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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란타 호크스 프랜차이즈 포지션별 랭킹 Top28 - SG편 (v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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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1-19 09:07:38

안녕하십니까, 지난 주에 이어 이번에는 시리즈 2번째 연재물인 SG편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지난 연재물인 PG편은 아래 링크해두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PG편 : /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65336&sca=&sfl=wr_name%2C1&stx=%ED%97%88%EC%8A%AC+%ED%94%8C%EB%A0%88%EC%9D%B4%EC%96%B4&sop=and&scrap_mode=

범례 및 프랜차이즈의 간단 역사 등은 이미 지난 편을 통해서 소개해 드렸으나, 이번 편을 맨 처음으로 보시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습니다.




범례

 

- 이 글의 랭킹은 기본적으로 아래 순위부터 역순으로 소개됩니다. 먼저 기본 랭킹 외의 선수들을 5명씩 소개하는 “Honorable Mention”이 등장하며, 이후 28위부터 역순으로 15위까지 마이너 랭킹”(14), 이어서 14위부터 역순으로 1위까지 메이저 랭킹”(14)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 위 글 내의 전반적인 스탯 정보(기본적인 신체 사이즈 포함) 등은 바스켓볼 레퍼런스(www.basketball-reference.com) 사이트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준용하여 제시하였습니다.

 

- 스탯 정보는 주요 1차 스탯과 일부 2차 스탯을 기재하였습니다. 1차 스탯은 득점(PT), 리바운드(RB), 어시스트(AS), 블록슛(BK), 스틸(ST), 출장시간(MIN)의 총계 및 평균치, 그리고 야투성공률(FG%), 3점슛성공률(3PT%), 자유투성공률(FT%), 3점슛 성공개수(3PTM)까지 수록하였습니다. 턴오버, 개인파울, 오펜/디펜리바 등의 정보는 생략하였으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차 스탯은 가장 대표적인 PER와 윈쉐어(WS)만 수록하였습니다.

 

- 주요 스탯 외에 해당 선수의 신체 사이즈(키와 체중), 포지션, 연차(Yrs), 출장 경기 수(Games), 활동한 시즌 기간(Season) 정보도 수록하였습니다. 포지션별 랭킹인데 포지션에 대한 정보가 중복해 들어간 이유는 두 포지션을 넘나드는 경우를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즉 경우에 따라 세컨드 포지션까지 표기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즌의 표기는 파이널이 열린 해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 99-00시즌은 “00”으로 표기함)

 

- 선수들의 주요 수상경력도 기재하였습니다. , 올스타 MVP 등과 같이 직접적인 선수 평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수상 실적은 제외했습니다. 이밖에 올스타 선정 횟수, 우승 횟수도 병기하였습니다.

 

- 각 스탯의 해당 프랜차이즈 내 랭킹도 첨부하였습니다. 이번 애틀란타 호크스 프랜차이즈의 경우, 3점슛 개수 및 3점슛율은 Top12까지, 블락슛과 스틸은 Top15까지, 나머지 스탯들은 Top20까지 랭킹을 매겼습니다. (스탯 랭킹의 범위가 각각 차이가 나는 까닭은, 3점슛은 79-80시즌부터, 블락슛과 스틸은 73-74시즌부터 계산된 스탯임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 스탯 랭킹 내에 드는 평균 및 비율 스탯의 유효 기준은, 레퍼런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프랜차이즈 커리어 최소 요구 수치를 준용하였습니다. 따라서 평균 득점 등 여러 스탯은 100경기 이상 출전을, FG%500개 이상 필드골 성공을, FT%200개 이상 자유투 성공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다만 3PT%의 경우에는 현 레퍼런스 사이트의 기준이 50개 이상 3점슛 성공인데, 3점슛을 많이 쏘는 현재의 트렌드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기준입니다. 그래서 얼마 뛰지도 않은 전문 3점 슈터들이 상위 랭킹에 대거 포진하는 등의 기현상이 있어서 필자의 임의에 따라 94-95시즌 이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기존대로 50, 94-95시즌부터 11-12시즌까지는 100, 12-13시즌 이후로는 150개를 랭크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리그의 3점슛 시도가 크게 늘어난 시점을 각각 지표로 삼았습니다. 94-95시즌에는 리그에서 3점슛 거리를 전체 22피트로 조정함에 따라 한 팀의 평균 3점슛 시도 횟수가 급증하였고, 처음으로 경기당 10개를 돌파했습니다. 이 거리 단축 조치는 3시즌 동안만 유지되었으나, 이후 3점슛의 비중이 커지고 선수들이 3점을 더 많이 던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2-13시즌에는 한 팀의 평균 3점슛 시도 횟수가 처음으로 경기당 20개를 돌파하였으며, 또한 이 시즌에 스테판 커리가 레이 알렌이 가지고 있던 시즌 최고 3점슛 기록(269)를 간만에 경신하기도 했습니다.)

 

- 선수에 대한 소개는 해당 프랜차이즈 내에서의 활약상을 위주로 기술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팀에서의 활약상 등은 가급적 생략하거나 짧게 요약하였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랭킹이 올라갈수록 선수 소개의 분량이 많고 자세합니다. 해당 프랜차이즈에서 드래프트 된 경우에는 드래프트된 연도와 그 순위까지 언급하였으며, 고인이 된 선수는 몰년과 향년을 기재하였습니다. 이밖에 명예의 전당 입성 및 해당 프랜차이즈 영구결번 여부 등도 밝혔습니다.

  




  

애틀란타 호크스 프랜차이즈의 간단 역사

   


 


호크스 프랜차이즈는 1946년에 NBL 리그에서 버팔로 바이슨즈(Buffalo Bisons)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다가, 한 달 여 만에 연고지를 일리노이 주의 멀린(Moline)으로 옮기면서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Tri-Cities Blackhawks)로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트라이-시티스란 미시시피 강 유역에 서로 인접한 멀린, 록 아일랜드(Rock Island), 데이븐포트(Davenport)의 세 도시에 속한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고, “블랙호크스는 과거 용맹했던 인디언 추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장신 센터 돈 오튼을 주축으로 한 블랙호크스는 1949년에 NBLBAA 리그에 병합되어 새로이 NBA 리그가 출범함에 따라, 그 소속이 NBA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구단주 벤 커너는 1951년에 연고지를 대도시인 밀워키로 옮겼고, 팀 이름도 좀 더 간단하게 호크스로 바꿨죠. 하지만 밀워키 호크스는 성적이 계속 하위권에 머물면서 흥행이 신통치 않았고, 결국 1955년에 연고지를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엘리트 빅맨인 밥 페팃을 중심으로 차츰 전력을 강화한 호크스는 56 드래프트에서 빌 러셀을 뽑았지만, 흥행 때문에 세인트루이스의 지역 스타인 에드 마콜리를 영입하기 위해 러셀을 보스턴 셀틱스에 팔고 말았죠. 56-57시즌에 파이널에 진출한 호크스는 공교롭게도 러셀 트레이드의 상대였던 보스턴과 맞붙어 역대 파이널 사상 가장 치열했던 7차전 대접전을 벌인 끝에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57-58시즌에 다시 파이널에 진출한 호크스는 보스턴과 리매치를 벌였는데 이번에는 러셀의 부상을 틈타 4-2로 승리를 거두면서 리벤지에 성공, 프랜차이즈 첫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죠. 이후 호크스는 밥 페팃, 클리프 헤이건 등을 앞세워 50년대 말~60년대 초에 서부를 대표하는 강자로 군림했으며, 라이벌 보스턴과는 두 번 더 파이널에서 맞붙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64-65시즌을 끝으로 밥 페팃이 은퇴하자, 호크스는 선수 겸 감독인 리치 게린의 지도하에 레니 윌킨스, 젤모 비티 등의 흑인 스타들을 앞세워 꾸준히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했죠. 게린의 시대에 호크스는 매년 빠짐없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67-68시즌에는 56승의 호성적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한편 홈구장 신축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벤 커너 구단주는 1968년에 끝내 팀을 애틀란타의 부동산 재벌인 톰 커즌스 등에게 매각함에 따라, 호크스는 연고지를 애틀란타로 옮기게 되었죠.

 

이후 호크스는 루 허드슨, 피트 마라비치 등 재간 있는 스코어러들이 팀을 이끌었지만, 몇몇 주축 선수들을 경쟁 리그인 ABA에 빼앗기기도 하고 마라비치와 흑인 동료들 간에 갈등도 심했으며 ABA의 스타 쥴리어스 어빙을 영입하려다 실패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성적이 추락, 잠시 침체기를 걷게 됩니다. 그러다가 1977년에 MLB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구단주인 테드 터너가 팀을 사들이고 휴비 브라운을 감독으로 임명한 후에 댄 라운드필드의 영입 등으로 전력을 추스르며 다시 중상위권으로 도약하게 되었죠. 82-83시즌에는 조지아 주 출신의 지역스타인 도미닉 윌킨스를 운 좋게 데려온 호크스는 이후 엘리트 스코어러로 성장한 윌킨스의 활약과 명장 마이크 프라텔로의 지도력 등을 앞세워 80년대 말에 4년 연속 50승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라이벌 보스턴 셀틱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등의 벽을 넘지 못하며 잇달아 고배를 마셔야 했죠. 프라텔로 사임 후 애매하게 중위권에 머물던 호크스는 93-94시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레니 윌킨스를 감독으로 선임했습니다. 윌킨스는 부임 첫 해에 도미닉 윌킨스를 트레이드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이면서 57승의 호성적을 거두었으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도미닉을 트레이드한 데에 충격을 받은 다수의 홈팬들이 호크스에 등을 돌리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죠.

 

이후 윌킨스 감독은 마이애미 히트로부터 스티브 스미스를 영입하고, FA로 수비 대마왕 디켐베 무톰보를 영입하며 90년대 중후반에 공수 발란스가 훌륭한 호화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플레이오프에서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 등에게 가로막히며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죠. 99-00시즌부터 리빌딩에 들어간 호크스는 프런트의 잇따른 오판에 따른 선수 영입 실패로 인해 오랜 암흑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무려 8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호크스는 그래도 그간 얻은 드래프트 픽 등을 통해 차츰 전력을 강화한 끝에 07-08시즌부터는 다시 플레이오프 권으로 복귀했죠. 이후 호크스는 조 존슨, 알 호포드 등을 앞세워 계속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만 하다가, 13-14시즌에 마이크 부덴홀저 감독을 영입하며 새롭게 도약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벤치 마킹, 팀플레이 위주의 짜임새 있는 전력을 구축한 호크스는 14-15시즌에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인 60승을 거두며 챔피언 컨텐더 급의 전력으로 올라섰죠. 하지만 무려 45년 만에 진출한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속절없이 스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시 중상위권으로 내려온 호크스는 이번 시즌에도 동부의 다른 팀들과 치열하게 플레이오프 싸움을 벌이는 중이죠.

