시즌 첫 경기를 치르게 되자 또다른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됐을 때, 브롱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 Point Guard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2-1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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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09-12-11 15:53:57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다음 편 나오는 걸 기다리는게 즐겁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9-12-11 16:08:12

이렇게 시리즈물로 올려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잘 읽고 있어요

2009-12-11 20:56:03

시리즈물로 올려주시는 덕분에 사이트 가도 영어의 미숙함 때문에 대충의 내용밖에 모르는 저한테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잘읽고 있습니다. 추천 꽝!!

2009-12-12 09:05:47

브롱의 광팬으로 이런 좋은 칼럼 너무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12-12 12:57:45

과거가 상당히 좋지 않았네요 17승이라니.. 몇년간 클블의 상향세는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2009-12-12 13:07:34

정말 감사합니다. 르브론의 인생을 세세히 볼 수 있는 듯 해서 너무 좋네요.

2009-12-12 23:20:20

브롱이가 사일러스를 만난것도 어떻게 보면 천운이군요. 물론 브롱이가 일단 너무 뛰어나기에 그런것일수도 있지만요

2009-12-21 22:16:21

아 첫경기 이야기 보고싶다 ㅜ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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