 

호크스는 70년 역사 동안 우승은 단 1회에 불과하지만, 47회나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꾸준히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해 온 부지런한 프랜차이즈입니다. 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8시즌 동안 외에는 뚜렷이 긴 암흑기도 없죠.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번번이 1라운드 탈락, 2라운드 탈락 등의 성적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에 비해 그리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 편입니다.

 

그럼 이상으로 서설을 마치고, 본격적인 랭킹 소개에 앞서 28위 밖 선수들 중에서 나름대로 소개해줄 만한 선수들을 5명을 추려서 "Honorable Mention"이란 타이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28위 밖 선수들에게도 잠정적인 랭킹은 있지만 여기에서 소개하는 순서는 그 순위와는 무관하며, 그냥 시대순으로 정렬했습니다.) 

 



Honorable Mention


Jack Stephens


 
55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7번으로 호크스에 뽑힌 잭 스티븐스는 루키 시즌에 주전 가드로 뛰며 평균 10.3득점을 올렸는데, 그게 그의 유일한 NBA 경력이었습니다.


Med Park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살림꾼이자 부지런한 수비수였던 메드 팍은 57-58시즌 우승 당시에 백업 가드로 뛰었습니다.


Ken Charles



발군의 운동능력을 자랑했던 6-3의 듀얼가드 켄 찰스는 76-77시즌에 평균 11.1득점, 3.6어시스트, 1.7스틸을 올려주었습니다.


Boris Diaw


 
03 드래프트에서 전체 21번으로 호크스에 뽑힌 프랑스 출신의 보리스 디아우는 초년병 때 놀랍게도 슈팅가드 유망주였으며, 조 존슨 사인&트레이드 때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습니다.


Salim Stoudamire



슈팅력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던 단신(6-1)의 슈팅가드 살림 스타우더마이어는 2000년대 후반에 세 시즌 동안 벤치 슈터로 활약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랭킹 소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이너 랭킹 (28위~15위)


28위


#_3 Lou Williams




6-1, 175lbs  SG/PG  /  2시즌(13-14), 99경기 


11.9득점, 2.1리바운드, 3.5어시스트, 85.7% 자유투율(통산 6위)


필라델피아 76ers에서 여러 시즌 동안 키 식스맨으로 활약한 루 윌리엄스는 11-12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어 애틀란타 호크스와 3년간 풀-미드레벨(약 15.6mil)로 계약했습니다. 12-13시즌에 그는 호크스의 벤치 득점을 책임지며 1월 중순까지 39경기에서 평균 14.1득점을 올려주었으나, 안타깝게도 무릎 ACL 파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아웃되고 말았죠. 그는 무릎 수술 후 기나긴 재활을 거쳐 13-14시즌 초반에 겨우 복귀, 그 해 벤치에서 평균 두 자릿 수 득점(10.4득점)을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득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뛰어난 1:1 공격수이며,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폭발력 있는 외곽 슈터죠. 다만 포지션 대비 워낙에 단신인데다가 기복이 심해 식스맨에 최적화 된 스타일입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호크스는 샐러리 캡 확보를 위해 그를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해버렸죠. 이후 그는 14-15시즌에 토론토에서 맹활약하며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했으며, 현재는 L.A 레이커스에서 여전히 정상급 식스맨으로 활약 중입니다.




27위


#_17 Sihugo Green




6-2, 185lbs  SG/PG  /  4시즌(59-62), 186경기 


7.5득점, 4.4리바운드*, 2.4어시스트*, 21.9분 출장*


※ 61-62시즌에 호크스에서 뛴 14경기의 리바운드, 어시스트, 출장기록이 따로 상세하게 남아있지 않아 평균 리바운드, 어시스트, 출장시간 수치는 이를 제외한 172경기의 평균 기록으로 산출함


듀케인 대학 출신의 시휴고 그린은 56 드래프트에서 무려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빌 러셀을 제치고 전체 1번으로 로체스터 로얄즈에 지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 와서는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고, 결국 58-59시즌 도중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죠. 호크스에서 주로 백업 가드로 활약한 그는 60 플레이오프에서 주전 포인트가드 슬레이터 마틴이 부상으로 거의 뛸 수 없게 되자, 조니 맥카시와 함께 나란히 주전 가드로 출전했습니다. 호크스는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으나 아쉽게 패배했는데, 땜빵 주전으로 나선 그린은 플레이오프 14경기 동안 평균 14.1득점, 8.6리바운드, 6.3어시스트를 올려주며 기대 이상으로 분전했죠. 당시만 해도 보기 드문 흑인 가드였던 그는 다른 선수들을 능가하는 발군의 운동능력과 점프력을 자랑하던 슬래셔였습니다. 다만 가드 치고 외곽 슈팅 능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죠. 60-61시즌에 그는 주전과 벤치를 두루 오가며 평균 9.2득점, 5리바운드, 3.4어시스트로 활약했으며, 이듬해인 61-62시즌 초반에 시카고 패커스(Chicago Packers, 현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65-66시즌까지 현역으로 뛰다 은퇴한 그는 1980년에 암으로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6위


#_34 Isaiah Rider



6-5, 215lbs  SG  /  1시즌(00), 60경기 


19.3득점, 4.3리바운드, 3.7어시스트, 0.7스틸

미네소타, 포틀랜드 등지에서 주전 슈팅가드로 활약한 아이재이아 라이더는 뛰어난 개인 기량을 지녔지만 코트 안팎에서 잦은 돌출 행동을 벌이며 악동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한편 99-00시즌을 앞두고 리빌딩에 나선 애틀란타 호크스는 팀의 에이스 스티브 스미스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보내는 대신에 그와 짐 잭슨을 데려왔죠. 슬램덩크 챔피언 출신이기도 한 그는 출중한 운동능력과 준수한 슈팅력을 지녔고, 스윙맨임에도 단단한 체구와 힘을 바탕으로 한 포스트 플레이도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제하기 힘든 제멋대로인 성격에다가 수차례 마리화나 소지로 체포되는 등 골칫덩이 그 자체였죠. 99-00시즌에 그는 스미스가 맡았던 에이스 스코어러로서의 역할은 나름대로 잘 수행해 주었지만, 연습 무담 불참, 코치의 지시 불이행, 마리화나 적발 후 리그의 약물 상담 지시 불응 등 크고 작은 사고를 쳐댔습니다. 이에 구단은 그에게 수차례 벌금, 벤치 행 등의 징계를 주었으나 소용이 없자, 자체 3경기 출장 금지라는 극약처방을 내렸죠. 그러자 이에 반발한 라이더는 급기야 방출을 요구했고, 결국 그는 시즌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호크스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동부의 강호였던 호크스는 잘못된 선수 영입 탓에 28승으로 성적이 급추락하며 8년 만에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그 이후로도 긴 암흑기를 걷게 되죠. 이후 라이더는 L.A 레이커스에 합류해 행운의 우승 반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코카인 소지로 감방을 들락날락하며 방황하던 그는 근래에는 “스카이 라이더(Sky Rider)”라는 재단을 설립해 농구 교실을 열고 불우 청소년들을 돕는 등 개과천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25위


#_24 Reggie Theus




6-7, 190lbs  SG/PG  /  1시즌(89), 82경기 


15.8득점, 3.0리바운드, 4.7어시스트, 1.3스틸, 85.1% 자유투율(통산 8위)


80년대 초반 두 차례 올스타에 뽑힌 바 있는 새크라멘토 킹스의 레지 씨우스는 88-89시즌을 앞두고 랜디 위트먼+드래프트 1라운드 픽과 맞바꿔져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모제스 말론과 씨우스를 영입하며 화려한 네임밸류의 스쿼드를 갖추었죠. 그는 뛰어난 돌파력과 탁월한 패싱 센스를 자랑했으며, 자유투 유도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스코어러였습니다. 다만 볼호그 기질과 개인플레이 성향이 강해 주로 약체 팀에서 공을 독점하는 에이스 이미지였죠. 한편 전년도 킹스에서 평균 21득점, 6어시스트 이상을 올려주었던 그는 강팀인 호크스에서는 롤이 줄어들며 스탯도 덩달아 떨어졌고, 새로운 동료들과도 잘 화합하지 못하며 라커룸에서 종종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팀워크 문제로 홍역을 앓은 호크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하위 시드 밀워키 벅스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하고 말았고,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7.4득점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으로 팀의 패배에 한몫했죠. 결국 오프시즌에 신생팀(올란도, 미네소타)의 확장 드래프트가 열렸을 때 그는 보호 명단에서 빠지고 말았고, 올란도의 지명을 받으며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걸은 그는 친정팀 킹스의 감독직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노스리지 캠퍼스)의 감독으로 재임 중입니다.




24위


#_25 Paul Graham




6-6, 200lbs  SG/SF  /  3시즌(92-94), 179경기 


8.4득점, 2.4리바운드, 2.0어시스트, 1.0스틸


오하이오 대학 출신의 언드래프티인 폴 그레이엄은 호주 리그와 하부리그인 CBA에서 뛰다가 91-92시즌을 앞두고 애틀란타 호크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 우여곡절 끝에 호크스의 개막 로스터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루키 시즌에 그는 팀의 벤치 득점원으로 쏠쏠히 활약하며 평균 두 자리 수 득점(10.1득점)을 올려주었고, 39%의 정교한 3점슛 성공률을 보여주었죠. 그는 다소 기복이 있었지만 폭발력 있는 외곽 슈터였으며, 수비에서도 재간이 있었습니다. 루키 시즌의 활약으로 호크스와 2년 재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그는 이듬해인 92-93시즌에도 벤치에서 활약을 이어갔으나, 3점슛은 30%대 미만으로 떨어지며(29.8%) 다소 무뎌졌죠. 한편 그는 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전에서 경기 막판 기상천외한 노-룩 아웃렛 패스로 팬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93-94시즌에는 베테랑 크레익 일로에게 밀려 거의 출장하지 못한 그는 이후로는 NBA에 자리 잡지 못하고 하부리그 및 유럽 등지를 떠돌며 커리어를 보냈으며, 2004년까지 현역으로 뛰다가 은퇴했습니다.




23위


#_4 Bobby McDermott



5-11, 180lbs  SG  /  2시즌(48-49), 82경기 

10.6득점, 총 873득점, 73.3% 자유투율


바비 맥더멋은 1940년대 NBL에서 4년 연속 MVP에 선정된 바 있는 명실상부 40년대 최고의 농구 스타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슈터였던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슈팅 레인지를 지녔는데, 20피트 너머는 물론이요 3~40피트 너머의 초장거리에서도 종종 슛을 꽂아 넣곤 했죠. 가슴팍에서부터 릴리즈하여 타점이 낮은 그의 투-핸드 세트 슛을 막기 위해 상대 수비수는 어떻게든 그에게 달라붙었으나,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릴리즈와 예측불허의 레인지로 수비수들을 농락하며 슛을 꽂아 넣곤 했습니다. 47-48시즌, NBL의 셰보이건 레드스킨스(Sheboygan Redskins)에서 선수 겸 감독직을 맡은 그는 시즌 초반에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고, 그곳에서도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죠. 그는 감독으로서는 블랙호크스를 플레이오프 서부 디비전 결승으로 이끌었으며, 선수로서는 평균 12.1득점을 올리며 올-NBL 세컨드팀에 선정되었습니다. 이듬해인 48-49시즌, 그는 블랙호크스를 25승 20패로 이끌며 평균 9.4득점을 기록하던 중에 해먼드-캘러멋 버커니어즈(Hammond-Calumet Buccaneers)란 팀으로 트레이드되고 말았죠. 한편 시즌 종료 후 NBL은 BAA에 합병되어 새로이 NBA가 출범했으나, 그는 ABL 등 다른 하부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1963년에 자동차 사고로 인해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988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습니다.




22위


#_10 / #_30 Don Ohl



6-3, 190lbs  SG/PG  /  3시즌(68-70), 173경기 

10.0득점, 1.8리바운드, 2.3어시스트, 74.6% 자유투율


60년대에 5번이나 올스타에 뽑힌 바 있는 돈 올은 볼티모어 불리츠의 간판 스타였으나, 67-68시즌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얼 먼로에게 밀리면서 결국 시즌 도중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그는 호크스에서 남은 31경기 동안 평균 13.1득점을 올리며 벤치 득점을 이끌었는데, 세인트루이스가 소재한 일리노이 주 출신 스타라서 홈팬들의 성원도 많이 받았죠. 항상 짧은 스포츠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는 정교한 중장거리 슛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점프 슈터였고, 준수한 수비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호크스로 왔을 때에는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로 전성기가 약간 지난 상태였죠. 호크스가 애틀란타로 연고지를 옮긴 68-69시즌, 그는 1, 2번을 두루 백업하며 평균 12.1득점을 기록, 녹슬지 않은 관록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69-70시즌에 그는 후배들에게 밀려나 팀 내 입지가 줄면서 평균 득점이 6점대로 추락하고 말았죠. 결국 그는 그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이후 금융업계에 종사했습니다.




21위


#_6 Stanley “Whitey” Von Nieda



6-1, 170lbs  SG/PG  /  3시즌(47-50), 150경기 

9.8득점, 1.4어시스트*, 총 1,476득점, 62.6% 자유투율


※ 평균 어시스트 값은 NBA 리그에서 기록한 26경기의 평균 기록


펜실베니아 주립대 시절부터 득점 기계로 명성을 날리던 와이티 본 니더는 46-47시즌에 이스턴 리그(Eastern League)의 랭카스터 레드 로지즈(Lancaster Red Roses) 소속으로 평균 22득점을 훌쩍 넘기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활약에 주목한 NBL의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가 그에게 입단 제의를 하여 그는 더 큰 무대에서 뛸 수 있게 되었죠. 47-48시즌에 그는 평균 12.1득점(총 726득점으로 리그 8위)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데뷔 시즌을 마쳤고, 플레이오프에서는 6경기에서 16.2득점을 넣으며 팀을 서부 디비전 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스피드와 민첩성으로 코트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으며, 중거리 슈팅 능력도 준수한 편이었죠. 이듬해인 48-49시즌,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 등 NBL의 4개 팀이 BAA(NBA의 전신)로 합류하며 다소 김이 빠진 상황에서 그는 평균 10득점을 기록했고, 올-NBL 세컨드 팀에 선발되었습니다. 결국 NBL은 1949년에 BAA에 완전히 병합되어 새로이 NBA가 출범했고, 블랙호크스도 자연스레 새 리그로 둥지를 옮겼죠. 한편 49-50시즌에 그는 다이크 에들먼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벤치로 물러나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결국 시즌 도중 볼티모어 불리츠로 이적했습니다. (현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인 6~70년대 볼티모어 불리츠와는 다른 팀임.) 이후 그는 NBA를 떠나 이스턴 리그의 친정팀 랭카스터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광고 세일즈맨으로 활약했습니다.




20위


#_5 Dion Glover



6-5, 228lbs  SG  /  5시즌(00-04), 273경기

 

8.5득점, 3.1리바운드, 1.6어시스트, 0.8스틸


조지아 공대를 1학년만 마치고 99 드래프트에 참가한 디온 글로버는 전체 20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첫 두 시즌은 벤치에서 맴돈 그는 01-02시즌부터 종종 주전으로 기용되다가 02-03시즌 중반 이후에는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 해 주전으로 출전한 42경기에서 평균 12.3득점, 5.1리바운드를 올려 주었죠. 그는 탄탄한 웨이트와 준수한 수비력을 보유했으며, 포지션 대비 훌륭한 리바운더였습니다. 다만 볼을 약간 끄는 경향이 있었고, 외곽 슛 능력이 썩 좋진 못했죠. (통산 3점슛 성공률 31.7%) 오프시즌에 그는 FA가 되었으나 시장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다시 호크스와 1년 미니멈으로 재계약했습니다. 한편 그는 03-04시즌 초반에는 주전으로 출전했으나, 결국 유망주 보리스 디아우에게 주전 자리를 뺏기고 말았죠. (루키 시즌에 디아우는 유망주 슈팅가드였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팀에 방출을 요구했고, 결국 시즌 도중 웨이브되었다가 토론토 랩터스로부터 콜-업을 받으며 잔여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후 그는 리그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주로 해외 리그를 전전하며 커리어를 마쳤죠. 현재 그는 D-리그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산하의 그랜드 래피즈 드라이브(Grand Rapids Drive) 팀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임 중입니다.




19위


#_11 Don Sunderlage



6-1, 180lbs  SG/PG  /  1시즌(54), 68경기 


11.2득점, 3.3리바운드, 2.8어시스트, 32.8분 출전


일리노이 대학 출신의 돈 선더리지는 51 드래프트에서 전체 9번으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곧바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한편 밀워키 호크스는 52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지명한 마크 워크맨을 52-53시즌 초반에 워리어스로 보내고, 대신 선더리지의 권리와 현금을 받았죠. 군복무를 마치고 53-54시즌에 호크스로 복귀한 그는 루키 시즌부터 팀의 주전 가드 자리를 맡으며 평균 11.2득점을 올렸고, 팀 내에서 유일하게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1-2번을 두루 맡아볼 수 있는 그는 준수한 볼-핸들링 기술과 중장거리 슈팅 능력을 보유한 가드였죠. 한편 그 해 21승 51패로 서부 최하위에 머문 호크스는 54-55시즌을 앞두고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 왕조에서 여러차례 우승을 경험한 베테랑 가드 펩 사울을 영입하는 대가로 그를 레이커스에 내줬습니다. 레이커스에서는 올스타 출신이란 명망이 무색하게 벤치를 전전하던 그는 결국 그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죠. 그는 안타깝게도 1961년에 교통사고를 당해 31세의 한창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18위


#_28 / #_13 Frank Selvy



6-3, 180lbs  SG  /  3시즌(55-56, 58), 103경기 


13.1득점, 4.4리바운드*, 2.6어시스트*, 29.0분* 출전


※ 54-55시즌에 볼티모어 불리츠에서 11경기, 밀워키 호크스에서는 60경기를 출전하였으나, 바스켓볼 레퍼런스 사이트에서는 현재 득점 이외의 스탯은 분별되지 않은 채 시즌 전체 기록이 합산되어있음. 따라서 리바운드, 어시스트, 출장시간은 불리츠에서 뛴 11경기 스탯을 포함하여 제시함. 


퍼만 대학 시절 한 경기 100득점의 신화를 남긴 당대 대학 최고의 스코어러 프랭크 셀비는 54 드래프트에서 당당히 전체 1번으로 볼티모어 불리츠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현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인 6~70년대 볼티모어 불리츠와는 다른 팀임.) 한편 당시 드래프트 2픽이 바로 밀워키 호크스가 지명한 밥 페팃이었죠. 대학 시절 명성에 걸맞게 프로 무대에서도 고감도 득점포를 가동한 그는 시즌 초반 한때 평균 20득점 이상을 넣으며 리그 득점 1위를 질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속팀 볼티모어가 재정난에 시달린 끝에 14경기 만에 해체됨에 따라, 그를 비롯한 볼티모어 소속 선수들은 파산 드래프트를 통해 다른 팀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죠. 그래서 당시 리그 최하위였던 밀워키 호크스가 1순위 지명권을 얻어서 그를 뽑았습니다. 그는 드래프트 동기인 페팃과 함께 최강의 루키 원-투 펀치를 결성했고, 나란히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죠. 그는 뛰어난 슈터이자 출중한 볼-핸들링과 1:1 기술도 겸비한 타고난 스코어러였습니다. 그는 그 해 호크스에서 60경기를 뛰며 평균 18.4득점을 올려주었고, 2차례나 40득점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죠. 한편 이듬해인 55-56시즌 초반에 그는 군에 입대하며 팀을 떠났다가 2년 후인 57-58시즌에 복귀했는데, 이미 그의 자리는 베테랑 가드인 잭 맥맨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0분 미만의 출장시간에 그치며 벤치에서 재능을 썩히던 그는 결국 시즌 도중에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되고 말았죠. 이후 그는 루키 시절과 같은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레이커스에서 한 차례 더 올스타에 선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은퇴 후에 모교인 퍼먼 대학에서 2년간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임하다가 이후 제지 공장에서 근무했죠. 한편 그가 대학 시절 기록한 한 경기 100득점은 여전히 NCAA 1부 리그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7위


#_34 Mike Glenn



6-2, 175bs  SG  /  4시즌(82-85), 263경기 


8.0득점, 1.3리바운드, 1.9어시스트, 55.3% 야투율(통산 1위), 83.1% 자유투율(통산 15위) 


조지아 주 출신의 마이크 글렌은 뉴욕 닉스에서 백업 슈터로 활약하다가 81-82시즌을 앞두고 고향 팀인 애틀란타 호크스와 FA 계약을 맺었습니다. 호크스에서도 그는 뉴욕 시절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벤치 슈터로서 제 몫을 다했죠. 그는 슈팅가드로서는 언더사이즈였지만, “Stinger(독침)”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날카로운 미드-레인지 슛을 자랑했습니다. 슛을 주무기로 삼았음에도 야투 성공률이 55%에 육박할 정도로(통산 야투율 54.3%) 그의 중거리 슛은 정확하고 효율적이었죠. 다만 당시는 아직 3점슛이 보편화되기 이전이라, 그는 따로 3점슛 에어리어까지 슈팅 레인지를 늘리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82-83시즌에 호크스는 마지막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달린 지구 6위 자리를 놓고 워싱턴 불리츠와 숨 가쁘게 경쟁했는데, (당시는 각 지구의 6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마지막 1경기씩을 남기고 42승 39패로 동률을 이루고 있었죠. 그런데 글렌이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5득점(야투 11-17)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끈 덕분에 결국 호크스가 워싱턴을 따돌리고 플레이오프 막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주의 3경기에서 평균 17.3득점을 올려준 그는 동부지구 “이 주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죠. 그는 84-85시즌까지 호크스에서 활약하다가 이후 밀워키 벅스로 이적해 두 시즌을 더 뛴 뒤 현역 생활을 마쳤죠. 은퇴 후에는 방송계로 진출한 그는 팍스 스포츠에서 호크스 전담 해설가로 20년 넘게 활동 중입니다.   




16위


#_17 Charles “Chico” Vaughn



6-2, 190lbs  SG/PG  /  4시즌(63-66), 239경기 


10.1득점, 2.5리바운드, 2.4어시스트, 23.4분 출전 


서던 일리노리 대학 출신의 치코 본은 62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 전체 26번으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루키 시즌부터 팀의 핵심 벤치 멤버로 활약하며 평균 10.1득점, 3.3어시스트를 기록했죠. 그는 3점슛이 아직 없던 시대부터 뛰었음에도 주로 20-25피트 사이의 중장거리에서 슛을 던지기를 즐겼던 롱레인지 슈터였습니다. 또한 머리 뒤에서 릴리즈하는 독특한 매커니즘의 슛 폼 덕에 수비수가 그의 슛을 블락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죠. 그는 호크스의 벤치에서 꾸준히 득점원으로 활약하며 매 시즌 8~11득점 가량을 올려주었습니다. 이듬해인 65-66시즌 초반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된 그는 67-68시즌부터는 ABA로 진출했는데, 당시 ABA는 3점슛 제도가 있었고 런&건 위주의 농구라 그와 궁합이 잘 맞았죠. 그는 주무기인 3점슛을 앞세워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퍼스(Pittsburgh Pipers)를 68년 우승으로 이끌었고,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69-70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이후 불우 청소년들을 돕는 사회 활동에 헌신했으며, 2013년에 폐암으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위


#_3 Craig Ehlo



6-6, 180lbs  SG  /  3시즌(94-96), 210경기 


9.4득점, 3.2리바운드, 2.5어시스트, 1.3스틸(통산 15위), 36.5% 3점슛율(통산 10위)


80년대 말~90년대 초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주축 멤버로 활약했던 크레익 일로는 89 플레이오프에서 마이클 조던이 꽂아 넣은 “더 샷(The Shot)”의 희생양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의 레니 윌킨스 감독이 92-93시즌을 끝으로 사임하고 곧바로 애틀란타 호크스로 부임하자, 당시 FA였던 일로도 발 빠르게 스승을 따라 호크스로 합류했죠. “Mr. Everything”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매우 다재다능한 스윙맨이었던 그는 뛰어난 외곽 슈터이자 끈질긴 수비수였으며, 준수한 패싱 센스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호크스에서는 2-3번을 두루 백업하며 주로 식스맨으로 활약했죠. 93-94시즌, 벤치에서 평균 두 자릿수 득점(10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57승에 공헌한 그는 이듬해인 94-95시즌에는 무릎 부상에 시달리며 49경기 출장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노장이 된 그는 95-96시즌을 마친 후 FA가 되자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이적해 한 시즌을 더 뛴 뒤 은퇴했죠. 이후 지역 방송 해설가 및 대학 코치 등을 역임한 그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장기간 복용하다가 약물에 중독되는 바람에 현재 재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메이저 랭킹 (14위~1위)


14위


#_11 Jamal Crawford





뉴욕 닉스 시절부터 전형적인 양날의 검으로 불리던 자말 크로포드는 08-09시즌을 마치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호크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에이씨 로와 스피디 클랙스턴, 두 포인트가드를 워리어스로 보냈죠. 그는 이전까지는 주로 스타팅으로 뛰었으나, 호크스에는 마이크 비비와 조 존슨이라는 확고한 주전들이 있었기에 벤치에서 출격하며 식스맨 롤을 전담했습니다. 그는 현란한 볼-핸들링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1:1 득점력과 폭발적인 외곽슛 능력을 지니고 있고, 정교한 자유투 실력을 자랑하죠. (통산 자유투성공률 86.1%)  그런데 한편으로는 볼호그인데다가 수비력도 부족하고 기복이 너무 심해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자멸” 크로포드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식스맨 롤을 맡게 되자 그의 장점들은 더욱 살아나고 단점들은 어느 정도 커버가 되면서 예상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죠. 마침내 그는 09-10시즌에 벤치로만 나와 평균 18득점을 올려주며 “올해의 식스맨 상”까지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4점 플레이(3점슛 성공 후 추가 자유투까지 얻어 성공시키는 플레이)의 달인이기도 한데, 이 시즌에 레지 밀러가 가지고 있던 종전의 기록(23개)을 넘어서기도 했죠. (15-16시즌까지 47개를 기록하여 이 부문에서 독보적인 통산 1위임) 또한 그는 이전 9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경험이 전무했지만, 호크스가 동부지구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함에 따라 감격적인 플레이오프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이듬해인 10-11시즌에도 변함없이 식스맨으로 활약한 그는 평균 14.2득점을 기록하며 전년도에 비해 약간 주춤했죠. 한편 당시 샐러리 문제로 골치를 썩은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를 잡지 않았고, 그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계약하며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L.A 클리퍼스에서 식스맨으로 활약하며 두 번이나 더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했고, 이번 오프시즌에 클리퍼스와 3년 42mil로 재계약을 체결했습니다.




13위


#_12 / #_10 John Battle





러트거스 대학 출신의 존 배틀은 85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 전체 84번으로 겨우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루키 캠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덕에 낮은 드래프트 순번임에도 로스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득점 마인드가 투철한 단신의 슈팅가드인 그는 벤치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호크스의 대표적인 식스맨으로 활약했죠. 그는 벤치에서 고작 20여분 정도 짧게 출전하면서도 평균 두 자리 수에 가까운 득점력을 선보이는 뛰어난 스코어러였습니다. (36분 환산으로 통산 평균 17.6득점) 한편 89-90시즌, 팀 내에 주전 2번을 맡아줄 변변한 선수가 없게 되자 종종 스타팅으로도 기용된 그는 주전으로 나선 48경기에서 평균 11.9득점을 올려주었죠. 이듬해인 90-91시즌에는 다시 본연의 식스맨 롤로 돌아가 1-2번을 두루 백업한 그는 커리어-하이인 평균 13.6득점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팀 재정비에 나선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와의 재계약을 추진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계약하며 호크스를 떠났죠. 이후 그는 네 시즌 더 클리블랜드에서 활약하다가 94-95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유명 R&B 가수인 레지나 벨의 남편이기도 한 그는 현재 종교에 귀의해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2위


#_11 / #_22 Al Ferrari






미시간 주립대 출신인 알 페라리는 55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전체 15번으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루키 시즌 초반에는 벤치를 전전하다가 이후 주전으로 발탁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해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호크스는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와 맞붙었는데, 1차전에서 전반까지 레이커스에 15점차로 뒤지다가 3쿼터에 페라리가 16득점을 몰아넣는 활약에 힘입어 추격에 성공, 마침내 116-115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결국 호크스는 레이커스를 누르고 5전 3선승제의 서부 디비전 결승에서 포트웨인 피스톤즈와 맞붙어 5차전까지 갔으나 아쉽게 패배했죠. 정규 시즌에는 평균 8득점을 올린 페라리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밥 페팃에 이어 팀에서 두 번째로 높은 14.8득점을 기록, 일약 플레이오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습니다. 가드와 포워드 어느 포지션도 다 소화 가능한 다재다능한 팀 플레이어였던 그는 스탯은 그리 돋보이지 않았으나 언제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었죠. 그는 “Bronco(야생마)”란 별명에 걸맞게 항상 투지와 허슬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편 그는 루키 시즌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2년간 복무를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팀이 58년에 우승할 때 동참하지 못했죠. 58-59시즌에 다시 호크스로 복귀한 그는 이후 묵묵히 벤치에서 키 플레이어로 활약했으며, 61-62시즌에는 주전 포인트가드 레니 윌킨스의 군복무로 공백이 생기자 포인트가드 롤까지 도맡으며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는 오프시즌에 2 : 2 트레이드를 통해 시카고 패커스(Chicago Packers, 현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로 이적했죠. (이 딜로 호크스는 훗날 프랜차이즈 레전드 포워드가 되는 빌 브리지스를 얻습니다.) 그는 은퇴 후 방송 해설가, 아마추어 골퍼 등으로 활동했으며, 2016년에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위


#_18 / #_11 Dike Eddleman






일리노이 대학 시절 농구, 육상, 풋볼 등 3개 종목에서 모두 두각을 보여준 다이크 에들먼은 1948년 런던 올림픽 때 높이뛰기 대표로 선발되어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대학을 마치고 농구를 진로로 선택했는데, BAA(NBA의 전신)의 시카고 스택스가 49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그를 지명했으나, 그는 대신에 경쟁 리그인 NBL의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에 입단하기로 결정했죠. 그런데 49-50시즌을 앞두고 NBL은 끝내 BAA에 흡수 합병되었고, 두 리그가 합쳐지며 새로이 NBA 리그가 출범했습니다. 49-50시즌, 그는 루키임에도 팀 내 최다 득점(826득점, 평균 12.9득점)을 올려주었는데, 말이 루키지 2차 대전 때 군복무를 하고 대학까지 마치느라 이미 그의 나이는 관록 넘치는 27살이었죠. 이듬해인 50-51시즌에 그는 평균 15.3득점 6리바운드를 올려주며 올스타에도 선발되었고, 대 포트웨인 피스톤즈 전에서는 무려 48득점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는 육상 선수 출신답게 탁월한 스피드와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코트를 누볐으며, 거의 입 근처까지 공을 가져갔다가 릴리즈하는, 이른바 “키스 샷”이라 불리는 독특한 투-핸드 슛 폼으로 유명했죠. 51-52시즌에 블랙호크스는 연고지를 밀워키로 옮기며 “밀워키 호크스”가 되었고, 그는 2년 연속 올스타에 뽑히며 새 팀의 간판스타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올스타전이 벌어진 그 날 밤, 그는 아트 버리스+현금과 맞트레이드되며 포트웨인 피스톤즈로 이적하고 말았죠. 은퇴 후 그는 모교인 일리노이 대학의 운동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의 사업에 헌신했으며, 일리노이 대학에서는 1993년부터 매년 교내 최고의 남녀 스포츠 스타에게 “다이크 에들먼 어워드”를 수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2001년에 심장병으로 인해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위


#_10 Randy Wittman






인디애나 대학의 81년 NCAA 우승 멤버기도 한 랜디 위트먼은 83 드래프트에서 전체 22번으로 워싱턴 불리츠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내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호크스는 베테랑 포워드 톰 맥밀런과 2라운드 픽 하나를 내주고 이 루키 가드를 영입했죠. 루키 시즌에는 벤치에서 머문 그는 2년차 때인 84-85시즌에는 무릎 부상 등으로 많이 뛰진 못했지만 두 자릿수에 가까운 득점(평균 9.9득점)을 올려주며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듬해인 85-86시즌부터는 호크스의 붙박이 주전 2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운동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미드-레인지에서 침착한 슛 셀렉션을 지닌 정교한 슈터였죠. 그래서 외곽 슛을 주무기로 삼았음에도 야투율이 50%를 웃돌 정도로(통산 야투 성공률 50.1%) 효율적이었습니다. 또한 코트 비전이 좋아서 보조 리딩 가드 역할도 충실히 잘 해냈으며, 라커룸에서 훌륭한 리더쉽을 보여주기도 했죠. 85-86시즌에 평균 12.9득점, 3.8어시스트에 53%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한 그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2차전에 35득점을 넣는 등 4경기 평균 22.8득점으로 분전했는데, 이렇듯 그는 정규 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서 더 빛나는 활약을 종종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는 호크스와 보스턴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88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7차전에서는 13개 중 11개의 야투를 넣으며 22득점을 기록, 47득점 퍼포먼스를 펼친 에이스 도미닉 윌킨스를 훌륭하게 보좌했지만, 아쉽게도 호크스는 116-118로 패배하며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죠. 한편 호크스는 87-88시즌을 마치고 새크라멘토 킹스의 올스타 출신 가드 레지 씨어스를 영입하기 위해 위트먼과 1라운드 픽을 킹스로 보내버렸습니다. 이후 그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벤치 멤버로 활약하다가 91-92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죠. 여러 팀의 어시스턴트 코치 및 클리블랜드, 미네소타의 감독 등을 역임한 그는 최근 5년간 워싱턴 위저즈의 감독으로 있다가 15-16시즌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습니다.




9위


#_21 Jack McMahon






로체스터 로얄스에서 뛰던 잭 맥맨은 55-56시즌 도중에 팀 동료 잭 콜먼과 함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두 베테랑을 데려오기 위해 55 드래프트 전체 1번인 빅맨 딕 리케츠까지 내놓는 강수를 두었죠. 호크스의 베팅은 성공적이었고, 맥맨과 콜먼은 각각 가드와 포워드 포지션에서 팀의 중심을 잡아주며 젊은 선수들을 잘 이끌어줬습니다. 56-57시즌 초반에 당대 최고의 수비형 1번인 슬레이터 마틴이 팀에 합류하자, 그는 2번 포지션에서 마틴의 리딩을 잘 보조하며 평균 8.6득점, 5.1어시스트(리그 2위)를 기록했죠. 그는 득점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나, 준수한 플레이메이커이자 탄탄한 수비수였습니다. 그는 스타 가드인 마틴의 보조자로서 오프-가드(슈팅가드의 초창기 형태로, 포인트가드를 도와서 주로 보조 리딩을 담당함) 역할을 항상 충실히 해냈죠. 56-57시즌, 호크스는 5할 미만의 승률(34-38)에 그쳤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분전하며 파이널까지 진출해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었습니다. 당시 맥맨은 당대 최고의 공격형 2번인 빌 샤먼을 맞아 수비에서 진땀을 빼야 했죠. 두 팀은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며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갔고, 마지막 7차전에서 그는 샤먼을 1할대 야투율(3-20)로 묶으며 최선의 수비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호크스는 2차 연장 접전 끝에 단 한 골 차이로 보스턴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죠. 그러나 이듬해인 58 파이널에서 호크스는 보스턴과 다시 맞붙어 리벤지에 성공했고, 두 팀은 50년대 후반 최고의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최고의 공격수(쿠지-샤먼)와 최고의 수비수(마틴-맥맨)가 서로 포진한 두 팀의 가드 대결은 항상 피 튀기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죠. 한편 그는 56-57시즌부터 3시즌 내리 전경기에 출장할 정도로 건강했었으나, 59-60시즌에는 불의의 부상으로 2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신시내티 로얄즈, 샌디에이고 로케츠 등지에서 감독직을 역임했죠. 그는 7~80년대에 필라델피아 76ers에서 15년 간 프런트 및 어시스턴트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9년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8위


#_15 / #_19 Richie Guerin






리치 게린은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에 뉴욕 닉스에서 뛰면서 6번이나 올스타에 오른 뉴욕의 간판 스타였지만, 당시 뉴욕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리빌딩에 몸부림치던 닉스는 63-64시즌 초반에 어느덧 31살이 넘은 이 노장 프랜차이즈 스타를 2라운드 픽 하나와 현금만 받고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했죠. 당시 호크스에는 밥 페팃, 클리프 헤이건, 레니 윌킨스 등 올스타급 동료들이 즐비했기에 그의 평균 득점은 전년 대비 대폭 하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1.5득점 → 13.1득점) 하지만 커리어 내내 루징 팀 에이스 노릇에 지쳤던 그는 위닝 팀의 일원이 되기 위해 기꺼이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꼬리가 되기를 자처했죠. 그는 한창때에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던 스코어러로, 고전적인 투-핸드 세트 슛이 주무기였고 돌파력도 일품이었습니다. 또한 뛰어난 코트 비전과 영리한 리딩 능력을 겸비해 뉴욕 시절에는 공격형 포인트가드로 이름을 날렸죠. 호크스에 와서는 나이도 들었고 다른 훌륭한 동료들도 많아 예전만한 득점력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특유의 바스켓 센스로 보조 리딩 가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냈습니다. 


한편 64-65시즌 도중에 해리 갈라틴 감독이 사임하자 호크스 구단은 그에게 선수 겸 감독으로 뛰어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5할을 간신히 넘던 팀 성적을 크게 향상시키며(17승 16패 ⇒ 45승 35패) 감독으로서의 자질도 입증했죠. 이후 그는 감독과 선수, 두 역할에 모두 충실하며 호크스를 꾸준히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는데, 특히 뉴욕 시절의 한풀이를 하듯 플레이오프만 되면 더욱 분발하곤 했습니다. (정규시즌은 평균 13득점 ⇒ 플레이오프는 1차 은퇴 전까지 평균 16.8득점) 그런데 1967년에 신생팀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확장 드래프트에서 덜컥 그를 지명해버리자, 호크스를 떠나기 싫었던 그는 미련 없이 현역에서 은퇴하고 호크스의 감독으로만 남게 되었죠. 그리하여 67-68시즌에는 감독직에만 전념하게 된 그는 팀을 56승으로 이끌며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68-69시즌을 앞두고 호크스가 시애틀로부터 그의 권리를 다시 사옴에 따라 그는 현역에 복귀했지만, 더 이상은 선수로서 풀타임을 뛰진 않고 이따금씩 벤치에서나 출장했죠. 그는 69-70시즌까지 현역으로 뛰다가 은퇴했는데, 현역으로서 마지막 경기인 70 플레이오프 서부 디비전 파이널 4차전에서는 깜짝 31득점을 올려주기도 했습니다. (플레이오프 기간 중이었지만 0-3으로 호크스가 시리즈 패배를 눈앞에 둔 상황이라, 마치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 경기처럼 예우를 해 준거죠.) 그는 71-72시즌까지 총 8시즌 동안 호크스의 지휘봉을 잡으며 매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오로지 호크스에서만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인 통산 327승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그는 친정인 뉴욕으로 돌아가 방송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월 스트리트로 진출해 주식중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죠. 그는 2013년에 선수 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늦깍이 입성하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7위


#_26 Kyle Korver






오로지 3점슛 능력 하나만으로 리그에서 살아남은 베테랑 슈터 카일 코버는 11-12시즌을 마친 뒤 트레이드를 통해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코버의 소속팀이던 시카고 불스는 사치세 절감을 위해 5mil의 트레이드 익셉션과 현금만 받고 헐값에 그를 넘겼죠. 12-13시즌에 호크스의 주전 3번으로 활약한 그는 오프시즌에 호크스와 4년 24mil에 재계약했습니다. 13-14시즌부터는 주전 슈팅가드로 포지션을 옮긴 그는 시즌 초반에 데이나 배로스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89경기 연속 3점슛 성공 기록을 경신했죠. 그리고 이후 약 석 달이나 더 3점슛 릴레이를 이어가며 127경기 연속 3점슛 성공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15-16시즌에 스테판 커리에 의해 경신이 되었으며, 현재 최고 기록은 커리의 157경기 연속 성공입니다.) 그해 3점슛 성공률 1위(47.2%)에 등극했습니다. 그는 슈팅 능력은 일품이지만 운동능력 등 그밖에 다른 능력들은 NBA 수준에 한창 못 미치죠. 대신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최대한 만회하기 위해 항상 매사에 최선을 다해 플레이합니다. 그는 수비력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매치-업 상대를 따라붙으며 수비하고, 서슴없이 몸을 날리며 허슬 플레이를 펼치죠. 그리고 공격 시에는 끊임없는 오프 더 볼 무브로 상대 수비를 따돌리며 항상 외곽 찬스를 노립니다. 


14-15시즌에 호크스는 동부 지구 선두를 질주하며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여주었는데, 그 중심에는 코버가 있었죠. 그는 시즌 초반에 50%를 웃도는 엄청난 3점슛으로 외곽을 뒤흔들었는데, 이러한 그의 3점슛은 어느새 호크스 공격에서 가장 위력적인 무기가 되었죠. 또한 상대 팀이 그의 3점에 신경 쓰다가 종종 수비진용이 무너지면, 그는 슛 대신 오픈된 동료에게 어시스트 패스를 해주며 상대의 허를 찌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그는 33살이라는 늦깎이 나이로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으며, 1월 달에 호크스가 17전 전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하자 다른 4명의 주전들과 함께 공동으로 동부지구 “이 달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죠. 후반기에는 다소 3점 페이스가 떨어지긴 했으나 최종 49.2%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한 그는 2년 연속 3점슛 성공률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결승 2차전에서 그는 상대 수비수 맷 델라베도바의 위험한 플레이로 인해 발목 부상을 당하며 시리즈-아웃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죠. 이후 그는 슈팅에서 예전만큼의 날카로움은 보여주지 못한 채 하향세를 걸었으며, 이번 시즌 도중에 마이크 던리비+모 윌리엄스+미래의 1라운드 픽과 맞바꿔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현재 3점슛 성공률과 자유투 성공률, 두 부문에서 모두 프랜차이즈 통산 1위에 올라 있습니다.




6위


#_2 Stacey Augmon





UNLV 대학 시절 3년 연속으로 전미 최고의 수비수 상을 타기도 했던 스테이시 오그먼은 91 드래프트에서 전체 9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호크스는 베테랑 가드 닥 리버스를 L.A 클리퍼스로 트레이드한 댓가로 받은 1라운드 픽으로 그를 뽑았죠. 당시 호크스의 2번 포지션은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기에 그는 루키 시즌부터 확고하게 주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91-92시즌에 평균 13.3득점, 5.1리바운드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그는 특히 4월 한 달 동안은 평균 19.6득점을 올리며 “이 달의 루키”에 뽑혔고, 올-루키 퍼스트팀에도 선발되었죠. 이듬해인 92-93시즌에 무키 블레이락이 트레이드로 호크스에 합류하자 그는 블레이락과 여러 시즌 동안 함께 손발을 맞추며 리그에서 가장 까다로운 1-2번 수비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플라스틱 맨(Plastic Man)”(DC 코믹스에서 몸이 쭉쭉 늘어나는 슈퍼 히어로)이란 별명에 걸맞게 길쭉길쭉한 신체와 탁월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탄탄한 대인 수비력을 보여주었고, 공격 시에는 주로 돌파나 활발한 속공 가담으로 득점을 올려주곤 했죠. 다만 그는 스윙맨임에도 점프슛이 약했고 슈팅 레인지도 짧았습니다. 한편 94-95시즌부터 3시즌 동안 리그의 3점슛 거리가 22피트(약 6.7m)로 줄어들자, 웬만한 가드나 포워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3점슛을 던져댔지만, 워낙에 슈팅력이 약한 그는 이에 동참하지 못하고 답답한 모습을 보여줬죠. 결국 호크스는 외곽 강화를 위해 95-96시즌 초반에 마이애미 히트로부터 슈팅력이 좋은 스티브 스미스를 영입했습니다. 스미스가 주전 2번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그는 잠시 벤치로 밀려났다가 이내 스타팅 3번으로 기용되었으나, 갑작스레 바뀐 포지션에 금방 적응하지는 못했죠. 한편 오프시즌에 호크스 구단은 스미스 재계약, 디켐베 무톰보 영입 등을 위해 샐러리 여유가 필요했고, 결국 그와 그랜트 롱을 4개의 미래 드래프트 픽(1라운드 픽 2개, 2라운드 픽 2개)을 받는 조건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포틀랜드, 뉴올리언즈, 올란도 등을 전전하며 선수 생활을 하다가 05-06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쳤죠.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걸은 그는 덴버 너기츠 및 모교인 UNLV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내다가 이번 시즌에는 밀워키 벅스의 코칭 스태프로 합류했습니다.



5위


#_8 Steve Smith






94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드림팀Ⅱ의 일원으로 출전한 바 있는 마이애미 히트의 주전 가드 스티브 스미스는 94-95시즌 개막 후 두 경기 만에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스미스와 그랜트 롱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케빈 윌리스를 히트에 내주었죠. 히트 시절 장신 1번으로 활약했던 스미스는 호크스에는 이미 올스타 1번인 무키 블레이락이 있었기에 주전 2번으로 자리 잡았으며, 기존의 주전 2번인 스테이시 오그먼이 3번으로 포지션을 옮겼습니다. 95-96시즌에 평균 18.1득점을 기록, 팀의 1옵션 에이스로 자리 잡은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1.7득점을 올려주며 팀을 2라운드로 이끌었죠. 신장이 6-8에 달하여 가드로선 훌륭한 체격 조건을 지닌 그는 능수능란한 포스트-업 스킬을 자랑했으며, 아크 너머에서 위협적인 외곽 슈터였습니다. 또한 본래 포인트가드도 보았던 만큼 수준급의 볼-핸들링 기술과 패싱 센스까지 갖추고 있었고, 수비력도 탄탄했죠. 


한편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그에게 7년 50.4mil의 장기계약을 안겨주며 팀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96-97시즌에 호크스는 56승이란 호성적을 거두었고, 스미스는 평균 20.1득점, 4.2어시스트로 연봉 값을 톡톡히 했죠. 그의 깔끔한 외모와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는 호크스 팬들을 매료시켰고, 그는 어느덧 팀을 대표하는 간판스타가 되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백코트에 블레이락-스미스, 골밑에 크리스찬 레이트너-디켐베 무톰보가 포진한 매력적인 라인업이었으나,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를 만나 1-4로 무릎을 꿇고 말았죠. 이듬해인 97-98시즌에도 평균 20.1득점을 올려주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간 그는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발이 되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98-99시즌에는 무릎 부상에 시달리며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였고, 마침 리빌딩에 착수하기로 한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아이재이아 라이더, 짐 잭슨을 데려오는 댓가로 그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포틀랜드와 샌안토니오 등지에서 커리어를 이어갔고, 03년에 샌안토니오가 우승할 때에는 행운의 반지를 얻기도 했죠. 04-05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이후 방송 업계로 진출했으며, 현재 NBA TV에서 해설가로 활동 중입니다.




4위


#_44 Pete Maravich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 시절, 평균 44.2득점(NCAA 역대 1위)이라는 무지막지한 득점력을 과시했던 피트 마라비치는 70 드래프트에서 전체 3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한편 호크스 구단은 그에게 5년간 1.9mil이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연봉을 선뜻 내어주었는데,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프로에 갓 진출하는 신인 선수로서는 역대 최고의 대우였죠. 그런데 이러한 구단의 처사는 그만 팀 내에 심각한 트러블을 야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리그에서 선수들에 대한 연봉 처우가 가장 안 좋은 구단이었기에, 박봉에 시달려 온 팀 내 흑인 선수들은 그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특급 대우를 받는다며 불만을 터뜨렸죠. 또 당시 FA였던 올스타 스윙맨 조 칼드웰은 구단이 자신과의 재계약은 안중에도 없는 듯 루키에게 거액을 퍼준 데 대해 큰 실망감을 표하며 아예 ABA 리그로 떠나버렸습니다. 마라비치는 이러한 선배들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루키 때부터 탁월한 기량을 뽐내며 평균 23.2득점을 기록, 올-루키 퍼스트팀에 뽑혔죠. 그는 현란한 볼-핸들링을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었으며, 노-룩 비하인드 백패스는 기본이요 심지어 속공 도중 자기 다리 사이로 공을 바운드 해 패스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묘기 농구의 달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 프레스 마라비치의 피나는 훈육 아래 익힌 그의 1:1 기술은 예술의 경지였으며, 또한 중장거리 슈팅 능력도 일품이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부친은 그에게 개인기는 전수했어도 팀플레이 마인드는 전혀 전수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친의 엇나간 훈육은 그를 최고의 테크니션이면서 동시에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볼-호그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죠. 안 그래도 연봉 문제로 그를 고깝게 보던 동료들은 루키임에도 거만한 성격에 개인플레이만 일삼는 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는데, 특히 팀의 에이스인 루 허드슨과의 사이가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72-73시즌에 그는 평균 26.1득점, 6.9어시스트를 올리며 올스타에 뽑혔고, 올-NBA 세컨드 팀에도 선정되었죠. 그의 화려한 플레이스타일은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는 어느덧 슈퍼스타급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73-74시즌, 그는 평균 27.7득점(리그 2위)을 올리며 2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나, 그의 개인 활약과는 별개로 호크스는 35승에 그치며 11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기록을 마감해야 했죠. 그의 개인 기량과 스타성은 단연 최고였지만, 팀원들과의 골이 깊은 반목 때문에 팀 분위기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호크스 구단은 눈물을 머금고 이 검증된 슈퍼스타를 팀에서 내보내야 했죠. 오프시즌에 호크스는 그를 신생팀 뉴올리언즈 재즈에 픽 4개(1라운드 픽 2개, 2라운드 픽 2개)와 신생팀의 확장 드래프트에 뽑힐 선수 2명에 대한 권리(밥 카우프먼, 딘 메밍거)를 받고서 트레이드했죠. 그는 뉴올리언즈에서 간판스타로 활약하며 득점왕에 1차례 등극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다가 무릎 부상으로 인해 79-80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는 1987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년 뒤인 1988년에 픽업 게임 도중 심장마비로 인해 4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죠. 한편 호크스 구단은 이번 시즌 도중에 그의 등번호 #44를 영구 결번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3위


#_3 Eddie Johnson






오번 대학 시절 기량은 좋았으나 멘탈 이슈가 있었던 에디 존슨은 77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전체 49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 벤치에서 두 자리 수 득점(10.5득점)을 올려주며 가능성을 보여준 그는 2년차 때인 78-79시즌에는 주전 자리를 꿰차며 평균 16득점, 4.6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도 뽑혔죠. 1-2번을 두루 볼 수 있는 듀얼 가드인 그는 “패스트 에디”라는 별명에 걸맞게 폭발적인 스피드와 운동능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번개같은 퍼스트 스텝에 이은 날카로운 돌파로 코트를 누비며 본인이 득점을 올리거나 동료들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주곤 했죠. 또한 그는 준수한 외곽슛 능력과 탄탄한 수비력까지 갖춘 팔방미인이었습니다. 79-80시즌에 그는 2년 연속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오른 데 이어, 그의 화끈한 플레이스타일에 매료된 팬들의 손에 의해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 주전으로 뽑히기도 했죠. 이듬해인 80-81시즌, 그는 평균 19.1득점, 5.4어시스트를 올리며 2년 연속 올스타 주전으로 선발되는 등 승승장구의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서서히 그에게 악마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죠. 1980년 여름에 그는 마약 판매상들에게 총격을 당하기도 하고, 그의 차에서 코카인이 적발되어 체포되는 등 곤혹을 치렀는데, 이는 결국 그의 커리어를 망쳐버린 마약 문제의 전초전에 불과했습니다. 이후로 그는 코카인 중독과 무릎 부상에 시달리며 결장 횟수가 잦아졌고 기량도 눈에 띄게 하락해 갔죠. 한때 코트를 뒤흔들었던 그의 돌파력과 수비력은 나날이 무뎌져만 갔고, 83-84시즌에는 평균 득점이 13점대(13.2득점)까지 하락했습니다. 이듬해인 84-85시즌에 그는 평균 16.3득점에 커리어-하이인 7.8어시스트를 올려주며 약간의 반등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코카인 문제는 계속해서 그와 그의 주변을 괴롭혔죠. 결국 지치다 못한 호크스 구단은 85-86시즌 도중에 그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해버리고 말았고, 이후 그는 끝내 재활에 실패하며 1987년에 리그로부터 영구 추방당했습니다. 코트를 떠난 후 마약 중독자로 전락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한 그는 절도, 강도, 폭력 등의 범죄를 잇달아 저지르며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 듯 했죠. 급기야 그는 2006년에 부녀자 강간 및 8세 여아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체포 소식이 보도되자 그와 동명이인으로 8~90년대에 활약했던 스윙맨 에디 존슨이 공연한 오해를 사서 곤혹을 치르기도 했죠. 한편 그의 동생인 프랭크 존슨은 8~90년대에 리그에서 포인트가드로 활약했습니다.  




2위


#_2 Joe Johnson






04-05시즌에 피닉스 선즈에서 주전 슈팅가드로 좋은 활약을 펼친 조 존슨이 오프시즌에 제한적 FA가 되자, 그간 연이은 리빌딩 실패로 허덕이던 애틀란타 호크스는 과감하게 선즈가 매치하기 힘든 5년 70mil의 맥시멈 오퍼를 던졌습니다. 결국 선즈는 오퍼에 매치하지 않는 대신 유망주 보리스 디아우와 2개의 1라운드 픽을 받는 조건으로 사인&트레이드를 체결했죠. 그의 영입을 두고 처음에는 연봉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이 많았지만, 그는 서서히 몸값에 걸맞는 실력을 보여주며 그러한 우려들을 불식시켰습니다. 처음에 그를 장신 포인트가드로 써보려던 실험이 실패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05-06시즌에 평균 20.2득점, 6.5어시스트를 올리며 팀의 에이스 노릇을 잘 해주었죠. 이듬해인 06-07시즌에 그는 평균 25득점을 올리며 한층 향상된 득점력을 뽐냈고,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6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되며 꾸준히 호크스의 간판스타 노릇을 하였죠. 슈팅가드 치고 매우 탄탄한 사이즈를 지닌 그는 코트 어디에서나 득점을 올려줄 수 있는 유능한 1:1 공격수입니다. 그는 비록 화려함은 좀 떨어지지만 탁월한 중장거리 슛 외에 돌파, 포스트-업, 플로터 등 다양한 공격 루트로 상대 수비를 공략할 수 있죠. 또한 그는 웬만한 포인트가드 못지않게 볼을 다루면서 플레이메이킹을 할 수 있으며, 수비력도 준수합니다. 특히 그는 리그에서 대표적인 클러치의 달인으로 이름이 높은데, 그가 고비 때 마다 터뜨린 놀라운 클러치 샷으로 승리를 따낸 경기가 비일비재했죠. 


07-08시즌에 평균 21.7득점, 5.8어시스트로 활약한 그는 3월 한 달 동안에는 평균 24.9득점, 7어시스트를 올리며 동부지구 “이달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해 37승을 거두며 8번 시드로 겨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호크스는 1라운드에서 폴 피어스, 케빈 가넷, 레이 알렌의 “빅3”가 뭉친 66승의 1번 시드 보스턴 셀틱스와 격돌했죠. 다소 일방적으로 흘러갈 것 같던 시리즈는 호크스의 선전으로 오리무중에 빠졌는데, 특히 4차전에서 총 35득점 중 4쿼터에만 20득점을 퍼부으며 팀을 역전승으로 이끈 존슨의 클러치 능력이 빛났습니다. 결국 7차전 접전 끝에 보스턴이 겨우 시리즈를 가져갔지만, 당시 그의 대활약은 이후에도 “조 존슨 대첩”으로 불리며 인구에 회자되었죠. 이후로도 그는 꾸준한 활약으로 매년 호크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09-10시즌에는 호크스를 53승으로 견인하며 올-NBA 서드팀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그는 호크스와 6년 120mil의 맥시멈 계약을 체결하며 다시 한 번 잭팟을 터뜨렸는데, 일각에서는 아무리 그가 팀의 에이스라 해도 기간과 금액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일었죠. 아니나 다를까 그는 평균 득점이 20점 이하로 떨어지는 등 다소 하락세를 보여주었고, 호크스의 성적도 동반 주춤했습니다. 결국 그의 높은 연봉에 부담을 느낀 호크스는 11-12시즌을 마치고 그를 5명의 고만고만한 롤 플레이어와 2장의 픽 등을 받고 브루클린 네츠로 트레이드하며 그와 결별했죠. 이후 브루클린, 마이애미에서 활약한 그는 이번 오프시즌에 유타 재즈와 2년 22mil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한편 그는 기량 대비 인지도가 떨어지는데다가 모 스포츠 기사에서 이름이 ‘라존 론도’로 잘못 소개되는 등의 해프닝을 겪는 바람에 존재감 없는 선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곤 합니다.




1위


#_23 Lou Hudson






미네소타 대학 출신의 루 허드슨은 66 드래프트에서 전체 4번으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부터 두각을 보인 그는 팀 내 최고인 평균 18.4득점을 올려주며 올-루키 퍼스트팀에 선발되었는데, 신인왕 투표에서는 아쉽게도 데이브 빙에 밀려 2위에 그쳤죠. 한편 그는 루키 시즌을 마친 후 군에 입대했는데, 마침 1967년에 ABA가 출범하면서 ABA의 여러 팀들이 선수 수급을 위해 NBA의 선수들과 접촉했습니다. 대학 시절 미네소타 지역 스타였던 허드슨에게도 미네소타 머스키스(Minnnesota Muskies)란 팀이 손을 뻗쳤죠. 그는 거의 머스키스에 합류 직전까지 갔으나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호크스에 잔류했고, 두 팀은 그의 소유권을 두고 법정 분쟁까지 벌였지만 호크스의 승소로 끝났습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2년차 때인 67-68시즌에는 군복무 등의 이유로 46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죠. 1968년에 호크스는 연고지를 애틀란타로 옮겼고, 군복무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새 팀에 합류한 그는 평균 21.9득점, 6.6리바운드를 올리며 생애 첫 올스타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슈팅 터치와 뛰어난 오프 더 볼 무브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캐치-앤-슈터였고, 클러치 상황에서 주저 않는 강심장이었습죠. 그래서 그의 달콤한 클러치 슛에 매료된 호크스 팬들은 그를 “Sweet Lou” 또는 “Super Lou”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1:1 득점 능력도 준수했고, 포스트 근처에서 다양한 마무리 기술들도 갖춘 팔방미인 스코어러였죠. 69-70시즌에는 평균 25.4득점을 올리며 더 향상된 득점력을 과시한 그는 올-NBA 세컨드 팀에 선발되었고, 대 시카고 불스 전에서는 무려 57득점을 넣으며 종전에 밥 페팃이 세운 프랜차이즈 한 경기 최다 득점과 타이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내리 4년간 평균 25 ~ 27득점 대를 오가는 고감도 득점포로 팀 공격을 이끌며 73-74시즌까지 6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죠. 한편 70-71시즌에 슈퍼 루키 피트 마라비치가 합류하자, 마라비치-허드슨은 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공격 듀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코트 위에서는 평균 50득점 이상을 너끈히 합작할 정도로 위력적이었으나, 아쉽게도 코트 밖에서는 매우 불편한 관계였죠. 허드슨을 위시한 호크스의 여러 흑인 선수들은 독선적인 마라비치와 화합하지 못했고, 내홍에 시달리던 호크스는 급기야 73-74시즌을 끝으로 마라비치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한편 허드슨은 74-75시즌에 팔꿈치 부상 등에 시달리며 1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평균 20득점 밑으로 떨어지며 완연한 하락세를 보였죠. 결국 그는 77-78시즌을 앞두고 올리 존슨과 맞트레이드 되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하며 11년 동안 정들었던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레이커스에서 두 시즌을 더 뛴 뒤 78-79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쳤죠. 은퇴한 후에는 호크스의 라디오 해설가 등으로 활약하던 그는 이후 유타 주에 있는 파크 시티(Park City)에 정착해 시의원에 뽑히는 등 지역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등번호 #23은 그가 아직 현역이던 1977년에 호크스에서 영구 결번되었으며, 그는 2014년에 뇌졸중으로 인해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종합 랭킹











Epilogue


이번 슈팅가드 편은 1위 선정에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루 허드슨은 본 시리즈의 초고 작업을 마친 직후까지만 해도 슈팅가드가 아닌 스몰포워드로 분류하고 있었거든요. 허드슨의 메인포지션을 2번으로 보느냐, 3번으로 보느냐는 정말 오랜 고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두 포지션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오갔던 스윙맨이었거든요. 그가 피트 마라비치와 함께 한 시절에는 확실히 3번이었고, 문제는 조 칼드웰과 함께 한 시절이었습니다. 나중에 스몰포워드 편에서 소개하겠지만, 칼드웰도 2~3번으로 오가는 스윙맨인지라...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3번, 칼드웰을 2번에 놓고서 계속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초고를 마치고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이 의구심을 풀어보기 위해,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허드슨 포지션 규명 작업에 들어갔죠. 예전에는 허드슨을 3번, 칼드웰을 2번으로 보는 자료들을 위주로 찾아봤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허드슨을 2번, 칼드웰을 3번으로 보는 자료들을 위주로 물색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몇 가지 단서를 잡은 뒤에, 최종적으로 로스터 출장시간을 분석해 허드슨이 2번과 3번 중 어느 포지션에서 더 많이 뛰었는지를 추산해봤습니다. 그 결과, 약 2천분 차이로 그가 2번에 더 많이 뛰었다는 결론이 나왔죠. 그가 호크스에서 2만 5천분이 넘게 출장한 것을 감안한다면, 2천분은 정말 근소한 차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허드슨은 2번으로 포지션이 변경, 확정되었고 이 때문에 한동안 1위 자리를 고수하던 조 존슨이 2위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번 포지션에 랭크되어 있던 칼드웰도 3번으로 그 자리를 옮겼구요. 이로 인한 나비 효과가 하나 더 있긴 한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스몰포워드 편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드슨의 포지션 구분 외에도, 에디 존슨과 피트 마라비치의 랭킹 또한 내내 고민이었습니다. 누적은 에디, 임팩트는 피트인데 보셨듯이 에디에겐 그야말로 낯부끄러운 최악의 결함이 있죠. (물론 농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실 이 선수를 프랜차이즈의 상위 랭커로 소개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저 자신부터 열불이 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인간이 아무리 미워도 선수로서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그를 피트 위에 두었습니다. 사실 피트는 오히려 현역 시절에 팀 내 불화 등 이런저런 스캔들이 많았던 것이 다소 감점 요인이 되었는데, 피트가 동료들과 화목하면서 호크스를 위닝팀으로 이끌었다면 똑같은 스탯으로도 에디를 앞지를 수 있는 명분이 충분했죠. 그 점이 좀 아쉽습니다.


피트는 최근에 구단에서 영구 결번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래저래 호크스에 있을 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터라 지금 시점에 영구 결번이 적합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호크스 프랜차이즈는 세인트루이스 시절의 레전드들을 밥 페팃 외에는 전부 결번하지 않았으며, 애틀란타 와서도 도미닉 윌킨스, 허드슨, 디켐베 무톰보 외엔 결번이 없죠. 지금 당장 손으로만 꼽아 봐도 피트보다 먼저 결번 시켜줘야 할 레전드들이 차고 넘치는데, 뭔가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그래도 뭐 피트는 트러블은 많았지만 호크스 시절에도 팬 페이보릿 스타였고, 팬들이 사랑한 선수라면 그 누구라도 결번의 대상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부디 이번 조치가 피트 하나에만 그치지 않고, 여태껏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다른 프랜차이즈 레전드들에 대한 재조명으로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호크스의 슈팅가드 뎁쓰는 그래도 타 포지션에 비해서는 제법 괜찮은 편입니다. 최상위권 선수들이 살짝 빈약해 보이긴 하지만, 중~하위권 랭커들은 타 포지션의 동일 랭커들에 비해서 제법 우위를 점하고 있죠. 실례로 2번과 3번간에 포지션 규명 작업이 힘들다보니 기획 도중에 3번에서 2번으로 옮기거나 2번에서 3번으로 옮긴 케이스가 더러 있는데, 3번에 있다가 2번으로 가면 랭킹이 뚝 떨어지고, 2번에 있다가 3번으로 가면 랭킹이 쑥 오르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사실 타 포지션은 거의 25번 대 뒤로 가면 아 이런 쩌리들도 소개해야 돼? 하는 생각도 들 정도인데, 슈팅가드 편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탯은 보잘 것 없어도 이 선수는 꼭 소개해야 하는데... 이런 케이스들이 더 많았죠. (27위인 시휴고 그린이 그런 케이스였죠.) 루 윌리엄스는 본래 29위였다가 거의 최종 작업에서 28번으로 올라갔는데, Honorable Mention(이라 쓰고 ‘쩌리 소개’라 읽는다...)에 낄 급은 아니라고 줄곧 생각했던 터라 막판에 겨우 턱걸이해서 참 다행이다 싶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 29위인 메드 팍 같은 훌륭한 팀 플레이어를 끝내 본 랭킹에서 소개하지 못한 부분은 못내 아쉽습니다.


현역 중에서는 앞으로 더 올라갈만한 랭커가 카일 코버 하나였는데, 최근에 끝내 팀을 떠나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아마도 당분간은 7위 자리를 고수할 듯... 그 밖에는 이번 시즌 잘 해주고 있는 팀 하더웨이 주니어가 랭킹 진입을 한 번 노려볼만 하겠네요. 문지기인 루 윌이 그리 만만치는 않으니 당장 이번 시즌 후에는 힘들겠지만요. 그밖에 지금은 3번으로 분류된 켄트 베이즈모어가 나중 가면 2번 포지션으로 옮겨서 등장할 가능성도 제법 있습니다. 


무난했던 포인트가드 편에 비해 이번 편에서는 고민도 많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스몰포워드 편은 이번 주 후반기쯤에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13
Comments
2017-01-16 13:54:44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7-01-16 14:06:29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7-01-16 15:27:39

글 퀄리티가 어마어마 하네요 ..

잘보고 갑니다.
2017-01-16 18:47:00

최고십니다!!!!! 애틀 팬도 아닌데 엄청 재미나게 자세히 읽었습니다

2017-01-16 22:46:35

애틀팬도 아닌데 무지 재미있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도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2017-01-17 01:13:33

정말 재밌게 잘봤습니다. 염치없지만 계속 부탁드릴게요 

2017-01-17 23:15:48

옆동네에서 먼저 읽고 추천은 여기서 누르네요

조 존슨이 아쉽게 루 헛슨에게 밀렸군요.
개인적으로 마라비치에게 영결주느니 차후에 조 존슨한테 주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벗어나서 다시 플옵컨텐더의 궤도에 올려놓은 선봉장이나 다름없는 상징적인 선수니까요.
3번이면 휴먼옹, 드류, 헤이건 정도가 생각나고 그외에는 역사상 뎁쓰가 그렇게 좋지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 순위 매기는데 상당히 힘드실 거 같습니다.
WR
2017-01-18 01:22:14

네 조 존슨은 은퇴 후 당연히 영구결번 대상이라고 봅니다. 무려 6회 올스타인데 말이죠.


3번의 뎁쓰는 정말 눈물 날 지경입니다. 중간에 포지션 정리를 하면서 3번에서 2번으로 옮긴 선수들이 더러 있었는데, 안그래도 뎁쓰가 눈물나는 3번에서 상위급 선수들이 빠져나가니까 더 기가 막히더군요. 미리 예고해드리지만, 5위 이하로는 눈물 없이 보기 힘든 라인업들입니다.



2017-01-18 06:53:04

팬질한지 오래 안된 저로썬 지난글도 그렇고 이번글도 참 좋은 글인것 같습니다. 우리 팀을 위해 이런 좋은 글을 써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저만의 랭킹으론 1등에 당당히 카일 코버를 놓고싶네요. 떠나서 너무 아쉽지만 시즌 후 다시 데려와 우리팀 유니폼 입고 은퇴하면 좋겠단 생각 많이합니다

WR
1
2017-01-18 09:53:24

코버가 애틀란타에서 4년 24mil 계약 맺었을 때, 일각에서 나이 들어 앞으로 하향세일 슈터에게 너무 많은 돈을 퍼줬다며 오버페이론을 펼치기도 했죠. 그런 주장은 제가 보기에도 좀 너무하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애틀란타에서 최전성기를 보내며 소위 오버페이 운운했던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었죠.


애틀에서 좀 더 오래 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아직 현역이니 바라신대로 컴백의 가능성도 있고, 비율 스탯이라 언제 탈환될 지 모르지만 3점슛과 자유투 성공률에서 프랜차이즈 1위 자리에 오르며 팀 역사상 최고의 슈터 중 하나임을 당당히 입증해냈죠.


이 선수가 처음 데뷔했을 적에는 슛 밖에 없는 선수가 얼마나 오래갈려나 하고 부정적으로 봤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한 면을 투철한 정신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는 모습에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죠. 그를 낮게 봤었던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구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팀을 떠나야 했지만 14-15시즌의 그 엄청난 포스는 애틀 팬들께 영원히 기억되리라 봅니다. 

2017-01-18 14:09:17

삼점 빡빡 꽂아넣는 모습에도 희열을 느꼈지만 코버의 팬서비스는 진짜 끝내줍니다. 사인하나하나 다해주고 애틀란타에서 사회환원 운동도 했구요.. 정말 아직도 그립습니다 전

2017-01-18 19:50:32

28명을 선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28이라는 숫자와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
WR
2017-01-19 08:06:05

아,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건 아니구요, 맨 처음 보스턴 편을 연재했을 때 부터 5년에 한 명 정도는 프랜차이즈에서 언급할만한 선수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그 프랜차이즈의 총 연차/5 를 해서 랭킹을 매겼었습니다. 제작년에 보스턴 편 할 때는 역사가 68년이었고, 68 / 5를 하면 13이 좀 넘는 수치여서 Top13을 선정했으며, 랭킹 외에 6명을 더 Honorable Mention으로 선정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브루클린 네츠편을 할 때에는 45년 역사여서 Top9을 선정했는데, 이왕 하는 김에 Honorable Mention을 좀더 보강해서 랭킹을 확장해보자는 욕심이 들어, Top9까지는 메이저 랭킹, 그와 동수로 Top10부터 Top18까지는 마이너 랭킹... 이런 식으로 Top18을 선정했었습니다.


이번 애틀란타 편도 그 기조에 맞춰서, 애틀란타가 70년 역사이니 70 / 5를 해서 Top14까지를 메이저 랭킹으로, 그 아래로 배수인 Top28까지를 마이너 랭킹으로 선정한 겁니다.


즉, 이 랭킹 숫자는 팀의 역사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수치죠. 현재는 이미 소개했던 프랜차이즈도 3년마다 랭킹을 업데이트할 생각인데, 애틀란타는 3년 뒤에는 73년 역사이니 그대로 Top28로 랭크를 매기지만, 그로부터 또 3년 뒤에 업데이트 할 적에는 76년 역사가 되므로 Top30으로 랭크가 약간 확장되는 그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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